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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가 된 아프로비트의 선구자

[장르의 개척자들] 펠라 쿠티(Fela Kuti)

2024.07.15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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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토착적 리듬과 서양의 대중 음악 문법이 뒤섞인 ‘아프로비트(Afrobeat)’는 1960년대 무렵 아프리카에서 등장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서양의 청취자들을 만났다. 

거칠게 말하면 이는 가나의 하이라이프, 요루바의 폴리리듬, 그리고 제임스 브라운의 훵크가 합성된 것처럼 보였다. 

미국의 흑인들에 의해 태어난 블루스, 프리 재즈, 그리고 소울과 훵크 등을 다시금 아프리카 대륙으로 가져와 새롭게 아프리카 식으로 해석한듯 보였던 아프로비트는 아프리카의 대중음악으로 시작해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는 이후 미국의 흑인 음악인들은 물론 폴 사이먼과 데이빗 번 같은 이들 또한 사로잡았다. 그 밖에도 폴 매카트니와 마일스 데이비스, 켄드릭 라마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면서 아프로 비트는 시대를 불문하고 뿌리내려갔다. 

펠라 쿠티 뮤지컬 (사진=펠라뮤지컬 페이스북)
펠라 쿠티 뮤지컬 (사진=펠라뮤지컬 페이스북)

1960년대 무렵, 유럽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하면서 아프리카 전역의 밴드 리더들 또한 자신들의 민속음악을 편곡하는 식으로 레퍼토리를 수정했다. 

이미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자신들을 점령한 서구의 악기들을 호텔과 클럽 등지에서 연주해왔는데, 서구인들이 만든 정치적 제약이 없어지면서 본격적으로 스스로의 뿌리를 탐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발생한다.

그 중심에 ‘펠라 쿠티’가 있었다. 나이지리아 출신의 이 도발적인 예술가이자 민권운동가는 국제적 주목을 받으면서 아프로비트를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 올렸다. 

그는 요루바어와 뒤섞인 영어로 도전적인 메시지를 외치는 한편 최면적인 편곡과 리듬을 운용해내면서 급진적인 문화현상을 만들어 나갔다. 무엇보다 1960년대 당시 나이지리아 군사 정부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식민지 이후 부패한 나이지리아 정권에서는 가시 같은 존재처럼 여겨졌다.

펠라 쿠티는 교사 연합을 설립한 성공회 목사였던 아버지, 레닌 평화상을 수상한 민족주의자이자 인권 및 노동 운동가였던 어머니 아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참고로 펠라 쿠티의 형제들은 모두 의사가 됐다. 

펠라 쿠티는 어린시절부터 피아노와 타악기 레슨을 받았고 1959년 무렵 영국 런던에서 클래식 음악을 공부했다. 런던에서 재즈, 그리고 록 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다양한 스타일을 접한 펠라 쿠티는 1960년대 중반 나이지리아로 돌아와 런던에서 공부했던 것을 토대로 아프로비트 사운드를 실험한다. 

1969년 미국 투어 이후, 미국에서 지켜본 말콤 엑스와 블랙 팬더 및 기타 흑인 무장 세력들에게서 직접적으로 정치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펠라 쿠티의 음악 또한 정치적으로 변해간다. 

다국적 기업, 그리고 서구문명이 아프리카를 착취하는 방식에 대한 개탄을 음악으로써 정리해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의 히트곡들인 ‘Zombie’, ‘Monkey Banana’, ‘Beasts of No Nation’, 그리고 ‘Upside Down’ 등은 여러모로 사회 변화를 촉구했다. 

마치 주술사처럼 노래하며 키보드 위에서 몸을 흔드는 이 선동적인 가수는 무직자, 불우한 계층, 그리고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음악적으로도 놀라운 성취를 거둠과 동시에 1970년대부터는 정치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음악적 재능을 정치적인 저항의 도구로 활용한 펠라 쿠티는 자신에게 있어 음악이란 권위와 식민지화, 그리고 부패한 아프리카 정부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라고 말했던 바 있다. 

펠라 쿠티는 자신만의 ‘칼라쿠타’ 공화국을 세웠다. 라고스 교외에 위치한 칼라쿠타 공화국에는 녹음 스튜디오는 물론 소외된 사람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는 거대한 단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존재 자체가 불법이었고 집단의 몇몇 지나치게 자유로운 정책들은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이는 군사정권에 대한 일종의 저항 행위로 읽혔다. 1979년도에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보기까지 했다. 소외된 사람들의 대변인이고 군사 독재에 맞서 직접 몸을 던졌지만 대신 매우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자신의 정치적 행보 때문에 펠라 쿠티는 평생 군부로부터 직·간접적인 억압을 받았다. 군부는 그의 추종자들까지 체포하고 구타했으며 투옥할 이유를 만들기 위해 공연장을 정기적으로 급습했다.

주로 저녁시간에 습격을 받았기 때문에 결국 아침에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꼬투리를 잡혀 몇번의 징역 생활을 했음에도 정치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는 살인 혐의로 감옥에 갇히기도 했지만 이 역시 결국 기각됐다. 

