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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60년, 새로운 시작

[한국인의 삶을 바꾼 것들 ①] 수출

“우리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김→가발→합판→철강→조선→반도체·휴대전화

2005.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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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60년을 맞았다. 그동안 끊임없는 아픔과 시련을 딛고 일어선 우리 민족. 60년 성상(星霜) 동안 산업화·민주화를 이룬 우리는 21세기 들어 마침내 세계 중심국가로 자리잡으며 선진국과 어깨를 견주어 나가고 있다. <코리아 플러스>는 광복 60주년을 맞아 질곡의 현대사를 헤쳐 나온 한국인들의 의식과 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은 ‘대사건’들을 반추해 본다.


김·가발·철강·조선·자동차·반도체 등은 60년대이후 우리 수출을 이끌어온 주력 제품들이다. 이를 기반으로 21세기 들어 한국은 IT강국으로 부상했다.


지난해 10월 대한민국의 수출 2,000억 달러 달성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 감격적인 날, 한 경제계 인사는 “우리는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만하다. 우리 국민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1964년 1억 달러 수출고를 달성한 이래 꼭 40년 만에 2,000배 증가한 것은 유례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수출의 역사는 경이의 역사였지만 그 쾌속항진은 올해도 내년에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수출 규모 세계 순위는 1964년 기준 83위에서 10위권으로 껑충 뛰었다. 수출 대상국은 41개국에서 229개국으로 늘었다. 무역업체 수도 600여 개에서 9만5,000여 개로 160배 증가했으며 연평균 수출신장률은 21.3%로 나타나 20대 수출국 가운데 가장 높은 신장률을 기록했다. 드라마와 같은 성장을 거듭한 것이다. 우리의 무역액은 남미국가의 무역액을 모두 합한 것보다 많다는 통계도 있다.

그러나 모든 영광의 역사 배후에는 역경과 고난이 있다. 해방 직후 무역 실적은 참담했다. 일본 산업계와의 단절은 상품시장의 손실, 남북한 산업의존관계의 단절 등을 불러왔고, 이로 인해 수출 산업은 전멸 상태였다.


우리나라 무역액, 남미국가 총액보다 많아


1946년 수출은 불과 350만 달러였고 47년, 48년에는 전통적인 농산물 수출로 2,000만 달러대를 각각 기록하다 49년에는 세계적인 경기 후퇴로 1,000만 달러대로 감소했으며 50년 한국전쟁 이후에는 그나마도 힘든 지경이었다. 53년 텅스텐 등 전략적 광물에 대한 수요가 증대해 수출이 3,900만 달러로 다시 급증했지만 50년대 내내 우리의 수출은 매년 2,000만 달러대에 머물렀다.

한국 수출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쓴 것은 1960년대부터였다. 당시 박정희 정부가 내세웠던 ‘경제개발을 통한 빈곤 퇴치’ 정책이 시작되면서부터다. 많은 가치들이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 매몰되기도 했지만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60년대 수출 증가는 연평균 40%에 육박하는 초고속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쓰레기통에 장미가 피었다’는 서구 언론의 말이 여기서 나왔다.

1970년대는 수출진흥의 필요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중대한 산업구조의 개편이 이뤄졌다.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이에 따른 수출품목의 급속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72년부터 76년까지 진행된 3차 5개년계획 당시의 수출증가율은 48.5%로 화려한 성장을 거듭했지만 근로자 계층의 피와 땀과 눈물은 그 화려함 속에 묻혔다. 폭압은 고통스러웠지만 규율과 능률을 낳았고, 능률은 경제적 부를, 경제적 부는 다시 경제력의 격차를 유발했다.

어쨌든 1970년대는 수출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여겨졌던 시대였다. 당초 목표치 24.3%의 거의 2배의 수출증가를 달성하면서 70년대 당시 정권이 제시한 신기루, 100억 달러 수출 목표는 3년이나 앞당겨 달성됐다.

1980년대는 개방화의 시대로 규정지을 수 있다. 이른바 ‘3저(低) 효과’에 힘입은 장기 호황과 수출 증대가 지속됐고, 이는 군사정권의 일각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아이러니로 작용했다. ‘봐라! 잘 풀리고 있지 않으냐’는 정권의 호언장담이 불안한 시국을 무마하는 당의정(糖衣錠) 역할을 했다.

1980년대 한국 무역의 성과는 86년에 기록한 역사상 최초의 무역 흑자였다. 31억 달러의 무역 흑자는 아시안 게임, 올림픽 유치와 맞물려 한국 중산층의 활력과 자신감 제고의 계기가 됐다.
하지만 1990년대는 한국 수출의 시련기였다. 저임금을 베이스로 한 수출 드라이브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강력한 연대와 항의에 직면해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글로벌한 시장경제 체제가 가속화되면서 해외에서 직접 생산활동을 전개할 자본재 수출 방향으로 일대 전환이 이뤄졌다. 중국에 대한 직접 투자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도 90년대 이후부터다. 1997년에 찾아온 외환위기로 인해 구조개혁이라는 날카로운 메스가 환부를 절개했다. 2000년부터 이전 단계로의 회복이 시작됐고 무역수지도 1998년 390억 달러 흑자를 기록, 이후 7년째 흑자 행진을 이어오고 있다.

IMF 외환위기 이후부터 수출상품 구성에서 반도체·컴퓨터 등 소위 고부가가치 정보기술(IT) 관련 제품의 비중이 현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출대상국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겼다. 그동안 수출 1위 지역이었던 미국이 중국에게 자리를 내주는 이변이 나타났다.


세계 8대 무역대국 진입 목표


2000년대 수출 산업의 리더는 반도체다. 작년 200억 달러를 돌파해 총 수출액의 10%를 차지했다. 휴대전화 등 무선통신 기기도 효자 종목 중 하나다. 반도체에 거의 필적하는 성과로 수출 제2위 품목으로 성장했다. 자동차·컴퓨터·선박도 모두 100억 달러가 넘는 수출로 저력을 과시했고 석유제품·철강판·합성수지·영상기기 등도 많게는 매년 50% 이상의 수출 신장세를 유지하며 한국 10대 수출 품목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의 노력과 꿈은 계속된다. 이제 세계 8대 무역대국으로 나아간다는 게 정부가 세운 비전이다. 올해 산업자원부의 업무계획에서는 2008년 4,000억 달러 수출목표를 잡고 있을 정도다.
정부는 이를 위해 ▷경제성장률 5% 유지 ▷물가상승률 3% ▷환율 2% 절상 ▷인구증가율 0.5% 등 ‘선진한국’ 목표를 위해 전력투구할 계획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과제도 산적해 있다. 특정품목에 대한 수출의존도를 완화하고 일류상품의 지속적인 개발 노력이 필요하다. 지식서비스 수출의 확대가 과제로 대두하고 있으며, 자유무역협정 체결 확대 등의 문제가 통상외교의 현안이다. 나아가 수출을 국민의 평균적인 삶의 질을 높이고 환경을 보존하며 지구촌 전체의 번영과 평화를 위한 모멘텀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궁극적인 이상(理想)이 있다.     
                
(자료제공:코리아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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