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 영역
- “국민이 올바른 부동산정책 지키는 지지자 돼야” 건설교통부 이춘희 차관은 12일 “앞으로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며 올바른 방향의 부동산 정책을 지키는 지지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차관은 이날 오후 10시부터 방송된 한국정책방송 KTV의 <특집대담, 대한민국 부동산 40년>에 출연, “참여정부는 불패신화가 뿌리 깊이 자리 잡은 대한민국 부동산 시장의 근원적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왔다”며 “특히 ‘거래시장 투명화’와 ‘주거복지의 진일보’라는 성과를 바탕으로 이제 국민들이 비판만 하는 제3자가 아니라 올바른 정책을 지키는 지지자로 서야 한다”고 밝혔다. 이 차관은 또 “어떤 상품이든 가격이 올라가면 수요가 줄어드는 것이 시장원리이지만 땅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경우 주택시장에서 만큼은 이런 시장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며 “분양가 상한제나 원가 공개가 시장원리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같은 우리나라 주택시장의 특수성을 외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특집대담에서 이 차관은 “정부의 일관된 부동산시장 안정화 의지와 집이 소유가 아닌 거주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실거래가 신고’와 ‘과표 현실화’ 등을 통한 거래시장 투명화와 종부세를 비롯한 부동산 세제 합리화로 이어졌다” 며 “이 같은 핵심 정책들이 일관성 있게 유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정책방송 KTV의 이날 특집대담은 지난 40년 동안 정부 부동산정책의 역사를 실록 형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대한민국 부동산 40년’(한스미디어) 출간에 맞춰, 이 책을 통해 앞으로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 어떤 교훈과 시사점을 얻어야 하는지 알아보는 대담 프로그램. 시사평론가 김방희 소장의 사회로 이 차관과 박헌주 대한주택공사 주택도시연구원장, 책을 집필한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이 출연해 진행됐다. 이날 대담에서 박헌주 주택도시연구원장은 “‘대한민국 부동산 40년’은 부동산 정책의 탄생과정에 얽힌 고뇌와 갈등 등 숨은 이야기를 통해 국민들에게 부동산 정책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돕고 있다”며 “과잉 유동성 관리에 다소 미흡했다는 점도 객관적이고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의 가장 큰 성과로 실거래가 신고제와 과표 현실화를 들고 “가짜와 은닉으로 뒤틀린 우리 부동산시장의 인프라를 완전히 바꿔놓았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 부동산 40년’은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이 지난해 말부터 지난 3월까지 3개월에 걸쳐 연재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을 단행본으로 묶어낸 책이다. 국민들이 부동산 정책을 보다 정확하고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부동산 불패신화의 근원을 파헤치고 정책형성과정의 고뇌와 숨은 이야기 등을 생생한 실록 형태로 옮겼다. 특히 전현직 부동산 정책 담당자들을 직접 인터뷰하고 부동산 관련 문헌과 보고서, 연구자료를 분석하고 국회속기록과 신문 보도 등을 하나하나 뒤져가며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정책역사를 기록했다. 한국정책방송 KTV의 <특집대담, 대한민국 부동산 40년>은 15일(일요일) 밤 11시부터 재방송되며 KTV 홈페이지(http://www.ktv.go.kr/)에서도 시청할 수 있다. ☞ <특집대담, 대한민국 부동산 40년> 동영상 보기 2007.07.12
- “향후 집값? 정책을 알아야지!”…‘대한민국 부동산 40년’ 출간 올 하반기에도 집값이 약세를 보일 것으로 전망되는데 오는 9월부터는 무주택자에게 유리한 청약가점제가 실시된다. 그리고 오는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다. 과거 대선을 앞두고는 각 후보들의 선심성 개발공약과 규제완화 공약 등으로 인해 집값이 오르곤 했다. 집값이 오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황이어서 무주택자들과 집을 넓히려는 유주택자들은 마냥 헷갈린다. 강력한 규제로 이제 더 이상 부동산의 시대는 끝났다는 주장이 나오는가 하면, 40년 이어온 부동산불패가 그렇게 쉽게 끝나진 않을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이처럼 갈피를 잡기 힘들 때는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도 방법이다. 지난 부동산정책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이 생겨난다. 참여정부 부동산정책 객관적 평가 시도 때마침 지난 40년동안의 부동산정책을 정책 내용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이 나왔다. 국정브리핑 특별기획팀이 지난해 말부터 지난 3월까지 3개월에 걸쳐 연재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을 단행본으로 묶어 ‘대한민국 부동산 40년’(한스미디어)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다. 단행본으로 묶으면서 겹치는 내용을 쳐내고, 총 4개 파트로 재구성하면서 전체적으로 일관된 관점을 갖도록 했다. 첫 번째 파트에서는 참여정부 기간 집값 급등의 원인을 유동성과 공급시차, 이전 정권의 규제완화, 정책불신 등의 관점에서 분석했다.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에 대한 정부 공인 평가인 만큼 일독할 만하다. 두 번째 파트에서는 종합부동산세, 양도세, 분양가 상한제, 주택청약제도 등 각 정책별 이력을 되짚으면서 어떻게 지금과 같은 제도가 남겨졌는지 추적했다. 부동산정책의 큰 흐름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매우 유용할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부동산정책에 처음 입문하는 학생들, 관련 기사를 쓰는 언론사 기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세 번째 파트는 그동안 시장논리에 치여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주거복지정책을 다뤘다. 주거복지정책을 독립된 파트로 다뤘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철학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다. 마지막 파트는 책 전체 내용을 정리하면서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의 공과를 평가하고, 향후 부동산정책을 세울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을 밝혔다. 부동산불패란 정책 불신의 다른 이름이며, 부동산불패를 끝내려면 어떤 정치적 유혹의 순간이 와도 정책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부동산정책 정리한 첫번째 대중서 그동안 부동산은 우리사회의 식지 않는 이슈였으면서도 아직까지 정책의 역사를 정리한 변변한 책 한 권 나오지 못했다. 사실 서점가를 점령했던 대부분의 부동산 서적은 얄팍한 내용의 투기 안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역대 정부마다 정권의 명운을 걸고 매진했던 부동산 정책의 앞과 뒤를 실록 형태로 정리해 낸 최초의 공식 기록이다. 정책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정책의 ABC를 추려내길 원하는 진지한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 각종 자료와 인터뷰를 담은 재밌는 구성이어서 누구라도 쉽게 읽어내려 갈 수 있다. 언론사 기자들도 기사를 쓸 때마다 필요한 페이지를 찾아 참조한다면 훨씬 윤택한 기사를 만들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문 연구자들이 부동산정책 관련 1호 서적인 이 책을 일독한 뒤 더 나은 책을 써준다면 이 책의 의미는 더욱 빛날 것이다. 2007.07.09
-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연재 마칩니다 지난 1월 말부터 국민과 언론의 관심 속에 연재됐던 기획물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이 13일 마지막 22회 분 기록을 끝으로 3개월 간의 대장정을 마칩니다. 지금까지 연재된 내용은 이르면 다음달 말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지난 40년 동안의 부동산정책을 되짚어보면서 정책적 시사점과 교훈을 얻고자 했던 이번 기획은 폭넓은 자료조사, 객관적이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호응을 얻었습니다. 특히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의 미흡했던 부분까지 숨김없이 기록함으로써 참신하고, 용기있는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역사적 진실의 힘을 빌어 투기세력의 정책흔들기에 맞서려는 시도였습니다. 부동산 정책사를 정부 차원에서 정리하려는 기획은 지난해 하반기 집값이 오르면서 부동산정책의 근간을 흔들려는 시도가 다시 고개를 들 때 시작됐습니다. 특히 역대 정부의 노력에도 ‘부동산불패 신화’가 좀처럼 꺽이지 않는 역사적 뿌리를 파헤쳐 근본처방을 마련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왜 올랐고 △어떤 정책을 폈는데 왜 실패했으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등 논리적 순서에 따라 제기된 의문에 대해 각각의 역사적 연원을 밝히는 방식으로 연구와 취재를 진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주기적인 경기부양 요구에 따라 오락가락했던 정책관행이 불패신화의 뿌리이며, 향후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정책일관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참여정부의 경우 종부세, 과표현실화 등을 통해 조세형평성을 높이고, 실거래가 신고 의무화, 양도세 실가과세 등으로 시장투명화의 기반을 확립하는 등 주목할 만한 성과를 냈지만 한편으론 공급시차와 과잉 유동성 관리에 다소 미흡했음을 공정하게 평가했습니다.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정리 작업은 국정브리핑과 주택도시연구원, 국토연구원, 금융연구원 등이 참여한 특별기획팀이 중심이 됐지만 정부 관련부처가 함께 한 작업이었습니다. 정부 기록을 확인하고, 관련 공직자를 인터뷰하는 한편 기존 연구성과를 종합하는 등의 작업은 관련부처의 적극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이뤄졌습니다. 특히 참여정부 정책을 평가할 때는 부처간 이견도 없지 않았습니다. 내부 논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열의에 찬 과정이 이번 기획의 객관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계기가 됐습니다. 경향신문 부동산담당 박재현 기자는 “잘못은 감추고, 성과만 부풀리는 기존 관행에서 벗어나 정책추진의 미진한 점까지 스스로 고백한 것은 아주 참신하고 신뢰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스피드뱅크 부동산연구소 박원갑 소장은 “일방적으로 강변하지 않고, 과거 역사를 통해 정부 정책을 이해시키려했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대국민 홍보전략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유는 현재의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조망해보기 위해서입니다.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의 기저를 이루는 문제의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 기획을 통해 국민들이 정부 정책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고, 투기세력과 싸워왔던 정부의 노력에 동참하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또 정책담당자를 비롯해 전문가 집단, 언론인 등이 부동산정책을 보다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2007.04.13 특별기획팀
- “돈 걱정 말고 공급하시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지금까지 연재된 1~3부에서 지난 40년 간의 부동산정책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항구적인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교훈과 정책적 시사점을 얻고자 했습니다. 마지막 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정책'에서는 역대 정부가 재정 부족 등을 이유로 전향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던 임대주택정책 등 주거복지정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향후 과제를 살펴 볼 것입니다. <편집자> 총론 제1부 왜 올랐나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제3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첨부 :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평가 전문가 설문조사> 제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 정책 ① 전·월세보호대책의 과거와 현재 ② 임대주택의 역사1 - 예산부족과 임대주택 ③ 임대주택의 역사2 - 주거복지 실현을 향한 노력 (시리즈 끝) “공무원들이 사후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피해자가 양산되지 않도록 대책을 세우십시오.” 2005년 5월 20일 예정에 없던 수석·보좌관회의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은 굳은 표정이었다. 매주 금요일 열리는 수보회의(수석비서관·보좌관 회의)는 통상 비서실장이 주재해오던 것으로,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갑자기 이 회의에 노 대통령이 참석한 것은 이틀 전 방송된 KBS ‘추적 60분’을 보고 대노했기 때문이었다. 건설업체 부도로 인한 입주자 피해를 줄이는 대책을 만들겠다는 ‘임대주택 정책 개편방안’을 발표한 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임대아파트에서 쫓겨난 할머니 ‘추적60분’은 민간 건설업자의 편법, 행정당국의 무사안일, 은행의 무책임으로 수 만가구에 달하는 임대아파트 세입자들이 보증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쫓겨나고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방송에 소개된 한 할머니는 살고 있던 임대아파트 부도로 보증금을 몽땅 날리고 말았다. 20년 넘게 유리공장에서 일해 번 알토란같은 돈이었다.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할머니는 월세방에서 어려운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할머니의 통장에 남은 돈은 고작 10원뿐이었다. 노 대통령은 이런 내용을 담은 녹화테이프를 참석자들과 20분 간 함께 시청한 뒤 대책마련을 지시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대통령의 지적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이날 이후 건교부는 대책마련에 착수, 2006년 12월 ‘부도공공임대주택 임차인 보호 특별법’이 탄생했다. "돈 걱정 말고 임대주택 늘려라" 노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임대주택 정책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은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이 2002년 6월이었는데, 이때 이미 임대주택을 늘려야 한다는 인식이 머리에 각인돼 있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의지는 2006년 4월 25일 열린 주거복지토론회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노 대통령은 한행수 당시 주공사장에게 “돈 빌려다 쓰십시오. 정부가 뒷감당해주겠습니다. 재정능력에 따른 공급정책이 아니라 수요에 맞춘 공급정책으로 전환합시다”라고 말했다. 역대 정부의 임대주택정책은 언제나 재원 부족을 이유로 흐지부지되곤 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서민 주거안정에 대한 확고한 정책의지이다. 2007년 1·31대책에서 발표된 '임대주택펀드' 아이디어처럼 '돈 문제'는 궁(窮)하면 통(通)하게 마련이다. 주거복지 로드맵 임대주택정책은 기본적으로 서민의 주거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하지만, 노 대통령은 공급확대를 통한 시장안정효과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김 비서관의 말이다. “대통령이 임대주택을 강조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임대주택으로 시장 실패를 보완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장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수준으로 공급되어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초기에 2% 내외였던 임대주택 비중을 2012년까지 12%로 확대하기로 결정했다.” 참여정부 임대주택 정책의 근간은 2003년 5월 발표된 ‘주거복지 로드맵’이었다. 주거복지 로드맵은 소득수준에 따라 맞춤형 주택을 공급한다는 큰 틀에 따라 소득 7분위 이상 중산층은 시장기능에 맡기고, 소득 4분위 이하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국민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국민임대주택의 공급확대에는 커다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자체 "우리 동네는 안돼" 역대 정부는 임대주택 건설에 재정을 적극적으로 투입하지 않았지만 택지공급은 여유가 있었다. 참여정부 때는 반대였다. 재정은 확대할 수 있었지만 부족한 택지는 정부 마음대로 늘였다 줄였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민임대주택 100만호를 건설하기 위해선 약 1억4000만평의 택지가 필요했다. 그러나 서울 등 임대주택 수요가 많은 대도시 인근지역은 1980년대에 이미 대규모 택지개발이 끝난 상태였다. 국민의 정부 말 모자란 택지를 확보하기 위해 보존가치가 적은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를 해제해 국민임대주택을 건설한다는 방침이 정해졌다. 그러나 사업승인권을 갖고 있던 지방자치단체가 임대주택 건설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대부분의 지자체는 자기 지역 안에 저소득층이 주로 거주하는 국민임대주택 단지가 건설되는 것을 반대했다. 대신 남는 땅을 조금이라도 지역경제에 보탬이 되는 쪽으로 활용하길 원했다. 또 국민임대주택단지가 들어서면 세수 확대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반면 복지비용 등 재정부담이 늘어날 가능성이 있었다. 지역주민들도 슬럼화, 집값 하락 등을 우려해 국민임대주택단지 조성을 반대했다. 그린벨트 해제도 반대? 그린벨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수 십년 동안 재산권을 제약 받아온 지역주민들은 많은 보상을 요구하며 지구 지정을 반대했다. 2001년 11월 대한주택공사에 따르면 같은해 전국 지자체의 국민임대주택 승인비율은 신청분의 37.5%(1만3108가구)에 불과했다. 반면 같은 기간 분양주택과 5년짜리 공공임대주택의 승인비율은 각각 74.2%, 60.1%였다. “저소득층의 주택문제에 대해 솔직히 지방자치단체가 관심을 더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지자체가 자기지역 주민들의 열악한 주거환경 문제를 혐오시설같이 취급합니다. 저는 그 실정이 참 안타까운데, 영세민들에 대한 주거문제를 중앙정부는 걱정하고, 해당 지자체는 쓰레기매립장 보듯이 해서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데, 이 문제 때문에 임대주택사업이 잘 안 됩니다.” 2003년 11월 11일 국회 건설위원회에 출석한 최종찬 건설교통부 장관의 말에는 지자체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한 서운함이 배어있다. 특별법으로 국민임대주택 건설 건교부는 2002년 말부터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건교부 유두석 주택관리과장(현 장성군수)을 반장으로 구성된 실무작업반은 2003년 2월 말 국민임대주택 건설 특별법 초안을 마련, 같은해 12월 국회를 통과했다. 법안의 주된 내용은 △과거 3~4년 걸리던 택지 확보 절차를 간소화해 기간을 2년 가량으로 줄이고 △대도시 인근 그린벨트 중 보전가치가 낮은 지역을 대상으로 국민임대주택 단지 예정지구를 지정할 수 있도록 근거를 마련하는 한편 △건교부 장관이 사업승인권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특별법이 제정된 뒤 국민임대주택 건설량(사업승인 기준)은 대폭 늘어났다. 2002년 5만2500호에 불과했던 건설량은 이듬해 7만1791호, 2006년 9만6812호로 대폭 늘었다. '저소득층용'이란 이미지 그러나 기존 임대주택이 가진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일부 지자체와 지역주민의 반대는 그치질 않았다. 6공화국 때 건설된 영구임대주택의 영향이 컸다. 당시 정책목표가 단기간 대량공급이었던 탓에 영구임대주택은 대규모 택지사업이 가능했던 서울 외곽에 1000~2000가구씩 건설됐다. 그리고 이곳에 저소득층이 집중되면서 임대주택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확산됐다. 