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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대출, 이러다 큰 일 납니다”
주택은행에서 주택금융공사까지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⑫] 서민 내집마련 위한 금융지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안정적 주택 공급>
①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1
② 수도권 집중과 신도시 건설-2
③ 부동산과 택지조성의 방정식
④ 서민 내집 마련을 위한 금융지원
2003년 2월, 참여정부의 첫 재정경제부 장관으로 내정된 김진표 씨의 집무실로 변양호 금융정책국장과 신제윤 금융정책과장이 찾아왔다. 이들의 첫 대면 업무보고의 핵심내용은 ‘주택대출 만기구조의 장기화’였다.
“외환위기 이후 시중은행들이 앞 다퉈 주택담보대출에 뛰어들면서 주택금융 이용도는 현격히 높아졌지만 대부분 3년 만기 변동금리 대출이다 보니 안정성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금리 상승이나 집값 하락으로 가계의 채무불이행 위험이 높아지면 또 다른 금융위기로 이어질 수 있는 우려가 있습니다.”
신 과장(현 재경부 국제금융심의관)이 제시한 해법은 두 가지. “3년 위주로 돼 있는 주택담보 대출을 20년 이상 장기 고정금리 대출로 전환해 가계의 채무상환능력을 높이고, 또 급증한 금융권의 주택저당채권을 시장에 원활히 유통시켜(유동화) 금융기관의 위험도를 줄여줘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전담할 공신력 있는 기관으로 ‘한국주택금융공사(가칭)’를 설립하는 방안이 보고됐고 김 내정자로부터 “좋은 아이디어다. 그대로 추진하자”는 지시가 내려졌다.
단기변동 금리 ‘싹쓸이’ 주택금융 우려 확산
당시 재경부 뿐만 아니라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위원회 등 금융정책 당국으로서는 취약한 단기 변동금리 주택대출 급증이 골칫거리였다. 시민단체와 학계·전문가 그룹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시 KoMoCo(주택저당채권유동화회사) 유동화 팀장이었던 이중희 박사(현 한국주택금융공사 조사부장)는 “옛날 주택은행이 국책은행이었을 때는 주택대출이 장기 분할상환이었으나, 외환위기 이후 단기 일시상환대출로 급격히 바뀌었다. 1998년만 해도 신규 취급 대출의 4분의 3이 20년 이상 장기대출이었으나 2002년 1분기에는 정반대로 3년 이하 단기 대출이 약 4분의 3이나 차지했다”며 “시중은행이 단기 변동금리로 ‘싹쓸이’ 해버린 주택대출시장에 대해 참여정부 출범 직전인 2002년 말부터 ‘이러다 큰 일 난다’는 우려가 폭넓게 형성됐다”고 회고했다.
재경부의 의뢰로 건국대 사회과학연구소 고성수 교수가 분석한 보고서(2003년 9월)는 “주택담보대출 증가분 중 만기 3년 이하 단기 일시상환 형태의 대출이 77%에 달해 향후 경기변동에 따라 주택대출 부실화 및 금융기관 부실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며 “이 같은 한국의 대출구조는 미국의 대공황기에 엄청난 문제를 일으켰던 단기일시상환형 대출과 유사하다”고 경고했다.
“주택금융공사법이 통과되도록 도와주십시오”
취약한 주택대출구조에 따른 금융 위험을 낮추고, 장기 고정금리로 주택구입자금을 빌려줘 서민들의 내 집 마련 기회를 넓히기 위해 ‘주택금융공사’라는 별도 기관을 설립하는 방안은 그해 3월27일 청와대에서 열린 참여정부 첫 경제정책조정회의에서 보고됐고 곧바로 공식 발표됐다.
이어 2003년 9월9일 국무회의. 김진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이 그해 정기국회에 제출될 한국주택금융공사법에 대해 설명하고 법안에 대한 국무회의 의결이 끝나자 노무현 대통령이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며 각료들에게 당부했다. “이 법안은 주거안정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는 것이고 나아가 부동산 안정에 크게 기여하는 대표적인 민생법안인 만큼 통과될 수 있도록 전 각료들이 노력해 주십시오.”
서민들 내 집 마련에 ‘물꼬’
노 대통령의 지적대로 주택금융공사법안의 목표는 “서민·중산층 주거안정을 위한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고 부동산 안정에 근본적으로 기여하기 위해” 주택금융공사를 2004년 1월 설립하는 것이었다.
주택금융공사는 은행 등 금융기관을 통해 장기 주택자금을 대출하면서 생기는 주택저당채권을 현금으로 사들이고, 이를 담보로 주택저당증권(MBS:Mortgage-Backed Securities)을 발행해 이를 채권시장에 유통시켜(유동화) 보험사나 투신사·연기금 등 기관투자가들로부터 장기자금을 조달해 다시 서민들에게 장기 주택구입자금인 모기지론을 공급한다. 주택금융공사가 발행하는 MBS는 국가기관이 하는 만큼 신용도가 높고 한도가 자기자본의 50배까지 발행할 수 있어 공사의 자본금이 2조원으로 확충될 경우 최고 100조원의 주택자금을 조성할 수 있다.
주택금융공사가 설립되면 10년 이상 장기 주택구입자금을 대출 받을 수 있어 서민·중산층의 내 집 마련 기회를 촉진하게 된다. 당시 재경부의 시뮬레이션으로는 월 소득 250만원인 직장인의 경우 월 68만원을 부담(20년 만기 1억원 대출, 세제혜택 감안)하면 1억5000만원 수준의 25평형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었다.
2004년3월2일 한국주택금융공사 출범 및 현판식에 이헌재(왼쪽)경제부총리와 박승(오른쪽) 한국은행 총재가 함께 입장하고 있다 |
그해 9월 국회에 제출된 법안은 정기국회 파행으로 12월29일 본회의를 통과했고 이듬해인 2004년 3월2일 주택금융공사가 출범했다. 2006년6월까지 주택금융공사는 총 11만1000가구에 10년 이상 장기 고정금리로 8조원의 주택구입자금을 지원했다.
장기 저리의 주택구입자금 대출 제도가 성숙되지 않아 내 집을 마련하지 못했던 서민들에게 ‘물꼬’가 트이고, 금융기관의 과잉경쟁으로 뒤틀린 우리나라 주택금융시장을 바꾸는 ‘씨앗’이 뿌려진 셈이다. 1967년 주택은행에서부터 2004년 주택금융공사 설립까지 서민의 내 집 마련을 위한 자금 지원과 주택건설 위한 주택금융의 뒷자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분양권 쥔 주택은행
개인이 집을 사려고 할 때 돈을 빌려주기도 하고, 건설업체들이 주택을 짓는데 자금을 대주기도 하는 역할(주택금융)은 1967년부터 30년 가까이 ‘한국주택은행’이라는 단일 국책은행의 몫이었다.
