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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주년…나라 위한 희생 잊지 않겠습니다

[6·25 결정적 전투들] ① 춘천지구전투

국군 개전 초기 첫 승리…북 수도권 포위기도 봉쇄

2010.06.07 제공=국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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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60주년을 맞아 국군의 활약상과 전쟁의 전체 흐름을 장병들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6·25전쟁의 결정적 전투들’을 총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전쟁사 연구의 중심기관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와 국방일보의 공동 기획으로 마련한 이번 특집기획에서는 다부동전투, 인천상륙작전 등 6·25전쟁의 큰 흐름을 좌우한 결정적인 전투와 함께 해군·공군의 주요 전투, 유격전의 주요 사례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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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6사단이 춘천전투를 통해 북한군의 수도권 포위 기도를 분쇄하는 데는 포병의 기여도 컸다. 사진은 1950년대 M2 105㎜ 곡사포의 사격 훈련 장면. 6·25 개전 초반에는 이보다 더 화력이 떨어지는 M3 105㎜를 주로 사용했다. 국방일보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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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은 춘천 전투 때 Su-76 자주포를 투입하는 등 아군보다 우월한 화력을 자랑했으나 국군의 선전에 밀려 수도권 포위에 실패했다. 사진은 6·25전쟁 당시 아군에게 파괴된 북한군의 Su-76 자주포.
 
국군과 유엔군의 총공세에 청천강을 넘어 한-중 국경 부근까지 후퇴한 김성을 비롯한 북한 지도부는 1950년 12월 21일부터 23일까지 만포 인근의 별오리에서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북한군 작전 수행의 문제점을 자인할 수밖에 없었다.

“적들의 유생역량을 소멸하는 것이 군사 승리의 최우선임을 망각하고 적들을 분산 혹은 도망치게 했다. 그 결과, 적들에게 시간적인 여유를 줘 다시 부대를 수습해 반격할 가능성을 줬다.”

■ 북한 2군단의 계획

별오리 회의에서 김일성이 지적한 국군에 대한 퇴로차단 임무는 북한군 2군단의 몫이었다. 6·25전쟁을 계획한 북한군 지휘부는 김일성의 방침에 따라 군단 및 사단급 공격부대의 기동계획을 수립했다. 여기에는 주공인 북한 1군단을 개성-문산과 동두천-포천 방면에 투입해 38도선을 돌파한 후 서울을 점령하고, 조공인 북한 2군단을 화천-춘천 및 인제-홍천 방면에 투입해 춘천과 홍천을 각각 점령한 후 서울 동남쪽과 수원 방향으로 우회 기동하도록 명시돼 있었다.

북한군 2군단 중 춘천 방면에 대한 공격은 2사단이 맡고 있었다. 이청송(李靑松) 소장이 지휘하는 제2사단은 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에 실시한 북한군 자체검열에서 최우수부대로 선정될 정도로 전투력을 인정받고 있는 사단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공격 당일 춘천을 점령한 후 가평으로 진출하고, 다음날 경춘가도를 따라 진격해 덕소에서 한강을 도하한 후 서울 동남쪽으로 진출하는 임무가 부여됐다. 이는 서울 동남쪽에서 국군의 예비전력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면서 그들의 주력인 북한 1군단의 좌측방을 엄호한다는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 국군 6사단의 상황

한편 1949년에 청주에서 원주로 이동해 사령부를 설치한 국군 제6사단은 사단장 김종오(鍾五) 대령의 지휘 하에 현리에서 가평에 이르는 84㎞의 넓은 정면의 경비를 맡고 있었다. 이 중에서도 춘천과 가평지역은 임부택(林富澤) 중령의 제7연대가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제7연대는 1949년 2월 20일 청주에서 원주로 이동해 2개월간의 교육을 마치고 5월 3일 춘천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제8연대로부터 책임지역을 인수받고 3개월 뒤인 8월 6일에는 신남을 침공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을 포착 섬멸하는 경험을 쌓기도 했다.