영구임대주택의 입주대상자는 원래 생활보호대상자 등 최저소득계층이었지만, 미분양되면서 일반 청약저축가입자로 확대됐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나마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진 이들도 입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대부분은 1~2년 뒤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 이들의 빈 자리를 기초생활수급자, 장애인 가구 등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채우면서 점점 더 ‘저소득층 단지’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박신영 주택도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나라의 임대주택이 ‘저소득층용’이라는 이미지 대신 유럽처럼 ‘근로자용 임대주택’이라는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이미지를 가졌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아쉬워했다. 임대주택도 '명품'으로 건교부는 임대주택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 초점을 맞췄다. 2004년 12월 건교부가 내놓은 ‘명품단지’ 계획이 시작이었다. 경기 의왕시 청계지구, 안양시 관양지구 등 총 3곳을 각각 테마공원과 완충녹지, 생태학습장 등이 들어선 환경친화단지, 문화공간과 다양한 공원시설이 들어서는 문화주택단지 등 명품단지로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계획을 내놨던 강팔문 전 기획단장은 “명품단지 계획은 지자체를 설득하기 위한 논거였다"며 "국민임대주택을 형편없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꿀 필요가 있다고 보고, 광고효과가 있는 곳을 선정해서 명품단지로 홍보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밖에 경기 수원과 서울 용산구에 국민임대주택 홍보관을 만들었다. 일반 시민들이 국민임대주택을 직접 본다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취지였다. 건교부 국민임대주택건설기획단 관계자는 “지자체의 반대를 뚫으려면 국민임대주택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2007년 7월 의왕 청계지구를 시작으로 입주가 시작되면 인식이 조금씩 나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구별짓기에서 섞어짓기로 또 2004년 말 계층간 이질감을 없애기 위해 국민임대아파트와 분양아파트를 같은 단지 안에 섞어짓는 , 이른바 '소셜 믹스(Social Mix)' 방침이 정해진다. 관리의 편이성 등을 이유로 임대주택과 분양주택을 각각 격리시켰던 기존 방침을 바꾼 것이다. 강팔문 당시 국민임대주택건설 기획단장의 이야기다. “당시 국민임대주택에 대한 비판 중 하나가 저소득층만 모여 살기 때문에 ‘섬’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뿐 아니라 동 안에서도 층별로 섞어서 짓자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반대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바로 옆에 사는 사람과 자신의 생활 차이가 확연히 드러나기 때문에 더 적대적 관계가 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2007년 현재 주공은 경기 군포시 당동2지구에 시범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5개 단지 중 2개 단지에서 시범적으로 '소셜 믹스단지'를 조성할 계획이다. 우선 1개 단지는 한 동 내에 임대주택 89세대, 분양 196세대를 섞어서 짓고 다른 1개 단지는 동별로 구분해 임대 320세대, 분양 539세대를 짓는다. 주공은 단지 입주자의 반응을 살펴본 뒤 문제점을 보완해 사업을 확대할 방침이다. "서울시 정책 좋은 것 같다" 임대주택이 도시 변두리에 몰려 있어 도심 내 직장과 너무 멀다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세대·다가구 매입임대사업도 추진된다. 이 사업은 원래 서울시의 아이디어였다. 2002년부터 2년간 서울시는 다세대·다가구 매입임대사업을 폈지만 곧 포기하고 말았다. 모두 800억원을 들여 1251호(175채)를 사들였지만 저소득층이 외면해 667호가 빈집으로 남았다. 대부분의 매입주택이 낡은데다 임대료도 비쌌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이 사업을 받아들였다. 이 정책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03년 5월 확정된 주거복지 로드맵에서였다. 이는 노 대통령의 생각이었다고 한다. 김수현 비서관의 이야기다. “노 대통령이 후보 시절 서울시의 정책을 들어보고 ‘좋은 것 같다. 낡은 걸 사들여서 공공이 지원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해서 채택한 정책이었다. 도심지에 노후한 것을 사 모아서 임대하고 낡으면 그곳을 공영 재개발해 임대주택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실패를 거울 삼아 성공적 출발 2004년 503가구로 시작한 이 사업은 2005년 4539가구, 2006년 6639가구로 확대됐다. 임대료는 영구임대주택과 국민임대주택의 중간 수준인 보증금 250만~350만원, 월임대료 8만~9만원 정도였다. 주택도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주거환경도 좋고 임대료도 저렴해 입주자들의 만족도는 80%에 달했다. 성공에 힘입어 건교부는 2005년 4월 도시서민의 생업여건과 교통, 주거편익을 감안해 기존의 다세대·다가구 매입임대주택 외에 전세임대와 신축 임대제도를 도입하기로 했다. 전세임대는 정부가 주택을 전세로 임대해 다시 세입자에게 임대하는 방식이다. 신축 임대는 노후불량 주택을 매입한 뒤 이를 철거하고 다시 지어 임대하는 방식을 말한다. 2006년까지 정부는 전세임대 5931호, 신축임대 17호(사업비 과다로 2006년 보류)를 공급했다. 2007~12년까지 다세대·다가구 매입임대, 전세임대 등 도심 내 임대주택 12만여호가 공급될 예정이다. 부도 임대아파트 보증금 보장 참여정부의 주거복지 정책은 국민임대주택 뿐 아니라 민간이 건설한 기존 공공임대아파트에도 적용됐다. 대표적인 것이 부도 임대아파트 세입자를 위한 대책이었다. 2005년 5월 KBS ‘추적 60분’을 본 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건교부는 부랴부랴 대책마련에 착수했다. 건교부가 마련한 안은 이해찬 당시 국무총리가 주재한 자리에서 한번 퇴짜를 맞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 2006년 12월 ‘부도공공임대주택 임차인 보호 특별법’으로 결실을 맺었다. 이전까지는 공공임대주택이 부도가 나면 경매를 통해 1순위인 국민주택기금이 대출금을 회수해갔다. 세입자가 보증금을 100%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별법은 부도 임대아파트 세입자의 보증금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해준다. 또 주공이 부도 임대아파트를 사들여 국민임대주택으로 다시 공급할 때, 기존 임차인이 우선적으로 입주할 수 있도록 했다. 2006년 8월 말 현재 부도 임대아파트는 395단지 9만4582호. 주공은 이중 1474세대를 매입했다. 2007년 상반기 관련 시행령과 시행규칙이 만들어지면 보다 본격적인 매입작업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소유에서 거주- 공공임대주택 20% 시대로 2007년 1·31대책에서는 2017년까지 중산층용 '비축용 임대주택' 50만호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임대주택정책의 수혜자가 중산층으로까지 넓어졌다. 특히 비축용 임대주택은 10년간 임대한 뒤 공급부족 등 시장상황에 따라 매각할 수 있기 때문에 시장 안정기능까지 갖고 있다. 노 대통령이 강조해온 것처럼 ‘상평창’ 역할을 하는 임대주택인 셈이다. 이밖에 2017년까지 국민임대주택 50만가구, 10년 민간임대 및 전세임대 주택 30만가구를 늘리는 한편 기존 5년짜리 임대주택을 10년 임대주택으로 전환하는 방법으로 25만가구를 추가공급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임대주택수는 2017년 340만가구로 늘어나 전체 가구의 20%에 달하게 된다. 민간의 주택공급이 위축되더라도 공공부문이 충분히 지어 주택재고량을 넉넉히 확보하겠다는 포석인 것이다. 또 과거 주거불안을 덜어줄 공공 임대주택이 넉넉치 않아 필사적으로 주택을 소유하려는 경향이 강했던 만큼 앞으로 장기 공공임대주택을 충분히 늘리게 되면 거주중심의 주거문화가 뿌리내릴 것이라는 점도 고려됐다. 임대주택 확대에 필요한 재원은 보험, 연기금 등이 참여하는 수 조원대의 부동산펀드를 조성, 이를 주공, 토공 등 공공부문에 출자하는 식으로 마련한다. 사업 초기 발생할 수 있는 투자 손실은 정부 재정으로 보존하게 된다. '임대주택펀드' 라는 아이디어 1·31 대책은 노 대통령의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6년 말 노 대통령은 ‘비축용 임대주택을 많이 짓고, 여기에 필요한 재원은 임대주택펀드를 만들어 충당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를 서종대 현 건교부 주거복지본부장이 구체화해 1·31대책이 탄생한 것이다. 특히 임대주택펀드는 고질적인 재원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돌파구였다. 주공이 임대주택 건설을 획기적으로 늘리기 어려웠던 것도 국민임대주택을 지으면 지을수록 부채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더라도 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한계가 있는 만큼 부동산펀드라는 방식으로 자금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임대주택펀드는 시중의 노는 돈(유휴자금)을 이용하기 때문에 재정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정부는 재정으로 투자손실분만 메꿔주면 되고, 투자원금은 임대기간이 끝난 뒤 비축용 주택을 판 돈으로 돌려주면 된다. 2007년 하반기쯤 시범사업으로 추진되는 비축용 임대주택 5000호 건설을 위한 임대주택펀드가 첫 선을 보이게 된다. "다음 정부가 덕 볼 것" 이처럼 참여정부는 2003년 출범 직후부터 임대주택 공급 확대에 주력했지만 실제 입주물량은 많지 않다. 사업승인, 택지확보에서부터 실제 입주까지 보통 3~4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강팔문 전 기획단장은 “국민임대주택 사업승인물량은 많은데 실질적인 입주는 아직 많지 않다"며 "하지만 일단 사업승인된 물량은 언제든 건설된다는 생각에 정권이 바뀌더라도 일정량이 쏟아지도록 (이번 정부가) 힘을 많이 실어줬다”고 말했다. 참여정부의 줄기찬 노력은 다음 정부 들어 입주가 본격화되면서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건교부 추정에 따르면 국민임대주택 입주물량은 2007년의 경우 전년도와 비슷한 3만4500가구 정도에 머물지만 △2008년 5만6600가구 △2009년 8만가구 △2010년 이후 매년 10만가구로 점차 늘어난다. 임서환 주택도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주택정책에서 참여정부가 한 가장 큰 기여 중 하나는 주거빈곤층을 위한 실질적 주거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다음 정부에서도 이를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07.04.13 특별기획팀
- “정부가 바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지금까지 연재된 1~3부에서 지난 40년 간의 부동산정책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항구적인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교훈과 정책적 시사점을 얻고자 했습니다. 마지막 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정책'에서는 역대 정부가 재정 부족 등을 이유로 전향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던 임대주택정책 등 주거복지정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향후 과제를 살펴 볼 것입니다. <편집자> 총론 제1부 왜 올랐나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제3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첨부 :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평가 전문가 설문조사> 제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 정책 ① 전·월세보호대책의 과거와 현재 ② 임대주택의 역사1 - 주거복지와 예산부족의 딜레마 ③ 임대주택의 역사2 - 주거복지 실현을 향한 노력 “앞으로의 주택정책은 지금까지의 1가구 1주택 소유의 의식구조를 1가구 1주택 거주 개념으로 전환해나가는 방향으로 시책을 해나가고자 합니다. 주택구입능력이 없는 저소득층에 대해서는 임대주택을, 중산층을 위해선 분양주택을 건설·공급해나가고자 합니다.” 1982년 2월 26일 국회 임시회의에 출석한 유창순 당시 국무총리의 말이다. 임대주택의 필요성은 두 말하면 잔소리다. 어느 나라에나 집 없는 저소득층이 있기 마련이고 국가는 이들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싼 값에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의 확보야말로 현대 복지국가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인 것이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임대주택 정책은 관심부족, 재정 부족 등으로 그다지 활기있게 진행되지 못했다. 주택공급을 민간자본에 의존했던 역대 정부는 자본회수가 느린 임대주택 역시 민간자본에 기대려고 했다. 그래서 임대주택 역시 주택경기의 부침에 영향을 받았다. 정부는 임대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민간 건설사에 각종 유인책을 제공했다. 그러나 민간은 자본 회수가 느린 임대주택 사업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설사 임대주택을 건설하더라도 민간은 짧은 시간만 임대한 뒤 분양해버리는 명목상의 임대주택을 건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대로 된 임대주택의 역할을 해내지 못했던 것이다. 정부는 1980년대 후반 국가재정을 들여 50년 이상 임대하는 영구임대 주택을 건설했지만 재정문제로 확대되지 못했다. 재정 투입을 통해 장기 임대주택이 활성화되기 시작한 것은 IMF 외환위기 이후 국민의 정부 때였다. 개봉동 '난장이의 집' 임대아파트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한 임대주택은 주택공사가 1971년 서울 개봉동에 지은 13평짜리 아파트 300채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임대를 목적으로 지은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정부의 주택정책은 분양주택 공급이 전부였다. 주공이 3억원을 들여 건설한 개봉동 아파트도 원래는 분양주택용이었다. 그러나 1971년 후반 불어닥친 부동산 경기 불황으로 주공이 건설한 한강시영아파트나 광명아파트처럼 개봉동 아파트 역시 분양실적이 부진했다. 당시 서울 지역의 무주택자는 48%에 달했지만 집이 팔리지 않았던 것은 가격이 비쌌기 때문. 불경기에 분양가 135만원을 부담할 사람은 없었다. 이같은 문제점은 70년대 말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주택이 팔리지 않아 자금 회수가 안되자 정부는 1972년 4월 개봉동 주공아파트를 임대하기로 결정했다. 조건은 보증금 10만원에 월세는 층별로 6100~6800원이었다. 당시 언론은 이를 두고 ‘고육의 전환’이라고 평가했다.(조선일보 1972년 4월 26일자) 개봉동 생긴 이래 최대 인파 그러자 반년 가량 빈집인 채로 방치됐던 이 아파트에 입주 희망자들이 넘쳐났다. 분양 당일(5월 9일) 추첨 현장인 개봉동 주공아파트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13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당시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상황을 전했다. “광화문에서 택시로 약 30분. 큰 길가에 ‘어서 오십시오. 여기서부터 시흥군입니다’라는 팻말이 스산해뵈는 허허벌판. 여기에 5~6동의 아파트가 덩그라니 서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처음 시도하는 임대주택인 것이다. 9일 아침 8시부터 집주인인 주택공사조차 깜짝 놀랄만한 인파가 이 아파트 광장과 주변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300가구 아파트 가운데 250가구에 대한 입주자를 추첨 선정하는 이날은 개봉동이 생긴 이래 아마 처음일만큼 붐볐다. 총 신청자 3339명. 뺑뺑이 돌리기 추첨기의 알맹이를 3000개밖에 준비 못한 주공 담당이사는 현장에 몰려든 군중을 돌아보고는 ‘큰일났다’고 비명같은 환성을 질렀다. 당첨번호가 호명될 때마다 어느 구석에선가 ‘와’하는 환호가 들리는 듯 하나 수 천명의 웅성거림 속에서 250명의 목소리는 금방 삼켜져버린다.”(1972년 5월 10일자) 전세아파트를 월세로 돌려라 대성공에 힘입어 건설부는 임대주택제도를 확대하기로 하고 분양하지 못한 주택을 대상으로 전세 아파트제를 실험해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월세보다는 전세제도가 자금 회수가 빠르기 때문이다. 대상은 한강시영아파트 22평형 48가구. 당초 748가구를 지어 그동안 340만원에 분양해왔으나 250가구가 분양되지 않은 상태였다. 임대용 48가구의 전세금은 분양금의 절반 이하인 150만원이었다. 그러나 135만원에 집을 사는 것도 주저하는 마당에 그보다 더 비싼 전세금을 낼 사람은 많지 않았고 임대 신청창구는 한산했다. 결국 정부는 월세형 임대아파트에 주력하기로 결정했다. 같은해 11월에 추가공급한 개봉동 임대아파트 160가구에는 951명이 몰려 6대 1의 경쟁률을 보였다. 임대아파트에도 투기꾼 북적 이후 정부는 임대아파트를 지속적으로 공급했지만 공급량은 많지 않았다. 정부 재정의 한계 때문이었다. 1973년 정부의 일반회계예산 중 주택건설 투입분은 191억4000만원으로 전체의 3%에도 미치지 못했다. 주택보급률이 훨씬 높은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도 5~10%의 예산을 투입하는 것에 비하면 무척 낮은 수준이었다. 임대주택 건설재원은 훨씬 적었다. 1971~1980년까지 임대주택 건설에 정부가 투자한 돈은 828여억원에 불과했다. 정부는 주공을 통해 1980년까지 임대주택 6만4947호를 건설했다. 그러나 공급량이 적었을 뿐 아니라 임대기간도 짧았다. 당시 주공은 건설재원 확보를 위해 1~2년 정도만 임대하고 분양하는 방법을 취했기 때문에 주거안정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고 투기를 유발하기도 했다. 1979년 5월 광주경찰서는 서울에서 내려와 공무원을 매수, 무주택 증명서를 사들여 서민용 임대아파트를 무더기로 분양받으려 했던 원정투기꾼을 붙잡았다. 이들이 임대아파트를 노린 것은 임대권만 따내면 비싼 값에 다시 임대를 할 수 있고, 임대기간이 끝난 뒤에는 싸게 분양받아 프리미엄을 받고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붙잡혔던 한 투기꾼은 “서울에서는 몇억원씩 투자했어도 말썽이 없었는데 시골이라서 까다롭게 군다”며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이밖에 분양전환 때 분양가를 둘러싸고 입주자와 주공간 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0년대의 임대주택은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 셈이다. 경기부양에 임대주택도 '동참' 1978년 8·8조치로 차갑게 식은 주택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정부는 1982년 1월 14일 경기대책을 발표했다. 여기에 임대주택 건설사업을 육성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정부의 임대주택 건설량은 수요에 비하면 극히 적기 때문에 민간업자들도 임대주택을 많이 짓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장기임대주택의 등장이었다. 1981년 주공의 조사에 따르면 앞으로 매년 12만~15만 가구씩 2001년까지 모두 314만4000가구분의 임대용 주택을 지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1980년 당시 19조원이 필요했다. 이는 1980년 정부의 일반회계 예산이 6조4860여억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였다. 도저히 정부의 힘만으로는 필요한 임대주택을 건설하기 힘들었다. 결국 정부는 민간자본을 임대주택 사업으로 유인하기 위해 세제 및 금융지원방안을 마련했다. 자금회전이 느린 임대주택의 특성상 건설비가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이를 상쇄할 유인책을 쓴 것이다. 건설부는 1982년 임대주택을 건설하는 민간업자에게 국민주택기금을 연리 10%로 융자하고 택지의 양도세와 취득·등록세를 면제하는 한편 재산세의 50%를 감면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사업은 지지부진했다. 이에 정부는 1983년 3월 19일 주택건설종합계획을 확정해 민간에게 임대주택건설자금을 연리 5%로 낮춰 빌려주기로 했다. 대신 단기임대로 인한 투기를 막기 위해 임대기간을 5년으로 늘리는 조치를 취했다. 이어 투기를 막기 위해 도입한 채권입찰제로 거둬들인 돈을 모두 임대주택건설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984년에도 민간 건설업자 유인 정책은 이어졌다. 민간업체에 대한 국민주택자금 이자율을 3%로 낮추고 토개공이 조성한 택지를 조성원가로 공급하기로 했다. 또 임대주택 건설촉진법을 제정해 민간 건설업체의 임대주택 건설 지원을 명문화했다. 한편 5년 임대 후 분양하는 방식의 임대주택 역시 투기대상이 된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같은해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을 공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예산 없이 벌인 장기임대주택 사업 그러나 늘 예산부족이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5공화국은 물가안정이 정치적·정책적 지상 과제였다. 이는 임대주택 사업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부가 임대주택 건설에 내놓은 예산은 이전 정부 때보다 적은 708억원에 지나지 않았다. 정부는 1983년 채권입찰제를 도입할 때 ‘채권을 판 돈은 국민주택기금과는 별도로 전액 임대주택을 짓는데 사용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듬해 예산동결이라는 대전제 아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5년짜리 장기임대주택과 함께 공급하기로 했던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 공급도 예산문제로 흐지부지됐다. 1984년 정부 예산을 들여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을 건설하기로 하고 시범지구격인 광명 철산지구와 안양 석수지구에 총 1000호를 건설했다. 보증금 200~300만원, 임대료 매달 3만2000~4만8000원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재정문제로 20년 장기임대주택 건설은 중단된다. 