국민은행과 합병돼 지금은 간판이 사라진 주택은행은 일반 저축자들의 예금과 주택저축을 통해 자금을 끌어들이고, 금융시장에서 주택채권을 발행해 돈을 조달한다. 여기서 나온 자금을 운용해 일정한 의무비율을 주택공급자와 수요자에게 대출해준다.
특히 주택은행은 신축주택의 우선분양권이 부여되는 청약예금과 청약부금, 대출우선권이 부여되는 주택부금을 단독으로 취급해 여기서 조달된 재원을 독점적으로 ‘장기·저리’로 주택부문에 다시 투자해왔다. 일반 시중은행들은 산업자금 공급을 위해 법적으로도 오랫동안 주택관련 금융을 취급하는 것이 제한됐다.
‘모든 돈은 중화학공업 육성으로…’
1960년대 산업화와 도시 인구팽창에 따른 땅값 상승과 주택수요 증가는 소득 수준이 낮은 서민들로 하여금 주택소유를 더욱 어렵게 했다. 장기저리의 주택자금을 풍부하게 조성해 집 없는 서민들에게 공급하는 등 주택금융에 대한 정책적 노력이 절실했지만 당시 저축능력 부족에다 정부 재정으로 충당되는 주택자금이 투자재원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예산 규모 대비 주택자금의 규모는 미미했다.
1957년 한국산업은행이 처음으로 주택자금 융자를 시작한 이래 1966년 말까지 10년간의 주택자금 대출액은 54억원, 주택수로는 4만8698가구에 불과했다. 주택부문이 정부의 공업화와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에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국민총생산 대비 주택투자율은 1.7%에 지나지 않았다.
바닥 난 주택금고
1967년 설립당시 주택금고 모습 <사진:주택은행 30년사> |
당시 신문(68년12월26일자 조선일보)은 이렇게 소개했다.
“지난 10월말 금고 바닥이 드러나 주택자금 융자를 중단하고 일찌감치 동면에 들어갔던 주택금고가 24일 주택은행으로 간판을 갈아달면서 새로 활기를 띠기 시작.
주택금고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이날 주택금고(이제부터 주택은행)는 바깥 간판만 아니라 이사장실의 팻말도 즉각 은행장실로 바꾸는 등 아래 위 없이 온통 축제 분위기.
지금까지 정부예산에만 매달려온 주택금고가 은행으로 바뀌면서 한은차입뿐 아니라 외자(달라)로 액면을 쓴 주택채권까지 발행하게 되어 내년부터는 자금부족의 염려가 없게 됐다는 것.
(중략) 내년에 적어도 주택금고 발족 이래 16개월 동안의 총 대출액 70억원보다 30억원이 많은 1백억원 정도의 주택자금을 융자, 서민주택(20평 이하) 2만채를 짓도록 하겠다는 주택은행은 요즘 전례 없이 방대한 새해 사업계획을 짜느라 여념이 없는 듯.”
꽹과리 치며 복권 팔아 자금마련
주택금고가 금고라는 명칭과 점포수 제약 등으로 인해 선발 은행과의 경쟁이 어려워 예수금보다는 자본금과 정부 차입금에 크게 의존했지만 주택은행으로 변경된 후에는 1969년9월 주택복권을 발행하는 등 자금 조달의 폭을 서서히 넓히기 시작했다.
주택금고 행원으로 출발해 주택은행장까지 역임한 김재기 전 행장(현 씨름연맹 총재)의 증언. “복권은 불특정 다수의 소액 소비자금을 모아 투자자금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당시 취약한 주택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선진국 형태의 복권을 도입했다.
재무부 장관 승인에다 첫 회 서울시장 허가까지 받아 그해 9월15일부터 29일까지 15일간 100원권 50만매를 발행했지만 그 때만 해도 복권이 무엇인지 모르는 때여서 잘 팔리지 않았다. 급기야 주택은행 전 직원이 가두판매에 나서 서울역 앞에서 모판을 메고 꽹과리를 치며 복권을 팔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택복권 판매액은 국민주택기금으로 편입돼 서민주택 건설 자금으로 쓰였다. 숫자가 적힌 동그란 과녁에 화살을 쏘는 형태의 추첨을 통해 나온 1등의 당첨금은 300만원. 당시 단독주택의 평균가격이 90만원 정도였던 점을 감안하면 꽤 높은 당첨금이었다.
서울시장의 허가를 얻어 발행된 1회 주택복권은 액면 100원에 1등 당첨금이 300만원이었다. |
1970년 초 주택복권 판매기금 1억원으로 서울 암사동에 파월장병·군경유가족·일반원호대상자·이재민을 위한 ‘복권 아파트’라는 이름의 아파트 단지가 조성됐으며, 그해 2월21일 <대한뉴스>는 남덕우 재무무장관의 복권아파트 기공식 행사 소식을 전하면서 ‘복권아파트’ 입주자들이 “낮은 이자와 장기 상환혜택을 받는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1억원짜리 올림픽복권
88서울올림픽 개최가 확정되면서 1983년 4월부터 주택복권 대신 최고 당첨금 1억원의 올림픽 복권이 대신 발행됐다. 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과 1억원 기대심리로 발행 초기 발매 1~2일 만에 매진되는 등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올림픽복권을 통해 조성된 자금 1827억원 중 국민주택기금에 639억원, 올림픽 기금에 1188억원을 지원했다. 올림픽 기금에 지원한 금액은 전체 올림픽 사업비 9098억원의 13%에 달했다. 끊임없는 사행심 조장 논란 속에서도 1969년부터 1997년6월까지 주택복권의 총 판매액은 1조6900억원에 달했으며 당첨금 및 발행비용을 차감하고 판매액의 38.9% 정도인 6568억원이 국민주택기금으로 조성됐다. (주택복권은 2006년1월5일, 도입된지 36년 만에 로또에 밀려 사라졌다.)
건설업자에게 빌려주는 국민주택기금 탄생
1990년대 주택은행 여의도 본점 전경 |
이 때부터 발행된 국민주택채권은 주택건설촉진법이 정하는 매입의무자가 일정 기준에 따라 강제 매입토록 돼 있어 매년 발행실적이 크게 늘어나 1980년 말까지 3688억원의 자금조달 실적을 올렸다.
하지만 주택건설 물량은 매년 15만호 안팎으로 계획물량을 크게 밑돌았다. 건설업자에게 국민주택을 더 많이 짓도록 장려하기 위해서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장기(20년)·저리(7.5~9.5%)의 자금을 공급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81년 국민주택자금을 주택은행 계정에서 별도로 분리해 독립된 공공기금인 ‘국민주택기금’으로 전환하면서 공공과 민간의 역할 분담체제가 확립됐다. 국민주택기금의 지원대상은 임대주택 또는 전용면적 25.7평 이하 국민주택을 건설하는 사업자이며 완공 때 입주자로 대출이 전환됐다.