그러나 연대는 넓은 방어정면을 담당하고 있어 중요 지형과 적의 예상접근로에만 병력을 배치하고, 나머지 지역에는 작전지역 내에서 동원된 대한청년단원을 배치해 군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의 경계와 조기경보임무를 부여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 6사단의 방어개념은 춘천에 중점을 두고 적이 공격하면, 이를 진지 전방에서 격파해 38도선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적의 주공이 화천-춘천 접근로로 지향할 것으로 판단한 국군 6사단은 포병화력을 춘천에 배치해 집중 운용했다. 화천-춘천 간을 방어하고 있던 제7연대는 방어지역에 철근 콘크리트로 된 대전차진지를 구축하고, 38도선에서 춘천까지의 거리가 13㎞에 불과한 점을 감안해 진지 구축에 주력했다.

그러나 육본의 재정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던 연대는 사단 공병중대와 춘천시민 및 학생의 도움을 받아 전쟁발발 한 달 전인 5월 하순에 공사를 끝마칠 수 있었다. 이 무렵 6사단의 화기와 장비 수준은 정면의 북한군 제2군단과는 양과 질적인 면에서 모두 열세에 있었고, 적은 아군이 보유하지 못한 최신형의 대구경 곡사포는 물론 자주포까지 갖고 있었다.

1950년 6월로 접어들어 38도선 일대에는 전운이 감돌면서 긴장감이 고조돼 갔다. 제6사단 제7연대가 담당하고 있는 춘천 정면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적은 포진지 구축작업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포를 전선으로 추진 방렬하고, 병력을 수용하기 위한 천막을 증설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도를 펼쳐들고 남쪽을 향해 무언가를 설명하는 북한군 군관의 모습이 종종 관측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제7연대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해 주는 북한군 병사가 귀순해 “전차 40대와 함께 야간행군으로 화천에 도착해 많은 병력과 포가 집결해 있는 것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30여 명의 수색대를 잠입시켜 귀순병의 진술을 확인한 연대장은 사단장에게 적정을 보고하고 심야 작전회의를 열어 대책을 숙의했다. 그리고 적의 공격 징후가 농후하므로 사태에 적극 대처할 것을 예하에 지시했다.

■ 북한군 2사단 공격개시

1950년 6월 25일 새벽, 국군 6사단의 좌전방을 담당하고 있는 7연대 경계지역에 북한군 2사단은 공격을 개시했다. 적은 화천-신포리-춘천 축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있었다. 강력한 포병의 공격준비사격으로 시작된 적의 포격은 38도선을 따라 경계진지가 구축된 인람리 및 지암리 일대에 집중됐다. 약 1시간에 걸친 공격준비사격이 끝나고 북한군 제2사단의 주공연대인 제6연대가 국군 제3대대 제9중대의 정면인 마평-상송암 선으로 SU-76 자주포와 함께 연대 규모의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그러나 아군은 험악한 산악지의 중요 지역에만 경계병 수준의 병력만을 배치함으로써 대규모 병력으로 침공해 온 적을 격퇴할 수 없었다. 적의 포격으로 전사한 중대장을 대신해 제9중대 선임장교가 적의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했으나, 결국 진지가 돌파됐다. 각종 포의 지원 아래 점점 병력이 증원된 적은 5번 도로를 따라 내려와 선두가 용산리까지 도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9중대는 방어선에서 철수해 우두산을 거쳐 소양강 남안의 지내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또한 조공연대인 제4연대는 국군 제7연대 제2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추전리 및 부용산 좌측 계곡과 발산리의 소로를 따라 공격을 가해 왔다. 고립된 상황에서 힘겹게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있던 2대대도 결국 진지가 돌파돼 지내리와 우두산으로 철수했다.