사실상 장기임대주택 사업 중단 공약에서 매년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을 2만호씩 짓기로 약속했던 여당과 달리 건설부는 1985년 3월 사업 축소를 발표했다. 총 2만1000호의 임대주택을 짓되 이 중 4000호만 20년짜리로 짓기로 한 것. 또 건설부는 별도의 예산이 확보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계속 5년짜리를 짓겠다며 사실상 사업중단을 선언했다. 2만1000호를 모두 20년짜리로 지을 경우 건설자금이 20년동안 묶여 6년째부터 자금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정부의 지원이 끊기자 사업주체였던 주공도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건설을 중단하고 만다. 2년간 건설된 20년짜리 장기임대주택은 총 5000호에 불과했다. 그나마 입주자의 지속적인 분양요구로 5년도 안돼 분양으로 전환되고 말았다.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임대주택 건설 확충과 이를 통한 주택경기 활성화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던 정부는 이후에도 민간건설 촉진을 위한 유인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그다지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1982~87년까지 공급된 임대주택은 총 12만9637호였는데 민간부문이 건설한 임대주택은 6만413호로, 전체의 50%에도 미치지 못했다. 애초 세웠던 민간부문 건설 70%라는 목표에 크게 미달하는 수치다. 그렇다고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것도 아니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집을 짓기 위해 정부는 자금회수가 빠른 분양주택 건설에 치중했다. 그나마 임대주택 마저 중산층용으로 둔갑 이 시기 건설된 장기임대주택은 1970년대의 임대주택에 비해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다. 임대기간을 1년에서 5년 혹은 20년으로 늘렸기 때문이다. 다만 20년짜리는 5000호밖에 건설되지 않았고, 공급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5년짜리는 투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주택도 아니었다. 당시 입주대상자는 청약저축 가입자였다. 즉 청약저축에 가입할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극빈층을 배려하지 못한 임대주택정책이 십여 년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1980년대 후반 집값과 전세값이 급등하자 이를 감당할 수 없었던 저소득층의 주거환경은 점점 열악해졌다. 6공화국 "영구임대주택 25만호" 6공화국이 출범한 1988년은 정부가 체제 위협을 느낄 정도로 주택문제가 심각한 해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을 내걸었는데, 여기에 영구임대주택 25만호 건설계획이 포함됐다. 영구임대주택 건설계획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5년 동안 빌려주고 분양하는 것이 아니라 영구적으로 임대, 안정적인 주거를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선 대규모의 재정지원이 필요했다. 정부는 영구임대주택 건설비의 85%를 재정에서 지원하기로 했다. 이전 정부들은 임대주택 건설에 적극적으로 재원을 투자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수 조원의 돈을 쏟아붓기로 했으니 당시로선 놀랄만한 일이었다. 예산이 넉넉하지 않았던 것은 과거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체제안정’이라는 시급한 정치적 목표 때문에 청와대와 건설부는 경제기획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업을 강행했다. 이 시기 임대주택 건설에 투자된 정부재정은 총 3조2177억여원으로 역대 정부 최대였다. 사업은 문희갑 청와대 경제수석의 지휘 하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건설부는 생활보호대상자 등 극빈층이 25만여 명이라는 보건사회부의 통계에 따라 목표량을 25만호로 잡았다. 영구임대주택 건설계획은 1989년 3월 30일 서울 도봉구 번동 영구임대주택 기공식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한다. 한 달 3만5000원도 부담스럽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영구임대주택 보증금은 170만원, 임대료는 월 3만5000원으로 생활보호대상자 등 극빈층에게 부담스러운 금액이었다. 1989년 말 건설부가 6대도시 영세민 407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30.8%가 영구임대주택에 입주하지 않겠다고 밝혔는데, 주거비 부담이 59.4%로 가장 큰 이유였다. 한 푼의 교통비도 아까운 영세민의 일터와 동떨어진 곳에 건설되는 것도 문제였다. 이런 까닭에 1990년 3월 서울 노원구 중계동 영구임대주택 시범단지의 경우 입주 예정자의 13.2%인 745명이 임대보증금, 임대료, 관리비 부담 등을 이유로 입주를 포기했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지만 상황은 다른 쪽으로 전개됐다. 영구임대주택 내 빈집이 생기자 생보자 등 극빈층의 주거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다고 보는 의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재경부, 사업축소 관철 당시 건설부 주택국장이었던 이동성 씨의 말이다. “사업 계획 수립 단계부터 경제기획원은 재정지원을 안 하려고 했다. 경제기획원 예산실 입장에서는 갑자기 몇 조의 돈을 주택에 쏟아붓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경제기획원 예산심의관이 청와대 문희갑 경제수석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문희갑 수석이 밀어부쳐 재정지원 계획을 수립하긴 했지만 예산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빈집이 나오고, 생보자 수가 19만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니까 거부할 여지가 생긴 것이다.” 건설부는 영구임대주택 공급을 확대할 계획이었다. 1991년 5월 건설부는 입주자격을 확대, 제7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1992~96년)에도 영구임대주택 공급 계획이 포함됐다. 1988년 이후 주택공급량이 늘고 있지만 △아직도 전체 가구의 25%, 특히 도시 지역에서는 27.8%가 단칸방에 살고 있으며 △전·월세값의 상승으로 저소득층의 주거 상태가 악화됐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기싸움’은 결국 경제기획원의 승리로 끝났고, 영구임대주택 사업은 목표했던 25만호에서 대폭 축소된 19만호 선에서 마무리된다. 한때 50년 공공임대주택도 건설 건설부는 대안으로 50년 공공임대주택을 들고 나왔다. 다만 정부의 재정지원비율은 영구임대주택(85%)보다 줄어든 50%였다. 대상은 영구임대주택 대상자보다 약간 소득이 높은 청약저축 가입자였다. 보증금은 지역에 따라 600만~800만원, 월 임대료는 6만~8만원 수준으로 정해졌다. 50년 공공임대주택 사업은 ‘탈규제’와 ‘민영화’를 지상 명제로 삼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 우여곡절을 겪는다. 1994년 정부 지원이 중단되자 사업주체였던 주공은 재정지원분까지 국민주택기금에 의존하게 된다. 그러나 이자 등 부담이 가중되면서 이듬해 10월 주공도 사업을 접는다. 이 시기 지어진 50년 공공임대주택은 총 3만9000여 호에 불과했다. 이후 50년 공공임대주택은 서울시가 재개발 지역내 세입자용으로 건설하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50년짜리 임대주택 사업을 포기하면서 주공은 5년짜리 공공임대주택 사업에 치중하겠다고 밝혔다. 5년짜리 임대주택은 1982년 당시 건설부가 경기부양을 위해 임대주택 건설사업을 장려할 때 등장했던 것으로, 우리나라 임대주택의 대들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업은 주공과 지자체, 민간업자 등이 정부의 재정 지원 대신 국민주택기금을 융자받아 이뤄졌다. 1982년~2005년까지 건설된 5년짜리 임대주택은 약 99만여 호로, 이 시기에 건설된 전체 임대주택(국민임대주택 제외, 119만7200여호)의 약 83%를 차지했다. 이는 임대기간이 짧을수록 자금 회수가 빠른 이점이 작용했다. 다시 민간 건설업자에게 돌아간 임대주택 문민정부는 재정 투입 대신 민간건설업자 유인이라는 카드를 꺼내들었다. △투기 발생 △분양가격 논란 등을 이유로 1990년 민간의 임대주택 건설을 억제했던 정부는 1993년 1월 다시 민간 임대주택제도를 도입했다. 임대기간이 끝난 뒤 분양할 때 분양가 논란을 없애기 위해 임대를 시작할 때부터 분양가를 확정하도록 했다. 정부는 이후 민간 임대건설 장려책을 펼쳤다. 건설물량을 늘리기 위해선 수요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1993년 상황은 분양주택에도 미분양주택이 속출할 정도로 주택경기가 좋지 않았다. 건설부의 조사에 따르면 1993년 1월 3만6487호였던 미분양주택은 같은해 12월 7만7483호로 늘어났다. 정부는 미분양 주택을 소화해 민간건설업체의 부담을 덜어주고 임대주택 수요도 늘리기 위해 1994년 11월 임대사업제도를 실시한다. 5가구 이상의 주택을 짓거나 매입해 임대하는 임대사업자에게 양도세와 취득·등록세, 재산세, 종합토지세 등을 감면한다는 게 골자였다. 임대사업제도가 활성화되면 민간건설업체의 임대주택 건설이 늘어나 전월세 시장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문민정부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민간 건설업자의 임대주택 건설을 장려하는 정책을 내놓았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뒀다. 이 시기 건설된 임대주택은 6공 때와 비슷한 물량이었고, 이 중 민간의 건설물량이 전체의 75.5%에 달했다. 국민임대주택의 등장 민간의 힘을 빌려 추진된 임대주택 건설 촉진책은 주택경기에 좌지우지된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주택경기가 바닥을 쳤던 IMF 외환위기 때 집권한 국민의 정부는 기존 체제를 바꿨다. 당시는 IMF외환위기로 저소득층의 주거환경이 날로 악화되고 있을 때였다. 정부는 정부 재정을 대거 투입해 임대주택을 건설하기로 발표했다. 주택건설 경기를 활성화하는 한편 저소득층의 주거불안을 해소한다는 취지였다. 한정된 예산에도 불구하고 정책적 우선순위에 따라 정부가 임대주택에 재정을 투입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두 번째 사례였다. 1997년 12월 2일 김대중 당시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는 서울 여의도 공동선거대책회의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집권 기간 중 영구임대주택 20만호 건설 등의 공약을 밝혔다. 이는 6공 시절의 영구임대주택 이후 중단됐던, 정부 재정을 통한 임대주택 건설정책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1998년 9월 건설교통부는 정부 재정으로 무주택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국민임대주택’을 짓는다는 계획을 밝혔다. 기존 임대주택보다 진일보 영구임대주택이나 5년짜리 공공임대주택은 무주택 저소득층에게 혜택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영구임대주택은 생보자 등 극빈층을 위한 것이었고 분양을 전제로 한 5년짜리 공공임대주택은 그나마 사정이 나은 이를 위한 것이었다. 그 사이에 낀 무주택 저소득층은 사각지대에 놓여있었다. 정부는 건설비의 30%를 재정지원하는 등 총 80%를 공공부문에서 부담하기로 했다. 입주자의 부담은 낮은 수준으로 결정됐다. 가격이 싸더라도 임대기간이 짧으면 임대주택으로서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를 감안해 건교부는 국민임대주택의 임대기간을 10년과 20년으로 결정했다. 또 적절한 대상자가 입주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입주자 조건을 명시했다. 10년짜리의 경우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의 70% 이하 청약저축 가입자, 20년짜리의 경우 월평균 소득이 50% 이하인 저소득층으로 제한됐다. 특히 20년짜리의 경우 청약저축에 가입할 수 없는 저소득층에게도 입주자격을 부여해 기존 임대주택보다 진일보한 모습을 보였다. 5만호 10만호 20만호- 늘어나는 국민임대주택 임대주택 20만호 건설이라는 공약은 갑작스레 닥친 IMF 외환위기로 사업구체화 단계에서 5만호로 줄어들었다. 1998년 시작한 국민임대주택 건설사업은 2500호 수준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임대사업자 기준을 5채에서 2채로 낮춰 수요를 늘리는 등 민간 부문의 활성화를 추진했다. 그러나 경제가 회복되면서 국민의정부 임대주택 사업은 점차 활기를 띠었다. 2000년 8월 IMF는 한국의 ‘IMF체제 졸업’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김 대통령은 임대주택 5만호 건설 계획에 더해 2002년까지 5만호 추가건설 계획을 내놓는다. 2001년 초반 이후 전세가격이 급등하자 정부의 임대주택 정책은 보다 확대된다. 2001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김 대통령은 2003년까지 기존계획 10만호에 10만호를 더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정부는 2002년까지 11만 8782호의 국민임대주택을 건설하는 성과를 거뒀다. 2003년 건설량까지 더하면 19만573호로 목표 대비 95.3%를 달성했다. 기획처 '임대주택 50만호만 지어라' 2002년 5월 정권 말기에 접어든 국민의 정부는 ‘주택정책사(史)’에서 ‘주택 200만호 건설사업’에 비견될만한 ‘임대주택 100만호 건설계획’을 발표한다. 2003년부터 10년 동안 임대주택 100만호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결과적으로 1998~2002년까지 건설한 12만호를 포함 2012년까지 총112만호를 추진하게 된 셈이다. 2001년까지만 하더라도 연간 국민임대주택 건설량은 평균 1만7000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임대주택 100만호 계획이 등장하게 됐을까. 당시 건교부 주택도시국장이었던 이춘희(현 건교부 차관) 씨의 회고다. “연간 5만호씩 짓겠다고 했는데 (예산 당국이) 돈을 안 주니까 결국 연간 2만호도 짓지 못했다. 약이 올라서 문제제기를 했다. 그리고 2002년 국민임대주택 100만호 계획을 만들었다. 사실 100만호 계획을 만들었을 때 목표는 50만호였다. 당시 주공의 건설능력이 연간 6만호 정도였기 때문에 50만호가 최대치였던 것이다. 50만호를 얻어내기 위해 100만호를 제시했는데, 기획예산처가 강력히 반대해서 50만호로 줄었다. 이 계획을 2002년 4월 3일 건교부 업무보고 때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대중 대통령 "100만호 지어라" 그런데 업무보고에서 상황이 달라지게 된다. 김 대통령이 “정부가 바로 이런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라며 건교부 보고 중에서 가장 많은 칭찬을 하자 기획예산처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기획예산처가 반대해서 대통령이 칭찬한 사업을 줄여버린 꼴이 됐기 때문이다. 결국 이 사업은 재검토를 거쳐 100만호 건설계획으로 바뀌었고 5월 16일 세상에 발표됐다. 당시 건설부는 건설량 확대 외에도 소득수준에 따라 입주자 부담률을 달리 적용키로 했다. 기존에는 소득 수준에 따라 임대기간에 차등을 뒀는데, 이를 평형으로 구분해 임대료를 차등부과한다는 내용이었다. 저소득층인 소득 1분위 계층은 기존대로 공급 금액의 10%를 부담하지만, 2분위 계층과 3분위 이상 계층은 부담이 늘어나 각각 25%, 30%를 부담하게 됐다. 나머지는 주공 등 사업주체가 10%, 국민주택기금이 40~50%, 국가 재정이 40~10%를 부담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2002년 9월 국민임대주택의 임대기간을 기존 10년과 20년에서 30년으로 확대, 통일했다. 더 많이 짓기 위해 정부 재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임대기간을 늘려 서민의 주거안정을 꾀한 것이다. 공약에서 실천으로 일부에서는 이러한 계획을 선거용 선심정책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기우였다. 50년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던 이전 정부의 약속을 포기한 문민정부와는 달리, 참여정부는 ‘공약(空約)’이 될 수도 있었던 국민의 정부 시절의 약속을 실현해나갔다.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부터 5년간 국민임대주택 50만호 건설계획을 제시했다. 집권 뒤인 2003년 5월 ‘주거복지 로드맵’을 발표한데 이어 9월에는 ‘서민중산층 주거안정 지원대책'을 발표했다. 향후 10년간 국민임대주택 100만호를 포함한 장기 공공임대주택 150만호를 건설하겠다는 것이었다. 2006년 말까지 4년간 건설된 국민임대주택은 총 35만6209호로 계획 대비 91.3%를 달성했다. 임대주택 건설은 돈문제와 직결된다. 건설비를 회수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까닭에 장기 임대주택 건설은 민간 뿐 아니라 정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사업이었다. 그래서 10년 이상의 장기 임대주택 건설사업은 처음에는 기세 좋게 시작됐지만 곧 자금 확보 문제에 직면, 축소되거나 중단되곤 했다. 하지만 임대주택의 역사를 보면 정부의 임대주택 건설이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정치적 의지만 있으면 아무리 예산이 부족해도 재정투자가 이뤄졌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국민의 정부의 주택정책을 계승·발전시켰다. 4년 내내 지속적인 재정투입을 통해 역대 정부 중 가장 많은 임대주택을 건설하는 성과를 거뒀다. 저소득층의 주거복지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재정투자가 불가피하다는 역사적 교훈을 받아들인 셈이다. 이어 참여정부는 2007년 1·31대책에서 공공임대주택 비중을 총 주택량의 20%까지 늘리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내놓기에 이른다. 2007.04.11 특별기획팀
- “엄마, 우리 또 이사 가?”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지금까지 연재된 1~3부에서 지난 40년 간의 부동산정책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항구적인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한 교훈과 정책적 시사점을 얻고자 했습니다. 마지막 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정책'에서는 역대 정부가 재정 부족 등을 이유로 전향적으로 추진하지 못했던 임대주택정책 등 주거복지정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향후 과제를 살펴 볼 것입니다. <편집자> 총론 제1부 왜 올랐나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제3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첨부 :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평가 전문가 설문조사> 제4부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 정책 ① 전·월세보호대책의 과거와 현재 ② 임대주택의 역사1 - 예산부족과 임대주택 ③ 임대주택의 역사2 - 주거복지 실현을 향한 노력]] 88 서울올림픽 직후부터 1990년 초까지 이어진 부동산 투기열풍과 전월세 값 폭등은 서민생활을 벼랑으로 내몰았다. 치솟는 전월세 임대료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목숨을 끊는 자살 사건이 연일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고, 이들이 남긴 유서는 수많은 서민의 절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전세대란에 세입자 자살 도미노 "폭등하는 부동산 가격에 내 집 마련의 꿈은 고사하고 매년 오른 집세도 충당할 수 없는 서민의 비애를 자식들에게는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1990년 4월10일 서울 천호동 반지하 4평짜리 단칸방에서 보증금 50만원·월세9만원의 셋방살림을 하던 40대 가장과 부인, 7, 8살 자녀 등 일가족 4명이 치솟는 전세값 때문에 방을 얻지 못해 동반 자살한 참극은 ‘집 없는 설움’을 넘어 생존의 사선으로까지 내몰린 서민의 삶을 상징했다. 그해 전세값 파동은 두 달 남짓한 기간 17명의 세입자들이 잇달아 목숨을 끊는 ‘자살 도미노’로 이어졌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이들을 기리는 ‘희생세입자합동추도식’까지 열렸다. 일선 경찰서와 신문사 사회부 기자들은 자고 일어나면 혹시 전세값 때문에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을까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시민단체들은 ‘전월세값 안올리기 운동’까지 벌였다. 국세청이 직접 전세값 단속에 나섰고, 일선 구청과 동사무소에는 전세금 부당인상 신고센터가 설치됐다. 그해 건설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986년 말~1990년 2월말까지 3년2개월 동안 전국 도시지역의 주택 매매가격은 평균 47.3% 오른데 비해 전세값은 이보다 34.9%포인트 높은 82.2%나 올랐다. 대책은 붉은 벽돌의 다가구 주택 하지만 당시는 경제침체가 우려되던 시기였다. 정부는 전세파동보다는 물가대책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실물경제전문가라고 불리던 이승윤 경제팀은 첫 작품으로 ‘4ㆍ4경제활성화대책’을 내놓았을 뿐이다. 4.4 대책이 성장력 배양에만 치우쳐 부동산투기와 물가불안을 방치하고 있다는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자 정부는 특단의 대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특히 부동산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최고위층의 지적에 따라 물가대책은 미루고 대신 부동산 대책 발표를 앞당기기로 했다. 며칠 후 모든 아이디어를 짜내 서둘러 발표된 이른바 ‘4.13 부동산 투기 억제대책’에는 ‘전세가격 안정’을 위한 5가지 방안이 담겼다. 임대용 다가구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당시 동당 연건축면적 100평 이하 3층 이하인 건축규제를 20평 이하 4층 이하로 완화했다. 또 △다가구주택 건축 때 건물분 재산세 대폭완화 △다가구주택 취득 때 100평초과 호화주택에 적용되는 취득세 7.5배 중과배제 △국민주택기금의 다가구주택 동당 지원규모 확대 △보험회사 총운용자산의 일정비율을 다가구주택 건설자금으로 지원 등 전월세용 다가구 주택 건설 촉진을 위한 대폭적인 규제 완화와 지원책이 나왔다. 