아파트 열풍과 주택청약예금
1970년대 후반 아파트에 대한 선호도가 급증하고 투기가 기승을 부리자 건설교통부는 민영아파트 공급 질서를 확립하고 투기억제 및 주택자금 재원 조성을 위해 ‘주택청약정기예금제도’를 마련 1978년 2월4일부터 서울 부산 대구에서 우선 시행했다.
1983년 주택경기 호황과 아파트청약 0순위제 폐지 채권입찰제 실시 등으로 주택청약 정기예금의 신규가입이 크게 늘어나고 주택부금이 높은 신장세를 보였다. 반면 1984년 주택경기 진정을 위한 강력한 투기억제정책으로 하반기 주택경기가 침체하자 주택청약 예금과 국민주택기금 일시 예치금 해약이 급증하기도 하는 등 주택자금 조달 규모는 부동산 경기에 따라 등락을 거듭했다.
1987년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이 신설돼 담보능력이 미약한 근로자 등을 대상으로 신용을 보증해줌으로써 주택자금이 보다 원활하게 지원되도록 했다. 주택보증신용보증기금은 1991년 말 기준으로 30개 금융기관과 보증계약을 체결했고 40만4000가구 1조5930억원의 보증을 지원해 무주택 서민의 주택마련 기회를 제공했다.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이 신설되면서 주택은행은 국민주택기금과 주택금융신용보증기금 등 2개 기금까지 관리하는 ‘주택금융 그룹’이 됐다.
200만호 건설에 돈을 대라
주택200만호 건설을 공약한 6공화국은 막대한 주택건설 자금 조성에 골몰해야 했다. 주택금융 확충을 1면에 보도한 1987년 11월 11일자 조선일보화면 |
6대 원칙과 6대 시책으로 요약된 경제 공약중 하나로 ‘내 집 시대의 조기실현’을 들고 “이를 위해선 국민주택금융을 앞으로 5년간 2조원이상으로 늘리고 값싼 공공개발택지를 3천만평 이상 공급, 주택건설 단가를 인하토록 하여 누구나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하고 앞으로 250만 무주택 가구에 정부지원을 집중하여 향후 5년간 50만 채의 공공임대주택을 건설하는 등 92년까지는 모든 국민들이 내 집을 갖는 시대를 맞도록 하겠다”고 공약했다.
다음날 신문은 ‘주택금융 2조 확대’라는 제목을 큼지막하게 1면에 뽑아 노 대표의 정책 내용을 상세히 소개했다. 하지만 당시 ‘주택금융’이라는 말과 ‘2조원’이라는 돈은 사람들이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다만 ‘모든 국민들이 제 집을 갖는 시대’라는 구호만 머릿속에 남았다.
이렇게 시작된 주택 200만호 건설은 주택자금 수급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신도시 건설을 위해 시중 부동자금을 주택건설 재원으로 흡수하는 방안이 총동원됐다. 다시 김재기 전 주택은행장의 회고.
“주택 200만호 건설을 위한 자금동원은 주택은행이 전담했다. 200만호 주택건설계획의 자금 지원을 위해 그해를 ‘총력수신증강의 해’로 정하고 자금조달의 극대화를 위해 전 은행차원의 저축증강 운동을 펼쳤다. 이에 따라 1991년 5월15일 주택은행 예수금이 10조원을 넘어 총예수금 1위 은행자리를 차지했다. 은행장 직속으로 ‘주택금융특별기획실’을 설치하고 여기서 만든 주택금융확충방안에 따라 200만호 건설 계획 중 민영주택부문에서 82만호 건설을 위한 자금 지원을 주택은행이 도맡았다.”
'차세대 주택통장' 한국판 기네스북 올라
200만호 건설 당시 주택은행을 통해서만 1989년부터 1991년까지 매년 2조원에 가까운 돈이 주택건설에 지원됐다. 건설업자 지원확대, 개인주택 구입자에 대한 대출금 상향, 신청자격 완화, 대출제도 개선 등 주택금융 활성화 방안이 잇따라 나오고 아파트 중도금 납입자금, 임차자금, 다가구단독주택 건설자금, 주거환경개선사업자금, 조립식주택설비자금대출 등 새로운 대출제도도 이때 대거 쏟아져 나왔다.
당시 주택건설 붐을 타고 1992년 30년 정도 저축하면 내집 마련을 할수 있는 차세대주택종합통장은 발매 1달만에 100만명이 가입할 정도로 선풍적 인기였다. 이 주택통장은 1993년2월 최단 기간내 최다 가입자 금융상품으로 한국판 기네스북에 올랐고 1993년에는 단일 상품으로는 드물게 300만계좌를 돌파했다. 당시 우리국민들의 ‘저축을 통한 내집마련 꿈’이 어느 정도 였는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그 결과 주택은행은 창립 24년만에 1991년말 직원수가 1만2000명에 이르고 282개 점포를 가진 총 예수금 10조3372억원에 이르는 초대형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그래도 모자라는 주택자금
갈수록 수요가 커지는 주택금융의 확충을 위해서는 주택자금 취급기관을 다변화하고 전문기관(은행 보험 새마을금고)을 적극 육성하며, 서구식 주택저당증권제도(MBS) 도입을 통해 중산층 이상의 여유자금을 주택자금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성이 높아져갔다.
주택200만호 건설 과정에서 만성적인 주택자금 부족현상을 경험한 정부와 주택은행은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주택자금 조달방안 마련에 골몰했다. 그 결과 대안으로 검토한 것이 바로 현재의 주택금융공사가 하고 있는 주택저당채권 유동화(MBS)다.
주택금융공사 이중희 박사는 “자본시장의 여유자금을 주택부문에 활용하는 선진국의 MBS제도는 정부 입장에서 솔깃한 대안이 아닐 수 없었다”며 “하지만 경제적·법률적 장애요인으로 인해 MBS 제도는 도입되지 못하고 그후 10여년 동안 조사연구와 논의 수준에 그치고 말았다”고 했다.
주택저당 채권을 시장에 유통시키기 위해서는 채권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높아야 하지만 당시에는 국가가 정잭적으로 대출금리를 조절하던 시기여서 오히려 채권시장의 금리보다 대출금리가 더 쌌다. 이같은 구조에서는 MBS를 도입해도 시장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또 법률적으로도 저당권을 양도하는데는 당시 민법상 큰 장애가 있었다.
