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어릴 적 잠자리에서 그림책을 읽어줬다. 아이에게 “잠잘 시간이야”라고 말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그림책을 여러 권 갖고 내 옆에 와서 누웠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더는 그림책을 읽어주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 ‘그림책은 아이에게 읽어주는 책이야’라는 고정관념이 생긴 탓이다. 하지만 그림책은 우리 모두를 위한 책이다. 남녀노소 누구든 그림책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아이가 아닌 어른에게도 그림책을 읽어줄 수 있다. 그렇기에 ‘어르신 그림책 테라피’라는 프로그램도 있다. 어르신을 대상으로 그림책을 읽어주다니 고개를 갸우뚱한다면 지금부터 주목해 보자.
아직 한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았지만,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에서 가을이 느껴진다. 9월은 독서의 달이다. 마침 서대문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이하 노동자센터)에서 ‘어르신 그림책 테라피’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노동자센터에서 ‘어르신 그림책 테라피’라니! 왠지 호기심이 생긴다. 첫 수업을 참관해봤다. 강사가 수강생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독후활동을 하는 점에선 여느 독서 프로그램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대다수 수강생이 노동자센터를 이용하는 60세 이상의 노동자라는 점이다. 8월 19일부터 10월 28일까지 총 10회 차에 걸쳐서 매주 월요일 오후 4시 30분에 진행한다. 센터의 첫 수업이 있던 날, 단 한 명의 결석생 없이 수강생 전원이 수업에 참석했다. 그만큼 수강생들의 기대감이 컸다.
조향숙 강사가 수강생들에게 자존감 박수를 알려준다. “나는 내가 정말 좋다”라는 여덟 글자를 또박또박 큰 소리로 말하면서 박수를 치는 방식이다. 수업 초반에 어색했던 분위기가 자존감 박수를 여러 번 치는 동안 해소되는 것 같았다. 이어서 조향숙 강사가 오늘의 그림책을 펼쳐서 읽어주기 시작했다. 제목은 ‘꽃을 선물할게’(강경수 글·그림)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책에 등장하는 무당벌레와 곰이 주고받는 짧은 대화가 독자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무당벌레가 거미줄에 걸려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다. 지나가는 곰에게 구해달라고 도움을 요청한다. 곰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다면서 무당벌레의 부탁을 거절한다. 하지만 무당벌레는 곰을 설득하기에 이른다.
그림책 읽기가 끝난 뒤 두 가지 독후활동을 했다. ‘마술꽃 만들기’에 이어 ‘무당벌레 미니북 만들기’다. 조향숙 강사가 먼저 시범을 보여줬다. 수강생들이 강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만들기를 시작했다. 박수정 보조강사가 수강생들 사이를 오가면서 질문에 답하거나 개별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어르신 그림책 테라피’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수강생들 모두 진지하게 임하고 있다. 수강생들은 자신의 일을 마친 뒤 시간을 내어서 이곳에 왔다. 강사가 첫 수업의 소감을 묻자 한 수강생이 “제가 방문하는 가정의 어르신에게 그림책을 읽고 독후활동하는 것을 적용해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수업이 끝난 뒤 다들 서둘러 노동자센터를 빠져나간다. 수강생 윤숙경 씨(68세)에게 간단히 소감을 물어봤다. 그는 “한두 번의 특강으로 끝나지 않고 총 10회의 프로그램이어서 제대로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랜만에 그림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색칠하고, 가위로 오려 붙이는 활동을 했어요.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 듯 즐거웠답니다. 다음 주 수업도 기대가 됩니다”라면서 환하게 미소 짓는다.
60세 이상의 노동자들이 바쁜 일과를 쪼개어서 ‘어르신 그림책 테라피’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은평구립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 덕분이었다. 수강생들은 독서하고 싶어도 일하느라 바빠서 책을 읽을 여유를 누릴 수 없다. 해당 사업은 50세 이상 (예비)실버세대의 문화소외계층을 대상으로 책을 읽어주는 활동이다. 그들에게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고, 일상 속 균등한 독서문화 환경을 조성하는데 목표가 있다.
‘어르신 그림책 테라피’ 프로그램은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지원으로 은평구립도서관에서 진행하고 있다. 은평구립도서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8곳의 지역 주관처가 있다. 매년 지역 주관처는 바뀔 수 있다. 올해 전국에서 34곳이 신청했단다. 올해의 지역 주관처는 어떤 곳일까? 수도권은 강동구립성내도서관(강동문화재단), 은평구립도서관, 잇다 사회적협동조합, 충청권은 사단법인 세종여성, 제천기적의도서관, 전라·제주권은 광주광역시 서구청 서빛마루도서관, 강원권은 맹글청소년교육사회적협동조합, 경상권은 꿈꾸는산호작은도서관(모자이크프로젝트)이다.