서민의 보금자리 달동네 사라지며 지금 서울 어디나 즐비한 빨간 벽돌의 3~4층짜리 다가구주택은 이렇게 해서 도시의 골목풍경을 바꿔놓았다. 다가구주택이 전월세 시장 안정에 일정하게 ‘효자’노릇을 했지만, 몇 년 후 무분별한 건축으로 도심 슬럼화를 초래할지는 당시 아무도 몰랐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택 및 전세가격의 상승률이 공식 조사된 것은 1986년 1월이다. 이후 주택은행(현 국민은행)이 매달 가격동향을 발표하고 있다. 1987년 전년대비 전세가격 상승률은 19.4%로, 지금까지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1988년 상승률 역시 13.2%에 달해 2년간 상승률이 32.6%였다. 특히 주택부족이 극심한 서울의 전세값 상승은 더욱 심각했다. 갑자기 500만원 또는 1000만원 가량 오른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해 지하셋방, 달동네, 도시외곽으로 밀려나는 세입자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다. 특히 당시는 이미 합동 재개발이 활성화되면서 달동네 지역이 점차 중산층 주거지역으로 변모해 가고 있던 중이라 저렴한 전셋집 찾기가 쉽지 않았다. 1989년 4월 27일 영구(7~12평)임대주택 25만호, 소형(10~15평)장기임대주택 등을 포함한 주택 200만호 공급계획이 발표됐지만 무주택 서민들의 고통은 줄지 않았다. 전세기간 2년 이상으로 법 개정 당시 언론은 “만약 모든 국회의원과 정부의 고위관리들이 셋방살이를 하고 있다면 다락같이 오르는 전세와 사글세를 요즘처럼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었을까. (중략) 민생문제를 중시하는 국회라면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했어야 했고, 아파트 분양가 현실화를 전격 발표할 정도로 주택가격 문제에 신경을 써온 정부라면 당연히 집세의 안정대책도 늦기 전에 내놓았어야 했다”고 정부를 질타했다. 정부는 1989년 5월 주택임대차기간을 1년에서 2년으로 늘리는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 그해 12월30일 통과됐다. 하지만 주택임대차보호법이 개정된 직후인 1990년 초부터 집주인들이 2년치 임대료를 한꺼번에 올리는 바람에 전세값이 오히려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당시 이 법은 갖가지 ‘원망’과 ‘탄식’의 표적이 되다시피 했다. 신도시 대기용 전세수요까지 겹쳐 물론 임대차보호법 개정이 임대료 폭등의 근본 원인은 아니었다. 1990년 당시는 자기집에 거주하는 가구의 비율이 49.9%에 불과한다데 분당 등 신도시 입주를 바라는 일시적 대기수요까지 가세해 임대수요가 컸던 시기였다. 따라서 임대기간 연장 외에도 시장 상황상 임대료 급등이 예상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또 1986~88년까지 3년 연속 연 10%를 웃돈 경제성장률, 3저호황으로 인해 넘치는 시중자금 등으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집값이 급등하면서 집값이 전세값에 반영된데다 일부 중개업자들의 농간까지 겹쳐 전세값이 급등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분석은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YMCA 시민중계실 등 시민단체에서 나왔다. 어쨌든 ‘짝수년 이사대란’과 ‘다가구 주택’은 1989~90년까지 이어졌던 전월세 파동의 산물인 셈이다. 조선 말기 한성에서 전세 유례 전세제도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독특한 서민 주거형태다. 주택가격의 일부를 보증금으로 맡기고 남의 집을 빌려 거주하는 전세 형태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제도로, 조선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강화도조약)에 따른 3개 항구 개항과 일본인 거류지 조성, 농촌인구의 이동 등으로 서울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전세제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구증가로 한성의 주택수요가 급증하면서 주택 임차관계가 형성됐다. 이때 집 한 채를 통째로 빌리는 독채 전세뿐 아니라 집의 일부를 빌리는 전세도 많이 나타났다. 당시 가옥 소유주는 주택 임대차계약을 맺으면서 임차인으로부터 일정한 금액을 기탁받고, 상당기간 그 가옥을 임차인이 거주하도록 빌려준 뒤 가옥을 돌려받는 시점에 기탁받은 금액을 되돌려 줬다. 조선말기 전세의 기탁금액은 기와집과 초가집에 따라 달랐으며, 보통 가옥가격의 반액에서 비싼 곳은 7·8할이었다. 기간은 통상 1년으로 기간을 정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세계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제도" 1900년대 조선을 방문한 한 일본학자는 “전세는 조선에서 행해지는 가옥임대차의 방법으로, 주로 경성 내에서 행해지는 관습”이라고 소개했다. 일제시대 전세는 일본 민법의 적용대상이 되면서 “매매는 임대차를 깨뜨릴 수 있다”는 규정이 적용되는 등 전세권자의 권리가 크게 약화됐다. 해방 이후 민법이 만들어지면서 등기를 한 전세권은 물권으로 인정하되, 등기하지 않은 전세에 대해서는 채권으로 보는 법체계가 정립됐다. 하지만 주택이 부족한 상황에서 집주인이 꺼리는 전세등기는 법률상의 권리로만 남게 됐다. 전세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급격하게 확산돼 대표적인 주택임대차 유형으로 자리 잡았다. 전세보증금이 불확실한 임차인의 신원을 보증하는 기능을 한데다 매월 약간의 임대료를 받는 것보다 쉬웠기 때문이다.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지금 50대 중반 이상인 사람들은 신혼생활의 단꿈이 가시기도 전에 이사 다니기 바빴던 씁쓸한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 지금부터 26년 전인 1981년 이전에는 6개월마다 한 번씩 전세보증금을 올려줘야 했다. 여기에 세입자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은 가등기 등의 절차를 밟지 있을 때 집주인이 집을 팔아버리면 전세보증금조차 돌려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남의 집 문간방에서 집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우는 아기의 입을 틀어막아야 하는 어미의 눈에는 한 맺힌 이슬이 핀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 서민의 첫째의 소원은 제 땅에 제 집 짓고 사는 것이다.” (1977년 10월 30일 조선일보 사설) 당시 조선일보는 ‘집’이라는 특별 사설까지 실어 “집값을 서민들 소득에 맞춰 주어야 제 집 지니는 것이 한(恨)인 서민들의 꿈을 구현시켜줄 수 있는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서울 시민의 반이 남의 집살이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은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됨에 따라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급격하게 유입하면서 높은 인구증가와 핵가족화 등으로 가구수가 증가해 주택부족현상이 심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인구가 몰려든 서울은 주택부족이 더욱 심각해 변두리 구릉지, 제방, 하천변, 공원용지 등에 무허가 주택이 들어섰다. 1980년 서울에서 자기 집에 사는 가구는 44.5%로, 서울인구의 반 이상이 남의 집에 살고 있었다. 이 당시 우리 민법은 임대차 존속기간에 대해 20년을 넘지 못하도록 최장기간만 제한을 뒀고, 최단기간을 제한하는 규정은 없었다. 그래서 주택임차의 존속기간을 6개월로 정하는 것이 통례였다. 3자에 대한 대항력도 약해 계약기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저당 등으로 주택소유권이 넘어가면 세입자들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쫓겨나는 등 세입자 보호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임대차보호법 '전세기간 최소 1년' 이러한 세입자의 일방적인 피해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주택임대차보호법이었다. 1981년 3월 5일 제정된 이 법은 전문 8조의 매우 짧은 법으로, 임차인이 주민등록을 옮겨놓는 경우 임차권은 제 3자로부터 대항력을 가지며, 임대차기간은 최소 1년으로 한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원래 임대차보호법은 1979년 유정회에서 임대가옥입주자보호법안으로 제정이 검토됐지만 실제 입법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서 이뤄졌다. 1981년 2월 19일 법안이 제안되자마자 다음날 의결됐고, 다음달 5일 법안이 공포, 시행됐을 정도로 초스피드였다. 임대료 인상 5% 이내에 그런데 법안이 제정된 다음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세기간이 길어져 부동산경기가 반짝할 때 주택을 임의처분 할 수 없기 때문에 셋집으로 내놓기를 꺼리고, 6개월마다 약 20%씩 올려 받던 전세금을 1년치씩 2번 앞당겨 올려 받겠다는 속셈 등이 작용해 전세값이 계속 치솟고 있다. 더군다나 부동산 경기의 계속적인 침체로 아파트 등에 잠겨 있는 자금을 빼려는 사람들이 집을 팔고 전세를 들려는 경향을 부채질하고 있어 집 없는 서민들은 전세를 옮겨 다니기가 더욱 힘들게 되었다.(1981년 3월 중앙일보)”는 것이다. 국보위가 만든 주택임대차보호법은 입법취지와는 달리 임대료 인상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되면서 1983년 개정된다. 임대료 인상 상한선을 연간 5% 이하로 제한하고, 소액보증금에 대해 우선변제권이 실시된 것이다. 당시 소액보증금은 특별시, 직할시에서 300만원, 기타지역은 200만원이었다. 임대료 인상 상한선 5% 제한의 경우 세입자의 우선계약권이 없기 때문에 종이호랑이에 불과한 상태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전세보증금 보호 소액보증금 우선변제조치는 집주인의 갑작스러운 부도나 의도적인 사기행위가 있어도 보증금 중 일부는 우선적인 보호대상으로 다른 채권에 앞서 돌려받을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세입자보호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호되는 소액보증금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게 낮아 형식적인 보호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금융기관이 주택담보대출을 심사할 때 방마다 세입자가 거주할 것으로 가정하고, 소액우선 보증금에 방수를 곱한 금액만큼 대출 가능액에서 제외한 것은 전세 보증금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IMF 외환위기로 역전세대란 오르기만 하던 우리나라 주택임대시장에 가장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IMF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초. 실직이나 감봉 등으로 더 싼 곳으로 옮기려는 세입자들이 전세값을 되돌려 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전세값이 떨어지면서 집주인도 전세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초유의 '역(逆) 전세대란'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전세가가 매매가를 웃도는 역전현상이 나타나 소형 아파트 중에는 ‘깡통 아파트’까지 등장(1998년 5월15일, 문화일보 11면)했고, 세입자가 전세보다는 월세를 선호하면서 전세의 종말을 예측하는 언론보도도 나왔다. 하지만 주택가격 및 임대료 하락세는 1998년 중점 추진된 주택경기 부양대책에 힘입어 6월 중순부터 둔화되기 시작, 8월부터는 '역 전세대란'이라는 표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98년 하반기부터는 전월세가 상승하기 시작, 1999년에는 폭등세를 보였다. 전세 보증금 못 받으면 세입자가 등기 전세가격 하락 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임차인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1999년 1월 도입된 임차권등기명령제도다. 이 제도는 임차기간이 끝난 세입자가 가옥주의 동의없이 임대주택이 있는 소재지 관할 지방법원, 지방법원지원 또는 시군법원에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임차인이 임대인으로부터 보증금을 받지 못하면 이사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면 다른 곳에서 집을 얻기 어려운 세입자에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전세가격이 폭락했던 1998년 5월부터 전세금을 내주지 못하는 집주인을 대상으로 전세금반환자금대출제도가 운영되고 있지만 금리가 높아 실제 이용은 거의 없었다. 전세를 월세로 바꿔라 2000년대 들어 경제회복과 저금리로 주택가격이 재차 상승하기 시작했다. 2001년 주택가격은 14.3%올라 IMF외환위기 때의 하락률(12.4%)을 상회했다. 전세가격은 이미 1999년부터 두 자리 수 상승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처럼 전세가격이 급등한 것은 IMF직후인 1998~99년 주택건설호수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택공급 부족은 2001년부터 전세가격 상승으로 나타났다. 아무리 가격이 높아도 전세로 들어오겠다는 문의가 빗발치자 당시 저금리로 돈 굴릴 데가 없던 일부 집주인들은 전세를 월세로 바꾸기 시작했다. 2001년 2월 내집마련정보사 등에 따르면 서울 강남, 서초, 송파, 용산, 강동구 등을 중심으로 전세의 월세전환물량이 60% 이상인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분당구 구미, 서현동은 월세비중이 80~90%에 달하기도 했다. 뒤늦은 월세 제한조치 당시 월세로의 전환이자율은 평균 13.1%~13.8% 수준이었고, 수도권은 이보다 높은 평균 15.6%~17% 이었다. 초기에는 소형 위주로 월세 전환이 이뤄졌지만 점차 대형주택 중에서도 월세 물량이 나오기 시작했다. 건교부는 월세세입자 대책 마련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월세에 대해 소득세를 부과하거나 세입자가 월세를 내는 경우 월세를 소득에서 공제하는 제도 등이 논의됐다. 그러나 세금을 메기면 임대용 주택의 감소가 우려되는데다 형평성 문제가 있어 전세보증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월차임으로 전환하는 경우 상한선을 정하는 방안이 모색됐다. 2002년 6월 주택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하면서 정한 상한선은 연 14%였다. 이미 전세의 월세전환 이자율은 저금리 기조가 확대되면서 연 12% 수준으로 하락한 상태였다. 전세 350만 가구, 월세 300만 가구 저금리로 인한 전세의 월세전환은 전세거주가구를 줄였다. 2005년 11월 센서스에 따르면 전세거주가구는 2000년에 비해 48만 가구가 줄어든 356만가구로 나타났다. 아직 301만 월세가구에 비해서 많지만 저금리추세가 이어지면 역전될 수 있다. 집 주인에게는 목돈 마련의 기회가 되고, 세입자에겐 비교적 저렴하게 거주할 수 있는(때론 세입자에게 고통이 됐지만) 전세제도는 저금리 기조와 주택금융의 발전 등으로 인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주택금융이 발전한 선진국의 시각으로 볼 때 주택가격의 50% 정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집을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은행융자를 끼고 집을 사는 것보다 세 살기를 원하는 수요가 많고, 매월 월세를 내는 것을 큰 부담으로 느끼는 한국적 정서 등으로 인해 여전히 월세보다는 전세가 선호되고 있다. '법률로는 안 된다, 임대주택 늘려라' 2002년 초 전세의 월세전환과 전세금 상승은 더 이상 법률만으로 세입자를 보호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보여줬다. 2002년 5월 당시 정부는 2003~2012년까지 임대기간을 30년으로 하는 국민임대주택 100만호를 지어 임대주택이 전체 주택의 10%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어 참여정부는 2003~2006년까지 4년간 47만5000호(사업승인 기준)의 국민임대주택을 건설했다. 2006년 말까지 입주 물량은 11만1000호에 불과해 당장 주택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하지만 입주를 마친 공공임대주택 재고가 늘어나면 전월세 가격 폭등에 안전판 구실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선진국에서는 공공임대주택의 임대료가 시장 임대료 인상을 결정하는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있다. 임대주택을 위한 펀드 조성 2006년 말 다시 전월세값 상승이 사회문제로 대두되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전월세 신고제, 전월세금 인상률 5% 제한, 계약기간 3년 연장, 재계약 갱신 거절 사유 제한 등의 대책이 논의됐다. 하지만 과거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임대주택의 임대차기간을 늘리거나 가격을 규제하는 것은 임대료 폭등을 야기한다. 따라서 2007년 1·11 대책에는 이러한 내용이 제외됐다. 수급불균형이 심화된 주택시장에서 행정개입을 통한 가격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가장 근본적인 전월세 세입자 대책은 임대주택 재고를 충분히 확보하는 것이다. 2007년 1·31대책에서 비축용 장기임대주택 건설재원으로 임대주택펀드를 조성키로 한 것은 공공임대주택 재고를 늘려 간접적으로 민간 임대료 인상을 억제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하다. 2007.04.10 특별기획팀
- “역대 정부에서 못한 것 했다” VS “시장위축 우려” 우리나라 부동산 전문가들은 참여정부의 4가지 부동산정책 목표 중 △조세형평성·시장투명성 제고 △주거복지 향상 분야에 높은 점수를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시장기능을 중시하는 전문가일수록 규제로 인한 시장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특히 다음 정부가 견지해야 할 부동산정책의 원칙으로 △정책 일관성 △전·월세 서민주거대책 △유동성 관리 △공공과 민간의 역할 재정립 등을 꼽았다. 이 같은 평가는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특별기획팀이 지난 2월 중순~3월 중순까지 학계, 언론계 등 전문가 17명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한 결과이다. 설문조사는 △과거 부동산정책 △참여정부 부동산정책 △시사점과 앞으로 과제 등 3개 분야로 나눠 마련된 5가지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이 직접 답변을 작성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 전문가 의견수렴 설문지는 기사 맨 아래 첨부된 파일을 열면 볼 수 있습니다) “시장 선진화, 서민주거 안정에서 큰 성과” 참여정부 부동산정책을 평가해달라는 질문에 대해 전문가들은 △조세형평성·시장투명성 제고 △주거복지 분야에서 큰 진전을 이뤘다고 평가했다. 변창흠 교수는 “참여정부 부동산정책 중 역사적으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 정책은 실거래가 신고제, 과표현실화율 제고, 다주택보유에 대한 중과제도 등 시장투명성과 조세형평성 제고정책”이라고 말했다. 김용창 교수는 “시장투명성과 조세형평성 측면에서 부동산실거래가 시스템의 도입과 부동산정보망의 구축, 보유세 강화와 거래관련 조세의 인하 등 지난 정부에서 하지 못했던 기반을 구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급격한 정책 변화에 따른 부작용을 지적하는 유보적인 입장도 있었다. “정책효과를 단기간에 극대화하려는 조급증으로 인한 ‘과속’의 문제는 목표설정의 정당성에도 불구하고 불필요한 조세저항을 유발해 갈등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에서 신중한 정책판단이 요구된다”(강황식 차장)는 것이다. ‘돈 문제’ 때문에 항상 우선순위가 밀렸던 공공 임대주택 건설 등 서민주거 안정 분야에서도 확고한 정책의지를 드러냈다는 평가다. 임서환 선임연구위원은 “주택정책에서 참여정부가 한 가장 큰 기여중 하나는 주거빈곤층을 위한 실질적 주거대책에 대해 고민하고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한 것”이라며 “차기 정부에서도 이를 더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장기능 위축 우려” 그러나 4대 목표 중 투기수요 억제정책은 주택공급 위축, 거래위축 등의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의견이 적지 않았다. 이정전 교수는 “참여정부는 부동산투기억제에 지나치게 집착해 너무 많은 제도들을 즉흥적으로 남발했다”며 “예컨대 양도소득세 중과는 부동산가격을 떨어뜨리기보다는 전가를 통해 부동산가격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조주현 부동산대학원장은 “공급보다는 수요억제 중심의 정책으로 인해 필요한 주택이 공급되지 못했다”며 “공급에 대한 양적 접근과 공공부문 역할의 지나친 강화로 인한 주택수급의 질적 부조화, 이로 인한 주택가격의 지속적 상승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집값 상승의 주요 원인인 돈줄을 죄는 정책의 타이밍이 늦었다는 지적도 있었다. 강황식 차장은 “금리정책의 경우 다른 경제부문에 미칠 영향 때문에 정책 운용에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부동자금을 생산적 부문으로 유도하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 등 소득과 연계한 주택담보대출 관리 등 금융대책을 적기에 시행하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지적했다. “정책 일관성 유지돼야” 전문가들은 “다음 정부가 견지해야 할 부동산정책의 원칙과 향후 보완해야 할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정책 일관성’을 꼽는 경우가 많았다. 다음 정부가 들어서도 일관되게 유지해야 할 정책으로는 ‘보유세 강화, 양도소득세 등 불로소득 환수제도’(김용창 교수)나 ‘실거래가 신고제, 과표현실화, 개발이익 환수 등의 정책’(임서환 선임연구위원)을 꼽았다. 이밖에 ‘서민 주거안정’과 ‘시중 유동성 관리’에 좀 더 주력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민간공급 위축을 보완하기 위해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려는 최근의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시장의 자리를 정부가 대체하지 않도록 “양자간 적절한 역할 재정립이 필요하다”(차학봉 팀장)는 의견이 나왔다. 이러한 의견은 대체로 시장의 기능을 보다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입장으로 모아진다. 또 “정확한 수요분석 없는 무리한 공급확대 정책은 향후 특정지역에서의 주택 초과공급을 유발할 수 있는 만큼 버블이 갑자기 푹 꺼지지 않도록 세심한 대책이 필요하다”(박덕배 선임연구위원)는 의견도 있었다. 2007.03.28 특별기획팀
