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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의 한국 사랑 기억해주세요 한국의 매력 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2024.06.26 대한민국 정책주간지 <K-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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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용사 사딕 아심길 씨의 손녀 일라이다 아심길 씨는 “호국 영웅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사진 C영상미디어
한국전쟁 참전용사 사딕 아심길 씨의 손녀 일라이다 아심길 씨는 “호국 영웅들을 기억하는 것이 그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사진 C영상미디어

튀르키예 참전용사의 손녀 일라이다 아심길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참전한 튀르키예군 소속 사딕 아심길 씨는 부산항에 발을 디뎠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처참했다. 집 없는 피란민과 구걸하는 아이들이 거리에 넘쳐났다. 유엔군에 합류해 한 달간 훈련을 받은 그는 최전방에 배치받아 유엔 깃발 아래 중공군에 맞서 싸웠다. 한국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며 북으로 향했고 숱한 전투를 치르며 전우들을 잃었다. 바로 옆에 있던 전우의 붉은 피가 흰 눈 위에 쏟아지는 장면은 사진처럼 그의 머릿속에 박혔다. 1년 뒤, 그는 튀르키예로 돌아갔지만 전우들의 비명·포화 소리와 함께 이명이 울려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51년 만인 2002년, 다시 찾은 한국은 다른 세상이 돼 있었다. 자신이 싸워 지켜낸 나라의 번성을 확인한 사딕 아심길 씨는 감사의 마음과 함께 벅찬 감정을 느꼈다. 그는 201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국전쟁 참전용사임을 자랑스러워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내 유엔실 튀르키예 부스에는 튀르키예 일간지 ‘휘리엣’이 두 면에 걸쳐서 사딕 아심길 씨를 인터뷰한 지면과 전쟁 당시 찍은 그의 사진, 참전용사 메달 등이 전시돼 있다.

그의 한국 사랑은 손녀인 일라이다 아심길(25) 씨에게 이어졌다. 한국 생활 4년 차인 일라이다 씨는 현재 국가보훈부의 제17기 서포터즈(온라인 응원·후원단)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의 보훈정책을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유튜브를 통해 한국의 매력을 세계에 알리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그가 한국에 온 것은 할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에게 한국전쟁 이야기를 듣고 자라 한국은 낯선 나라가 아니었다. 부모의 이민으로 독일에서 태어난 일라이다 씨는 독일 베를린 세종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2018년 한국으로 배낭여행을 와서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전쟁기념관이었다. 할아버지의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의 사연을 듣고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악수를 청했다. 한국과 사랑에 빠진 그는 2020년 한국으로 유학을 왔다. 현재는 한국외국어대 대학원에서 국제학을 전공하고 있다. 그는 매년 6월 전쟁기념관을 찾아 할아버지를 비롯한 참전용사들의 명복을 빈다. 올해도 어김없이 6월 6일 전쟁기념관을 찾은 그를 만났다.

2002 한일월드컵 때 한국을 찾은 사딕 아심길(왼쪽) 씨의 모습.
2002 한일월드컵 때 한국을 찾은 사딕 아심길(왼쪽) 씨의 모습.

할아버지로부터 한국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할아버지는 한국이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참전했다고 했다. 튀르키예에서 배를 타고 23일 만에 부산에 도착해 한 달 동안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됐다고 했다.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는 유엔군의 퇴로 확보를 맡았는데 그때가 가장 치열했다고 한다. 특히 군우리전투에서 전우를 많이 잃었다고 했다. 일기장에 남긴 기록을 봤다. 전투 당시 총탄을 피해 눈 덮인 바닥에 엎드려 있었는데 헬멧을 고쳐 쓰는 순간 총알이 날아왔고 총알이 헬멧에 튕겨 옆에 있던 동료 손에 박혔다고 한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목숨을 잃을 뻔했던, 신이 도운 순간이라고 쓰여 있었다. 혹독한 추위도 죽을 만큼 힘들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괴로워했다.

튀르키예로 돌아간 할아버지는 어떻게 지냈나?

튀르키예 참전용사 재단에서 틈틈이 활동했고 튀르키예 언론은 물론 한국에서 기자들이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한국전쟁 참전 메달을 보여주며 자랑스러워했다. 51년 만인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을 다시 찾았는데 발전한 한국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우리가 튀르키예 부대로 참전해 싸웠기에 한국이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는 말씀도 했다.

