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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6]고구려 붕괴 후 그 유민의 거취문제

김현숙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200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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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사에 속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이는 統一的 多民族國家인 중국이 안고 있는 현실문제를 고려한 역사정리 작업이다. 고구려사의 중국 귀속을 주장하는 근거 가운데 하나는 멸망 후 그 주민의 상당수가 漢族으로 흡수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망국민이 된 고구려사람들의 삶을 추적해보면, 중국학계의 주장이 牽强附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68년 평양성이 함락된 후에도 고구려 땅에서는 항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唐은 유민 지배를 두 방향으로 나누어 실시했다. 하나는 徙民策으로 고구려인을 집단적으로 본토로 옮긴 후 왕족과 親唐派 귀족 등 일부만 수도에 안치하고, 나머지 대다수의 유민들은 변경 여러 주의 빈터에 분산, 배치했다. 다른 하나는 기미주로 편제하는 것으로 고구려 땅을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편제하고, 그 총괄기구로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이런 唐의 지배에 대해 고구려 유민들은 집단이주와 무력항쟁으로 격렬히 저항했다. 그러자 唐은 보장왕을 조선왕에 봉한 뒤 요동으로 돌려보내 지역민들을 무마하게 했다. 그러나 요동으로 온 보장왕은 말갈족과 공모해 復國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邛州로 유배되었다. 고구려유민들은 다시 河南道와 隴右道 방면으로 끌려갔다. 이로 인해 고구려고토에는 가난하고 약한 자들만 남게 되었는데, 말갈, 돌궐 등지로 옮겨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뒤 696년에 거란인 이진충의 반란을 기화로 營州에 있던 고구려유민들이 집단 탈출하여 고구려 옛 땅인 동모산(지금의 돈화)에 이르러 발해를 세웠다. 발해는 고구려민이었던 말갈족과 고구려족이 결집하여 건국했으므로, 국초부터 고구려의 계승국임을 자처했다.

한편, 멸망을 전후해 신라지역으로 간 고구려인들도 많았다. 淵淨土가 거느리고 간 12개 성읍 763호, 3543인, 문무왕 8년(668)에 귀부한 大谷, 漢城 등 2郡 城의 민들, 安勝이 이끌고 간 4천여 호, 검모잠이 주도한 고구려 부흥운동이 좌절된 후 그에 참여했던 사람들, 羅唐 전쟁에서의 승리 이후 신라로 편입된 浿西 지역 사람들, 그리고 문무왕이 포로로 잡아온 7천명 등이 그들이다. 신라에서는 이들을 金馬渚(지금의 익산)로 옮기고, 670년 8월에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금마저 고구려국에서는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하며 고구려 부흥을 도모했다.

그러나 신라 영토 안에 건국된 고구려는 자주권에 한계가 있었다. 신라는 674년 9월에 안승을 보덕왕에 봉하였다. 이는 ‘고구려왕’이란 칭호 자체를 부정하여 고구려 계승의식을 제거하려는 조치였다. 또 680년 3월에는 안승과 王妹를 혼인시켰고, 683년 10월에는 안승에게 蘇判의 관등과 김씨 성을 주면서 京都에 머물게 했다. 이는 안승을 왕이 아닌 신라 왕의 신하로 만드는 조치였다. 이에 보덕국민들은 무력항쟁을 벌였지만 곧 진압되었다.

이와 같이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의 행방을 추적해보면, 고구려 유민 가운데 많은 수가 중국인으로 흡수된 것은 사실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를 근거로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귀속된다고 하는 논리가 타당할까? 고구려유민들의 거취와 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논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첫째, 그들이 자의적으로 자신의 거취를 결정했는가 하는 점이다. 唐은 고구려인이 강인한 정신력과 탁월한 군사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패망하더라도 다시 모여 부흥운동을 벌일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그 가능성을 근절하기 위해 고구려땅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으로 고구려인들을 강제로 사민했다. 이들은 고국과의 접촉가능성이 차단되었으므로 부흥을 도모할 수 없었다. 반면 신라나 발해, 일본, 돌궐로 간 사람들은 전쟁포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스스로 자신의 거취를 정했다.

둘째, 고구려유민들의 자의식이라는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으로 간 사람들 가운데 遠地에 강제로 옮겨진 사람들은 살기 위해 중국사회에 적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망국민이 처한 어쩔 수 없는 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와 달리 중국에서 고위직에 올라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들도 고구려 멸망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까지도 고구려인으로서의 자의식과 정체성을 보존하고 있었다.

발해를 건국한 사람들이나 신라로 가서 보덕국을 세운 사람들은 고구려인으로서의 자의식을 더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인들이 자국을 멸망시킨 신라로 자진귀부했던 것은 곧 唐보다는 신라에 더 친연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와 신라는 4세기 중반부터 긴밀한 관계를 맺어왔다. 양국의 관계는 광개토왕비에 표현되어 있는 고구려의 천하관에도 잘 나타나 있다. 4세기말 5세기초에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는 臣民, 동부여와 숙신은 屬民으로서 모두 광개토왕이 다스리는 천하 안에 들어있는 대상으로 생각했다. 고구려와 신라는 5세기 말 이후 정치적으로 결별했지만 문화적인 면이나 사회적인 면에서는 계속 영향을 주고받았다. 멸망을 전후한 시기에 많은 수의 고구려인들이 唐이나 다른 제3국 대신 신라를 선택한 것은 지리적인 근접성 때문만이 아니라, 역사적 경험과 문화의 공유에 의거한 친연성 때문이었다.

셋째, 고구려유민에 대한 지배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할 때 계승문제를 의식하고 있었는가 하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唐에서는 고구려유민들을 전쟁포로로 인식했으므로 그에 대한 지배도 복속민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시행했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삼국 통합이라는 측면을 염두에 두면서 지배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넷째, 고구려 계승의식이 단지 인식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었는지 여부에 더 비중을 두고 살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여 一統三韓을 이룩했음을 강조한 통일신라나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국초부터 강조했던 발해의 역사를 중시해야 한다. 또 고구려 부흥을 주창하며 일어난 고려와, 멸망 후 고려로 들어온 발해유민의 존재를 주목해야 한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고구려 계승의식이 한국사의 전개과정 속에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기고:김현숙(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책임연구원)

제공:해외홍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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