그러던 것이 외환위기 이후 IMF(국제통화기금)의 금융구조개혁 권고에 따라 국민의 정부가 1999년 주택저당채권유동화회사법이라는 특별법을 만들어 법률적 장애를 극복하고, 채권금리 등 금융시장이 시장원리에 따라 작동하면서 2000년 KoMoCo(주택저당채권유동화회사)를 세워 처음으로 MBS를 발행하게 됐다. 하지만 일반 기업형태의 유동화회사로는 공신력이 낮아 MBS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배급제도인 주택자금대출
MBS와 같은 장기 주택자금 조달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 단기성 예금을 유치하는 형태로 자금을 모아 장기 저금리 주택자금을 공급한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개인이 자기 집을 취득할 수 있도록 주택 구입자금 대출만 전담하는 금융기관이 존재지만 우리나라에는 주택금융공사가 출범하기 전까지 이 같은 형태의 금융기관이 없었다.
주택은행의 개인주택구입자금 대출은 만성적 재원부족 때문에 청약부금이나 예금·저축을 가입한 사람에게만 자격이 주어졌고 엄격한 가입순위와 조건을 따져 일정 한도의 돈을 ‘배급해주는’형태여서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1967년 초창기 개인 주택구입 대출 대상은 무주택자로 신축 후 1년 이내의 주택을 건설업자로부터 최초로 매입하는 사람으로 한정됐으며 대출한도는 주택부금 가입여부에 관계없이 60만원이었다. 그러나 1975년부터는 대출 대상자가 주택부금 가입자로 한정됐고 1978년에는 대출기간이 20년으로 늘어났다.
1997년 발간된 ‘주택은행 30년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87년 3월에는 개인주택구입자금의 대상주택 경과년수를 신축 후 5년에서 10년 이내로 완화하는 등 실수요자 위주로 지원대상을 확대했다. 1987년 5월에는 근로자의 주거안정과 목돈마련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 근로자저축제도를 신설해 전 은행에서 취급토록 해 사실상 모든 은행에서 주택자금 대출을 취급할 수 있도록 했다.
특히 1989년 1월부터 중도금납입자금 대출이 시행되고 1995년 10년이 넘은 주택에 대한 대출도 허용되면서 개인 주택자금 대출은 크게 증가했다.”
주택은행이 1967년부터 1996년까지 30년 동안 공급한 주택자금은 22조4934억원으로 주택 수로는 207만 가구에 해당한다. 이중 개인의 주택구입 자금 지원은 15조617억원이었다.
나머지 자금은 주택을 공급하는 건설자금으로 쓰였다. 경기진작과 건설경기 부양이 필요할 때는 건설업체에 대한 돈줄을 늘리고 정부가 건설경기 진정책을 추진하면 건설업에 대한 자금지원을 억제하는 형태였다. 주택경기가 침체할 때는 건설업체 자금난을 완화하고 주택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건설업자 운전자금과 미분양주택 구입자금을 대출해주기도 했다.
분양 주택 돈 많은 계층에게만 돌아가
그렇다면 이 같은 자금 지원으로 많은 서민들이 자기 집을 마련했을까?
‘주택보급률은 100%를 넘는데 자기 집에 거주하는 비율은 55.6%.’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일반가구의 자가거주율은 1970년 71.7%였으나 1990년 49.9%로 하락했다가 2005년에는 55.6%에 머물렀다. 절반 가까이 전월세를 살고 전세비율은 1975년 17.6%에서 2005년 22.4%로 오히려 높아졌다. 전세로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왜 주택구입 자금 대출을 통해 자기 집을 못 사는 것일까?
주택도시연구원 박신영 선임연구원의 분석은 이렇다.
“자가거주율이 낮은 것은 장기저금리 주택자금을 대출해주는 제도가 미성숙했기 때문이다. 주택가격의 50% 이상의 자금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전세로 주택을 임차한 가구가 주택을 사기는 쉽지 않았다. 만일 정부가 주택자금을 많은 사람들에게 장기저리로 대출해주는 제도와 더불어 많은 신규주택을 공급했더라면 전세거주자중 자가를 취득한 가구가 많아졌을 것이다. 주택자금 대출제도가 성숙되지 않은 상황에서 많은 전세거주자는 자가를 취득하지 못한 채 매년 인상되는 전세보증금을 마련하기에도 역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1982년 이후 2004년까지 신규로 공급된 1090만가구의 주택은 주택자금 대출 없이도 집을 살 수 있었던 계층에게만 돌아갔다.”
외환위기와 2000년 이후 주택금융 무한경쟁 시대
1997년 이후의 금융 국제화와 금리 자유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주택은행의 민영화 추진도 빨라지면서 주택은행의 주택금융 독점 시대는 서서히 저물고 일반 상업은행들의 주택금융시장 진입과 은행간 경쟁도 본격화됐다. 1997년 주택은행 민영화를 계기로 주택금융시장은 정책논리보다는 시장원리를 중시하기 시작했으며 외환위기를 계기로 더욱 빠른 속도로 시장 중심적 체제로 변했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은행의 자산운용에서 비중이 낮았던 가계대출이 기업들의 부도 등을 계기로 안정적인 자산운용처로 서서히 인식되기 시작했다. 기업대출의 부실우려가 높아지면서 기업대출을 줄이는 대신, 마땅한 자산운용처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저금리와 부동산경기 상승이 맞물리면서 담보가 확실하고 수익률도 높은 가계대출을 늘리게 된다.
2001년과 2002년 중 주택담보대출은 매해 50%이상 성장하였고 그 결과 2000년 말 54.2조원에 불과하던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은 2006년 상반기말 200조8000억원으로 급격히 증가했다.
“부동산 투기자에게 종자자금 제공”
박원석 대구대 부동산학과 교수가 ‘주택문제의 해법’(삼성경제연구소, 2005)에서 ‘건전하고 효율적인 주택금융시스템 구축’을 주제로 내놓은 지적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주택담보대출 구조의 문제와 결합하여 주택담보대출의 활성화가 주택시장의 안정보다는 오히려 주택시장의 단기 변동성을 확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중략) 다시 말하면 공적자금 투입을 통해 살려놓은 금융기관들이 부동산 투기자들에게 종자자금을 제공하는데 골몰하고 있다는 의심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전에는 주택금융의 활성화가 정책의 목표였다면 이제는 주택금융시장의 연착륙, 주택금융 시장의 건전화가 우선적인 정책목표가 되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주택금융공사의 성과와 한계
이 같은 단기 변동금리 주택담보대출의 급증은 저금리에 따른 통화량 증가와 부동산투기 열풍이 맞물린 결과다. 아무리 높은 이자에 단기 대출을 받아도 3년 만 지나면 집값이 ‘화끈하게’올라 대출금을 갚고도 남는 구조에 너무나 길들여져 있었다.