한편 강력한 북한군의 포격이 개시됐다는 급보를 받은 7연대장은 비상을 발령해 영외거주 장병을 소집했다. 이때 원주의 사단사령부에서 북한군의 전면공격이 개시됐다는 보고를 받은 사단장은 19연대의 출동명령을 하달하고 춘천으로 직행했다.

연대 예비로 춘천역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1대대는 비상 발령에 앞서 영외거주 장병들이 연병장에 집결하고 있었다. 전방의 상황이 평소와 다르다고 판단한 대대장 김용배 소령이 자체 소집망을 통해 소집명령을 하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대대의 많은 병사들은 상부의 지시로 외박을 나간 상태였다. 일부 병사들은 연대의 가두방송을 통해 전쟁발발 사실을 알고 귀대했고, 나머지는 소양강 북안의 방어진지로 직행했다. 8시 20분쯤 1대대는 소양강 건너 128고지로부터 164고지에 이르는 선 일대에 진지를 점령하고 전투태세에 돌입했다.

한편 교육에 참석한 연대장을 대신해 부연대장이 직무를 대행하고 있던 19연대는 3대대를 선발대로 편성해 영월광업소에서 징발한 차량 등을 이용해 출동시켰다. 그리고 기차편으로 원주역을 출발한 1대대와 2대대는 청량리를 경유해 춘천으로 향했다. 오후 8시쯤 춘천에 도착한 3대대는 밤 11시에 북한강 서안의 금산리에 병력을 배치해 화천 방향에서 남하하는 적을 저지했다. 강력한 공격으로 경계진지를 돌파한 적은 자주포를 선두로 5번 도로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이때 S자형 굴곡지점에 대전차포를 방렬하고 있던 아군이 적의 자주포에 대전차포를 명중시켰으나, 적의 자주포는 별다른 충격이 없는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에 연대 대전차포중대는 포를 거둬 옥산포로 철수했다.

■ 국군, 잇따른 승리

이날 정오쯤 적의 주력이 옥산포를 지나 넓은 보리밭에 나타나자, 1대대는 보ㆍ포 협동으로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불시에 협격을 받은 적은 대혼란 속에 많은 시체를 남기고 도주했고, 1대대는 지내리 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쪽으로 퇴각했던 적은 다시 자주포를 앞세우고 옥산포로 진격해 왔다.

이때 대전차포중대 2소대는 적의 자주포가 가까이 접근하자 포격으로 2대를 격파했고, 이로 인해 적은 다시 서원 방면으로 모습을 감췄다.

한편 소양강 도하에 실패한 적은 오후 6시쯤 17연대를 투입해 도하를 시도했다. 이를 간파한 대대장은 오후 7시를 기해 선공에 들어갔다.

그러나 북한군 또한 많은 인명손실을 입었던 화천-춘천 간 도로 대신 가래모기의 보리밭을 따라 공격을 실시했다. 하지만 몸 하나 숨길 곳 없는 개활지로 몰려든 적은 증강된 대대의 모든 중화기와 개인화기의 목표물이 됐다. 아군 포병도 보병과 함께 협동공격을 가해 적을 거의 궤멸상태로 몰고 갔다. 대대가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자, 적의 일부는 북한강물에 빠져 죽었고 도망친 자는 일부에 지나지 않아 벌판에는 적의 시체가 가득했다.

전날 야간에 실시한 1대대의 반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북한군은 다음날 옥산포 일대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19연대 2대대가 우두산 일대에 방어진지를 점령하자, 7연대장은 옥산포의 적을 공격하도록 1대대장에 지시했다. 1대대는 포병의 지원사격과 19연대 2대대의 측방 엄호사격을 받으며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준비에 골몰하고 있던 적은 기습공격을 받고 역골 방면으로 도주했다.

