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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는 역사의 땅 … '독도 영유권 문제'

어부 150명 '억울한 죽음' 독도 폭격사건

[일본은 죽어도 모르는 독도이야기 ⑦]

2005.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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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에 투하된 폭탄
미군정기인 1948년 6월 8일. 우리 어민들은 힘없는 백성의 서러움을 너무나 큰 비극으로 겪어야 했다. 미 공군기가 독도에서 고기잡이하던 어부들에게 폭탄을 퍼부어 150여 명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역사는 그것을 독도 오폭사건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실수로 폭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실수였는지 의도적인 폭격이었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독도의 악몽에 대해 보도한 언론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조선 동해상에 있는 독도 부근 해상에 있는 우리나라 어선을 미국 극동항공대의 중폭격기군이 이만 삼천 척 상공에서 폭격하야 11척의 어선을 침몰시키고, 14명의 조선인 어부를 살해한 일로 인하여 전국 동포는 불안으로 민심이 들끓었다.’(신천지 1948년 6월 30일)
“미국 극동함대 사령부가 독도 폭격이 고공폭격 연습대에 의한 것이라고 공식 인정했다. 이 성명서는 11척의 조선 어선을 총·폭격하여 14명의 조선인을 살해하고 기타를 부상시켰다고 전해진 이 사건을 불행한 유감스런 사고라고 말한다.”(동아일보 1948년 6월14일, 17일)


"태극기 흔들며 소리쳤지만 계속 총을 쏘았다"

독도폭격사건 희생자 위령제 : 푸른 울릉.독도 가꾸기 모임과 한국외대 독도연구회에서 주최한 위령제(2005. 6. 8.)
폭격에서 천우신조로 살아남은 어민들은 옷가지를 찢어 상처를 동여매고, 총알이 지나간 뱃전은 헝겊으로 구멍을 막아 울릉도로 도망쳐왔다고 한다. 당시 생존자 고(故) 김도암 씨는 “태극기를 흔들어 목메어 소리쳤지만 야속한 비행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총을 쏘아댔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숫자 등 폭격의 실상이 상당 부분 숨겨져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95년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과 한국외국어대 ‘독도연구회’가 생존자와 유가족의 증언을 기록한 결과 폭격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어민은 무려 15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진상규명 조차 제대로 안돼 50여 년 간 유족들 가슴에 응어리져 있는 이 사건은 폭격의 와중에서 살아남은 장학상 씨(당시 36세·1996년 사망) 등이 사건 직후 천신만고 끝에 울릉도로 돌아와 세상에 알려졌다.

장씨 등 생존자 2명은 “울릉도 방향에서 날아온 12대의 폭격기가 2개조로 나눠 600m 상공에서 선회하며 융단폭격, 조업현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30여 척의 동력선에 척당 5~8명이 타고 있었으니까 150여 명 정도가 숨졌다고 보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시 미군정은 사건발생 8일이 지나도록 폭격사실 등을 부인했다. 그러다 미 공군 극동사령부를 통해 미 제5공군 소속 B29폭격기가 어선들을 바위로 오인해 연습폭격을 했다고 발표했을 뿐 진상을 공개하지 않았다.

미군 돼지 1마리 값 위자료 지급

1948년은 미군이 이 땅의 모든 것을 쥐고 있을 때였다. 우리는 항의할 정부조차 없었다. 사건 직후 미군 당국은 소청위원회를 구성, 울릉도와 독도에서 피해 내용을 조사했고 1명을 제외한 피해자들에게 소정의 배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배상 내용, 독도를 연습대상으로 지정한 경위, 사고에 따른 내부 처벌 등의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독도의용수비대 홍순칠 대장의 자서전에 의하면 포항 주둔 미 육군 소속의 몇 명의 장교와 사병이 울릉도에 들어와 배상문제를 처리했다고 한다. 당시 어른은 500환, 미성년자에게는 300환의 위자료를 지급했다는 것이다. 이 돈은 당시 미국 돼지 1마리에 해당되는 가치에 불과했다고 한다.

1950년 4월 25일 대한민국 수립 후 정부는 미 제5공군에 이를 조회했다. 미군은 같은 해 5월 4일자로 “독도와 그 근방에 출어가 금지된 사실이 없었다는 것과 또 독도는 극동 공군의 연습 목표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공식 회답을 받았다.
그러나 미군기에 의한 독도 폭격사건은 1952년에도 있었다. 1952년 9월 한국산악회가 제2차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단을 파견했는데, 미군기의 독도 폭격으로 독도에 상륙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해야 했다. 당시 독도에는 어민 23명과 해녀들이 있었는데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다.
우리 정부는 독도가 미 공군의 연습기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미군 측에 항의했다. 미 공군 사령관은 이에 대해 “1953년 2월 27일 자로 독도는 미 공군을 위한 연습기지로 선정됨으로부터 제외되었다”는 공식 답변을 내놓았다. 1948년의 폭격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때까지 연습기지 해제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공군의 연습 목표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답변은 거짓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미군기 독도 폭격사건은 50년 가까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끝나지 않은 진행형이다. 이 사건도 노근리 사건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 유족들에게 합당한 보상 등이 이뤄져야 한다.

1995년 6월 23일, 7월 20일 - ‘푸른 울릉·독도가꾸기 모임’과 한국외대 ‘독도연구회’는 1948년 독도폭격 생존자들과 면담 취재했다.