금융연구원 이명활 연구위원은 2006년 말 내놓은 연구자료에서 “은행권 주택담보대출 가운데 시장금리 연동 변동금리 대출비중은 98%에 이르고 있다. 만기연장이 원활히 이뤄지지 않거나 금리급등으로 이자부담이 가중될 경우 부실화될 우려가 있는 등 여전히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홍식 전 주택금융공사 사장도 2007년 초 매일경제와의 신년인터뷰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이자만 내다 2~3년 뒤 집값이 오르면 일시에 상환해도 되는 주택대출 시스템으로는 집값을 잡기 힘들다”며 “주택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장기 고정금리 대출 비중이 전체 주택대출 중 70% 이상으로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주택자금, 모자라도 '문제' 남아도 '탈'
주택구입을 위한 장기 모기지론이 서민들에게 보다 폭넓게 확산되지 못한데 대해 주택금융공사 설립 준비단계에서 테스크포스(TF) 팀장을 맡았던 박병섭 부장은 “그 동안 우리 금융시장의 유동성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은행들이 돈이 남아 대출 할 곳이 없어 가계대출에 집중하는 상황에서 주택금융공사의 20년 장기 모기지론을 팔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은행의 돈으로 주택담보 대출을 파는데 바빴다. 은행에 돈이 남아도는 상황에서 은행 입장에서 장기모기지론을 대출해주고 그 채권(주택저당채권)을 주택금융공사에 팔아 현금을 가져가야 하는데 돈이 남아돌다 보니 그렇게 할 유인이 낮았다.”
박 부장은 “주택금융공사 출범 이후 은행들도 자체적으로 20년 상환 상품을 만드는 등 주택자금 대출 구조가 서서히 장기 구조로 전환되고, MBS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3년물 중심이었던 채권시장이 장기물 유통구조로 바뀌고 있는 것은 긍정적 변화”라고 말했다.
지난 30년 동안 서민 내 집 마련을 위한 자금지원이 바늘구멍처럼 좁았던 것은 돈(재원)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주택금융 시장에 경쟁체제가 도입되면서 자금부족 문제가 해소되고 소비자들은 내 집 마련을 위한 주택자금을 쉽고 싸게 대출받을 수 있게 됐다. 하지만 돈이 풍부해진 저금리시대에는 지나친 경쟁과 단기 변동금리대출 편중으로 인해 또 다른 부실 위험을 안게 됐다.
뒤틀린 주택금융시장을 바로잡는 ‘씨앗’
이 두 가지를 해소해 ‘보다 풍부한 재원으로 보다 많은 서민에게 장기간 고정금리로 안정되게’ 주택구입자금을 지원해주려는 정부의 노력은 이제 첫 단 추를 끼웠을 뿐이다. 주택금융공사 이중희 박사는 “담보가치 위주의 주택담보대출 심사체계를 차입자의 채무상환능력 위주로 전환하기 위해 총부채상환비율(DTI: Debt-To-Income) 규제를 도입하고, 주택담보대출에 대한 대손충당금 적립기준을 강화하는 등 주택담보대출의 선진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는 것도 단기 변동금리 위주로 급팽창한 주택담보대출시장이 초래할 수도 있는 잠재적 금융불안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정부가 추진하는 정책이 결실을 거둘 경우 우리나라의 주택금융시장의 구조가 한결 튼튼해져 집값 하락이나 금리 상승과 같은 외부적 충격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장기 고정금리 대출과 이를 기초자산으로 한 MBS 발행이 활성화됨으로써 자본시장의 발전을 촉진하고 주택가격의 안정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 3월6일 경제전문 미디어 <이데일리>는 ‘e-모기지론 인기몰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송고했다.
‘시중은행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꾸준히 오르면서 고정금리 장기대출상품인 ’e-모기지론‘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주택금융공사는 지난 2월 e-모기지론이 1592억원 가량 판매돼 전체 보금자리론 판매액 중 57.2%를 차지했다고 6일 밝혔다. 이는 전월비 25.5% 증가한 것으로 지난해 7·8월 두 달간 판매실적을 합친 1080억원보다도 절반이상 늘어난 규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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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책뉴스 내수 중견기업 40곳, 수출기업 탈바꿈…맞춤형 지원 강화 산업통상자원부는 26일 중견기업 수출기업 전환 지원단 첫 전체회의를 개최하고, 올해 발굴한 40개 내수 중견기업을 대상으로 맞춤형 글로벌 진출방안을 논의했다. 첫회의에는 법무부, 관세청, KOTRA,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등 수출 지원기관 및 중견기업들이 참여했다. 산업부는 지난 2월, 2028년까지 수출 중견기업 200개 사 신규 확충을 목표로 18개 수출 지원기관과 함께 중견기업 수출기업 전환 지원단을 출범하고 수출 확대 의지가 있는 내수 중견기업을 발굴해 컨설팅, 판로·물류, 금융, 기술·인증 등 수출 전 과정에 대해 맞춤형으로 지원해 왔다. 특히, 올해 상반기에 발굴한 내수 중견기업 27개 사를 대상으로 ▲수출 지원기관 매칭(중견련), ▲바이어 발굴 및 마케팅(KOTRA), ▲물류비 할인(DHL, FedEx), ▲수출금융(무보, 우리은행 등), ▲관세·인증 등 컨설팅(관세청, 해외인증지원단 등), ▲내수 중견 맞춤형 지원시책 강화(법무부, 수은 등) 등을 지원하고 있다. 이에 힘입어 전년 대비 수출이 1.7배 증가할 것으로 전망(KBI코스모링크) 되고, 말레이시아 현지 국립대학 병원과 14억 원 규모의 양해각서(MOU) 체결(제일약품) 등 가시적인 수출 성과도 창출되고 있다. 부산항 신선대부두 야적장에 적재된 컨텐이너들.(ⓒ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하반기에 내수 중견기업 13개 사를 추가로 발굴하는 한편, 수출 지원기관을 신용보증기금을 추가해 18개로 늘린다. 아울러, 무역협회 수출실무교육, 물류 컨설팅 지원 등 지원 프로그램을 확대해 내수 중견기업 대상 맞춤형 수출지원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제경희 산업부 중견기업정책관은 “우리 수출이 상반기 전년 대비 9.0% 증가하며 올해 역대 최대실적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강조하고 “국내시장에서 확고한 경쟁력을 보유한 중견기업은 수출 잠재력이 매우 높은 기업군인 만큼 역대 최대 수출실적 달성을 위해 하반기에도 민관이 원팀으로 중견기업의 세계시장 도전을 적극 지원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문의: 산업통상자원부 중견기업정책관 중견기업정책과(044-203-4361, 4369)