한국전쟁 참전 당시의 사딕 아심길 씨 모습. 참담한 전쟁 중에도 그는 직접 악기를 만들어 전우들과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며 위로의 시간을 보냈다. 제공 일라이다 아심길
한국전쟁 참전 당시의 사딕 아심길 씨 모습. 참담한 전쟁 중에도 그는 직접 악기를 만들어 전우들과 함께 연주하고 노래하며 위로의 시간을 보냈다. 제공 일라이다 아심길

기억 속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

굉장히 유쾌한 분이었다. 성격이 쾌활한 나는 할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소리를 종종 듣는다. 음악을 좋아했던 할아버지는 자식들이 어렸을 때부터 악기를 가르쳤다. 가족이 다 모이면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나와 여동생은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손재주가 좋았던 할아버지는 전쟁 중에도 직접 악기를 만들어 전우들과 함께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다고 했다. 전쟁의 현실은 참담했지만 전우들과 함께 보낸 시간만큼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일라이다 씨가 한국에 관심 가지게 된 것도 할아버지의 영향이 큰 것 같다.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대학생이던 2018년 관광차 한국에 처음 왔는데, 그때 한국에 매료돼 방학 때마다 찾았다. 한국의 문화와 역사가 흥미로웠다. 이후 어학연수와 교환학생으로 한국과 독일을 오가다 2022년 학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에 이렇게까지 오래 머물면서 깊은 인연을 맺을 줄 몰랐다. 모두 할아버지 덕분이다. 할아버지와 같은 참전용사를 기억하고 널리 알리는 일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전용사 후손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한다고 들었다.

2023년 부산에서 열린 ‘유엔군 참전의 날·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함께 튀르키예 참전용사 후손으로 무대에 올랐다. 올해 2월부터는 국가보훈부 서포터즈로 활동하고 있다. 한국 역사와 보훈 관련 주제로 사진을 찍고 온라인에 올리는 활동을 한다. 역사 속 영웅들의 콘텐츠를 만들어 한국 청년들에게 알리는 역할이다. 지난 5월에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을 소개하고 일제강점기 역사를 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적도 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유엔실에 튀르키예 국기와 참전용사 메달 등이 전시돼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유엔실에 튀르키예 국기와 참전용사 메달 등이 전시돼 있다. 사진 C영상미디어

한국을 해외에 알리는 일도 한다고?

한국 여행 홍보 영상에 참여했다. 지금은 서울관광재단의 홍보대사를 맡아 누리소통망(SNS)을 통해 한국의 관광지를 홍보하고 있다.

한국에 대한 인상은 어떤가?

문화도 역사도 매력적이다. K-드라마를 특히 좋아한다. 한국어도 배울 수 있고 문화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K-팝도 좋아한다.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 한국에서 많은 인연을 쌓았다. 한국인은 정이 깊다. 친구들과 강원 속초 여행을 갔다가 아픈 적이 있었는데 시장 할머니들이 약도 주고 감자도 삶아주며 정성스레 보살펴줬다. 그때의 따뜻했던 정을 지금도 기억한다.

유튜브를 통해 한국 문화 알리기에도 앞장서고 있다.

외국인이 잘 모르는 한국의 이색 문화를 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빨리빨리’ 문화, ‘밥 먹고 2차로 카페 가기’ 등이다. 한국어를 어떻게 공부하면 효과적인지도 알려주고 있다. 최근 한국어에 관심 갖는 이들이 많다.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는 그 나라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 나누는 게 가장 빠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책과 드라마를 보거나 한국 사람들과 대화하며 재미있게 배웠다. 사람들은 내가 한국에서 하는 활동들에도 흥미로워한다.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동기부여가 된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본보기가 되는 만큼 더 열심히 활동할 생각이다.

자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15)
자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2015)

참전용사 후손으로서 사명감이 크겠다.

어깨가 무겁다. 참전용사 후손으로서 한국에 온 후 더욱 책임감을 느끼게 됐다. 국가보훈부를 통해 만난 참전용사 후손들과 모임도 갖고 있다. 그들과 유엔군 참전용사들에 대한 책도 기획 중이다. 당시 참전용사들이 이제는 연로해 많은 분이 세상을 떠났다. 더 늦기 전에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해야 한다. 그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것을 미래세대가 기억해야 한다. 특히 20~30대 중에는 역사를 잊고 지내는 사람이 많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이 있다. 역사를 기억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튀르키예계 독일인이라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했다고 들었다.

나를 독일인이라 소개해야 하나 튀르키예인이라 소개해야 하나 헷갈릴 때가 있다. 부모님은 튀르키예 분이지만 내가 태어난 나라는 독일이기 때문이다. 집에서는 튀르키예 문화, 나가서는 독일 문화를 경험하며 살았다. 이젠 스스로를 글로벌 주민이라 생각한다. 졸업 후 계속 한국에서 국제사회와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

한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영웅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을 잊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방법이다. 역사를 기억하고 기록하는 나의 활동이 많은 또래 친구들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

서경리 기자

*튀르키예 한국전쟁 참전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10월, 튀르키예 제1여단 5400여 명이 부산항에 상륙했다. 이들은 유엔 깃발 아래 평양 탈환 작전에 투입됐다. 평양 군우리전투는 튀르키예군의 격전지였다. 평양 탈환에는 성공했지만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전사 892명, 부상자 966명으로 미군과 영국군 다음으로 큰 피해였다. 휴전까지 3년 동안 튀르키예군 참전 연인원은 2만 1212명으로 참전국 가운데 네 번째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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