태극기 흔들며 “살려 달라”
공두업 씨의 증언(1995년 현재 83세)
공두업 옹

“1948년 6월경 독도(서도 물골 근처)에서 미역채취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난데없이 비행기(증언으론 몸체 곳곳에 총구가 나와 있는 것으로 보아 폭격기로 추정된다)가 날아와 바다 위로 기관총을 난사했다. 갈매기들이 총에 맞아 무수하게 널렸고, 바다는 핏물로 변했다.”
공 씨는 급히 배를 돌려 울릉도로 돌아왔다. 독도에서 미역채취를 못하면 생계가 곤란했기 때문에 당시 경찰총무였던 이종오 씨에게 독도 폭격사실을 보고했다. 며칠 뒤 안심하고 조업을 하라는 이종오 씨의 통보를 받고 2차로 미역채취를 위해 독도에 배를 띄웠다.
그런데 그날 또 폭격이 있었다. 폭격시간을 아침 10~11시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는 공씨는 당시 바다 위에 떠있는 배들의 숫자를 32척으로 기억하고 있다. (본인이 직접 세어보았다고 주장) 강원도에서 온 배들이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그 중의 한 척은 미역과 물물교환을 위해 쌀, 술 등을 싣고 온 배였다.

울릉도 주민 김유길 씨는 “96년 경 주문진에 사는 중년의 형제가 찾아와 40년대 후반 아버지가 미역 채취하러 독도에 들어갔다가 돌아가셨다며 위령비가 어디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다”고 기억한다. 김씨는 “당시 사건 현장에는 강원도 어선이 대부분이어서 사망자의 대다수도 강원도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전한다.
공씨의 증언에 의하면, 서도 쪽에서 조업을 하던 배들은 모조리 가라앉았으며, 어부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도주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파괴되지 않은 배는 강원도 소속의 배 1척과 공씨의 배였으며, 그나마 파편과 충격으로 인해 심하게 파손된 상태였다고 한다.

생존자 죄책감 · 현장 충격으로 정신적 고통

생존자들은 자신들만 살았다는 죄책감과 참혹한 현장의 충격으로 고통스러워했다고 가족들은 전한다. 공두업 씨의 아들 공태우 씨는 “느거는 우째 살아왔느냐며 통곡하는 유족들을 피해 아버지는 한 달 가까이 산에 숨어 있었다. 아버지는 지옥 같은 폭격현장에서 친구들을 데리고 나오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한스러워했다”고 말한다. 그 후 사건 자체에 대해 입을 열지 않던 공두업 씨는 지난 90년 이후에야 단편적으로 증언을 시작했다.
지금까지의 희생자의 수는 30여 명으로 알려졌으나 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서도 부근에서 격침된 배에 승선한 인원들은 1척 당 5~8명이어야만 조업이 가능한 배들이었기에 최소한 150~320명 정도의 인원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된다. 공씨는 살아 돌아온 후 경찰서로 찾아가 이종오 씨에게 격렬한 항의를 했으나 어떤 변명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배상문제에 관해선 공씨 자신이 어떤 배상도 받지 못했으며 다른 희생자 가족에게도 배상이 되었는지 여부조차 잘 모르겠다고 증언했다.



“수백 명은 죽었어”
장학상 씨의 증언(1995년 현재 83세)
장학상 옹

당시 배를 소유한 선주였으며 공두업 씨와는 달리 동도 쪽에서 조업(미역채취)을 하던 중 폭격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폭격은 서도 물골 근처에서 시작되어 동도로 융단폭격이 이어졌으며, 12대의 폭격기가 2개의 편대로 나뉘어져 폭격을 했다고 한다.

그 때 장씨는 미역을 말리기 위해 동도에 상륙해 있었으며 600m 상공에서 시작된 폭격에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배가 가라앉는 참상이 벌어졌다고 한다. 폭격이 끝난 후 자신의 배를 이끌고 울릉도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항해가 불가능했다. 당시 옆구리가 파편으로 찢어진 이와 발목이 파편으로 날아간 강원도 사람 2명과 함께 공두업 씨, 이상주 씨 등이 상처를 입고 있었다.
장씨는 울릉도로 돌아온 후 한 달 가량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며 그 때 미국인들이 찾아와 병세를 묻던 기억이 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그 역시 공두업 씨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동력선 1척 당 5~8명이 있어야 조업이 가능한데, 그 당시 동도와 서도 합쳐서 약 80여 척의 배(이것은 동력선과 거기에 딸린 배에 싣고 온 소형 배들을 모두 합쳐서 낸 숫자임)가 있었고, 거의 다 침몰했다고 한다. 공씨가 서도에서 폭격당하며 본 희생자들의 숫자에 동도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숫자를 합하면 희생자의 수는 더 늘어나게 된다.



“보상은 없었다”
폭격 당시 사망한 김태현 씨 아들 김찬수 씨의 증언
김찬수씨.

김찬수 씨는 당시 상황은 주위 어른들에게 들은 것이라며 입을 열었다. 폭격 당일 날 오전 11시 경 비행기들이 독도 쪽으로 떼 지어 날아가는 것을 울릉도 사람들이 보았다고 한다. 얼마 뒤 독도 쪽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을 울릉도 주민들이 목격하고 “이제 독도 사람들 다 죽었다”며 불안과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당시는 나이가 어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겠으나, 후에 미군 측에서 보상금과 물건이 나왔는데 이것은 희생당한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위령제 경비로 다 쓰이고 희생자 가족 측에서는 보상금을 받지 못했다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알려줬다.


김성호 :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도연구회’와 인연을 맺었다. 1988년 울릉도-독도 뗏목 탐사를 시작으로 수차례에 걸쳐 독도를 탐사하고, 독도를 주제로 한 각종 전시회를 진행했다. 1993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40주년 기념행사, 2005년에는 독도폭격사건 희생자 위령제를 진행했다. 주요 저서로 <재미있는 대학여행>, <한국의 만화가 55인> 등이 있고, 공저로 <친일변절자 33인>, <부끄러운 문화답사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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