1977년, 군부의 명령을 받은 약 1000명의 군인이 펠라 쿠티의 공동체 칼라쿠타 공화국을 습격하면서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진다. 마을의 집들이 불태워졌고 펠라 쿠티의 어머니는 머리채를 잡힌 채 건물 2층 창문 밖으로 던져지면서 그로 인한 부상 및 후유증으로 이후 사망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펠라 쿠티의 드러머 토니 앨런은 이 습격 이후 자신은 음악가일 뿐 싸움꾼이 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며 팀을 나갔다. 이처럼 군사정권이 탄압의 강도를 높였다는 것은 오히려 그의 음악이 어떤 정치인의 수사보다도 강력했음을 입증해주는 행위에 다름 아니었다. 

1997년 8월 2일, 펠라 쿠티가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그의 사망은 아프리카 대륙에 에이즈에 대한 인식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펠라 쿠티는 칼라쿠타 공화국 안에서 27명의 아내와 결혼한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여성과 이혼하면서 어떤 남자도 여성의 몸을 소유해서는 안 된다 말하기도 했다. 에이즈로 사망하는 날까지 그는 다양한 사안들과 끊임없이 투쟁해왔다. 

사망 이후에도 펠라 쿠티의 음악적 유산들이 이어져 나갔다. 일단은 아들들인 페미 쿠티와 세웅 쿠티에 의해 이 횃불이 계승되었다. 

몇 주 전 열린 콜드플레이의 글래스톤베리에서의 공연에서 페미 쿠티가 게스트로 등장해 ‘Arabesque’를 연주하기도 했는데, 페미 쿠티는 자신의 아들 메이드 쿠티와 함께 발매한 더블 앨범 <Legacy+>로 그래미 글로벌 뮤직 부문 후보에 지명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여러 밴드 중 하나인 ‘이집트 80’을 이어 나가고 있는 세웅 쿠티 또한 2018년 자신의 앨범 <Black Times>로 월드뮤직 부문 그래미 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이들은 문화 지도자로서 여전히 쿠티 가문의 전통을 따르고 있다.

말 그대로 펠라 쿠티의 음악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그의 유산은 아프로비트를 통해 살아 있으며 이는 나이지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 브라질, 일본 등지에서도 열렬히 흡수되어 갔다. 

그의 유산을 있는 그대로 이어 나가는 수많은 아프로비트 뮤지션들은 물론 비욘세와 제이콜, 나스, 제이지 등의 힙합 아티스트들 또한 그의 음악을 샘플링하기도 했다. 정작 펠라 쿠티는 1984년 인터뷰에서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로 헨델을 꼽았다.

펠라 쿠티의 전기를 그린 뮤지컬 <Fela!> 또한 오프 브로드웨이에서 시작해 브로드웨이로 넘어가면서 예상치 못한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극찬 받았다. 

뮤지컬은 다수의 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살아있는 동안 미국을 정복하지 못했던 펠라 쿠티는 마침내 미국의 문화적 중심지로 옮겨져 적극적으로 인정받았다.

한없이 자유분방하면서 뼛속까지 깃들어 있는 그 강렬한 리듬은 펠라 쿠티의 사운드를 쉽게 거부할 수 없게끔 만든다. 그리고 소외된 아프리카 사람들은 기이한 힘을 감지하고는 펠라 쿠티에게로 편승했다. 

자신의 두 형제들처럼 의료업에 종사하면서 고고한 삶을 영유할 수도 있었겠지만 펠라 쿠티는 목숨을 걸고 저항하면서 악명을 떨치는 방향을 택한다. 결코 타협하지 않는, 아프리카에서 가장 위험한 이 인물은 이 세상에 결코 지워지지 않는 고귀한 흔적을 남긴다. 

☞ 추천 음반

◆ Zombie (1977 / Coconut)

가장 널리 알려진 펠라 쿠티의 앨범으로 앨범에 수록된 네 곡이 모두 10분 이상의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 군사정권이 시키는 대로 사고방식을 조종당하는 것에 대해 펠라 쿠티는 마치 좀비 같다 생각했고 결국 이런 작품으로까지 이어졌다. 

펠라 쿠티의 초등학교 동창이었던 당시 국가 원수 올루세군 오바산조 장군에게 이 앨범은 일종의 트리거처럼 작용했고, 결국 앨범이 공개되고 나서 얼마 후 1000명의 군인을 칼라쿠타 공화국으로 투입시키면서 구역을 피로 물들인다. 

◆ Red Hot + Riot: The Music and Spirit of Fela Kuti (2002 / MCA)

에이즈에 대한 인식 및 활동 기금 마련 컴필레이션 시리즈로 널리 알려진 ‘레드 핫’에서 에이즈로 사망한 펠라 쿠티를 테마로 앨범을 만드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디안젤로부터 믹스마스터 마이크, 탈립 콸리부터 조르쥬 벤에 이르기까지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려운 30여명의 다양한 아티스트들이 2000년대 초반 흑인 음악, 재즈, 아프로비트의 현주소, 그리고 펠라 쿠티의 영향을 동시에 추적해내고 있다.

한상철

◆ 한상철 밴드 ‘불싸조’ 기타리스트

다수의 일간지 및 월간지, 인터넷 포털에 음악 및 영화 관련 글들을 기고하고 있다. 파스텔 뮤직에서 해외 업무를 담당했으며, 해외 라이센스 음반 해설지들을 작성해왔다. TBS eFM의 < On the Pulse > 음악 작가, 그리고 SBS 파워 FM <정선희의 오늘 같은 밤> 고정 게스트로 출연하기도 했다. 록밴드 ‘불싸조’에서 기타를 연주한다. samsick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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