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부터 비무장지대 접경지역을 돌아볼 수 있는 ‘DMZ 평화의 길 테마노선’이 개방되었다. 인천⋅경기 지역과 강원 지역의 총 11개 코스가 마련됐는데, DMZ 평화의 길 누리집(https://www.durunubi.kr/dmz-main.do)이나 모바일 앱 ‘두루누비’를 통해서도 신청할 수 있다.
오래전부터 보고 싶었던 두타연을 찾아가고자 양구 코스를 신청했다. 기왕이면 꽃이 핀 풍경도 보고 싶었다. 중부지방은 이미 봄이 밀려왔다 꽃들이 지고 있지만 강원도 상황은 어떨까 기대 반 긴장 반으로 예약한 날을 기다렸다.
이른 아침부터 날이 흐리더니 가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종일 내릴 모양이었다. 양구에 도착해서 ‘금강산 가는길 안내소’를 찾아갔다. 군부대 바로 옆에 있는 도착 장소에 내리자 여전한 분단 상황이 체감되었다.
사전신청을 하고 받은 QR코드를 확인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접수가 끝났다. 시간이 되자 10여 명의 신청자가 모두 도착했다. 준비된 차량에 오르자 해설자가 안전수칙을 강조하며 탐방이 시작됐다. 군 장병이 인원을 확인했다. 금강산 가는길 안내소를 출발해 양옆으로 천혜의 자연 그대로인 풍경을 덜컹거리며 10여 분 달려 금강산 가는길 통문에 닿았다.
차에서 내리니 ‘금강산 32km’라는 이정표가 우뚝 서있었다. 그러니까 오래 전에는 바로 이 길을 걸어서 금강산에 갔다는 것 아닌가. 문득 아직 가보지도 못한 금강산이 조금 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삼대교 통문까지 왕복 2.7km 정도만 도보로 이동이 가능하다.
또 다른 장병이 나와 인원을 확인했다. 참가자들이 함께 닫혀 있는 금강산 가는길 통문을 열었다. 31번 국도에 들어섰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31번 국도는 부산에서 시작돼 금강산까지 이어진 길로 광물 등과 전쟁물자를 운반하던 도로였다. 이 길을 걸어 학생들이 내금강의 장안사로 소풍을 가고 주민들은 금강산 자락으로 마실을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길 양쪽에 철조망이 둘러쳐지고 가끔 ‘지뢰’라는 경고표지도 부착돼 있었다. 넓지 않은 길에 독특한 돌들이 세워져 있었다. 오래전부터 그대로 있었는지 이끼 낀 바윗돌들도 있어서 마치 돌로 만든 관처럼 보이기도 했다. 알고 보니 이 바위들은 탱크나 전차의 진입을 저지하기 위한 장애물이었다. 큰 바윗돌이 굴러 떨어지기 쉽게 작은 돌 4개를 모서리에 받쳐두었다. 얼핏 거북이나 두꺼비로 보이는 바윗돌이어서 현지에서는 ‘거북이 유랑단’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31번 국도에 31개의 바윗돌을 만들었다고 한다.
계곡을 따라 걸었다. 일행의 앞뒤로 장병들이 함께했다. 가끔 개구리가 튀어나오는 길 옆에 풀꽃들이 피어 있었다. 남산제비꽃, 족두리풀, 옥녀꽃대와 괭이눈들이 천천히 봄을 알리고 있었다. 가끔 산양이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보지 못했다.
마침내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의 끝에 닿았다.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km 지점에 있는 삼대교 통문이 닫혀 있었다. 통문 너머는 여전히 통제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은 불가하다. 여기서 금강산까지는 직선거리로 26km 정도로 옛날에는 주민들이 자유롭게 오가던 길이었다.
평소에는 잊어버리고 사는 일이지만 분단의 현실을 새삼 기억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다시 왔던 길을 돌아나왔다. 금강산 가는길 통문을 다시 나와 잠시 하야교에서 흐르는 물을 내려다보았다. 금강산에서 흘러온 물과 비득고개 쪽에서 흐르는 물이 합해져 두타연으로 흐른다고 한다.
다시 차를 타고 내려와 조각공원을 둘러보았다. 양구 지역에서는 ‘피의 능선 전투’와 ‘펀치볼 전투’ 등 9개의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조각공원에는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사용한 탱크 등이 전시돼 있고, 전쟁과 분단을 기억하면서 평화를 기원하는 작품들이 곳곳에 설치돼 있었다.
공원은 옛 두타사 터로 이어졌다. 지금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두타사는 고려시대 초기에 창건됐다가 17세기 경에 폐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오래된 사찰의 이름에서 ‘두타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두타연 위쪽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줄기를 보았다. 물이 흘러 두타연으로 쏟아져 내리는 소리가 웅장했다. 곳곳에 철쭉이 피어 보기에도 참 좋았다.
두타연으로 내려갔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정작 폭포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서둘러 차에 올라야 했다. 쉽게 찾아가기 어려운 곳인 만큼 좀 더 효율적으로 시간을 안배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양구에 가면 꼭 들르고 싶었던 DMZ자생식물원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무장지대에 서식하는 식물들과 좀처럼 보기 힘든 북방계 식물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지만 들어선 느낌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WAR 가든’이 현실을 상기시켰다.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던 펀치볼에 자리한 식물원은 전쟁의 상흔 속에서도 피고 지는 식물을 통해 상처를 보듬을 수 있도록 ‘WAR 가든’을 조성했다고 한다.
아직 황량한 정원을 좀 걸었다. 분꽃나무 향기가 낮은 대기에 진하게 퍼졌다. 비는 추적추적 내렸지만 걸을 만했다. 그런데 뜻밖에 반가운 꽃이 피어 있었다. 설악산 공룡능선에 올라야 볼 수 있는 솜다리였다. 그것도 4월에 솜다리가 식물원에 피어 있다니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았다. 이름만으로도 서식지가 분명해 보이는 ‘백두산떡쑥’도 처음 만났다. 개벼룩도 좀처럼 보기 힘든 꽃이었다.
전쟁과 분단의 역사를 고스란히 기억하는 양구에는 아름다운 두타연이 있고, 비무장지대의 식물을 연구하며 희망을 꿈꾸는 국립DMZ자생식물원이 있다. 여전히 마음껏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경계 없이 자유로워지기를 희망하며 양구, 그곳을 다시 찾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