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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영화 <자유만세>의 역사적 가치

2015.07.10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이야기 2015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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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만세>(최인규 감독,1946)는 8·15 해방 이후 항일과 광복을 소재로 만든 첫 번째 극영화라는 점에서 영화사적 의미가 큰 작품이다. 이 영화의 필름은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9월 등록문화재(제343호)로 등록되기도 했다. 해방 직전 한 투쟁가의 치열한 무장 활동을 그린 영화 <자유만세>속으로 들어가 보자.

“일제의 패망이 짙어지던 1945년 8월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다 투옥되었던 최한중(전창근)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다. 한중은 대학병원 간호부 혜자(황려희)의 집으로 은신해 지하조직의 무장봉기를 다시 주도한다. 동료 박(김승호)이 다이너마이트를 운반하다 일본 헌병에 붙잡히자 한중은 그를 구출한 후, 우연히 헌병 남부(독은기)의 애인인 미향(유계선)의 아파트로 피신한다. 한중을 숨겨준 미향은 그에 매료되어, 지하조직이 있는 지하실로 찾아가 정보와 자금을 전달한다. 그 뒤를 밟은 남부의 헌병대에 의해 미향은 총에 맞아 죽고 한중 역시 총상으로 대학병원으로 옮겨진다. 한중을 사모하던 혜자는 헌병이 잠든 틈을 타 그를 탈출시킨다.”

최한중 역의 전창근
최한중 역의 전창근
1946년 10월 21일, 해방 전까지 명치좌로 불렸던 국제극장에서 <자유만세>가 개봉하자 관객들은 열렬한 환호로 응답했다. 생전 전창근의 회고에 의하면, 흥행이 잘 된 정도가 아니라 관객들로 극장이 터져 나갈 정도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감격과 함께 찾아온 우리손으로 만든 극영화, 게다가 항일무장투쟁을 활극과 멜로드라마장르에 담아 묘사한 덕분이었다. 지하운동가 최한중을 사모하는 간호부 역의 신인 황려희도 당시 학생 관객들을 극장으로 모으는 계기가 되었다. 원로 평론가 박용구는 <자유만세>의 히로인 황려희의 등장은 말 그대로 신선한 사건이었음을 증언한 바 있다. 영화배우를 ‘딴따라’로 여겼던 당시의 분위기에 비춰봤을 때 경기여고 출신의 인텔리 여성이 영화배우가 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던 일이어서, “해방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하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한중의 지하조직 장면
한중의 지하조직 장면
<자유만세>는 일제 시기 조선영화계를 대표하던 영화인들이 8·15 해방 이후 다시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 근대사의 격랑을 여실히 보여준다. 영화 개봉 직전인 1946년 10월 6일자 「경향신문」광고는 감독 최인규라는 타이틀과 함께, 1930년대 중반부터 조선영화계를 주도한 제작사 고려영화협회가 사회사업 단체인 ‘향린원’(1941년 <집없는 천사>의 배경이기도 했던)과 공동 제작한 것으로 소개한다. <자유만세>가 기획되었을 시점인 1946년 4월 8일자 「동아일보」광고는 이 영화가 말 그대로 당시 영화계를 대표하는 프로젝트였음을 제시한다. 특히 ‘연출응원’으로 이름을 올린 안종화, 안석영, 윤봉춘, 이규환과 촬영 이명우 등은 조선영화를 대표하는 인력들이기도 했다. 같은 광고 지면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사실 이 영화는 광복 1주년 기념, 즉 “해방경축영화”로 기획되었지만 이보다 늦은 10월에야 개봉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 1년이 지나도록 극영화가 등장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몇 번인가 촬영 도중 크랑크는 쉬이고 큰거리 전신주에는 ‘필님 산다’라는 광고지가 처처에 붙어 있었다”라는 안철영의 글(「경향신문」1946.12.15)에서 당시 영화계 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혜자 역의 황려희
혜자 역의 황려희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보존되어 있는 이 영화의 프린트는, 1975년경 덧붙여진 도입부 소개 자막에서 볼 수 있듯이, 1946년 제작당시의 온전한 상태가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100분이지만, 6·25전쟁 등을 거치며 많은 부분이 유실되어 현존하는 필름은 50여 분에 불과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사료 상으로만 존재한다. 생전 전창근의 증언과 시나리오를 참고하면, 이 영화의 유실된 마지막은 다음과 같은 중요한 장면들을 포함했다. “곧 일본 헌병대가 사이드카로 한중을 추격하여 산중 총격전 끝에 그는 죽게 된다. 그 시간이 바로 8월 15일 동틀 녘이었다.”

이 영화는 새로 촬영된 장면을 포함해 곳곳에 다시 편집된 표시를 남기고 있기도 하다. 무슨 이유에서였을까. 바로 6·25전쟁 발발 전에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 배우 독은기의 출연 장면 등이 개봉 이후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자유만세>라는 영화 한 편에도 만만치 않은 한국 근대사의 굴곡이 새겨져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글 · 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사진 제공 · 한국영상자료원

*이 글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이야기 여름호에 실린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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