- ‘바뀐 것’과 ‘바꿀 수 없는 것'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와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에 이어 중간 결론 성격의 '제3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를 게재합니다. '3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는 지난 40년간의 부동산정책을 기록하면서 얻은 정책적 시사점과 교훈을 '바뀐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이란 주제로 정리한 것입니다. 마지막 제4부에서는 '발상의 전환, 주거복지정책'이 이어집니다.<편집자> 총론 제1부 왜 올랐나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제3부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참여정부 부동산 정책 평가 전문가 설문조사> 지난 40년 동안 우리사회는 부동산시장 안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왔지만 경기흐름에 따라 오락가락했던 정책관행, 개발·투기이익을 제대로 환수하지 못하는 미흡한 제도, 재정·공공부문의 역할 미비 등으로 인해 오히려 ‘부동산 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키워왔다. 참여정부는 뿌리 깊은 불패신화를 꺾고, 시장의 기초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그동안 투기꾼들의 저항과 이해관계에 밀려 좌초됐던 정책들을 일관되게 추진해왔다. 앞으로 부동산정책사를 쓸 때 적어도 조세형평성과 부동산시장 투명화에 관한 한 참여정부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그러나 택지확보에서 주택분양까지 걸리는 공급시차와 과잉 유동성에 선제적으로 대응하지 못함으로써 시장불안을 초래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이는 앞으로 부동산정책을 세울 때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이다. 참여정부는 그동안 재정 부족을 이유로 방치됐던 서민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정과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는 획기적 전기를 마련했다. 소위 ‘정책의 발상 전환’인 셈이다. 주거복지 차원에서 재정·공공부문의 역할 강화는 민간 투기자금의 흐름에 따라 오락가락했던 과거 정책관행을 불식하고, 일관된 정책 수행을 위한 확고한 토대가 될 것이다. 왜 올랐나 - 과잉 유동성과 주택공급 부족 1970년대 후반, 1980년 후반, 2001년∼최근까지 등 과거 3차례 부동산가격 급등기에는 모두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리고, 주택공급이 부족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70년대 후반 1차 급등기에는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 주택난이 갈수록 악화됐고, 마침 1970년대 말 중동특수로 벌어들인 오일달러가 시중에 풀리면서 부동산가격이 폭등했다. 한동안 잠잠했던 부동산가격은 1980년대 말 2차 급등기를 맞는다. 이 때 역시 1980년대 초반 경기침체로 주택공급이 충분치 않아 집이 부족한데다 1986~88년까지 3저호황에 따른 대규모 국제수지 흑자로 시중에 돈이 넘쳐났던 것이 원인이었다. 2001년 말∼최근까지 지속되는 3차 급등기는 과거 1, 2차 급등기가 전국적 현상으로 지속기간이 2~3년에 불과했던 것에 비해 서울과 수도권을 중심으로 한 국지적 현상인데다 가격상승 국면이 오래 지속된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만큼 부동산시장에 내성이 생겼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다. 3차 급등기의 원인은 IMF외환 위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IMF외환위기로 경기가 급속히 위축되자 당시 정부는 경기를 살리기 위해 전방위로 부동산경기 활성화시책을 추진한다. 이 때 분양가규제 폐지, 분양권 전매 허용, 소형의무비율 완화, 취득·등록세 및 양도세 완화, 대출이자에 대한 소득세 감면 등 대대적인 규제완화가 이뤄졌다. 당시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투기를 막기 위한 필수규제마저 마구잡이로 풀어버린 결과 유례없는 장기 상승이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 것이다. 여기에 IMF 외환위기 이후 충분히 택지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시차를 두고 집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또 2000년 이후 계속된 저금리 기조로 엄청나게 풀린 시중 유동자금이 부동산시장으로 몰려들었다. 어떤 의미에서 참여정부는 부동산가격이 급등할 수밖에 없는 ‘나쁜 조건’을 모두 물려받은 셈이다. 따라서 참여정부는 이전 정부에서 마구잡이로 풀린 필수규제를 제자리로 돌려놓고, 택지확보 부족분을 다시 정상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왜 ‘불패 신화’인가 - 투기이익환수 미비와 냉·온탕정책 1967년 ‘부동산투기억제세’(양도차익의 50% 과세) 도입을 시작으로 지난 40년 동안 발표된 부동산정책만 모두 60차례에 달하지만 부동산불패 신화는 아직도 모진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숱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불패신화가 꺾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전체 자산의 80% 가까이 부동산에 쏠려 있는 우리나라 가계자산 구조는 국민들로 하여금 부동산가격 안정보다 상승을 선호하도록 만들었다. 통계청의 가계자산조사에 따르면 2006년 6월 현재 우리나라 가구당 평균 총자산은 2억8112만원이며, 이중 부동산자산의 비중이 76.8%(2억1604만원)에 달했다. 이 같은 부동산자산의 비중은 미국(2005년 기준, 삼성금융연구소 조사) 39%, 일본(2004년) 42%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처럼 거의 전 재산을 부동산에 묻어둠으로써 겉으로는 부동산투기를 비난하면서도 속으로는 가격상승을 바라는 독특한 이중심리는 결과적으로 불패 신화를 지탱하는 강력한 사회심리적 기반으로 작용했다. 여기에 단기간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한 지역간 불균형 개발, 특히 수도권 집중현상이 일부 지역의 만성적인 주택부족을 야기한데다 지나치게 낮은 보유세 등 불로소득을 제대로 환수하지 못하는 미흡한 제도와 정책이 우리사회에 ‘부동산불패’라는 잘못된 믿음을 심어주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국민소득이 낮은 시절에 담세능력이나 정치적 고려로 보유세를 높게 부과하지 못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다주택 소유를 부추겼고, 부동산가격 상승기에는 더욱 투기수요를 자극하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또 역대 정부의 일관성 없는 부동산정책은 부동산불패 신화의 불길을 키우는 연료 구실을 했다. 과열기 때는 규제를 강화하고, 침체기 때는 규제를 푸는 방식으로 경기진작효과가 큰 부동산시장을 만지작거리는 방식으로 수십 년을 반복하다보니 투기꾼들은 아무리 강한 규제가 와도 조금만 기다리면 경기부양이라는 명분으로 다시 규제가 풀린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하면서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가 땅에 떨어졌던 것이다. 특히 부동산시장이 경기조절수단으로 자주 활용된 것은 우리나라 주택공급체제가 구조적으로 민간 투기자금에 의존했기 때문이다. 역대 정부는 급속한 산업화가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주택부문의 공공투자 부족을 민간기업으로 하여금 집을 많이 짓게 하는 방식으로 메우기 위해 인위적으로 투기를 일으킬 필요가 생겼고, 이 과정에서 투기광풍이 불면 다시 규제를 강화하는 식으로 주기적으로 정책을 뒤집었다. 주거문제를 순전히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그동안의 정책관행은 개인들로 하여금 필사적으로 내 집 갖기에 집착하도록 하는 ‘소유 중심의 주거문화’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적은 돈으로 편하게 살 수 있는 공공 임대주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은 주택소유 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었다. 결국 주거복지에 대한 정책적 무관심은 대다수 국민들의 가슴 속에 ‘그래도 믿을 것은 부동산 밖에 없다’는 불패신화가 뿌리내리는 계기가 됐던 것이다. 성과는-조세 형평성과 시장 투명성 지난 40년간의 잘못된 정책관행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바탕으로 항구적인 시장안정을 위한 기초질서 확립에 주력했던 참여정부는 조세형평성·시장투명성 제고와 주거복지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2003년 2월 출범한 참여정부는 △조세 형평성과 시장 투명성 제고 △안정적 주택공급 △수요억제·전환 △주거복지 향상 등 4대 정책 목표를 설정, 그동안 10여 차례의 부동산정책을 발표했다. 4대 정책목표는 2002년 말 대선공약으로 제시된 ‘가수요 차단과 불로소득 과세 강화를 통한 부동산투기 억제’, ‘공공임대 확충 등을 통한 서민주거 안정’ 등 2가지 기본 방향을 구체화한 것이다. 참여정부는 종부세 강화 등을 통해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이 많은 세금을 낸다’는 조세형평성의 원칙을 확립했고, 이를 통해 투기수요 차단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또 실거래가 신고 의무화, 양도세 실가과세 등 부동산시장 투명화의 기반을 다졌다. 1967년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정책인 ‘투기억제세’ 이후 각종 사회적 저항에 부딪혀 번번이 도입이 좌절됐던 정책들이 40년의 세월을 돌아 참여정부 들어 겨우 실현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부동산정책사를 쓸 때 적어도 부동산시장 투명화와 조세형평성에 관한 한 참여정부 이전과 이후는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역대 정부에서 ‘돈 문제’ 때문에 항상 우선순위에 밀렸던 공공 임대주택 확충계획을 착실히 추진했던 점도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그동안의 임대주택정책은 주택공급정책의 종속적인 수단으로 활용됨으로써 언제나 건설계획은 의욕적으로 제시됐지만 재정여건이 악화되면 가장 먼저 사업이 축소되거나 조정되곤 했다. 또 분양위주의 자가(自家)촉진 정책이 우선됨으로써 임대주택 재고 확충이 충분하지 못했다. 이에 따라 2004년 말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10년 이상 장기 공공 임대주택은 전체 주택의 2.7%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참여정부는 2003년 5월 ‘주거복지 로드맵’을 세우고, 2006년 말까지 4년간 국민임대주택 총 39만여 호를 건설했다. 이는 당초 계획(5년간 50만호)에 비춰봤을 때 4년 성적으로 91.3%의 실적을 올린 것이다. 물량위주 공급관행을 탈피하기 위해 다세대·다가구 매입임대, 전세임대 등 도심 내 임대주택도 크게 늘렸다. 2006년 말까지 확보량은 1만8000호 가량. 또 10년 후인 2017년까지 공공 임대주택 비중을 선진국 수준인 전체 가구의 20%까지 확보한다는 중장기계획을 마련했다. 이를 위해 연기금, 우체국, 보험사, 투신 등이 참여하는 임대주택펀드를 구성, 2006∼2019년까지 연평균 7조원, 총 91조원의 자금을 조달할 계획이다. 미흡했던 점-공급시차 관리와 대출규제 참여정부는 조세형평성·시장투명성 제고와 주거복지 분야에서 뚜렷한 성과를 올렸지만 과잉 유동성으로 인한 가격불안과 공급시차로 인한 일시적 수급불균형을 선제적으로 관리하는 데는 약간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2005년 8·31정책의 경우 향후 5년간 공공택지 1500만평 확보라는 총량적 계획은 있었지만 세부적으로 택지공급에서 분양까지 걸리는 공급시차에 대한 대비가 부족했고, 규제에 따른 민간 공급 위축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참여정부 들어 수도권 주택공급이 감소한데는 IMF 외환위기 이후 경기부진의 여파로 1998~2002년까지 확보한 수도권 공공택지가 크게 줄어든 영향이 크다. 이 시절 공공택지 확보량은 연평균 360만평으로, 문민정부(1993~1997년)시절 실적의 81%에 불과하다. 택지확보에서 분양까지의 공급시차를 감안하면 이 시절 택지확보 부족분은 이후 시차를 두고 주택공급 부족을 초래하는 요인이 된다. 이후 2004년부터 공공택지 확보량은 연평균 600만평 이상으로 늘어났지만 역시 주택분양·입주까지 걸리는 시차로 인해 즉각적인 수급안정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에 2000년 준농림지 폐지 이후 민간택지 부족, 2003년 도심지 다세대·다가구주택의 일조권, 주차장 설치기준 강화로 인한 공급위축 등이 수급불안을 불러왔다. 이에 따라 2006년 11·15대책에서는 민간 주택공급을 늘리기 위해 수도권 재정비촉진지구 및 뉴타운에서 2012년까지 36만호를 공급하고, 계획관리지역 내 2종 지구단위계획구역의 용적율을 종전 150%에서 180%로 늘리는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다. 이러한 도심재정비, 규제완화 등을 통한 공급확대 효과는 다음 정부 들어 본격적으로 나타날 전망이다. 투기수요 억제에 주력했지만 정작 문제가 된 은행대출 규제가 적시에 이뤄지지 못한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2000년 말 54조2000억원에 불과했던 은행권 주택담보대출은 2006년 상반기 말 200조8000억원으로, 6년여 만에 4배가량 불어났다. 과거 집값 급등기에는 시중에 너무 많은 돈이 풀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2000년 이후 전 세계적인 저금리 기조 속에 우리나라도 저금리로 인한 시중 부동자금이 크게 늘었다. 이는 당시 경기침체에 대한 우려 때문에 통화금융정책에 급격한 변화를 주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데다 IMF 외환위기 이후 기업대출수요 감소 등으로 은행들이 상대적으로 위험부담이 적은 가계 주택담보대출에 치중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주택 매수수요가 늘었고, 이 과정에서 다주택자들에 대한 대출규제가 충분치 못했다. 2007년 1·11대책에 이르러서야 다주택자에 대한 주택담보대출 규제 강화가 유효한 정책수단으로 등장한다. 곧이어 1·31대책에서는 투기지역과 투기과열지구의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40%로 강화하는 등 그동안 집값 불안의 주요원인이었던 ‘돈 구멍’을 조절하는 정책이 본격화됐다. 가장 중요한 교훈-정책 일관성 지난 40년의 세월 동안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가까스로 빛을 본 주요 정책들이 앞으로 본격적으로 효과를 내려면 무엇보다 일관된 정책 추진이 중요하다. 특히 단기 경기부양책으로 부동산부문을 활용하는 과거 정책관행과 단호히 결별해야 할 것이다. 부동산정책을 경기조절수단으로 활용할 경우 자금이 단기부동화돼 생산적 부문으로의 유입이 억제되며, 이로 인한 투기과열은 노동윤리의 상실, 소득구조의 양극화를 초래한다. 건설부동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구조조정이 지연돼 국민경제의 기반이 약화되는 부작용도 뒤따른다. 따라서 보유세 강화, 양도소득세 등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정책기조는 경기흐름에 관계없이 일관되게 유지돼야 한다. 또 실거래가 신고제, 과표현실화 등은 부동산시장 안정의 전제조건인 시장 투명화의 토대이자 경제정의를 위한 기본요건인 만큼 더 치밀하게 다듬고 유지해야 한다. 전체 가구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무주택 서민들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전·월세값 폭등에 휘둘리지 않도록 이들을 위한 장기 임대주택 건설 등 주거복지 정책도 그 기조가 바뀔 수 없다. 부동산가격 불안의 주요 원인인 돈줄(과잉 유동성)을 관리하기 위해 담보가치 위주의 대출보다 소득 위주의 대출 기준이 정착되도록 노력하고, 장기적으로 시중 유동자금이 산업계로 흘러들어가도록 각종 유인책을 마련하는 전략도 숙제다. 한편 민간공급 위축을 보완하기 위해 공공부문의 역할을 강화하는 최근의 정책 방향에 대해 일부 시장론자들의 우려가 적지 않다. 심지어 정부는 부동산시장에서 아예 손을 떼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미래-주거복지정책을 향하여 그러나 국민들에게 최소한의 주거수준을 보장하고, 주거비 부담이 가중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현대 복지국가의 최소한의 의무일 뿐 아니라 주택은 공급시차(공급의 비탄력성) 등으로 인해 시장실패가 쉬운 만큼 이를 보정하기 위해 일정하게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또 부동산 소유편중에 따른 자산양극화, 부동산투기에 의한 불로소득 등이 그대로 방치되면 사회통합에도 지장을 주기 때문에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한다는 주장은 무책임하다. 다만 정부는 공공부문 비대화에 따른 비효율과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민간 구축효과의 부작용을 적절히 관리하는 대책을 지속적으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지난 1월부터 국민과 언론의 큰 관심 속에 연재를 시작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지난 40년간의 부동산정책의 역사를 되짚어보면서 부동산불패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꼼꼼히 확인하고,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위해 과거 정책으로부터 교훈과 정책적 시사점을 얻고자 했다. 불패신화와 싸워왔던 지난 40년의 역사는 숱한 유혹과 좌절의 과정이었으며, 정책의 일관성이 흔들릴 때마다 어김없이 부동산투기가 들불처럼 일어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투기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개개인 모두가 정책의 감시자이자 수호자로 발 벗고 나서야 하는 이유이다. 2007.03.28 특별기획팀
- “서울은 차라리 방치하는 게…”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세번째 주제로 <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을 6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①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②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 변천 ③ 토지투기 억제와 토지공개념의 변형 ④ 뜨거운 감자 재건축 ⑤ 교육과 부동산 ⑥ 부동산 문제와 균형발전 “위성도시 10여 개를 더 만들고 그나마 위태 위태 남아있는 그린벨트 등 녹지를 모두 풀어 수도권 전역을 콘크리트로 뒤덮지 않고서야 (수도권에) 충분한 토지와 주택을 공급할 방법이 어디 있나. ‘토지’가 아니라 ‘허공’을 충분히 공급해 앞으로 서울 사람들은 모두 최소 60층짜리 건물에서 살아야 하고 도로도 복층, 복복층화 한다면 고개를 끄덕거릴 수 있을 것이다. 근본적인 수요 요인을 관리하지 않고 공급만 늘린다는 방책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은 서울의 교통정책이 잘 보여주고 있다.” ‘신행정수도건설 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이 제기된 지 10여 일 후인 2004년 7월27일자 머니투데이 김준형 기자는 칼럼을 통해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반대해 온 서울의 ‘집적의 경쟁력’이라는 시장논리가 얼마나 반시장적인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연속 시리즈 형태의 이 칼럼은 이렇게 끝맺고 있다. “시장실패로 인한 과다한 비용의 확산을 막고, 서울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서울 시민을 포함한) 국민들에게 좀 더 균질의 삶을 제공하기 위해, 서울 집값이 ‘거품’탓이 아니라 쾌적한 환경 덕에 진짜 오르게 하기 위해서라도 수도이전은 ‘적정한 규모’로 추진되는 게 바람직하다. 수도이전은 먼 장래를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웰스 매니지먼트, 재테크이기 때문이다.” (김준형, ‘수도, 절대 못 옮겨가는 10가지 이유?’) 교통혼잡 비용이 서울시 예산 맞먹어 실제로 2002년 수도권 교통혼잡 비용은 서울시 한해 예산에 맞먹는 12조4000억원에 달했고 여전히 상승하고 있다. 또 폐기물 처리 등 수도권 환경개선 비용은 연간 4조원이 들고 있다. 서울의 경우 대기오염도나 공원면적 등 삶의 질 면에서도 선진국 대도시에 비해 극히 열악한 상황에 있다. 집적의 이익을 넘어 과밀의 폐해가 심각해지면서 오히려 수도권 경쟁력 약화 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2006년 한 해 동안 서울과 경기 지역 주택 가격은 각각 18.9%와 24.8% 올랐으나 부산(-0.6%)과 대전(-0.7%)은 오히려 집값이 떨어졌다. 이는 근본적으로 부동산문제의 해법이 수도권 과밀을 어떻게 완화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이는 과거 부동산값 상승기의 자료와 비교하면 더 명확해 진다. (전국 주택가격 관련 자료는 1987년부터 나왔기 때문에 이전에는 지가로 비교한다) 수도권 과밀이 부동산 문제의 원인 이른바 8·8조치라는 부동산 투기억제 종합대책이 나온 1978년의 경우 전국의 땅값은 전년에 비해 평균 49%가 올랐으나 서울은 무려 135% 상승했다. 몇 년 동안의 침체기를 거쳐 다시 부동산 투기바람이 불어 ‘토지 및 주택문제 종합대책’이 나온 1983년 역시 전국 평균 땅값은 전년 대비 18%가 올랐으나 서울은 57%나 뛰었다. 1980년대 후반에는 서민들의 이혼, 자살사태가 속출할 정도로 투기 열풍이 휩쓸며 집값이 치솟았다. 당시 투기붐이 정점에 달했던 1990년에도 전년대비 집값 상승률은 전국 평균이 21%였으나 서울은 24%였다. 가장 최근의 투기붐이 일기 시작한 2002년에도 서울의 집값 상승률은 전국 평균의 16.4%를 훨씬 웃도는 22%였다. 