- 카드뉴스 이번 주말 어디 가지? ‘아이와 함께 가기 좋은 정원’ 8곳을 추천합니다. 무더운 여름방학, 알차게 보내기② 2024 대한민국 정원여행 지도를 확인하고, 아이와 함께 힐링하는 시간 보내세요! ■대한민국 1호 국가 정원 ‘순천만 국가 정원’ ∨어린이 동물원 ∨정원클럽파티, 정원관람차 야간투어(7,8월) ∨순천만 역에서 정원까지 편히 오가는 스카이큐브 · 입장료: 10,000원 · 위치: 전남 순천시 국가정원1호길47 ■도심 속 최대 규모 철새 도래지를 품은 ‘태화강 국가 정원’ ∨365일 운행하는 무장애 전기 관람차 ∨대나무가 가득한 어린이 놀이터 ∨뛰놀기 좋은 너른 잔디밭과 야외공연장 · 입장료: 무료 · 위치: 울산광역시 중구 태화강국가정원길 154 ■연꽃이 만개한 신비로운 공간 ‘세미원’ ∨수생식물, 초본식물, 목본식물 등 270여 종 보유 ∨2만 6천 평 부지의 넓은 정원 ∨손수건 염색, 연꽃 부채 만들기 체험 · 입장료: 5,000원 · 위치: 경기 양평군 양서면 양수로 93 ■자연이 살아 숨 쉬는 친환경 정원 ‘거창 창포원’ ∨연꽃, 수련, 수국이 둘러싸인 곳 ∨하천 곳곳에서 서식하는 동물 ∨웰니스 아로마 치유 프로그램 · 입장료: 무료 · 위치: 경남 거창군 남상면 창포원길 21-1 ■울창한 대나무와 피톤치드로 가득한 ‘죽녹원’ ∨울창한 대숲 ∨8가지 주제로 구성된 죽녹원 8길 ∨죽녹원 한옥펜션 · 입장료: 3,000원 · 위치: 전남 담양군 담양읍죽녹원로 119 ■수려한 경관을 간직한 화개산이 품은 ‘화개 정원’ ∨5색 테마로 조성된 정원 ∨스탬프 투어, 방탈출 등 이벤트 ∨화개산 모노레일 · 입장료: 5,000원 · 위치: 인천 강화군교동동로 471번길 6-60 ■자연이 살아 있는 ‘줄포만 노을빛 정원’ ∨20여 종의 자생화와 염생식물 ∨정원 내 람사르 습지 보유 ∨수상 레저 체험장, 갯벌 생태관 · 입장료: 무료 · 위치: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줄포면 생태공원로 38 ■부산의 첫 번째 지방 정원 ‘부산 낙동강 정원’ ∨야생·철새·사람·공유 등 4가지 주제로 운영 ∨철새 도래지인 낙동강 물길 ∨샛길 생태문화 탐방로 · 입장료: 무료 · 위치: 부산광역시 사상구 삼락동 29-61번지 일원(삼락둔치) ‘대한민국 정원여행 지도’에서 취향에 쏙 맞는 나만의 힐링정원을 찾아보세요! ‘대한민국 정원여행 지도’ ①각 지역 관광안내소 혹은 ②산림청 누리집→산림보호→수목원·정원→정원자료실에서 확인 가능합니다!
- 여행 복잡한 도시에서 로그아웃, 별캉스 떠나기 좋은 영양 경북 영양군은 대중교통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이지만, 그만큼 비밀스럽고도 깨끗한 자연환경을 누릴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은하수가 흐르는 하늘, 반딧불이 가득한 숲, 맑고 시원한 계곡까지, 영양의 청정 자연을 누리는 별캉스를 떠나보자. ★추천 코스★ 영양반딧불이천문대, 영양자작나무숲, 영양풍력발전단지, 발효공방1991 영양반딧불이천문대 첨성대와 밤하늘 풍경. 영양군은 인공조명으로 인한 빛 공해가 매우 적은 도시다. 특히 아시아 최초의 국제밤하늘보호공원에 속한 수비면 일대는 우리나라에서도 밤이 가장 어두운 지역으로 손꼽힌다. 관내 대표 시설은 영양반딧불이천문대. 진입로에도 가로등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맨눈으로도 별이 쏟아질 듯 반짝이는 밤하늘을 볼 수 있다. 영양반딧불이천문대. 2005년 개관한 영양반딧불천문대는 우주의 탄생 및 태양계의 생성 과정과 태양계 행성에 관한 내용을 상설 전시하는 시설이다. 천체관측 시설을 통해 낮에는 태양의 흑점과 홍염을, 밤에는 행성과 달, 별똥별, 은하수 등을 관찰할 수 있는데, 때로는 지구를 공전하는 인공위성까지 포착되곤 한다. 천체관측실에 설치된 천체망원경. 1층 상설전시실. 완벽한 은하수 여행을 위한 한 가지 팁이 있다면, 달빛이 약할 때 별이 더 잘 보인다는 것이다. 달이 초승달이나 그믐달에 가까워지는 시기, 또는 달이 늦게 뜨거나 일찍 지는 시기에 맞춰 방문하면 밤하늘을 수놓은 아름다운 별들의 축제를 만끽할 수 있다. 영양군 생태사업소 홈페이지에서 별빛 예보를 미리 확인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6월 또는 8월 반딧불이가 출현하는 시기에 방문하면 깨끗한 밤하늘 아래 별처럼 반짝이는 반딧불이를 볼 수 있는 행운도 기대할 수 있다. ※ 반딧불이천문대 - 주소 :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반딧불이로 129- 문의 : 054-680-5332- 홈페이지 : https://www.yyg.go.kr/np/observatory/facilities- 운영시간: 주간 13:00~18:00 / 야간 19:30~22:00 (운영 종료 1시간 전까지 입장 가능)- 이용요금: 어른 4000원, 청소년 3000원 (체험 프로그램비 별도) 영양자작나무숲 영양자작나무숲. 영양의 맑은 밤하늘을 바라보며 두 눈 가득 힐링을 만끽했다면, 푸른 숲에서 마음마저 정화할 차례다. 수비면 죽파리에 위치한 산림청이 선정한 100대 국유림 명품 숲, 영양자작나무숲으로 떠나 보자. 규모는 141.8ha. 인공 조성된 자작나무숲 중 가장 크다. 최근에는 지형이 완만하여 접근성이 좋은 일부 구간이 개방되어 관광객이 늘어나는 추세다. 영양자작나무숲 포토존. 죽파리 마을과 자작나무숲을 연결하는 4.7km 구간은 차량 통행이 금지되어 있지만, 영양군 측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다. 코끼리 열차처럼 생긴 셔틀버스는 환경 보호를 위해 전기 파워트레인을 사용한다. 매주 월요일을 제외한 주중과 휴일에 운행하며, 운행 시간대가 구분되어 있으니 미리 확인할 것. 계곡이 흐르는 진입로. 시간과 체력이 허락한다면 진입로부터 걸어보자. 초록으로 가득한 숲과 폭신한 오솔길, 시원한 계곡 소리의 하모니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숲 내부 산책로는 1.49km 길이의 1코스, 1.52km 길이의 2코스 두 개로 나뉘는데, 어느 길을 선택하든 큰 차이는 없다. 두 길 모두 자작나무숲을 이리저리 누비다가 제2쉼터를 거쳐 전망대로 향하는 코스다. 전망대. 영양군이 운영하는 셔틀버스. 코스를 완주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자작나무숲 자체를 하나의 작품처럼 즐기는 것을 추천한다. 수십 년의 역사를 품은 자작나무숲은 마치 거대한 예술 작품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새하얀 나무 기둥이 주변을 감싸는 풍경은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와 그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이 주는 청량감도 마음껏 즐겨 보자. ※ 영양 자작나무숲 - 주소 : 경상북도 영양군 수비면 자작나무길 96 (주차장 및 셔틀 탑승 장소)- 문의 : 054-680-6410 (영양군청 문화관광과)- 홈페이지 : https://tour.gb.go.kr/tip/storyView.do?idx=16381- 셔틀버스 이용 Tip· 주중: 09:30~16:00 (상·하행 1시간 간격 운행/매주 월요일 휴무)· 주말: 09:30~15:15 (상·하행 30분 간격 운행/중간 지점 하차 후 자작나무숲까지 도보로 30분 이동)· 안전 및 기상 여건에 따라 배차 간격이 달라지거나, 노선이 변경되거나 운행이 중단될 수 있음. 영양풍력발전단지 영양풍력발전단지의 노을 풍경. 힘차게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영양군 맹동산 일대에는 대규모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동해와 서쪽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모여 풍력 발전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것. 풍력발전기 관리를 위해 마련된 임도를 따라 정상부에 오르면, 능선을 따라 설치된 수십 기의 풍력발전기가 힘차게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능선이 펼쳐지는 풍경. 전망 좋은 곳에 마련된 정자. ※ 영양풍력발전단지 - 주소 :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요원리 산31-101 발효공방1991 영양군 대표 양조장인 발효공방1991. 