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빵 말고 뭐가 필요할까. 대학 시절 ‘조직행동론’ 과목에서 매슬로(Maslow)의 욕구 5단계 이론을 배웠다. 1단계 생리적 욕구부터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까지다. 가장 높은 단계인 5단계는 자기만족을 느끼는 단계이다. 먹는 문제가 해결되면 문화, 스포츠 등 빵 이외의 생활에 관심을 둔다.
코로나19로 거의 2년 동안 영화, 공연 등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2022년 4월 18일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5월 2일 야외 마스크 착용 의무 완화 등으로 문화예술계도 조금씩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나도 아내와 문화생활을 다시 즐기기 시작했다.
지난 연말에 아내와 클래식 공연을 관람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Sarah Chang, 장영주) 공연이다. 아내는 클래식 음악을 무척 좋아한다. 코로나19 이후 3년 만에 공연장을 갔는데, 깜짝 놀랐다. 티켓 비용이 10만 원인데, 공연장이 꽉 찰 정도로 구름 인파가 몰렸다. 우리 부부처럼 모두 문화에 목말랐던가.
사라 장의 연주 중 빼놓을 수 없는 게 비발디의 ‘사계’다. ‘사계’는 한국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곡 중 하나다. 아내는 공연을 보면서 코로나19로 지친 몸과 마음을 편안히 내려놓았다.
공연 후 아내는 “3년 넘게 공연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다가 삶에 예술과 문화의 양식을 채워 넣은 기분이에요”라며 엄지척을 보여준다. 아내와 함께했던 클래식 공연 관람은 코로나19로 3년간의 문화적 배고픔을 해소하기에 충분했다.
어디 공연뿐인가. 영화도 오랫동안 보지 못했다. 나는 대도시에 살고 있어서 눈만 돌리면 영화관이 많다. 큰딸이 연말이 됐으니 아내와 영화를 보라고 영화 티켓을 끊어주었다. 오랜만에 영화관에 가니 비대면 셀프 티케팅을 한다. 아내와 박스오피스 순위 3위 한국 영화 ‘올빼미’를 관람했다. 조선 인조시대 역사를 다룬 픽션(fiction) 영화다.
코로나19가 한창일 때는 좌석을 한 칸 띄워서 영화를 관람했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 연말이라 그런가. 전 좌석이 매진될 정도로 관객이 많다. 그래도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관람객 모두 마스크 착용 등 개인방역수칙을 지키며 관람했다.
대도시만 문화생활 혜택을 보는 건 아니다. 중소도시도 영화와 공연을 즐길 기회는 많다. 그중의 하나가 작은영화관이다. 작은영화관은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 작은영화관 사업의 지원을 받아 기존에 영화관이 들어선 적이 없거나 경영 악화로 폐관된 도서 지역에 국비, 도비를 지원받아서 건립하는 소규모 영화관이다.
작은영화관은 2010년 전라북도 장수군 한누리시네마에서 처음 시작됐다. 역사가 10년이 넘다 보니 여기저기 작은영화관이 생겼다. 기초자치단체에서 주민 복지 차원에서 직접 운영하거나 위탁 운영한다고 한다.
얼마 전에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에도 작은영화관이 건립돼 운영을 시작했다. 마도면은 도시가 아니라 농촌 지역이다. 이곳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흘러간 영화가 아니다. 대형 영화관처럼 ‘아바타 : 물의 길’과 ‘올빼미’, ‘영웅’ 등 최신 영화를 상영한다.
아내가 '아바타 : 물의 길'을 보고 싶다고 해서 화성시 작은영화관을 찾았다. 영화관은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깔끔하다. 규모는 2개관 150석으로 1관, 2관 모두 75석이다. 온라인으로 예약을 하고 갔는데, 평일인데도 지역주민이 많다. 이런 최신 개봉작을 관람하는 데 얼마일까. 7000~9000원(2D 7000원, 3D 9000원)으로 일반 영화관의 절반 수준이다.
농촌에도 작은영화관이 생긴 것은 문화 소외를 없애기 위한 정부와 지자체의 노력 덕분이다. 작은영화관 덕분에 영화 한번 보려고 도심지까지 나가지 했던 불편함이 없다. 게다가 관람료도 저렴하니 현지 주민들의 반응은 아주 좋은 편이다.
이렇게 국민 누구나 문화 혜택을 누리며 사니 문화 선진국이라는 자부심이 있다. 나 역시 그렇다. 영화, 뮤지컬, 콘서트, 작은음악회 등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내가 원하는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떨까? 문체부 설문 결과 한국인 66%가 대한민국은 문화 선진국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 결과다.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의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한국 대중문화에 대해 ‘우수하다’라고 답한 비율은 96.6%다. 2008년에 비해 43%p 상승했는데, 이는 조사 이후 가장 높은 수치라고 한다.
국민의 문화생활 지원을 위해 올해 7월부터 영화 관람료 소득공제도 시행한다. 공제율은 30%다. 공제 한도는 전통시장, 대중교통, 문화비 사용분에 대한 소득공제를 합해 총 300만 원이다. 소득공제 대상이 도서, 공연, 박물관·미술관, 신문 사용분에 이어 영화 관람료까지 확대된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7080세대인 나는 어릴 때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어쩌다 한 번 동네 공터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다. 큰 천막을 치고 그 안에서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몰래 들어가 구경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설날, 추석 등 명절이 아니면 영화를 보러 가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영화관 전용 앱으로 클릭 몇 번이면 가까운 곳으로 영화를 보는 시대다. 한류를 얘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나라는 문화 선진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