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와 함께 카페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가 당황한 일이 있었다. 메뉴판에 한글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빵으로 추정되는 디저트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영어로 ‘Jambon beurre’라거나 ‘Ang Butter’라고만 적혀 있었다. 발음해보니 요즘 유행하는 잠봉뵈르 샌드위치와 앙버터가 들어간 빵이라고 추측해서 주문했다. 그나마 그때는 발음이 가능하니 주문도 할 수 있었다.
음료 코너에 적혀 있는 ‘Ciapple tea’와 ‘M.S.G.R’이라고 적힌 음료는 무슨 메뉴인지 발음을 해봐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친구에게도 물어보니 무슨 메뉴인지 모르겠다며 곤란해 했다. 직원에게 따로 물어보니, 각각 ‘사과 시나몬 차’와 ‘미숫가루’를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음식을 주문하고 오는 손님에게, 해당 메뉴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자신이 20대라고 밝힌 손님은 “힙하잖아요. 한글로만 적어놓는 것보다 개성 있어 보이기도 하고요. 표기의 자유가 있는 게 아닌가요?”라고 답했고, 30대라고 한 손님은 “외국인 관광객도 많고, 제2외국어로 영어를 배우는 건 거의 필수인 만큼 영어 표기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글 표기보다 외국어 표기가 자연스러워지는 것은 위험한 현상인 것 같다”라며, “가끔은 이렇게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운 메뉴판을 볼 때면 어떻게 주문을 하라는 건지 당혹스러울 때가 있다”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유난히 길거리 간판이나 음식점 메뉴판에 시선이 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영어로만 메뉴를 적는 것도 아니었고 다른 외국어와 혼용하여 적어놓는 메뉴판도 꽤 보였다. 핫플레이스로 유명한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었고, 집 앞의 골목 카페, 혹은 길거리에서도 외국어가 범람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메뉴판만의 문제는 아니다. 학교로 올라가는 골목에 있는 음식점과 카페를 보면 한글 간판보다 무엇을 파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는 영어 간판을 달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곳은 한국인데, 오히려 한글로 적힌 간판을 찾는 게 더 힘들 지경이다.
인테리어가 하나의 트렌드이자 사람들의 시선을 이끄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 지금, 외국어 표기를 하면 더 세련되어 보인다는 이미지가 강해진 탓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어에 나름 익숙하다고 생각하는데도 이렇게 영어 간판과 메뉴판을 보고 당황하는데, 고령층의 경우는 더 어려움을 겪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70대 이상 고령층의 외국어 이해도는 전체 국민 평균의 절반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옥외광고물 등의 관리와 옥외광고산업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찾아보니, 제3장 광고물 등의 표시 방법에서 외국어 간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제12조 2항에서 광고물의 문자는 원칙적으로 한글 맞춤법,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 및 외래어 표기법 등에 맞추어 한글로 표시하여야 하며, 외국 문자로 표기할 때는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한글과 함께 표기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즉, 한글 표기가 없으면 위법이라는 의미이다. 다만 처벌이나 강제성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해당 조항이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를 보기 힘들다고 한다.
게다가 예외 조항도 있다. 특허청에 등록된 상표를 그대로 표시하는 경우는 간판에 있어서 한글을 꼭 표기하지 않아도 되며, 만약 간판 면적이 5제곱미터 이하인 경우는 신고나 허가 대상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실질적인 관리가 어렵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가장 빠르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우리의 인식 개선에 있겠다. 간판이나 메뉴판의 본래 쓸모를 생각해보자. 기본적으로 해당 대상이 무엇을 가리키고 지칭하는지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즉, 사람들이 알아보기 쉽게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얼마 전에 인사동에 갈 일이 있었다. 개인 가게는 물론, 프랜차이즈 가게까지 모두 한글로 표기된 간판을 달고 있어서 익숙한 한글이 주는 생경함을 느끼고 돌아왔다. 함께 간 친구는 “한글 간판을 보면 오히려 더 세련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다른 지역에도 더 널리 퍼졌으면 하는 현상이다”라고 이야기하며, “꼭 외국어로 된 간판이 있어야만 감각적이고 세련되었다는 인식이 옅어졌으면 좋겠다. 인테리어나 콘텐츠를 어떻게 개성적으로 만드는가의 여부는 외국어 간판의 유무로만 결정되는 것은 아닐 것 같다”라고 말해주었다.
외국 문화가 우리 문화 속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현상은 글로벌 시대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뭐든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범람하는 외국 문화 속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가 오랫동안 잘 유지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지는 나날이다. 우리의 것은 우리가 스스로 지켜야 한다. 우리조차 우리 문화를 두고 “힙하지 않다”고 말해버리면, 누가 우리의 것을 지켜준단 말인가. 10월 9일 한글날을 맞아 우리가 가진 문화 역시 자랑스럽고 애틋하다는 사실을 모두가 상기했으면 하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