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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크리스마스를 하얗게 수놓은 미국이 자랑하는 작곡가
[장르의 개척자들] 어빙 벌린(Irving Berlin)
크리스마스 시즌이 언제부터 시작되는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누군가는 TV나 미디어에서 산타가 나올 때부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또 누군가는 핼러윈 다음날, 어떤 사람은 추수감사절 이후라고도 한다.
물론 크리스마스 분위기라는 것이 세월이 흐를수록 비교적 잠잠해져 가는 편이지만 어쨌든 종교와 관계없이 사람들은 여전히 크리스마스를 즐기고 있다.
무엇보다 이 연말 분위기를 이끄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음악이기도 하다. 이맘 때면 ‘머라이어 캐리’가 돌아온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밈이 되지 않았던가.
크리스마스 음악, 크리스마스 캐롤의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4세기, 혹은 13세기 성당에서 불려진 성가나 미사곡들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후 세기가 바뀌면서 청교도들 사이에서는 금지됐다가 다시 복원되는 등등의 굴곡진 역사를 거치면서 20세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그간 교회와 종교 커뮤니티 내부에서만 돌았던 이 크리스마스 노래들이 20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교회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그런 흐름 속에 공개된 노래 ‘White Christmas’는 일종의 혁명과도 같았다. 그러니까 ‘White Christmas’가 1942년 10월 차트 1위를 차지하기 이전까지 미국에서는 10월이 끝나는 핼러윈부터 12월 25일 사이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주구장창 흘러나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핼러윈과 크리스마스 사이에 위치한 추수감사절 또한 조용히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크리스마스는 미국, 그리고 전세계 각지의 공휴일로 여겨졌다.
‘White Christmas’의 작곡가인 어빙 벌린 또한 크리스마스나 연말 명절 시즌을 일부러 겨냥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다른 여느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게 노래 한 곡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심지어 곡은 눈이 내리는 것과는 거리가 먼 화창한 캘리포니아 수영장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작곡가 어빙 벌린은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눈으로 뒤덮인 목가적인 환경에서 성장하지도 않았다. 러시아계 유대인인 어빙 벌린은 5세가 되던 1893년도 무렵 가족과 함께 뉴욕의 로어 이스트사이드에 정착했다.
어렸을 때부터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해 거리에서 신문을 팔거나 노래하는 웨이터로 일하기도 했다.
이후 작곡에 눈을 뜨면서 어깨너머로 작곡을 배워 곡을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했다. 피아노로 작곡하고 밴드의 리더가 되면서 틴 팬 알리의 전속 작사가로 임명되고 이후에는 브로드웨이로 향한다.
그 무렵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데, 미국 이민자로서 애국심에 고취되어 있던 어빙 벌린은 152보병여단에서 군복무를 하는 동안 작곡을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그는 자신의 애국심을 반영하는 노래들을 더러 썼는데, 특히 ‘God Bless America’가 대표적이며 이는 미국의 비공식 국가처럼 여겨지곤 했다. 2001년 9/11 테러 당시 하원의원들은 국회의사당 계단에 서서 엄숙하게 ‘God Bless America’를 불렀다.
어빙 벌린은 뮤지컬 황금기 시절 유수한 명곡들을 남겼고 이는 이후 대대손손 재해석되고 다시 불려지면서 몇몇은 재즈 스탠다드로 고정되기도 했다.
빙 크로스비, 프레드 아스테어 주연의 <블루 스카이> 같은 것 또한 주제곡이 재즈 아티스트들로부터 수차례 불려졌으며, 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의 <탑 햇>에 삽입된 명곡 ‘Cheek to Cheek’은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 그리고 <그린 마일>에서는 아예 곡이 삽입된 영화장면 자체가 극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2년 빙 크로스비와 프레드 아스테어 주연의 뮤지컬 영화 <홀리데이 인>의 곡을 쓰던 어빙 벌린은 화창한 캘리포니아 수영장에서 그가 꿈꾸던 고전적인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떠올린다.
푸른 잔디와 야자수가 있는 LA 비버리 힐스에서 추운 북쪽에 있기를 희망하는 마음에서 곡을 써내려갔고, 그렇게 ‘White Christmas’가 탄생했다.
‘White Christmas’는 고향에 대한 향수, 그리고 어린 시절에 대한 순수한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곡으로, 이는 역사상 가장 많이 녹음된 노래 중 하나가 됐다.
어빙 벌린이 ‘White Christmas’로 아카데미 주제가 상을 탔을 당시도 흥미로웠는데, 어빙 벌린은 아카데미 시상식 역사상 유일하게 자기 자신을 수상자로 호명한 시상자가 됐다.