깨끗한 자연, 맑은 물이 있는 곳에 빠질 수 없는 것이 그 지역에서 빚어내는 술이다. 영양군에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양조장이 있었다. 1926년 창업한 영양양조장은 한 세기 동안 지역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았지만, 10년 전 아쉽게도 경영난으로 폐업했다. 그러던 2022년, 영양군이 교촌에프앤비와 협업해 이 공간을 새로운 개념의 양조장으로 세웠다. 발효공방1991의 탄생이다. 막걸리 제조 공간. 발효공방1991에서는 양반들이 즐겨 먹었던 술 감향주를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은하수 막걸리를 맛볼 수 있다. 17세기 영양군 재령이씨 종가로 시집온 장계향 선생의 후손인 조귀분 명사가 전수한 비법으로 만들어진 전통주다. 물, 쌀, 누룩 외에 어떤 첨가물도 사용하지 않아 재료가 지닌 본연의 맛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막걸리로 만든 타르트와 스무디. 은하수 막걸리를 활용한 포토존. 은하수 막걸리는 발효공방1991 내 카페 소풍에서 구매 가능하다. 카페 소풍에서는 막걸리를 활용한 색다른 음료와 디저트도 맛볼 수 있는데, 막걸리를 첨가했음에도 제조 과정에서 알코올을 제거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막걸리 특유의 달콤함과 고소한 향이 느껴져 매력적이다. 카페 내부 공간. 세월의 흔적 느껴지는 기록물. 맛있는 디저트로 배를 채웠다면 카페 공간도 천천히 살펴보자. 누룩 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은 오래된 천장과 벽면, 양조장 이름이 적힌 상자는 물론, 양조장의 역사를 기록한 전시는 영양양조장이 간직한 구수한 세월의 정취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 발효공방1991 카페 소풍 (영양군꽃차사회적협동조합) - 주소 :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군청길 49- 문의 : 054-682-0230- 운영시간: 10:00~21:00 (주문 마감 20:30/매주 월요일 휴무)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SNS 글, 사진 : 김정흠 여행작가 * 위 정보는 변경될 수 있으니 여행하시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사진 팜 민 찐 베트남 총리 면담 한덕수 국무총리가 25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베트남 총리실에서 팜 민 찐 베트남 총리와 면담하고 있다.,한덕수 국무총리가 25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베트남 총리실에서 팜 민 찐 베트남 총리와 면담하고 있다.,한덕수 국무총리가 25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베트남 총리실에서 팜 민 찐 베트남 총리와 면담하고 있다.,한덕수 국무총리가 25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베트남 총리실에서 팜 민 찐 베트남 총리와 면담하고 있다.,한덕수 국무총리가 25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베트남 총리실에서 팜 민 찐 베트남 총리와 면담하기 전 인사하고 있다.,한덕수 국무총리가 25일(현지시간) 베트남 하노이 베트남 총리실에서 팜 민 찐 베트남 총리와 면담하기 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국민이 말하는 정책 나의 부모님은 자랑스러운 제복공무원입니다! 차를 끌고 집을 나설 때마다 집 앞 사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을 마주한다. 바로 집 앞에 롯데몰이 있어 경찰의 정리가 없다면 극심한 교통체증이 발생하는 곳이기에 폭염 가운데서도, 비가 쏟아져도, 항상 같은 자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는 모습을 보면 감사함을 넘어서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주위에서 알게 모르게 국민의 편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앞서 말한 교통경찰부터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골든 타임을 지키기 위해 빠르게 출동하는 경찰과 구조대원, 모두 피하는 불길 한가운데로 뛰어 들어가는 소방대원과 관광객과 어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해양경찰까지. 국민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앞서 이야기한 공무원들을 흔히 제복공무원이라고 이야기한다. 제복공무원의 사전적 명칭은 정해져 있지 않지만, 통상 소방관, 경찰관, 교도관 등 제복을 입고 근무하는 직종을 통칭한다. 제복공무원의 처우 개선에 관심이 높아지는 요즘 소방청에서 조금 특별한 프로그램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청소년 안전캠프가 진행된 강원도 태백의 365 세이프타운. 주차장 근처에서 행사 관련 홍보물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복공무원 자녀 소방안전 캠프(이하 안전 캠프)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프로그램은 지난 7월 16일부터 18일까지 강원도 태백소방학교 및 365 세이프타운에서 진행됐다. 제복공무원 중 소방과 경찰, 해경 공무원의 자녀와 순직 자녀의 초등학교 고학년 약 500여 명이 참여했는데, 정책기자단 자격으로 캠프가 진행되는 현장에 직접 방문해봤다. 집에서부터 세 시간도 더 떨어진 강원도 태백,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365 세이프타운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안전 체험관인 세이프타운은 다양한 재난 상황을 생동감 있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세이프타운의 가장 위쪽, 소방 안전 체험관에서 캠프의 주인공과 담당자를 만날 수 있었다. 담당자는 안전 캠프가 올해 3년 차를맞이했다면서 제복공무원 자녀들의 안전 캠프로는 2년 차 캠프라고 소개했다. 처음 캠프를 기획할 때 제복공무원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존중에 대해 생각해보는 방향으로 캠프를 기획했는데 캠프를 진행하며 아이들과 공무원들의 이야기를 더해 조금씩 더 나은 캠프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소방 안전 체험관에서는 농연 체험과 완강기 체험이 진행됐다. 긴장한 모습으로 완강기를 타고 내려오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사회 안전에 대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캠프지만, 제복공무원의 자녀들에게는 부모님의 직업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보면서 누군가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알아가도록 준비했다고 했다. 