이와 함께 인구가 집중된 서울과 수도권의 주택보급률은 계속해서 전국 평균을 밑돌았다. 2005년 전국 주택보급률은 105.9%인데 반해 수도권은 96.8%, 서울은 89.7%에 머물렀다.이에 따라 대도시들만 놓고 비교하더라도 주택의 평당 분양가는 2003년 6월 기준으로 △서울 978만원 △부산 527만원 △대구 485만원 △광주 367만원 △대전 485만원으로 기록됐다. 수도권 집값 폭등과 지방경기 침체는 ‘동전의 양면’ 국가의 각종 자원과 경제활동이 수십 년 동안 수도권에 편재된 결과 서울과 수도권은 교통난, 환경오염 등 각종 도시 문제가 양산되는 가운데 주기적인 부동산가격 폭등이라는 몸살을 앓아왔고 지방은 인구유출과 경제 침체가 심각한 상태로 방치되면서 정체와 무기력에 빠져 들었다. 따라서 부동산 문제의 측면에서 균형발전정책은 장기적으로 전국을 골고루 특성에 맞게 발전시켜 대부분의 국가기능과 시설의 집중에 따라 서울과 수도권에 몰려 있는 부동산 수요를 적절히 분산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긴 안목으로 국가경쟁력 강화와 국민의 삶의 질 향상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주기적으로 되풀이 돼 온 부동산 투기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도 인구의 수도권 집중을 억제할 수 있는 균형발전 정책이 시행돼야 한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부동산 문제의 근원은 결국 수도권 집중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균형발전이 부동산 안정의 근본적인 해결방안”(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 2006년12월8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인 것은 분명하다. ‘나는 빼고 다른 사람들이나 보내라’는 것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이 같은 수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회고다. “1975년 사법연수원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어느 날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냈던 손정목 씨가 도시학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강의를 한 일이 있습니다. (중략)그 중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떠오르는 인상적인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서울은 만원이다. 서울 집중은 막아야 한다. 서울의 인구 집중을 유발하는 중요기관은 지방으로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막상 당신이 가겠느냐고 물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말하는 사람 대부분이 힘 꽤나 쓰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의 생각은 ‘나는 빼고 다른 사람들이나 보내라’는 것이다”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그 말의 취지가 서울 분산을 찬성하는 것이었는지 반대하는 것이었는지는 잘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나는 그 말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습니다.”(2005년3월22일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노 대통령은 “지금 평가해 보니, 나는 강력한 분권주의자, 분산주의자이기는 하나 행정수도 이전계획은 분권전략이기보다는 수도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적 성격이 강했다”고 했다. “행정수도 이전은 수도권 문제 해결 위해” 행정수도 이전의 정치적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우리나라 부동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균형발전의 대의를 심각히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정부 관료와 외국 전문가, 시민·사회단체는 물론 현 정부의 균형발전정책을 비판하는 언론들조차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부동산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단순히 세제 개편 등으로는 안 된다. 범국가적인 사회대개혁이 따라야 한다. (중략) 서울로의 인구 유입을 막지 못하면 아무리 서울에 집을 많이 지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밖에 안 된다. 범국가적인 균형발전을 위한 대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안 되고 이 문제는 여야 정치권도 따로 없다”(박승 한국은행 총재. 2006년3월22일 기자 간담회) “진정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 안정을 위한다면 이 사태를 부동산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부동산 가격급등과 투기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소신과 일관성 있는 지역균형발전을 펴야한다”(수도권과밀반대준비연대 성명 2006년11월15일) “기본적으로 인구가 수도권으로 지나치게 집중된 것이 문제다. 한국의 인구 수도권 집중은 일본보다도 심각한데 이는 지방과 수도권의 격차 문제로도 이어진다. 이 때문에 수도권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고, 지방으로까지 가격상승이 확산되는 부동산 거품의 패턴이 야기되는 것이다”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일본 와세다대 교수. 전 대장성 국제금융담당 차관. 서울신문 2007년1월1일)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몰려 사는 현실에서 국토를 고루 이용하지 않으면 부동산 문제의 근본적 해결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동아일보 2007년1월30일) 모든 게 다 모이는 서울…누적된 악순환 이어져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과밀 집중은 해방 후 정치적 격변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시작됐다. 서울은 오랜 기간 동안 왕도로서 권력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국민들의 수도지향적 가치관이 뿌리 깊었다. 여기에 1960년대부터 추진된 경제개발 최우선 정책으로 집적의 이점이 있는 서울과 수도권에 각종 경제활동이 집중되면서 사람들은 일자리가 풍부하고 다양한 수도권으로 몰려들었다. 구성원 사이의 경쟁이 치열한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 취업과 소득수준을 결정짓는 중요한 기구인 고등교육기관도 서울에 집중돼 있어 인구유입의 큰 요인이 됐다.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이 펴낸 ‘국토50년’은 “수도권 과밀 집중은 한국사회의 변동을 공간적으로 투영해 놓은 결과이자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분석하면서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다 모든 일자리와 정보, 자원과 인력이 서울로 집중되면서 교육, 의료, 문화 등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에서도 지방에 비해 월등한 서비스가 제공됐고 집중의 누적적 악순환이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도시계획 잘하면 더 몰려올 것…서울은 방치해야” 1963년12월부터 1966년3월까지 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 씨는 “서울에는 도시계획을 전혀 하지 않아도 매년 20~30만 명씩 인구가 모여든다. 만약 도시계획을 잘 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람이 몰려올 것이므로 인구집중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도 도시계획은 안하는 것이 좋다”며 공언했다고 전해진다.(손정목, 서울도시계획이야기4) 이호철의 장편소설 ‘서울은 만원이다’가 동아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것도 1966년2월8일부터였다. 서울시 인구가 350만명인 1966년을 전후해 나온 얘기들이니 지금으로서는 엄살처럼 들리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00만명 이하로 떨어진 서울의 인구가 1954년 124만명, 1959년 210만명, 1963년 325만명 등으로 급팽창하던 시절임을 감안해야 한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연 평균 인구증가율이 10%를 넘는다면, 누구를 시장에 앉혀도 이 인구증가를 수용할 수 있는 기반시설을 건설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면서 “당시의 서울에는 하수구가 제대로 없어서 비가 오지 않아도 진창이 되는 곳이 수두룩했다”고 기록했다.(대한민국史 2권 6부 역사를 통한 세상읽기 ‘서울, 40년 전부터 만원이었다-서울변천사에 대한 서울토박이의 넋두리’) 서울에 인구가 모일만큼 모인 후에는 서울 주변이 폭발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서울의 외곽도시들은 1970년대부터 발달하기 시작해 성남·안양·부천 등이 시로 승격했고 1980년대에만 서울 주변의 13개 읍이 시가 되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전체 인구의 48%가 국토면적 11.8%인 수도권에 모여 있으며 의료기관의 50.4%, 금융기관 예금의 68%, 공공기관의 84%, 100개 대기업 본사의 91%가 수도권에 입지하는 세계 최고의 수도권 집중도를 보이게 됐다. 더욱이 수도권 인구조차도 수도권 전체에 고루 퍼져 사는 게 아니라 수도권의 17%에 불과한 ‘과밀억제 권역’에 81.9%가 밀집해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 인천, 구리, 고양, 수원 등 16개시에 1900만명이 넘는 인구가 몰려 살고 있는 기형적인 양상이다. 행정수도 이전은 마지막 정책적 수단 수도권 과밀 해소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려는 ‘행정수도이전’ 계획의 역사는 수도권 집중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김광수경제연구소의 김광수 소장은 “서울과 수도권에 소재하는 중앙행정서비스 기능의 지방이전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전체의 과도한 집중과 과밀의 심각성을 해소하기 위해 시도되는 사실상 마지막 정책수단”이라며 “수도의 개념은 과거 왕정시대와 같은 중앙집중적인 지리적 개념보다는 지방분산적인 기능적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균형발전 정책의 상징적 출발점이자 전환점이 되는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당시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대전으로 행정수도를 옮기겠다고 공약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서울에 무허가 판자촌이 우후죽순처럼 번지는 등 이미 1960년대부터 추진해 온 수도권 인구 억제정책들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던 때였다. 1977년 박 대통령 ‘임시행정수도’ 계획 밝혀 이어 박정희 대통령은 1977년2월10일 서울시 연두순시에서 통일 때까지 정부기능을 수도권 남부지역으로 이전한다는 ‘임시행정수도’ 계획을 밝혔다. 앞서 1976년2월 신형신 제1무임소 장관은 박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장관실에 ‘수도권 인구정책조정실’이라는 기구를 신설하고 서울인구집중억제책을 연구했다. 1977년 전반기에 거의 마무리된 이 연구의 주된 내용은 서울 인구수 억제라는 목표를 위해 행정수도를 만들고, 수도권을 이전촉진·제한정비·시설유치의 3개 지역으로 구분해 수도권 전체 인구를 재배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이 행정기능을 옮길 제2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한 때는 인도차이나 반도 공산화 도미노 현상이 일어난 직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 대통령은 이미 1975년8월2일 경상남도 진해 하계휴양지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수도권 인구분산정책의 획기적인 방안은 수도를 옮기는 것밖에 없다. (중략)서울서 자동차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곳에 인구 100만명 규모의 새 행정도시를 건설하는 것이 좋겠다”고 속내를 털어놨다.(중앙일보 1977년2월11일자) 1976년5월20일에는 서울대 공대 도시계획 전공의 주종원 교수와 최상철 환경대학원 교수가 김종필 당시 유정회 국회의원의 지시로 ‘행정수도 건설 기초작업’을 시작한다. 이 작업 결과는 '새 수도(New Capital)'의 약자인 ‘NC'라는 제목의 책으로 정리됐다. 이 책은 8월 수십 장의 후보지 항공사진, ‘임시행정수도 입지선정기준’이라는 대통령의 친필메모와 함께 김재규 건설부 장관과 김의원 건설부 국토계획국장에게 전달됐다. 외국의 수도 이전 사례 조사, 현지답사부터 ‘정감록’ 풀이까지 하던 건설부는 그해 말까지 세 번에 걸쳐 중간보고를 하면서 별도의 전담팀 구성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77년3월 오원철 당시 제2 경제수석이 단장으로 있던 중화학기획단에 ‘실무기획단’이 꾸려져 구체적인 입지선정과 건설계획에 착수했고 그 해 7월에는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위한 임시조치법이 제정됐다. 행정수도 제1후보지는 충남 공주시 장기면 일대 박 대통령은 백지상태에서 이상도시를 세운다는 뜻으로 기획단에 ‘백지계획 수립’을 지시했고 중화학공업단은 1977년 말에 ‘행정수도 이전을 위한 백지계획안’을 마련했다. 극비로 진행된 백지계획이 상정한 행정수도 제1후보지는 충남 공주시 장기면 일대였다. 이 지역은 휴전선에서 70km 이상, 해안선에서 40km 이상 떨어져 있어 북한군의 지상포화와 함포 공격을 피할 수 있어 안보 측면의 조건을 충족시켰으며 국토의 중심점과 근접한 지형적 이점을 갖추고 있었다. 대상지가 선정된 후에는 행정부, 정부연구기관, 학계전문가 등이 광범위하게 참여한 가운데 도시설계작업이 이뤄졌다. 1978년6월부터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내에 신설된 지역개발연구소팀이 6개월간 밤낮없이 작업을 해 부문별 세부계획을 담은 방대한 극비 보고서를 완성했다. 1979년5월 ‘행정수도건설을 위한 종합보고서’가 박 대통령에게 제출됐다. 총면적 8600ha, 2000년에 인구 100만명을 수용하게 될 행정수도 건설은 1982년부터 1996년까지 3단계로 나눠 추진된다는 구상이었다. 건설비용은 1978년 불변가격 기준으로 공공부분 3조4409억원 등 모두 5조5421억원으로 잡았다. 당시 국민총생산의 0.6%, 정부재정규모의 3.2% 수준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2차 석유파동으로 전세계 경기가 얼어붙어 있었고 한국 역시 1979년4월 ‘경제안정화 종합대책’을 발표해 재정긴축정책을 천명한 상태라 백지계획을 당장 실행에 옮기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그러던 중 10·26사건과 12·12쿠데타가 연달아 터지면서 백지계획은 말그대로 ‘백지’가 되고 말았다. 당시 백지계획은 안보와 반대여론, 부동산 투기를 우려해 극소수 전문가들에 의해 극비리에 진행됐다는 한계로 폭넓은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는 못했다. 과천 청사, 당초 목적 달성 못하고 서울 광역화 1977년 박 대통령은 해발 629m 높이의 관악산이 적의 장거리포탄을 막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 경기도 과천면 문원리에 정부 제2청사를 짓고 그 일대에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79년 4월에 과천 제2청사 기공식이 열렸고 1982년 6월부터는 정부부처의 입주가 시작됐다. 그러나 과천 정부 제2청사도 인구나 행정기능 분산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 채 오히려 서울의 광역화를 야기했다. 과천은 최근의 집값 상승이 시작된 2003년1월부터 올 1월까지 아파트값이 110%나 올라 수도권에서도 집값이 가장 많이 오른 대표적인 지역으로 꼽히게 됐다. 1980년대 들어서는 중앙행정기관을 대전으로 옮기는 방안이 추진됐다. 대전시 둔산지구로 행정부 기능을 옮긴다는 계획은 앞서 박정희 대통령이 행정수도백지계획 실행이 여의치 않자 구상한 내용이었으나 중단돼 있다가 1985년 전두환대통령이 ‘중앙행정기관 및 외청배치계획안’을 재가하면서 본격화됐다. 그러나 초반 5년가량은 부처간 갈등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했다. 88올림픽을 전후해 수도권 비대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자 1987년 “대전을 행정중심 기능도시로 육성한다”고 방침이 나왔으며 노태우 대통령은 1989년 2월 10일 대전을 방문한 자리에서 "제2수도로 집중 육성해 나가겠다"고 공식 발표해 청사이전작업을 구체화했다. 노대통령은 이를 위해 그 다음날 곧바로 "수도권대책 실무기획단"을 발족했다. 노태우 대통령 1989년 대전 방문 “제2수도로 육성” 하지만 두 달 후 노 대통령은 총리실에서 전담하기에는 부처간 이기주의를 극복하기 힘들다고 판단, 명칭을 ‘지역균형발전기획단’으로 변경하면서 대통령비서실 소속으로 격상시키고 기획단장에 문희갑 경제수석비서관, 부단장에 이석채 경제비서관을 임명했다. 그 이듬해인 1990년 9월 노대통령이 마침내 11개 청단위기관의 대전이전에 관한 계획안을 최종 재가하면서 대전 이전안은 현실화된다. (한국경제신문 1998년7월23일자) 대전청사 건물은 김영삼 대통령 집권기인 1993년 9월에 착공, 1997년에 완공돼 1998년까지 관세청, 조달청, 특허청 등 11개 중앙행정기관이 이전을 마쳤다. 1985년부터 계획안이 나오기 시작해 13년 만에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해당 공무원들 중 가족과 함께 대전으로 이사한 비율은 30% 안팎에 그치는 등 수도권 인구 및 중앙권력 분산 효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국민의정부는 1998년부터 중앙행정부서 권한을 지방으로 넘기는 방안을 추진했으나 이양 대상 사무 625개 중 138개만 지방으로 넘기는 데 그쳤다. 2000년에는 지역균형발전기획단을 발족해 국가 중추기능을 수도권 박으로 옮기는 방안이 논의했다. 신행정수도 건설계획 25년 만에 부활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대선 후보 시절인 지난 2002년 9월 말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해 청와대와 중앙부처부터 옮겨 가겠다'고 공약하면서 신행정수도 건설계획은 25여 년 만에 다시 빛을 보게 됐다. 신행정수도건설추진자문위원장을 지낸 김안제 서울대 명예교수는 논란 많았던 신행정수도이전 계획에 대해 “1960년대 이후 100개 정도의 수도권 규제와 지방발전정책이 나왔는데 모두 실패했고 효과가 없었다”면서 “할 수 없이 초강력 약을 쓰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2003년 4월14일 신행정수도건설추진기획단 및 지원단을 발족하면서 신행정수도 건설작업을 본격화했다. 그 해 7월에는 신행정수도특별법안을 내놓은 뒤 공청회 등의 절차를 거쳐 같은 해 10월21일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은 여야 간의 밀고 당기는 격론 끝에 2003년 말 찬성 167,반대 13의 압도적인 표차로 국회를 통과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은 2004년 4월10일 공식 공포절차를 거쳐 시행에 들어갔으며 이 법률에 근거해 5월21일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발족했다. 추진위는 6월 15일 연기·공주와 진천·음성 등 4곳의 후보지를 발표했고 이후 후보지 비교 평가작업을 거쳐 8월 11일 연기·공주를 예정지로 공식 확정했다. 100차례 넘는 토론회, 공청회 통해 결론 이춘희 건설교통부 차관은 당시 입지선정 과정에 대해 “2003년5월부터 충청권 전역을 놓고 도면검토를 해 이듬해 6월 최종후보지 4곳을 추려낸 후 최종평가는 전국 16개 시도에서 각 5개 분야 평가위원회를 구성해 합숙토론을 하도록 해서 결정했다”고 밝혔다. 도시 건설 마스터플랜도 이 차관이 이른바 ‘개방형계획수립체계’라고 명명한 방식대로 15개 분야로 나눠서 역시 100차례가 넘는 각종 토론회, 공청회, 워크샵을 통해 결과를 도출해 냈다. 이 차관은 토지보상 역시 보상착수 8개월 전부터 주민들과 19차례에 걸쳐 금액을 제외한 이주대책, 생활대책 등을 논의한 ‘참여형 보상’으로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밝혔다. 이 과정에서 야당과 서울시 등은 줄기차게 신행정수도 건설 반대 목소리를 내왔으며 천도와 국민투표 논란 등으로 신행정수도 건설작업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석연 변호사가 2004년7월12일 '수도이전 위헌 헌법소원 대리인단'을 구성해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제기했고 3개월 후인 10월21일 특별법은 위헌 결정을 받았다. 이후 정부와 국회는 후속대책 마련에 착수, 2005년3월2일 국회에서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 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세종시’로 명명된 행정중심복합도시는 2006년 말 토지보상이 완료됐으며 올해 하반기부터 부지조성 공사에 들어가 일정이 차질 없이 진행될 경우 2012년부터는 중앙행정기관이 단계적으로 이전하고 주민들의 입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40년 간 계속된 수도권 인구분산 정책 수도이전 계획 외에도 정부는 일찍이 1964년 대도시인구집중방지책을 국무회의 의결사항으로 발표한 이래 지난 40년 동안 수도권에 인구 집중을 유발하는 공장과 대학 신설 규제, 대규모 개발사업 제한, 과밀부담금 부과, 조세 중과 등 숱한 인구집중 억제책을 펴 왔다. 그러나 수도권 정책은 여러 외적 요인들로 인해 규제 강화와 완화가 반복되면서 서울 인구는 매년 30만명이 넘게 늘었으며 전국 인구 대비 수도권 인구 비율은 1960년에 20.8%(519만명)에서 2005년에는 48.3%(2213만명)로 폭증했다. 1960년대 후반에는 이농인구 최소화, 대도시 인구집중방지를 겨냥해 동진강지역, 전남지역, 김해지역 등에 대규모 간척사업이 실시됐으며 공업단지 조성, 중소도시 개발지원책, 지방대학 육성정책도 시행됐다. 서울시내에는 도시계획상 공업지역이 없어졌으며 공장건설은 금지됐다. 