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전자정부 누리집 로고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콘텐츠 영역

안개 낀 숲속 그윽한 향 기억나시죠

[한국의 꽃과 나무] 피나무

2014.02.20 위클리공감
글자크기 설정
인쇄 목록

이전에 뽕나무에 대한 칼럼을 쓸 때 <나무 노래>라는 것을 잠시 언급했는데 말이죠. 이 자리에서 다시 한 번 더 인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 글의 주인공 피나무 때문입니다.

“십리 절반 오리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입맞춘다 쪽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칼로 베어서 피가 나는 나무’라는 표현이 재미있긴 하지만, 실은 피나무의 ‘피’는 껍질 피(皮)의 의미로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플라스틱이나 비닐 제품에 밀려나 시나브로 자취를 감추었지만, 질긴 섬유질로 이루어진 피나무의 속껍질은 옛날에는 노끈, 망태기, 삿자리 등을 만드는 데 아주 요긴하게 사용했다고 합니다.

사람의 성씨에도 피(皮) 씨가 있어요. 한국에서는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유명합니다만, 역사와 문화 속에 피나무의 정서가 뿌리 깊은 서양에는 피씨(氏) 성(Lind, 皮라는 의미와 같음)을 가진 유명 인사들이 꽤 많이 있답니다. 린제이(Lindsey), 린드버그(Lindberg), 린델(Lindel), 리핀스키(Lipinski) 같은 이름들은 모두 피나무와 연관이 있는 이름들입니다. 사람 이름만이 아닙니다. 독일의 도시 라이프 치히(Leipzig)는 ‘피나무들이 있는 정착지’라는 의미이며, 또한 독일의 라인란트지방에서 새 포도주를 수확할 때 개최하는 린덴훼스트(Lindenfest)는 ’피나무 축제‘라는 뜻입니다. 이 축제는 오래된 피나무 아래에서 개최된다고 해요.

또 리투아니아에서 흔한 성씨인 리파(Liepa)는 7월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피나무의 개화기가 7월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독일의 수도 베를린 도심에도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이라는 유명한 거리가 있는데 이것 역시 피나무가 많은 지역임을 시사합니다.

이 정도는 그저 몇 가지 사례에 불과할 뿐이랍니다. 유럽에서 피나무와 연관이 있는 명칭들을 찾고자 한다면 그 사례는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어요. 한국인들이 소나무에서 깊은 정서적인 유대감을 느낀다고 한다면, 전통적으로 유럽인들은 피나무에서 깊은 애정을 느껴왔기 때문이죠. 단순히 외형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피나무는 실생활에서도 사람들에게 많은 것들을 베풀어줍니다. 무늬가 아름다운 목재는 조각·가구재로 사용되고, 피나무 꿀은 향기와 약성이 뛰어나 인기가 좋습니다. 또한 앞에서 말했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플라스틱이나 비닐이 실생활에 들어오기 전에는 질기고 낭창낭창한 피나무의 속껍질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지요.

예전에는 질기고 낭창낭창한 피나무 속껍질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예전에는 질기고 낭창낭창한 피나무 속껍질로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었다.

물론 제가 여기에서 피나무라고 한 것은 동·서양을 구분하지 않고 피나무류 전체를 통칭한 것입니다. 문헌을 찾아보면 한반도에 자생한다는 다양한 종류의 피나무 이름들이 나오지만 아무래도 ‘피나무’, ‘찰피나무’, ‘보리자나무’(중국에서 도입) 정도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피나무류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사는 이 땅에도 오래 전부터 아름다운 피나무(류)들이 자라고 있는데 실용적인 정보를 제외하고는 옛 문헌 속에서 피나무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배비장전>에 피나무 뒤주 이야기가 잠깐 나오고, ‘국수 못하는 년이 피나무 안반만 나무란다’는 속담 정도가 눈에 띄네요.

하지만 그저 실용성만 놓고 따져서는 피나무를 온전히 다 이해했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장맛비 내리는 날, 안개에 싸인 피나무 숲속에 홀로 서서 그윽한 꽃향기를 맡을 수 있다면 무슨 생각을 떠올리게 될까요? 하트 모양의 피나무 이파리를 쓰다듬고 있노라면 아득한 옛사랑이라도 추억하게 되지 않을까요? 오래된 러시아의 가요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참된 사랑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리 / 내가 그대에게 남긴 사랑은 / 밤이든 낮이든 언제든 돌아오리라 / 사랑은 피나무 잎처럼 / 부드럽고 신선한 초록빛으로’

글과 사진·김태영(자연생태연구가·<한국의 나무> 공저자)

[위클리공감]

이전다음기사 영역

하단 배너 영역

지금 이 뉴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