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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

마지막 조선어 수업

[기고] 정재환(한글문화연대 부대표 · 방송사회자)

2005.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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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인 정재환.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소설이 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배운 작품 가운데 드물게 잊히지 않는 작품 중 하나이다.

선생님은 교단에 올라서서 "여러분, 오늘은 나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베를린으로부터의 명령으로 내일부터는 알자스와 로렌의 학교에서는 독일말로만 가르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굳센 말이라는 프랑스 말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비통한 선언이었다. 애석하게도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프러시아군의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선생님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선생님은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썼다.

이 소설을 읽고는 가슴이 뭉클했다. 마음이 아팠다. 남의 나라 얘기지만 더 이상 자기 나라말을 가르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비통함과 절망감, 프랑스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이 내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읽은 거의 모든 이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그와 똑같은 비극이 있었다. 불과 67년 전 일이다.

일본어 수업시간.


일제의 식민통치는 지독했으며 잔인했다. 특이했다. 나라를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 조선민족을 말살하려 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 이후 일제는 황국신민화교육에 박차를 가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국어(일본어-당시는 일본어가 국어였다)를 더욱 널리 보급하기 위해 급기야 조선어교육을 금지시켰다.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당시 조선어를 가르치시던 어떤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을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저의 마지막 조선어 수업입니다. 앞으로는 조선 땅에서 더 이상 조선어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의 슬픔이었고 조선어의 위기였다.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허망한 구호를 외치며 ‘일시동인’이라는 감언으로 조선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조선어를 말살하려 한 것이다. 1942년에는 국민총력운동의 일환으로 ‘국어 상용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전 조선인에 대해 일본어 상용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나라 잃은 조선의 백성들은 말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말은 그들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었다. 언어의 소멸은 곧 민족의 소멸이라는 인식 아래 그들은 일제의 압박과 탄압 속에서도 조선어를 지켜나갔다.

1930년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조선어 연구와 조선어에 대한 관심은 곧 조선어와 민족 수호운동으로 이어졌으나, 그 와중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졌다. 1942년의 함흥학생사건을 조작한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체포하여, 조선어의 정리ㆍ통일ㆍ보급을 도모하는 어문운동이 곧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한 민족독립 운동의 점진적인 형태라는 구실로 실형을 선고하고 옥에 가두었다. 일경의 모진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다가 이윤재 선생과 한 징 선생은 끝내 세상을 떠나셨다. 조선어 말살을 기도한 일제의 만행이었다.

일제는1942년 국민총력운동의 일환으로 ‘국어 상용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전 조선인에 대해 일본어 상용을 강요했다.


다행히도 1945년 조선은 광복을 맞았고. 조선의 말과 글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35년 동안 일제가 남긴 상처는 의외로 깊었다. 1943년 불과 22%밖에 보급되지 않았던 일본어였지만 일본어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더 이상 일본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자주 일본말이 튀어 나왔다.

관객들은 극장 앞에서 나래비를 섰고 승객들은 붐비는 전차 안에서 쓰리를 맞기도 했으며 학생들은 벤또를 쌌고, 여인들은 미용실에서 고데로 머리를 지졌으며 남자들은 공사판에 나가 노가다를 뛰었다. 이런 말들은 우리 삶 구석구석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영화판, 인쇄소 같은 곳에서는 일본말이 전문용어 행세를 하기도 했다. ‘노예의 씨’라는 최현배 선생의 지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국어학자들과 민족정신을 잃지 않은 국민들이 있어 점차 우리말이 순화되었다.


일본어 교본.
글쓴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많이 쓰던 빠께스, 쓰메끼리, 다마네기, 닌징, 다꾸앙, 요깡, 와리바시, 자부동, 덴뿌라, 고바이 등은 어느 틈엔가 자취를 감췄다. 무의식중에 툭툭 튀어나왔지만 노력하니 불가능하지 않았다. 요즘 청소년들은 ‘요깡’이나 ‘닌징’ 같은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애쓴 결과 일본말 찌꺼기가 많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강의실에서 만난 어떤 일본인 선생은 ‘잇빠이’가 원래 한국말이냐고 물었다. 농담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잇빠이’뿐만 아니라 ‘나시’ 입고 ‘후까시’ 주고 ‘가오’를 세워 달라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아주 많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이 말도 일제 때 우리 삶 속에 스며든 것 아닐까? 본디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없지 않았는가! 그래서 난 되도록 이 속담의 사용을 피하려 노력하고 있다. 말이란 버릇이나 습관처럼 몸에 배는 속성이 있지만 관심을 갖고 노력하면 일본말찌꺼기를 걷어내고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광복 60년이 된다. 일본은 패전 60년이다. 그런데 글쓴이가 보기에 일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결여하고 있는 일본은 역사마저 왜곡한다. 침략전쟁도 부인하고 남경에서의 학살이나 군대위안부도 부인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교과서에까지 기록한다. 한순간 분노하고 화만 내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내 안의 일제잔재부터 지우는 것 아닐까?

◎정재환: 현재 한글문화연대 부대표와 방송사회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9년에 '자장면이 맞아요, 잠봉은?'을, 2000년에 '우리말은 우리의 밥이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은 받아쓰기 중'을 펴냈다. 1999년에 제1회 KBS 바른언어상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에서 주는 푸른미디어 좋은언어상을 받았고, 2000년 10월에는 한글학회로부터 우리말글 지킴이에 위촉됐다. 2003년 2월에는 성균관대 인문학부를 수석졸업했으며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상 대통령상도 수상하였고, 현재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를 공부하는 사학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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