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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 믿음 속에 살아있는 불교

[인도에 관한 사실들 ③]

2007.05.30 주 인도 김승호 홍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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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1600여 년 전 인도로부터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 전래되어 우리의 문화와 사상, 생활전반에 큰 영향을 미친 종교이다. 이번 회에서는 불교의 발상지인 인도에서 불교가 흥기하게 된 동기, 인도사회에 미친 영향, 이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배경 등에 대해 살펴본다.

인도 사르나트의 물간다 쿠티(Mulgandha Kuti) 사원 안에 있는 부처님의 생애를 그린 벽화.(사진 이경훈)

흔적만 남아있는 불교 유적지

인도는 한국 불교신자들에게 인기 있는 성지 순례지이다. 네팔과 인접한 인도 북단지역의 부처님이 보리수나무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부다가야(Buddha Gaya), 최초로 설법을 한 바라나시 인근의 사르나트(Sarnath), 부처님이 80세에 열반한 쿠시나가르(Kushinagar) 등은 한국인 불교 성지 순례자들이 반드시 거쳐 가기를 원하는 코스다.

최근 인도 정부는 한국인 불교 성지 순례자들을 대거 유치하기 위해 델리와 이들 불교 유적지를 연결하는 특별 철도편을 운행하는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유적지에서 뭔가 그럴듯한 불교의 실체를 확인하겠다는 기대는 금물이다. 대부분 이교도의 손에 의해 파괴되었거나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 마모된 유적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경 발생한 불교는 12세기 이후 그 발상지인 인도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만다. 순례자들이 만나는 파괴되고 부서진 불교 유적지는 불교 부침(浮沈)의 역사를 쓸쓸히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불교가 정신세계를 강조하는 무욕의 종교임을 감안할 때 순례자들은 그 초라한 유적 속에서도 한때 부처님이 전파하고자 했던 진리의 말씀을 발견한다고 한다.

물간다 쿠티 사원에서 불공을 드리는 불교 순례자들.(사진 이경훈)

오래전 인도 땅에서 사라진 불교이지만 그 중요한 교리와 가르침은 인도 전통종교인 힌두이즘의 태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인도인들의 사고와 생활 속에도 남아 있다. 이는 아이러니 하게도 불교를 몰아내고 인도 제1의 종교로 자리 잡은 힌두교가 불교의 가르침을 상당수 수용한 데에 따른 것이다.

불교 융성 계기된 '칼링가' 전투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하여 융성하게 된 배경에는 불교만의 독특한 교리와 통치권자의 비호가 큰 역할을 했다. 우선 불교는 당시 전통 브라만교가 추구해오던 동물 희생제, 제식주의, 카스트라는 신분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 신흥사상은 당시 브라흐마니즘(힌두교의 전신)에 핍박받던 일반대중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여성의 승단(僧團) 가입을 허용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철저한 자기수양을 강조하여 교세를 확장해 오던 불교는 기원전 3세기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인 마우리야 왕조의 아쇼카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불교의 경전 속에서 가장 이상적인 전륜성왕(전 세계를 다스리는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되고 있는 아쇼카 왕이 불교에 귀의하게 된 계기는 칼링가 전투를 통해서였다.

사르나트의 다메크(Dhamekh, '진리를 본다'는 뜻) 불교 사원 유적지. 대부분의 인도 불교 유적은 이교도의 침입으로 파괴되거나 오랜 세월의 풍상에 부서져 흔적만 남아있다.

당시 마우리야 왕조는 인도 대부분의 지역을 관장하는 욱일승천의 기세에 있었다. 그러나 벵갈만의 일개 소국에 불과했던 칼링가 왕국은 마우리야 왕조의 권위를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무시하고 경멸하기조차 했다. 자신의 거대한 왕국이 작은 왕국으로부터 멸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에 분개한 아쇼카 왕은 내외의 상황이 안정된 기원전 261년 무자비하게 칼링가 왕국으로 쳐들어 갔다.

지금까지의 수모를 한꺼번에 다 갚으려는 듯 아쇼카 왕의 군대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살육 하였고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사람들이 흘린 피로 거대한 강물을 이루었다. 아쇼카 왕의 거센 분노와 복수심에서 야기된 이 일방적인 전투에서 10만명이 살해되고 15만명이 포로로 잡혔다고 한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처참한 시체더미와 죽어가는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한 아쇼카 왕은 정의, 진리, 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심각한 회의에 사로잡히게 된다.

칼링가 전투의 후유증에 따른 오랜 번민 끝에 아쇼카 왕은 힘에 의한 지배를 포기하고 법과 진리에 따른 정치를 펴기로 결심하고 불교에 귀의한다. 그는 불교의 전파를 위해 자신의 아들을 스리랑카에 보내는 한편 많은 포교사들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심지어 유럽에까지 파견했다. 또한 라주카라는 일종의 자치관리를 임명하고 불교의 교리에 입각하여 백성들의 법과 정의에 대한 문제를 심판하도록 하였다.

마우리야 왕조의 멸망에 이어 여러 왕조들이 세력다툼을 벌이는 가운데서도 불교의 교세는 튼튼히 유지되었으며, 기원후 2세기 인도 북부를 지배했던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 대에 다시 한번 그 위세를 떨치게 된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카니슈카 왕은 제4차 불경결집을 하고 대승 불교의 탄생에 기여했다. 그는 중앙아시아와 티베트, 그리고 중국으로 불교를 전파하고 거대한 불교 수도원과 탑을 건립하기도 했다.