서울 은평구 관내 여러 도서관이 있다. 2020년과 2021년에 내를건너서숲으로도서관이, 2023년에 구립증산정보도서관이 지역 주관처로 선정된 바 있다. 올해는 은평구립도서관이 지역 주관처로 선정되었다. 은평구는 도서관이 바뀌긴 했어도 꾸준히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올해 은평구립도서관은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을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서 20명의 활동가를 모집했다. 11월 말까지 어린이, 노인, 장애인 관련 문화 취약계층 기관 20곳을 방문하여 총 200회의 책 읽어주기와 관련 독후활동으로 구성된 독서문화프로그램을 진행할 예정이다.
조향숙 강사, 박수정 보조강사와 같은 활동가가 팀을 이뤄서 은평구 관내 및 서울 시내 문화 취약계층이 있는 곳을 방문하고 있다. 은평구치매안심센터, 은평구가족센터, 노인데이케어센터, 장애인복지관, 지역아동센터, 지역키움센터 등이다. 여기에 서대문구 노동자종합지원센터도 포함되어 있다. 은평구립도서관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으로 진행하는 독서문화프로그램의 가장 큰 특징은 마술적 요소가 들어간 ‘마술 동화 구연’에 있다. 일반적인 책 읽어주기 및 관련 독후활동에 대상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마술이라는 새로운 요소를 추가하였다. 예를 들면, 그림책 ‘꽃을 선물할게’의 독후활동 ‘마술꽃 만들기’가 있다. 긴 막대 속에 숨겨져 있다가 활짝 펴지는 꽃이 간단한 마술을 보는 것 같다.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에 대해 은평구립도서관 나은주 팀장과 일문일답을 나눴다.
Q) 은평구립도서관이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지역 주관처로 선정되었다. 어떤가?
나은주 팀장) 은평구립도서관은 은평구에서는 유일하게 다문화 자료실, 시끄러운도서관(느린 학습자를 위한) 등 정보 취약계층을 위한 자료실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지속해서 지식정보 취약계층(장애인, 다문화가정, 저소득층, 노인 등)을 위한 다양한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올해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에 선정될 만했다는 생각이 든다.
Q) 은평구립도서관이 문화 취약계층 기관을 선정하는 기준은?
나은주 팀장) 먼저 사업 목적에 맞는 아동시설, 노인시설, 장애인시설을, 그리고 다문화 자료실과 시끄러운도서관 등을 방문하였던 문화 취약계층 기관을, 마지막으로 사업 시행 전부터 방문을 요청했던 기관들을 선정하였다.
Q)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에서 좋았던 점은?
나은주 팀장) 좋았던 점은 많다. 사업에 선정되기 전부터 은평구립도서관은 중장년 또는 예비실버세대를 대상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제공하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의 지역 주관처로 선정되었다. 첫째, 활동가의 활약이 돋보였다. 도서관에서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지식을 나누는 모습, 방문 기관에서 책을 읽어주고 독후활동을 진행하는 모습 등에서 활동가가 성취감을 느끼고 자아실현과 삶의 질 향상을 도모한다는 점이다. 둘째, 방문 기관의 담당자와 참여자 모두 높은 만족감을 나타냈고, 다음에도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마지막으로, 활동가와 방문 기관으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접하면서 지역 주관처로서 은평구립도서관이 이번 사업에 참여한 것에 대해 뿌듯함과 자긍심을 느끼고 있다.
Q)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에서 개선할 점이 있다면?
나은주 팀장) 내년에도 지역 주관처로 선정되어 사업을 운영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긴다. 올해 처음 지역 주관처로 선정되어 전반적인 사업 운영과 흐름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다. 그 점이 아쉽다. 매년 다양한 기관에 기회를 주는 것도 좋다. 하지만 한 기관이 여러 해 연속적으로 운영한다면 경험이 축적되어 양질의 사업을 운영할 수 있게 된다. 더불어 전국에 산재한 지역 주관처 간에 네트워킹이 활성화된다면 서로의 지식과 비법을 공유하고 협력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이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을 홍보하고 운영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 판단한다. 또한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이 지역 내 나눔을 실천하는 자생적 독서문화 재능 기부 동아리로 정착한다면 지역 독서문화 확산의 디딤돌이 되리라 생각한다.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은 이제 본격적으로 문화 취약계층 기관을 방문하여 독서문화프로그램 운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나은주 팀장은 “앞으로 활동가들의 활기차고 적극적인 활동과 이를 아낌없이 지원하는 은평구립도서관을 응원해 주길 바란다. 은평구립도서관은 지속해서 예비실버세대와 문화소외계층을 위한 다양한 도서관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문화 분야는 책, 음악, 미술, 무용, 영화, 연극 등등 다양하다. 책을 읽고 싶어도 여건상 책을 읽지 못하는 문화 취약계층이 있다. 공연장에 갈 여유가 없듯이 그들은 도서관에 갈 여유가 없다. 그런 분들에게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이 있어서 독서에 대한 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할 수 있다.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자발적으로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는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유익한 사업인데도 그동안 모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책 읽어주는 문화봉사단’ 사업이 널리 알려져서 많은 문화 취약계층이 혜택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 9월은 독서의 달이다. 전국 8곳의 지역 주관처에서 파견나간 활동가가 방문 기관에서 수강생들을 대상으로 책을 읽어주면서 독서의 열기가 한층 고조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