대화를 나누던 중 농연 체험과 완강기 체험을 진행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다음 프로그램으로 이동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종합안전체험관에는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안전 관련 체험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었다. 발걸음을 옮겨 옆 건물인 종합안전체험관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안전 체험을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는데, 캠프에 참여한 학생들은 조를 나눠 산불과 설해, 풍수해는 물론지진과 대테러에 관련된 체험을 진행했다. 소방안전캠프는 2박 3일동안 진행됐다. 아이들은 편안한 집을 떠나 텐트에서 지내며 서로 금세 가까워 진다고 한다. 그저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체험관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학생들은 모든 프로그램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었다. 체험관을 나오며 해당 체험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하면서도 실제로 어려움이 닥친다면 배운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도 나누는 것을 보니 단순한 체험 이상으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은 순간이었는데 이미 누구보다 가까워 보였다. 담당자에게 소방청에서 주관하는 캠프에 어떻게 다른 제복공무원의 자녀까지 함께하게 되었냐고 묻자 소방 현장에서 활동하다 보면 단순히 소방의 힘만으로 할 수 없는 일도 많다고 했다. 각자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며 때로는 자문하고, 때로는 협업하게 되는데, 타 기관에 대한 고마움과 앞으로의 유대 관계를 위해 경찰과 해양경찰의 자녀도 초대하게 됐고, 아이들이 잘 어울릴까 하는 걱정도 잠시, 친한 친구처럼 적극적으로 캠프에 참여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소방호스를 잡고 직접 물을 쏴볼 수 있던 주수체험. 방화복을 입고 호스를 잡은 모습이사뭇 진지했다. 잠깐의 휴식을 가진 후 차를 타고 세이프타운의 반대편에 있는 태백 소방학교로 이동했다. 소방학교는 평상시 강원지역 신입 소방관의 교육과 직무 향상 교육을 진행하지만, 학생들의 캠프를 위해 특별히 개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멀리 보이는 물줄기를 따라 체험장으로 이동했다. 가장 처음 마주한 체험은 주수(Fire Stream) 체험이었다. 앞서 방문한 세이프타운의 프로그램에는 약간의 재미가 더해졌다면, 소방학교의 프로그램은 생동감 넘치는 현장의 경험과 같았다. 방화복과 헬멧을 착용한 채 교관의 지시에 따라 주수하는 학생들의 모습에는 웃음기보다 진지함이 가득했다. 주수 체험을 끝내고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아이들 가운데서 우리 아빠는 진짜로 불 앞에 서야 될 거 아니야.라는 말이 들려왔다.학생들이 안전 캠프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일반인인 나에게는 그저 경험하기 힘든 것을 경험해본다는 체험일 수 있지만,아이들에게는 각자의 부모님이 마주하는 현장을 떠올리는 순간이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소방체험학교에서는 실전에서 쓰이는 다양한 장비로 생동감 넘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소방관들은 자리를 옮겨 다니며 학생들의 자세를 고쳐주곤 했다. 많은 생각이 들었던 주수 체험장을 뒤로한 채 소방학교의 나머지 체험장을 돌아봤다. 다음 프로그램을 위해 이동할 때는 노래도 부르고, 자유롭게 떠들다가도 수상 구조 체험에서 직접 로프를 던져보고, CPR과 응급처치를 직접 실습해보며, 드럼통 안에 불길을 향해 직접 소화기를 사용해보는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체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프로그램의 진행을 돕는 소방관들 역시 자세 하나하나를 교정해주며 올바른 방법을 익힐 수 있도록 도와주며 학생들에게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소방학교에서 진행됐던 생존수영. 여름철을 맞아 꼼꼼하게 생존수영에 대한 교육을 진행한 후 자유 물놀이 시간이 주어졌다. 학생들이 가장 환하게 웃던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2박 3일 동안 모든 프로그램을 로테이션 형식으로 체험하게 된다고 했다. 앞서 방문했던 세이프타운과 태백 소방학교의 프로그램들을 한 번씩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담당자는 많은 아이가 참여한 만큼 바쁘게 진행되지만, 야간 프로그램 때 만큼은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휴식을 취하며 친목을 다진다고 했다. 작년 제1회 제복공무원 캠프 때도 2박 3일간의 짧은 시간 동안 아이들이 굉장히 가까워지는 것은 물론, 부모님에 대한 이해도도 많이 높아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고 한다. 특히 지난 캠프에 대한 기억이 좋아 자원해서 참여한 소방관들 역시 적지 않다며 아이들을 위한 안전 캠프지만, 도움을 주고 있는 소방관들 역시 자부심과 책임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365 세이프타운 홈페이지에 대한민국 청소년 안전 캠프 관련 배너와 게시글을 확인할 수 있다.(출처=365세이프타운 홈페이지) 이날 진행된 제복공무원 자녀 대상 안전 캠프는 태백시에서 주최하는 대한민국 청소년 안전 캠프(7.16.~7.28.)의 1회차 캠프였다. 이하 2~4회차 캠프는 일반 국민의 자녀를 대상으로 진행되는데, 제복공무원 안전 캠프와 같은 환경, 소방관들의 지도아래 진행된다고 하니 안전 캠프에 관심 있는 국민이라면 추후 대한민국 청소년 안전 캠프를 기억해두면 좋겠다. 한편 정부와 국회에서는 제복공무원에 대한 존중 문화 확산과 처우 개선에 대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 국회에 이어 이번 국회에서도 제복공무원에 대한 다양한 지원 법안이 발의되어있고, 정부 역시 제복공무원의 근무 환경과 일상생활에서의 처우 개선을 위한 지원을 확대하고 있다. 정부와 국회의 노력도 물론 중요하지만, 제복공무원의 존중 문화와 처우 개선의 시작은 국민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자신을 희생하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이 순간에도 일선에서 근무하는 제복공무원을 생각하며 존중과 감사의 마음을 가져보자.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이정혁 jhlee4345@naver.com
- 숏폼 “한-체코 신규원전 사업” 다양한 분야의 경제협력으로 확대합니다! 7월 22일 산업통상자원부 안덕근 장관은이반 얀차렉 주한 체코대사와 만나 신규 원전 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도록협력해 나가자고 당부했습니다. 원전협력을 매개체로 체코와의 경제협력을포괄적, 전면적으로 확대해 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