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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민과 탕평’…정조의 혼이 깃든 수원화성을 걷다

[국립중앙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 연재] ⑩ 경기 수원·남양주 ‘수원화성을 다시 읽다’

2014.10.27 정책기자 진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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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수원 화성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정조의 효심을 떠올린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화성이 있는 수원은 ‘효의 도시’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그런데 201413차 길 위의 인문학 ‘과학의 성, 수원 화성을 다시 읽다’를 통해 만난 화성은 전혀 다른 일면을 갖고 있었다. 가을의 정취가 완연했던 10, 화성을 직접 걸으며 새로운 의미의 화성과 다시 만났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주관하는 13차 길 위의 인문학은 융릉(경기 화성시)과 수원 화성, 그리고 다산 정약용의 생가와 실학박물관(남양주)을 방문하는 꼼꼼한 일정으로 짜여 있었다. 이번 인문학 여정에 함께한 전문가는 김호 경인교대 교수이다. 그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헌경왕후 혜경궁 홍씨가 합장된 융릉에서 사도세자의 삶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민심을 살핀 균형잡힌 정조의 리더십에 대해 설명해줬다.

길 위의 인문학은 인문학과 여행이 만나는 체험형 캠페인으로 인문학 전문가와 함께 명소를 찾아 나서는 현장의 인문학 프로그램이다. 국립중앙도서관, 교보문고, 조선일보사가 공동 주최하며 올해 3월부터 11월까지 총 17회의 현장탐방이 준비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길 위의 인문학은 인문학과 여행이 만나는 체험형 프로그램으로, 인문학 전문가와 함께 명소를 찾아 나서는 현장의 인문학 프로그램이다. 국립중앙도서관, 교보문고, 조선일보사가 공동 주최하며 올해 3월부터 11월까지 총 17회의 현장탐방이 준비돼 있다.

융릉을 뒤로하고 수원화성에 당도한 일행은 북문인 장안문부터 동문인 창룡문에 이르는 도보 탐방길에 올랐다. 정조가 화성에 행차할 때면 서울에서 가까운 북문을 통해 화성에 들어섰다고 한다. 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 됐지만, 국방요새로 활용하고 백성을 배부르게 하려 농업, 상업 연구의 실험 무대로 계획된 신도시이기도 하다.

햇살이 눈부신 10, 화성은 이미 많은 나들이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화성을 따라 걸어가는 길, 지금의 도심과 200여 년 전의 화성 성곽은 아름답게 어우러져 있었다

13차 길위의 인문학 탐방은 초등학생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가자 40여 명으로 꾸려졌다. 사진은 융릉의 모습.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화성시로 이장하며 릉 남쪽에 여의주 모양의 흙무더기와 연못을 설치하고,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引石), 꽃새김한 대석(臺石), 장명등을 비롯해 병풍석과 와첨상석까지 설치하는 등 왕릉에 가깝게 계획했다.
13차 길위의 인문학 탐방은 초등학생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가자 40여 명으로 꾸려졌다. 사진은 융릉의 모습. 정조는 아버지의 묘를 화성시로 이장하며, 릉 남쪽에 여의주 모양의 흙무더기와 연못을 설치하고, 꽃봉오리 모양의 인석(引石), 꽃새김한 대석(臺石), 장명등을 비롯해 병풍석과 와첨상석까지 설치하는 등 왕릉에 가깝게 계획했다.
  
정조는 화성에 행차할 때 양로연을 열어 가난한 백성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수십 건의 민원을 해결했다고 한다. 정조는 ‘효’가 자신의 부모에게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 확장돼 이웃을 공경하고 ‘더불어 사는 삶’의 공공윤리로까지 확장되길 희구하며 이를 실천한 왕이었다.

민가를 허물지 않기 위해 설계를 변경하면서까지 화성을 축조하고 공역자들에게 인건비를 지불하는 한편, 무더위와 추위에는 공사를 일시 중지하기까지 했던 정조의 애민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화성 앞에 다다르자 공연히 숙연한 마음마저 들었다.

(사진 위) 화성에서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방화수류정의 전경. (사진 아래)화성 성곽이 현대의 도심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사진 위) 화성에서 특히 아름답기로 유명한 방화수류정의 전경. (사진 아래)화성 성곽이 현대의 도심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다.
    