그러니까 어빙 벌린이 주제가상 시상자로 등장해 봉투를 열었더니 수상자에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인데, 이 분위기가 너무 어색했기 때문에 아카데미 시상식 측에서는 다시는 이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이듬해부터 의전 규칙을 변경했다고 한다.
어빙 벌린은 ‘White Christmas’를 쓰자마자 자신이 특별한 무언가를 창조했다는 것을 깨닫았다고 한다. 결국 이는 예배용 노래가 아닌 크리스마스 노래로써 새로운 업계를 창조하는 시발점이 됐고 곡이 지닌 특유의 감상적인 면으로 인해 ‘연말 유흥’이라는 아이디어를 주류로 끌어올려내면서 새로운 대중 시장을 개척했다.
뮤지컬 <홀리데이 인>에는 크리스마스 이외에도 다양한 명절들이 등장하는데, ‘Happy Holiday’, ‘Easter Parade’ 같은 다른 명절에 관한 어빙 벌린의 곡들 또한 함께 인기를 끌었다.
1941년 12월 25일 NBC 라디오 쇼에서 빙 크로스비가 부른 버전으로 처음 ‘White Christmas’가 공개됐고 이듬해인 1942년 영화 <홀리데이 인>이 개봉했다.
이후 빙 크로스비는 1942년 11주 동안 빌보드 차트 1위를 했고 1943년과 1944년 12월에 다시 1위 자리를 탈환했다. <홀리데이 인>에 이어 1954년에는 아예 빙 크로스비 주연의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의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는데 이는 1954년 최고 수익을 올린 영화로 기록되기도 했다.
어빙 벌린은 악보를 읽을 수 없었고 제한된 피아노 연주만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복잡한 곡을 쓰지 않았다. 그가 만든 단순하고 피부에 와닿는 노래들은 평균 미국인의 마음에 다가가는 것이 목표였던 스스로의 작업방식과도 일치했다.
그리고 이는 오히려 이 노래들의 기나긴 생명력과도 연결된다. 위대한 작곡가 조지 거슈인 또한 어빙 벌린을 가리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 치켜세우기도 했다.
1966년 이후 작품이 뜸해진 어빙 벌린은 공식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남은 여생을 뉴욕에서 보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기리는 행사를 비롯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다. 그저 자신의 음악 출판물의 통제권을 유지하면서 살아갔고 1989년 10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수많은 이들이 어빙 벌린의 곡들을 다시 녹음했다. 윌리 넬슨이 다시 부른 ‘Blue Skies’는 곡이 공개된 지 52년 만에 1위를 차지하기도 했고, 1983년 신스팝 아티스트 타코가 재해석한 ‘Puttin’ On the Ritz’의 경우 국내에서도 유독 사랑받으면서 라디오에서 자주 흘러나왔다.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어떤 미국적인 가치나 멜로디 같은 것이 어빙 벌린의 곡들에 마치 DNA처럼 심어져 있었고 때문에 이 곡들은 시간이 흘러도 쉽게 재생산됐다.
수많은 명곡을 만들어 왔지만 유독 ‘White Christmas’의 경우 시대를 초월하는 곡의 특성 때문에 거대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어빙 벌린은 대중의 흐름을 파악하는 감각이 있었고 전시 미국의 국민들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연결되는 무언가를 갈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White Christmas’의 아름다움은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이상적인 과거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전쟁은 참혹하고 겨울은 춥기 때문에 그것이 허구의 향수나 환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시대, 그리고 삶은 너무나 개인화되어 있어 이처럼 거대한 그룹의 정서에 초점을 맞추는 시장은 대부분 사라졌다.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노래들 또한 그간 너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여전히 ‘White Christmas’를 무의식 중에 흥얼거리고 있다.
☞ 추천 음반
◆ Ella Fitzgerald Sings the Irving Berlin Song Book (1958 / Verve)
재즈 가수 엘라 핏제랄드는 거슈인부터 콜 포터, 듀크 엘링턴 등의 송북을 기획 발표해왔던 전적이 있는데, 그 수많은 송북 시리즈들 중 어빙 벌린을 다룬 것 또한 훌륭했다.
기존에 존재하던 30여 곡의 어빙 벌린의 곡을 새로 녹음해 담아낸 이 앨범에서 미국을 대표하는 두 거인의 행복한 화합을 음악이 흐르는 내내 감지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사운드트랙에는 프레드 아스테어의 초기 버전, 그리고 엘라 핏제랄드 버전의 ‘Cheek to Cheek’을 모두 수록하고 있기도 하다. 앨범은 제1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올해의 앨범’ 부문 후보에 올랐다.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On the Pulse>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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