불교의 쇠퇴에 정치적 메커니즘 작용

그러나 기원 후 4세기 등장한 굽타 왕조 대에 이르러 불교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불교라는 신흥사상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했던 당시 개혁적인 성향의 브라흐만 사제들은 그간의 폐단을 쇄신하는 노력을 경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반대중에게 보다 가깝게 다가서기 위해 여성뿐만 아니라 최하위계급인 수드라도 천상세계로 갈 수 있음을 역설했다.

다메크(Dhamekh) 사원 안에 유일하게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스투파(Stupa, 불탑). 한국인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또한 종래의 단순한 제식주의에서 벗어나 명상이나 요가를 통한 깨달음의 가능성도 적극적으로 수용해 나갔다. 즉 불교가 주장하는 현실적이고 자아중심적인 교리를 상당수 받아들인 것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종래의 지방어를 통한 가르침 대신 지성인들의 표준어인 산스크리트어를 사용하고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치중하는 등 점차 대중들의 호응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 굽타시대 지배자들의 왕권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과 브라흐만 사제들의 카스트 제도를 정착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합치되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 격동적인 시대상황 속에서 왕권의 절대화를 꾀하던 당시의 지배자들에게 만민평등이라는 불교적인 사고는 양립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굽타왕조는 왕권의 절대화를 위해 왕의 권위를 인정하는 종래의 브라흐마니즘을 받아들이게 되고 불교의 쇠퇴는 필연적이 되고 만다.

이후 브라흐마니즘은 보다 세속적인 색깔을 가지고 힌두이즘이라고 하는 인도 고유의 종교, 철학 사상을 발전 시켰다. 이 과정에서 브라흐만 사제들의 지위는 당연히 향상될 수밖에 없었으며 또한 카스트라는 계급제도 역시 인도사회 내에서 자연스럽게 정착되어 나갔다. 이후 카스트 제도는 오랜 세월 인도의 발전과 통합을 저해하는 아킬레스 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굽타 왕조이후 하르샤 왕조에서 불교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이후 이슬람의 본격적인 침입이 이어지면서 인도에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이 시기는 또한 16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건너간 신라의 혜초 스님이 남인도에서 온 밀교승 금강지(金剛智)의 제자가 되어 인도로 구법여행을 떠난 때이기도 하다. 온갖 험난한 여정을 거쳐 도착한 불교의 발원지 인도에서 혜초 스님은 실망스럽게도 불교의 쇠락해가는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이다.

힌두이즘 속에 남아있는 불교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비율은 전체인구의 0.7%인 800여만명에 불과하다. 힌두교(81.5%), 이슬람교(11.2%), 기독교(2.7%), 시크교(2.4%)에 이어 5번째의 위치에 있다. 이처럼 인도 땅에서 거의 사라지고 없는 불교이지만 그 사상과 철학은 인도 역사와 궤를 같이 하면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우선 불교는 불살생의 교리를 통해 인도인들의 동물을 대하는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불교가 본격적으로 인도에 보급되기 시작한 기원전 3세기경 비 아리아인들은 동물을 식용으로, 아리아인들은 종교상의 희생 제물로 사용했었다. 그러나 동물은 물론 살아있는 생명체의 보호를 역설한 부처의 가르침은 이러한 관습에 변화를 가져왔다.

비록 인도 브라흐만주의자들이 교세 부흥을 위한 현실적인 이유에서 받아들인 것이기는 해도 불상생의 교리는 동물을 보호하고 육식을 하지 않는 힌두교의 전통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영향으로 지금도 인도 어디를 가든 길거리를 배회하는 소, 개, 원숭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인도정부가 뉴델리의 대통령궁과 국회의사당을 제집 드나들듯 하고 있는 원숭이 떼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도 불교로부터 파생된 동물보호 전통의 유산이다.

불교는 또한 인도의 사상과 문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부처는 궁극의 깨달음인 열반은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수행해 스스로 달성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나아가 부처는 쓸데없는 믿음이나 미신보다 이성과 자기경험을 통한 논리적 사고를 중요시했다.

이러한 불교사상의 도전에 직면해 있던 굽타왕조 시대의 브라흐만 사제들은 종래의 형식적인 제식주의를 과감히 청산하고 슈라마니즘으로 대표되는 명상이나 요가를 통한 깨달음의 가능성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이후 힌두교로 발전한 브라흐마니즘이 보다 이성적인 경향을 띄는데 기여했고 인도의 전반적인 사상과 문화를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불교는 또한 여성과 수드라 계급에게도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당시의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신성한 베다를 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정도로 천대받던 그들에게 불교에의 귀의는 자신들이 낮은 위치에서 해방되는 길이기도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인도의 불가촉천민들이 카스트제도의 신분차별에 반발하여 종종 불교로 집단 개종하는 사태로 이어지곤 한다.

대부분의 인도인들은 인사할 때 '나마스테'(안녕하세요) 하면서 두 손을 공손히 모은다. 필자는 이 인사 예절도 불교의 합장 관습에서 영향 받은 것으로 본다. 인도 수도 뉴델리 중심가에는 인도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아쇼카 호텔'이 있다. 이 호텔의 이름도 불교문화를 융성시킨 마우리야 왕조 '아쇼카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주(註): 본 기사 작성에 김형준 저 '이야기 인도사'(2005년 청아출판사)가 많은 도움이 되었음을 참고로 밝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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