주민세 신설, 대학 신설금지 및 정원증가 억제, 구미·창원·여천 등 동남권 대규모 공업단지개발 등이 모두 서울 인구집중방지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것이 국정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서울이 지닌 집적경제의 혜택을 가능한 한 살려야 할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수도권 정책은 주택부족, 불량주거지 척결 등 서울의 당면문제 해소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1970년대에는 안보 차원의 인구억제 조치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는 서울의 팽창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는 사회, 경제적 요구와 함께 안보 차원의 서울인구 집중억제책이 다시 거론되면서 더욱 강경한 조치들이 추진됐다. 1960년대만 해도 연평균 인구증가율이 당시 서울의 4분1 수준인 2%에 불과했던 경기도 인구 증가율이 1970년대에는 서울과 유사한 수준인 4%대로 오르면서 서울의 광역화 현상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1971년 개발제한구역 지정, 1973년 기업본사 및 정부투자기관 지방이전, 무허가 판자촌 철거와 공원화 시책 등이 발표됐으며 1974년에는 서울 강북인구의 강남분산 및 강북 소재 중·고교의 강남이전이 실시됐다. 1975년 3월 서울시 연두순시 때까지만 해도 서울인구 집중방지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한 의지는 ‘강북인구 억제책’에 머물렀다. 손정목 전 서울시립대 교수는 저서 ‘서울도시계획이야기’에서 “애초 박 대통령의 서울인구 분산책은 한강 이북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면 북한의 남침시 한강을 건너 피난하기 어렵다는 안보상의 이유에서 비롯된 생각이었으나 당시 인도차이나 반도의 공산화 도미노 현상과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보유로 1975년4월쯤부터는 ‘강북만이 아니라 서울 및 수도권 인구 전체가 억제돼야 한다’는 쪽으로 전환됐다”고 전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수도권 인구집중 억제책은 강도를 더해 1976년에는 서울 인구집중 억제정책을 제1무임소장관이 맡아 장기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1977년에는 수도권 인구재배치계획이 발표되고 임시행정수도 건설 계획이 나오기에 이르렀다. “88올림픽 개최로 수도권 인구집중 유발” 그러나 정치적 격변으로 4공화국이 끝나면서 임시행정수도 건설을 필두로 한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들은 무산됐다. 최상철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이 시기에 88올림픽 서울 개최 결정으로 인한 서울시 개발, 과천 제2종합청사 건설, 인천 남동공업단지 개발 등 오히려 수도권 인구집중을 유발하는 정책들이 전개됐다”고 지적했다.(수도권정책과 지역균형발전정책, 지방자치 1989년8월호) 그러나 행정수도건설계획이 백지화된 가운데 정부가 모범을 보이기 위한 조처로 1982년5월 수도권 내 공공청사 및 대규모건축물규제계획이 발표됐고 1984년7월에는 수도권정비기본계획을 시행을 위한 근거법인 수도권정비계획법이 제정됐다. 1988년 6공화국이 출범하면서 당시 대대적으로 몰아쳤던 투기열풍에 대한 대응과 지역간 격차로 인한 갈등해소를 위해 수도권인구집중억제와 정비문제가 다시 강조됐다. 1989년에는 청와대에 지역균형발전기획단이 발족돼 수도권 정책과 균형발전 문제를 주요과제로 다루게 됐다. 1990년을 전후해서는 청와대와 건설부를 중심으로 그간의 수도권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와 대안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작업이 이뤄졌다. 기존 수도권 정책이 지나치게 물리적 규제에 의존하고 있어 오히려 규제를 피하기 위한 탈법, 편법, 불법을 유도하는 부작용을 일으켰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수도권 내부에서도 지역격차가 심화돼 주민들의 불만이 쌓이면서 경기도 분도 요구까지 나왔다. 경기도의 분도 요구 1990년대 들어서는 수도권 5개 신도시 건설, 영종도 신공항 및 경부고속전철 건설, 수도권 광역교통망 확충, 아산만 신산업지대 조성 등 일련의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수도권 공간구조가 크게 재편됐으며 서울을 중심으로 한 첨단정보, 국제교역 등 고급 중추기능에 대한 수요가 정책적 딜레마로 부상했다. 이 시기 수도권정책은 물리적 직접규제에서 간접규제로 전환됐으며 수도권 문제를 국토전체의 균형발전과 함께 조망하려는 통합적인 시각이 대두됐다. 이에 따라 1994년에는 수도권 공장총량제 및 과밀부담금제가 도입됐고 개발촉진지구가 지정됐으며 준농림지 개발이 허용됐다. 또 지역균형발전법을 제정해 개발촉진지구 사업, 지역균형발전기금 설치 등 지방육성사업이 추진됐다. 그러나 1995년 전면적 지방자치제 실시와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수도권 관리의 의미가 퇴색됐고 시장경제논리로 무장한 조직적 수도권 규제완화 요구가 커져갔다. 2000년대는 난개발이 이뤄지던 1990년대 말의 수도권 개발을 반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수도권을 개발하려는 논리가 등장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에는 국토정책과 관련한 주요 법률이 개정, 제정돼 국토의 체계적 정비가 가능해진 한편, 수도권을 국제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동북아경제중심국가 전략, 외국인 투자지역 및 경제자유구역 등이 지정됐다. 2001년에는 서해안고속도로와 논산-천안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는 등 정부는 지방개발에 역점을 뒀으나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외국인투자에 대한 수도권 입지규제를 완화하는 등 부득이한 규제완화도 있었다. 균형발전, 핵심적 국가발전 전략으로 현 정부는 지역간 불균형을 이대로 방치하면 궁극적으로 국가 전체의 경쟁력과 성장 잠재력을 붕괴시키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균형발전을 핵심적 국가발전 전략으로 삼았다. 1980년 초 부산에서 변호사로 사회운동에 참여할 당시부터 대도시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던 노무현 대통령은 “당시 공해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대도시문제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대도시 집중은 단순히 공해와 비용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신병, 마약, 청소년 범죄문제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을 뿌리째 황폐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피력했다. (노무현 대통령 ‘행정수도 건설을 결심하게 된 사연, 2005년3월22일) 이에 따라 참여정부는 출범과 동시에 국가균형발전위원회를 창설해 ‘선 지방 육성, 후 수도권 규제완화’의 기조로 균형발전특별법 제정, 균형발전5개년계획 수립, 국가균형발전기금 설치, 신행정복합도시 건설, 공공기관 지방이전 등 의욕적인 지방발전전략을 시도했다. 그러나 수도권을 그대로 놓아 두는 것은 아니었다. 지방육성시책 중에서도 일부 불합리한 규제완화, 공공기관 이전부지 등에 정비발전지구 도입 등을 통해 수도권 경쟁력 강화도 함께 하고 있다. 프랑스 18.7%, 영국 26%, 일본 27,2%…한국은 48.3% 재계와 수도권의 입장을 반영하는 쪽에서는 선진국들이 다 수도권 규제 정책을 없애는 마당에 우리나라는 여전히 각종 수도권 규제가 유지되면서 국가경쟁력에 발목을 잡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선진국들 중 수도권 집중이 사회문제화 되고 있다는 나라들의 수도권 인구비중은 프랑스가 18.7%, 영국이 26%, 일본이 27.2%(2003년 기준) 수준으로 그 비율이 48.3%(2005년 기준)에 이르는 우리나라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1950년대부터 각종 수도권 규제, 지방분산·육성책을 추진한 프랑스는 수도권 인구비중이 1960년에 18.2%로 우리나라(20.8%)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나 이후에는 1982년 18.5%, 2005년 18.7%로 안정돼 우리나라와 큰 대비를 이룬다. 프랑스는 1985년 파리권 규제를 완화한 후 사무실 신설이 크게 증가하자 1989년에 다시 규제를 강화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역시 1950년대부터 균형발전 정책을 추진해 온 일본도 1970~2000년 동안 전국 인구가 21.3% 증가한 데 비해 수도권 시가지 인구는 5.9%에 그쳤으나 1956년 제정된 ‘수도권정비법’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 최근 이 나라들이 일부 대도시권 규제를 완화 내지 폐지하는 추세는 이처럼 우리나라와는 달리 대도시권 인구가 안정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배준구 경성대 교수는 “한국처럼 여전히 수도권 인구집중이 극심하고 지방의 모든 여건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각의 주장처럼 수도권 규제정책을 대폭 완화하거나 폐지할 경우 수도권 블랙홀 현상, 지방산업 공동화가 가속화할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한겨레신문 2007년2월13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2005년 연례 한국경제보고서에서 한국이 잠재성장률을 현재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역균형발전이 필요하다고 권고했다. 비수도권 토지보상금, 수도권 부동산 거래금액의 0.36% 최근 수도권 부동산값이 급등한 원인에 대해 행정중심복합도시·혁신도시·기업도시 건설 등으로 지방에 풀린 보상비가 수도권으로 밀려들어오면서 집값 폭등을 부채질했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혁신도시·기업도시는 보상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근거가 희박한 ‘주장’에 불과하다. 건설교통부가 행정중심복합도시를 포함해 토지공사, 주택공사 시행의 131개 사업지구에서 2006년 상반기에 토지보상금을 받은 사람들의 1년간 부동산거래내역을 조사한 결과 전체 보상금 수령액 6조6508억원 중 2조5170억원, 즉 37.8%%가 다시 부동산에 투자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중 비수도권에서 풀린 보상금은 3조2058억원으로 이 보상금 중 수도권 부동산에 유입된 액수는 2840억원으로 276조원으로 추정되는 2006년 수도권 전체 부동산 거래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1%에 불과했다. 건교부는 연간 총 보상금 규모로 환산해 분석해도 비수도권 지역 보상금이 수도권에 흘러든 비율은 수도권 부동산 거래금액의 0.36% 수준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더욱이 행정·혁신·기업도시는 중장기적으로는 수도권 집값안정에도 기여할 수 있다. 해당 예정도시나 주변 지역 부동산 값 상승에 대해서는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은 “전국을 투기장화한거냐, 아니면 소외, 낙후되었던 지역들이 개발가치가 조금 높아진 정상적인 과정으로 봐야 하는 거냐.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2007.03.22 특별기획팀
- 대통령도 깨지 못했던 ‘8학군’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세번째 주제로 <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①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②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 변천 ③ 토지투기 억제와 토지공개념의 변형 ④ 뜨거운 감자 재건축 ⑤ 교육과 부동산 ⑥ 균형발전 ‘강북에서 용났다. XX학원 출신 서울대 합격생 총 141명’ 최근 서울의 버스에 붙여진 학원 광고는 강남·북 간의 교육 문제를 잘 보여준다. 강북 지역의 고등학교에 다녀서는 공부를 잘해도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려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반대로 유명한 사설학원이 몰려있고 교육환경이 좋은 강남의 학교에 다니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사회적으로 성공할 확률도 높다는 것이 거의 공식처럼 굳어지고 있다. 강남의 학교에 다니려면 고가 아파트가 즐비한 강남에서 살아야 하고, 결국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자녀의 명문대학 진학으로 연결되는 셈이다. 소위 ‘개천에서 용나는’ 우리 사회 ‘기회균등’의 신화가 급속도로 무너지고 있다. 대한민국 부모의 자녀 교육열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부모세대는 교육이 출세의 확실한 사닥다리임을 절감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대한민국의 부모들이 좋은 교육시설이 몰려있는 강남으로 진입하려는 노력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이유에서든 '강남의 집중화'는 여러가지 사회경제적 악순환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특구 강남의 수요가 이 지역 아파트값을 끌어올리고, 또 주변 지역과 수도권의 집값을 차례로 밀어올리는 동심원 현상을 일으킨다. 주택수요를 좌우하는 ‘입지여건’ 측면에서 부동산 가격변동의 핵심 요인 중 하나가 교육인 셈이다. 반면 강남에 진입할 수 없는 대다수 보통 부모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가진다. 부동산 정책을 놓고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균등한 교육기회 제공 문제와 8학군 조정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때문이다. ‘8학군병’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나고 강남이 교육특구로 자리잡은 1980년대 이후, 이 두가지 상반된 시각의 이해충돌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강남 이전 명문고를 다시 강북으로 옮길 계획은?” 2003년 9월 23일 서울시교육청 국정감사 현장. 부동산 가격 급등의 원인으로 강남의 교육환경이 지목받을 때였다. 당시 민주당 이재정 의원은 유인종 서울시교육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혹시 강남에 이전했던 명문고들을 다시 강북으로 옮겨올 계획은 가지고 계시지 않나요? 과거에 강북에 있던 학교들 가운데 일부 강남으로 이전했던 학교들을 다시 강북으로 환원시킬 수 있는 방안은 한번 연구해볼만 하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유인종 교육감은 이렇게 답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연구의 가치는 있습니다만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날 이 의원이 말한 ‘강남으로 이전했던 학교들’이란 1974년 평준화되기 이전까지 전국적인 명문고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경기고·서울고·휘문고 등이다. 이 학교들은 1970년대 서울시 인구분산책의 하나로 강남으로 이전돼 강남 8학군 신화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학군이 중요하게 된 것은 1980년부터. 당시 서울시교육위원회는 고등학교 배정기준을 출신중학교 중심에서 거주지 중심으로 바꾸고 공동학군제를 폐지했다. 공동학군제란 정부가 1974년 평준화를 도입할 때 ‘도심지역 거주학생만 도심지에 몰린 명문고에 지원하면 불공평하다’는 외곽 지역의 불만을 고려, 서울의 모든 중 3학생에게 문호를 개방한 제도를 말한다. 당시 서울시교위가 학군제를 변경한 것은 통학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서였다. 8학군의 탄생…현대판 ‘맹모삼천지교’ 학군배정 기준이 거주지 중심으로 바뀌자 강남지역에 8학군이 탄생하고 8학군 지역에 몰린 명문고를 쫓아 사람들이 이동하는 ‘8학군병’이 태동했다. 평준화 이후에도 학교간의 우열차가 나타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같은 해 과외금지조치가 취해지면서 학교 교육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해졌다. 교육열에 불타는 한국의 ‘맹모’에게 명문고가 몰려있는 8학군이 커다란 유혹으로 작용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었다. 1981년 10월 중앙일보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고교평준화 후 명문고에 자녀를 보내기 위해 주민등록을 허위로 옮기는 현상이 늘고 있다. 서울 강남의 대치동·삼성동·서초동·청담동 등 명문고들이 몰려 있는 지역은 허위세입자가 많아 실제로 거주하고 있는 학생들이 학교배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먼 곳의 학교로 배정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허위전입이 부쩍 늘자 서울 대치동 한 아파트 주민들은 며칠 전 반상회에서 ‘친척·친지들의 허위전입 부탁을 받지 말자’는 색다른 건의를 하고 관할 동사무소에 허위 전입자를 철저히 가려내줄 것을 요청했다.” 부동산 투기꾼 8학군에 눈독 이후 위장전입자 단속은 연례행사처럼 계속된다. 1982년 9월 명문고 배정을 목적으로 한 위장전입 관련자는 모두 처벌한다는 발표가 나자 8학군 명문고 주변 동사무소에 전출 신청자의 긴 행렬이 늘어서기도 했다. 이처럼 교육열을 가진 중산층 학부모가 몰리면서 경기고·서울고 등 기존 명문고에 이어 신흥 명문고가 하나둘 등장했다. 곧 8학군은 대입에서 단연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투기꾼이 명문고가 몰린 8학군을 놓칠 리 없었다. 게다가 8학군 지역은 계획개발 덕택에 쾌적한 주거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이 지역에 눈독을 들인 투기꾼은 1982년 중반 이후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기 시작하자 본색을 드러낸다. 당시 정부는 1978년 이후 침체된 주택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힘겹게 노력하고 있었다. 8학군에 되살아난 주택경기가 더해지자 ‘상승작용’이 발생했다. 서울 개포동 등 강남지역에 투기판이 벌어진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투기대책으로 8학군 조정 등장 1982년 10월 27일 국회 건설위원회. 민주한국당 최수환 의원이 당시 횡행하던 투기의 원인을 캐묻고 있었다. “개포동이나 압구정동에 수요자가 몰리는 것은 바로 학군이 좋기 때문입니다. 학군이 좋다는 것은 건설부와 관계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건설부는 엉뚱한 곳에서 문제점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관영 당시 건설부 차관도 학군 문제를 수요 집중 원인 중 하나로 인정했다. “투기발생 원인을 살펴봤습니다. 첫째 학군 등 주변 환경으로 인해 주택수요가 급증하고 있는 것이 원인의 하나라고 분석했습니다.” 곧 8학군 조정 문제가 등장한다. 1983년 9월 당시 구본석 서울시교육감은 명문고가 밀집돼 있는 8학군 등의 학군이 아파트 투기붐과 전입학 적체현상을 빚는 등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 1985년부터는 이를 대폭 조정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지하철 3, 4호선이 개통되면 통학거리와 학군에 따른 아파트 투기 우려 등을 고려, 1985년부터 고교의 경우 2개 학군 정도를 추가해 8학군 학교의 분산을 꾀한다는 내용이었다. 강남 전입 신참 527명 강제로 강북 배정 서울시교위는 산하에 ‘서울시내 인문계 고등학교 학군조정위원회’를 발족해 조정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2년이 지난 1985년 10월 이 방침은 보류된다. ▲신설 지하철의 통학 기여도가 4.6%로 예상보다 낮게 나타났고 ▲문교부 산하 교육개혁심의회에서 선지원 후선발 등 고입제도 자체를 바꿀 움직임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문교부는 1984년부터 학력저하 등을 이유로 고교평준화 정책을 재검토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 지역에 선지원 후시험제를 도입하자는 문교부의 논의는 결국 무산됐다. 이에 연계해 학군조정을 하기로 했던 서울시교위도 ‘뜨거운 감자’였던 학군문제를 건드리지 않았다. 1986년 서울시교위는 8학군 등 특정학군에 학부모들이 몰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 일종의 대안을 내놓는다. 바로 전입학생의 거주기간 원칙 적용이었다. 이 제도가 실시되면서 1986년 8학군 졸업생 중 거주기간이 1년 이내였던 527명이 강북의 다른 학군 학교로 배정됐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강남 교육수요는 해마다 늘어났고 1990년대에 이르자 강제로 타학군에 배정된 학생의 수는 3000여 명을 훌쩍 넘어섰다. 40개월이 넘는 거주기간이 적용됐으나 강남 수요는 줄어들지 않았다. '8학군병'·'강남특구' 신조어…8학군발 부동산 가격 폭등 1987년에는 ‘8학군병’, ‘서울교육시 강남특별구’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평준화 실시 이후 ‘학교차’가 해소된 반면 ‘지역차’가 생긴 셈이다. 비평준화 시절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면 실력이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평준화 이후에는 ‘돈이 없어서 강남에 못 갔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8학군은 많은 이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1987년 고등학교 배정통지서를 나눠주던 날, 서울 강남의 중학교 담임교사는 학생들을 달래야 했다. “흔히 강남의 고교라야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타학군에 진학하면 크게 낙담하는데 그 생각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타학군 배정통지서를 받아든 한 학생은 이내 울음을 터트렸다. 당시 학생들이 8학군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짐작케 하는 장면이다. 8학군에 대한 수요는 점점 늘어 불씨만 댕기면 언제든지 주택가격 폭발로 이어질 기세였다. 8학군인 서울 강남의 삼성동, 역삼동, 청담동, 서초동 등 명문고 배정 안정지대에서는 전세값이 집값과 비슷해졌다. 4년 전부터 매물이 없어 거래가 끊긴 상태라 전세값만 상승했기 때문이다. 전세 입주자의 40%가 “학군 때문에” 당시 주택공급은 사상 최저 수준을 기록하고 있었다. 반면 3저 호황으로 소득이 늘어나 주택수요는 계속 늘어났다. 