학교에서 문화재 동아리를 꾸려 활동 중이라는 오가은 양과 손우영 양(18·서울시 광진구)교수님 설명을 듣고 화성과 정조에 대해 새롭게 알게돼 기쁘다. 문화재에 관심이 많아서 동아리를 만들었는데 앞으로 자주 우리 문화재를 직접 돌아보며 배우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오가은 양은 화성이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정약용이 축조한 화성을 직접 눈으로 보니 더욱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사진 위)화성은 조선의 전통방식과 중국에서 수입하여 정약용이 연구한 신 축조기법이 동시에 쓰였다. 좌로는 돌의 크기에 맞게 성을 축조한 모습이며 우측의 성곽은 벽돌을 구워 쌓은 신기법으로 축조되었다.(사진 아래) 화성행궁에서 정조는 행궁에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이웃을 위해 일한 이를 특별히 천거해서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 김호 교수는 “더불어 사는 삶”의 정치를 실천한 정조와 화성 건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조는 행궁에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이웃을 위해 일한 이를 특별히 천거해서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 김호 교수는 “더불어 사는 삶”의 정치를 실천한 정조와 화성 건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정조는 행궁에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이웃을 위해 일한 이를 특별히 천거해서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 김호 교수는 “더불어 사는 삶”의 정치를 실천한 정조와 화성 건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위)화성은 조선의 전통방식과 중국에서 수입해 정약용이 연구한 신 축조기법이 동시에 쓰였다. 좌로는 돌의 크기에 맞게 성을 축조한 모습이며 우측의 성곽은 벽돌을 구워 쌓은 신기법으로 축조됐다. (사진 아래) 화성행궁의 모습. 정조는 행궁에서 과거시험을 치렀는데 이웃을 위해 일한 이를 특별히 천거해서 관직을 주었다고 한다. 김호 교수는 ‘더불어 사는 삶’의 정치를 실천한 정조와 화성 건축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화성행궁까지 탐방을 마친 일행은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부지런히 걸은 뒤라 그런지 점심시간이 더욱 반가웠다. 큰 갈빗대 두 대가 담긴 갈비탕 점심식사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일행은 화성 성곽 전체를 돌아보진 못하고 아쉽게 발걸음을 재촉해 남양주의 정약용 생가로 향했다.

햇살이 길게 드리워진 오후, 일행은 여유당(與猶堂) 옆 아름드리 느티나무 아래에서 다산 정약용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정약용하면 생각나는 것?”이란 김호 교수의 질문에 어린 학생들은 앞다퉈 실학자”, “거중기”, “목민심서등 다양한 답변들을 쏟아냈다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에서 정약용의 정치 철학과 삶에 대해 김호 교수의 설명을 듣고 있다.
정약용의 생가 ‘여유당’에서 정약용의 정치 철학과 삶에 대한 김호 교수의 설명을 듣고 있다.

김호 교수는 “정약용이 조선 후기, 더 이상 인간의 선의와 본성을 믿고 다스리기는 어려워 이를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정조에게 강력히 주청했다.”며 학생들이 쉽고 재미있게 이해할 수 있게끔 봉이 김선달 설화를 통해 이를 설명해줬다.

여유당 뒤편의 낮은 언덕을 오르면 정약용의 묘를 직접 볼 수 있다. 화성을 돌아보고 온 터라 그런지 거의 2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다산 정약용과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의 감정은 쉬이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다산 정약용 묘
여유당 바로 뒤편 낮은 언덕을 오르면 다산 정약용의 묘를 볼 수 있다.
 
이날의 모든 탐방을 마치고 학생들은 여유당 앞마당에서 역사 퀴즈 맞추기에 참여했다. 정약용의 탄생연도를 맞춰 부상으로 문화상품권을 받은 조호현 군(18·서울시 광진구)정약용 생가와 화성에 정말 방문해보고 싶어 이번 탐방에 참여하게 됐어요. 한국사에 관심이 많아서 미리 책도 읽어보고 왔는데 책으로만 보던 내용들을 직접 눈으로 보니 와닿는 감정이 많다.”며 참여 소감을 밝혔다.

1925년 홍수로 소실되었던 정약용 생가를 1975년 복원하였다.  [노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수을 두려워 한다.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었다
1925년 홍수로 소실되었던 정약용 생가를 1975년 복원했다. 여유당은 ‘노자’의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수을 두려워 한다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 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서린(14·서울 돈암동)군은 이번 탐방을 통해 역사에 눈을 뜨게 된 기분이에요. 관심도 더욱 많아졌고요. 오늘 몰랐던 내용도 많이 배우고, 또 눈으로 직접 화성을 보니 더욱 아름다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탐방에선 장·노년층의 참여도 눈에 띄었는데 역사에 관심이 많은 만큼 실학박물관에선 날카로운 질문과 평들이 이어졌다.

(사진 위) 여유당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실학박물관 (사진 아래) 실학박물관 앞에 설치돼있는 거중기의 모습.
(사진 위) 여유당 바로 맞은 편에 자리한 실학박물관 (사진 아래) 실학박물관 앞에 설치돼있는 거중기의 모습.
 
남편과 함께 참여한 김숙경(서울 송파구) 씨이번이 세 번째 길 위의 인문학 참가예요. 조선시대 애민정치를 실천한 인물로 세종과 정조를 꼽고 싶어요. 세종과는 달리 시기적으로 어려울 때 왕이 된 정조의 왕도정치를 화성을 통해 보면서 혼자 와선 놓칠 수 있는 부분들을 교수님께 듣게 돼 더 유익했다.”고 참여 소감을 밝혔다. 더불어 그는 지리와 건축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런 측면에서도 화성에 대해 자세히 알고 싶었는데 다소 아쉬워서 다음에 이런 기회가 또 있었으면 참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조와 정약용의 발자취를 따라 융건릉과 화성, 여유당, 실학박물관까지 탐방을 마친 하루, 그 무엇보다 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던 이 두 인물을 통해 200년 전의 과거가 새롭게 다가왔다. 역사를 되살려 새롭게 조우한 이날, 탐방대는 각자가 아로새긴 역사를 품고 집으로 돌아갔다.

 

정책기자 진윤지(대학원생) ardentmithr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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