오후1시께 1대대 진지와 우두산 일대에 강력한 포격을 가하던 적은 자주포를 앞세우고 다시 공격을 가해왔고, 제1대대는 약 1시간 동안 치열한 교전을 펼쳤다. 이때 봉의산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사단장은 여러 정황상 적의 공세이전이 임박했음을 감지하고 사단 주력을 집중적으로 운용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6월 26일 오후 3시를 기해 7연대와 19연대를 소양강 남안으로 철수시켜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명령했다.

■ 소양강 남안 방어전

164고지로 복귀한 2대대는 사단장의 작전명령에 따라 오후 3시에 소양강을 도하해 석사리에서 휴식과 부대정비를 마친 후 6월 27일 오전 9시쯤 소양강 남안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에 1대대를 엄호하던 19연대 2대대도 소양강 남안으로 철수해 소양강과 북한강의 합류지점인 근화동 제방에서 19연대 주력과 합세했다.

38도선의 경계진지에서 철수해 소양강 남안에 배치됐던 7연대 2대대는 춘천의 동측방을 방어하기 위해 봉의산 동남쪽의 후평리로 이동했다. 그리고 적이 소양강 도하를 위해 소양교로 몰릴 것으로 예상한 연대장은 전 화력을 보유하고 있던 8중대를 소양교 남단의 범바위 주변에 집중 배치했다. 따라서 봉의산을 중심으로 한 소양강 남안의 방어선이 완성됐다. 6월 27일 오전 5시부터 북한군의 공격준비사격이 봉의산을 비롯한 춘천 시내에 가해졌고, 1시간 후 총공격이 시작됐다. 적은 소양교 정면에 주공을, 제19연대의 근화동 일대에 조공을 투입해 공격해 왔다. 7연대와 19연대는 모든 화력을 집중해 적의 소양강 도하를 저지했으나, 적의 일부가 춘천 시내로 침투함에 따라 사단장은 철수를 명령했다. 이에 따라 제19연대는 10시쯤에 홍천을 향한 철수를 단행했다.

한편 제19연대의 전환을 통보받은 7연대장은 근화동 일대를 19연대로부터 배속받은 2개 중대와 연대본부 행정요원 등의 혼성부대로 대체했다. 10시부터 적은 자주포를 소양강 북안에 두고 봉의산의 연대관측소와 소양강 제방의 화기진지에 직격탄을 퍼부었다. 11시쯤 적은 막대한 인명손실에도 거듭된 공격을 실시해 아군의 진지가 돌파되자,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 무렵 사단장은 전선의 균형유지를 위해 중앙선을 따라 지연전을 실시할 것과 원창고개에 제2방어선을 구축하라는 명령을 7연대장에 통보했다. 소양교 입구까지 진출한 적의 자주포가 다리 위에 쌓여 있는 시체를 강으로 밀어내고 다리를 건넜고, 가래모기로 도하한 적도 근화동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전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오후 1시에 연대관측소를 원창고개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춘천시가지에 편성한 시가지 방어선이 연속으로 돌파되면서 연대장은 축차 지연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적의 증원 병력이 투입되고 돌파구가 확대되는 등 전황이 점점 악화되자, 연대장은 오후 6시를 기해 철수 명령을 예하에 하달했다. 이로써 춘천은 북한군 2사단의 수중에 놓이게 됐다.

■ 춘천전투의 의미

결과적으로 춘천이 적에게 점령되기는 했으나 적의 점령을 최대한 지연시켜 북한군의 수도권 외곽 포위 기도를 완전히 분쇄했다는 점에서 춘천전투는 매우 의미가 큰 사건이다. 그 점에서 춘천전투는 개전 초기 국군이 유일하게 거둔 승전으로서, 국군의 뛰어난 전투수행능력을 확인시켜 준 쾌거였다. 아울러 전쟁 전반을 좌우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앞서 밝힌 대로, 북한군 2군단은 개전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한강 이남으로 우회해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하는 임무가 부여됐다. 이러한 북한군의 작전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면, 축차적인 지연전을 통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려던 국군의 작전계획은 실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손규석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선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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