곧 집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서울 강남, 그중에서도 8학군의 대형아파트를 중심으로 급등세를 보였다. 1989년 2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51평형은 2억9000만원으로 보름 사이에 3000만원이 올랐다. 하룻밤 사이에 넉 달 치 월급만큼 집값이 오른 셈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당시 평균임금은 한달 43만여 원이었다. 집값이 오르자 내 집 마련을 포기한 전세 수요자가 늘었다. 8학군 지역도 사정은 마찬가지. 명문고를 찾아온 전세수요자로 전세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 1989년 3월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48평형은 1988년 12월 8000만원이었던 전세값이 1억원에도 물건을 구하기 힘든 상태가 됐고, 대치동 쌍용아파트 31평형은 같은 기간 1500만원이 오른 5500만~6000만원에 전세계약이 이뤄졌다. 이 시기 주택사업협회가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 6개 아파트단지 955가구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39.9%가 학군 때문에 강남에 살고 있다고 답했다. 경제기획원이 나서 다시 학군조정 논의 시작 정부는 1989년 2월 이형구 경제기획원 차관 주재로 부동산실무대책위원회를 열어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는 방안 중의 하나로 학군조정을 검토하기로 했다. 당시 정부는 “서울 강남 지역의 8학군이 인기가 높아 이곳 아파트가 투기대상이 되고 있다”며 “8학군 학교의 일부 학생을 지역에 관계없이 선지원 후시험 방식으로 뽑거나 서울 강북 지역 학교를 명문 학교로 중점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정원식 문교부장관도 같은 해 4월 경제·사회균형발전확대회의에서 “학군문제는 투기뿐 아니라 교육 차원에서도 시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서울 강남의 8학군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에 조정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이어 정 장관은 평준화 정책은 유지하면서 학군의 광역화와 수험생의 학교선택권을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개편안을 마련해 다음해부터 시행하겠다는 내용을 밝혔다. 서울시교위가 마련한 안은 ▲서울 전역 단일학군제 ▲4~5개의 광역학군제 ▲혼합학군제(1지망은 학군 관계없이 지원하고 2지망부터 소속 학군 학교에 지원하는 방식)였다. 그러나 8월 서울시교위는 ‘서울시 고교의 학군조정방안은 문교부가 내신제의 등급간 격차를 높이는 방향으로 대학입시제도를 개선해 시행하겠다는 계획과 맞춰 제시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다시 학군조정방안을 보류한다. 대통령도 깨지 못한 8학군 막강한 대통령의 힘도 8학군을 깰 수는 없었다. 1990년 2월 노태우 대통령은 “서울의 8학군은 이상과열로 아파트 가격을 자극하고 사회적 위화감을 초래했다”며 새로운 방안이 내년부터 실시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 문교부는 곧 행동에 나섰고 서울시교위는 고교학군제를 재조정하기 위해 다시 ▲단일학군제 ▲5개 광역학군제 ▲혼합학군제를 들고 나왔다. 이번에는 서울 시내 314개 중학교 3학년생 14만명을 대상으로 모의배정을 실시했다. 결과는 학군 조정에 부정적이었다. 학생들은 인기 학교를 선호했고 통학거리는 2배 이상 늘어났다. 8학군의 한 학교는 단일학군으로 했을 때 1지망자가 정원의 14배를 넘었다. 결국 조정 시도는 무산됐다. 통학거리가 늘어나고, 30%에 달하는 학생이 원치 않은 학군에 배정돼 어떤 안을 선택하더라도 심한 반발과 부작용이 예상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문교부는 8학군 폐지 대신 비8학군 지역, 특히 강북지역에 제2과학고를 설립하는 등 지원을 통해 서울 시내 모든 학군을 8학군 수준이 되도록 하겠다는 원론적인 계획을 밝힌다. 잠잠해진 ‘8학군병’ 1991년에 접어들면서 ‘8학군병’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8학군 거주배정자 수를 살펴보면 이런 현상이 잘 드러난다. 1980년 이후 1990년까지 매년 1200~3000명 가량 늘어나던 8학군 고교배정 대상자 수는 1991년 상승세가 둔화하더니 이듬해에는 처음으로 감소해 124명이 줄었고 1993년에는 267명이 줄었다. 1998년 8학군 지역 중학교 졸업생이 고교 정원에 크게 미달해 인근지역에서 역배정되는 현상을 빚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내신 반영 비중 강화라는 대입정책 변화의 영향이 컸다. 1994학년도 대학입시(대학수학능력시험 1세대로 1991년 고등학교 1학년)에서 내신의 비중이 높아졌다. 경쟁이 치열한 8학군 학교에서 나쁜 내신 성적을 받느니 상대적으로 덜 치열한 다른 학군 학교에서 좋은 내신 성적을 받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정부의 공급 확대와 투기수요 억제 정책이 힘을 발휘하는 상황에서 8학군병이 가라앉자 8학군 지역 집값도 안정되기 시작했다. 1994년 다른 지역의 아파트값이 8학군 지역보다 비싼 ‘기현상’이 발생했다. 당시 서울 대방 대림아파트, 마포 삼성단지 등의 아파트값은 압구정동 현대 아파트 등 8학군 아파트값을 앞질렀다. 1995년 3월 한 건설사가 실시한 조사는 이런 현상을 뒷받침한다. 당시 조사에서 서울 사람은 집을 살 때 교통환경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1980년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학군은 겨우 3%를 차지한데 반해 교통환경은 45%를 차지해 대비를 보였다. 강남 명예회복의 일등공신 ‘대치동 아줌마’ IMF 외환위기 이후에는 사교육이 강남 인기를 주도했다. 서울 강남구 대치동 일대 학원가는 2000년 4월 헌법재판소의 과외 금지 위헌 결정 이후 급속도로 성장했다. 명실상부 ‘사교육 1번지’가 된다. 2001년 말 수능시험이 어렵게 출제되면서 사교육의 중요성이 절실해지자 너나할 것 없이 학부모와 학생이 대치동 부근으로 몰려들었다. 여기에는 분당과 일산 등 경기도 신도시 지역에서 고교평준화가 시행된 것도 큰 영향을 미쳤다. 분당· 일산의 명문고 진학을 노리던 신도시 학생과 학부모들이 대거 강남으로 진입했다. 사교육 뿐 아니라 이 지역에 나타난 명문 초등·중학교도 ‘교육1번지’의 가치를 높였다. 2001년 말 이후 강남구 대치동은 언론의 단골메뉴로 등장, 더욱 인기를 끌게 된다. 대치동 은마아파트가 부동산 시장의 스타로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은마아파트는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주변 아파트에 밀려 시장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적은 평수만으로 구성된 오래된 아파트라는 점, 주차시설 등 편의시설이 부족하다는 점 때문이었다. 은마아파트 34평형은 2001년 11월 3억8000만원이었는데 이는 근처 우성아파트 31평형과 같은 가격이었다. 그런데 수능시험 여파가 몰아닥친 2001년 12월 가격은 4억2500만원으로 한 달 사이에 4500만원이 훌쩍 뛰어올랐다. 2007년 1월 현재 13억4000만원을 기록하고 있다. 1979년 12월 입주 당시 2139만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가공할만한 가격상승이다. 이는 재건축 기대효과도 있겠지만 전국 최강의 사교육과 공교육 여건이라는 프리미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평가가 많다. 사교육 1번지, 집값 폭등 1번지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03년 6~7월 학원이 강남 부동산 시세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서울 시내 부동산 중개인 433명의 38.2%가 유명학원이 집값에 20~40% 정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답했다. 23.8%는 60% 이상, 22.8%는 40~60%라고 대답했다. 사교육 시장이 집값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런 현상은 비단 강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서울 목동이나 중계동처럼 사교육 시장이 발달한 지역의 집값은 다른 지역에 비해 강세를 보이고 있다. 집값이 비싼 목동과 강남구 뿐 아니라 서울 중계동도 학원이 밀집한 ‘은행사거리’ 학원 근처 아파트는 30평형의 경우 5억원을 넘어서지만 지역을 벗어나면 가격이 2000만~5000만원 이상 떨어진다고 한다. 최근에는 교육환경이 좋은 지역에서 좋은 학교로 진학한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수요는 더욱 몰리고 있다. 2006학년 서울 지역 6개 외고와 경기 용인시 한국외대부속외고 입학생의 출신지를 비교해본 결과 노원구와 강남구, 양천구 순으로 드러났다. 모두 학원 밀집지역으로 유명한 지역들이다. 지방도 마찬가지다. 대구 수성구나 대전 서구 둔산동 등 대표적인 지방 8학군으로 불리는 이 지역에는 명문 학교 뿐 아니라 사교육 환경까지 발달해 있어 학부모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부동산 해법에서 교육은 빼라” 2002년부터 정부는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급등한 아파트값 상승을 막기 위해 여러 대책을 내놓는다. 그런데 부동산 정책에 교육문제를 포함할지를 놓고 부처간에 이견이 존재했다. 경제부처는 강남 집값 상승의 중요한 원인으로 학원 등 교육문제를 들었으나 교육부는 집값 문제 때문에 교육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다는 인식을 보였다. 게다가 학원 등 사교육에 손을 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000년 헌법재판소의 과외 금지 위헌 결정 이후 학원 통제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교육문제를 직접적으로 손댈 수 없었던 경제부처는 우회로를 택했다. 판교신도시에 강남의 사교육 수요를 분산할 수 있을 정도로 훌륭한 학원단지를 유치한다는 계획이었다. 2003년 9월 건교부가 밝힌 이 계획은 교육부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무산된다. 이후 부동산 대책을 준비할 때마다 교육문제가 거론됐지만 대책에 포함되지는 못했다. 강팔문 전 건교부 주거복지본부장(현 익산지방국토관리청장)의 말이다. “강남 문제를 해결하면 전체적인 핵심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강남 집값 상승의 주요 원인 중의 하나인 공급 부족은 사실 수요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수요를 차단하려고 할 때 가장 큰 원인이 교육에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교육 문제를 계속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교육부나 언론 등에서 강하게 비판합니다. 집값을 잡기 위해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건드리느냐는 주장이었습니다. 언제나 대책 마련 초기에는 교육 문제가 한 부분을 차지했지만, 발표할 때에는 결국 빠지고 말았습니다.” EBS 수능방송과 고1 자퇴생 부동산 문제 때문에 백년대계를 망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던 교육부는 정공법을 내놓는다. 우선 2002년 3월 18일 ‘공교육 내실화 대책’을 발표했다. 학교의 입시교육 경쟁력을 강화해 과외 등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강남 수요가 줄어들지 않자 교육부는 2004년 2월 17일 ‘사교육비 경감대책’을 마련했다. EBS와 연계해 수능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대입에 내신 비중을 더 높이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곧 2008학년도 대입제도 개선으로 이어졌다. 교육부는 2004년 6월 대입에 내신 반영 비중을 50% 이상 강화한다는 내용을 내놓았다. 내신 강화는 1990년대 초 강남 지역의 인기가 수그러들었던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매년 1~2월이면 강남 등 학군 선호 지역을 중심으로 집값이 크게 움직이던 현상이 2007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부작용이 발생했다. 내신성적을 올리기 위해 휴학하는 고교 1년생이 등장했다. ‘새 학기가 다가오면서 휴학하거나 자퇴 뒤 재입학하는 방법에 대해 문의하는 학부모의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는 서울시교육청 관계자의 이야기는 이런 현상을 대변하고 있다. 또한 내신을 믿을 수 없다며 대학들이 논술시험을 강화하기로 해 한바탕 ‘본고사’ 부활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기적 대안과 단기적 대안 강남 8학군 조정 문제는 2003년 “강남 집값을 안정시키기 위해 교육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던 김진표 당시 경제부총리가 2005년 교육부총리로 취임한 뒤 또다시 거론됐다. 그해 8월 23일 국회 예결산위원회에서 김진표 당시 교육부총리는 학군 조정에 긍정적 입장을 보였다. “현재도 학생들의 선택권을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좀 넓혀주기 위한 방법으로 평준화 지역에서 모든 학생들에게 선복수지원을 할수 있게 해주고 나서 추첨배정을 하는 시스템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우선 확대시행하면서, 학군을 조정하는 방법도 하나의 대안으로 서울시교육감·교육위원회와 함께 협의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강남·북간 차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강북의 교육환경 개선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강북에 강남과 같은 교육환경을 갖추도록 한다는 것은 교육부의 오랜 방침이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정책적 의지와 시간이 걸리는 문제다. 1990년 문교부가 서울 시내 모든 학군을 8학군 수준이 되도록 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지 15년이나 지났지만 현실적인 격차는 여전한 상태였다. 그러는 동안 강남 지역의 집값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김 부총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학군 조정이 ‘단기적으로’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서울시교육청은 용역작업을 거쳐 2007년 2월 27일 학군조정안을 최종 확정했다. 2010년부터 적용될 새로운 학군제에 따르면 서울의 중3 학생은 강남을 포함한 서울 전역의 고교에 지원할 수 있게 된다. 각 고교는 1단계에서 서울 전 지역 학생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정원의 20~30%를 추첨을 통해 배정한다. 2단계에서는 거주지 학군 학생의 지원을 받아 정원의 30~40%를 추첨 배정한다. 나머지는 3단계에서 희망과 관계없이 거주지 및 인접학교에 배정된다. 이같은 ‘학교선택권 확대안’은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이 “서울 교육사(史)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날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1983년 이래 논의만 무성했던 8학군 조정문제가 24년만에 이뤄졌고, 8학군 등장 30년만에 ‘강남구에 거주해야 8학군에 간다’는 원칙이 깨졌기 때문이다. 학군조정은 강남 8학군 지역 고교에 가정 형편상 갈 수 없었던 교육수요를 해결하고 집값에서의 ‘교육 프리미엄’을 낮춰 부동산 시장을 안정시키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통학거리가 길어져서 생기는 부작용과 사교육 시장의 변수는 앞으로도 풀어야 할 숙제다. 회의 거듭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다른 대안은 없을까. 2005년 8월 김진표 당시 교육부총리는 국회에서 “장기적으로는 강북 지역의 교육환경 개선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번 학군 조정으로 8학군에 대한 갈증은 해소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전 지역의 교육환경이 8학군 수준으로 좋아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8학군에 대한 수요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시설 부분은 교육 당국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사교육 환경이나 학부모의 열의 등은 정부의 노력만으로 조성하기 힘들다. 흔히 교육문제는 부동산문제보다 풀기 어려운 숙제라고 한다. 김수현 청와대 사회정책비서관의 말은 정부가 처한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교육 문제는 부동산 문제보다 상위의 고질병입니다. 이는 현재의 부와 그 부를 자녀에게 물려주길 원하는 한국적 특성, 그리고 그것이 발달시키는 사교육 체계에 원인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교육을 통해 뭔가를 재생산하려는 욕구를 눌러야 합니다. 하지만 이는 교육부나 몇 개 교육청이 가진 제도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8·31정책을 준비하는 관계부처 회의에 참여한 교육부도 ‘뾰족한 수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습니다.” 이처럼 풀기 힘든 교육문제는 부동산 문제와 연결돼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있다. 과거 학교차는 지역차로 변질됐고, 지역차는 계층화로 고착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강남 지역에 모여든 부유층은 좋은 교육환경을 독점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부를 세습한다는 ‘질시’를 받고 있다. 강남역사=중산층 역사, 부촌 이미지로 강남수요 이끌어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나. 강남의 형성 과정을 본다면 장기적인 해법을 찾을 수도 있다. 강남의 역사는 중산층 중심으로 시작됐다. 이는 서울 강남과 서초 지역의 대졸 이상 학력 소유자의 비율을 보면 잘 드러난다. 1980년 서울 강남과 서초 지역의 대졸 이상 학력 소유자의 비율은 25.3%로 서울 전 지역 평균(8.6%)의 4배에 달했다. 불과 5년 전만 하더라도 6.2%로 오히려 서울 전체 평균(6.7%)보다 낮았던 점을 감안하면 놀라운 증가세다. 이는 이 시기 조성된 아파트 단지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1980년 강남 지역 내에서 방 4개 이상을 가진 아파트 점유율을 보면 60%에 달했다. ‘잘사는 사람’이 많이 사는 부촌의 이미지가 형성돼 중산층의 눈길을 끌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970년대 정부의 강북 억제 정책으로 여러 서비스산업이 강남으로 유입되면서 생활의 편리함까지 갖춰진 상태였다. 이 지역에 몰린 중산층이 가진 구매력은 새로운 상업시설을 들여오는데 큰 영향을 미쳤고 이는 또다른 강남 수요를 이끌어냈다. 장기적 해법을 찾아라 1970년대 이후 학력을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신중산층에게 자녀교육은 물론 주거 등 생활의 편리함까지 고루 갖춘 강남 지역은 커다란 흡입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이 한정된 공간에 모여들면서 보다 좋은 교육여건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는 서울 목동 지역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과거 대학 입시 성적이 좋지 않았던 학교나 신생 학교가 명문고로 부상한 데에는 중산층의 힘이 작용했다. 해법은 중산층을 끌어들일 수 있을 만큼 살기 좋은 주거환경을 만드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살기 좋은 강남대체 신도시 개발을 이야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강북 지역을 강남 수준으로 재개발하면 될 것 같지만, 이는 비용도 비용이거니와 서울 집중 현상을 폭발시킬 수 있다. 이는 전체적인 부동산 가격 상승과 교통 문제 악화 등 갖가지 부작용을 가져오기 때문에 결코 쉬운 문제만은 아니다. 정부는 당장 학군 조정으로 실마리를 찾았다. 그러나 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점에서 정부의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 영국도 ‘학군’ 정상화 노력 영국에서도 학군이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리는 현상이 발생, 이를 해결하기 위해 대책마련에 나섰다. 2007년 1월 영국의 앨런 존슨 교육부장관은 공립학교 학생 선발 때 추첨제를 실시하고 각종 ‘보이지 않는 장벽’을 없애, 모든 학생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는 부모의 능력에 따라 자녀의 학교가 결정되는 기존 방식을 바꾸겠다는 취지다. 영국의 명문 공립학교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워놓고 있다. 우리는 강남 지역에 살면 강남의 고교에입학할 수 있다. 그러나 영국에선 그럴 수 없다. 학군 내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각종 장애물을 통과하지 못하면 입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의 소수 명문학교가 학생을 선발할 때 성적이 우수한 소수의 학생을 제외하고는 ▲가족을 면담, 경제적으로 학교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수학여행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지 등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 발간된 보고서에 따르면 374곳의 학교 중 약 25% 가량이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잠재적으로 선택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자 영국 교육부는 2006년 9월 이런 관행을 철폐하기로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장벽을 제거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시험을 통해 학생을 선발하는 사립학교와 달리 영국의 공립학교는 학교와 가까운 곳에 사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발하는 근거리 배정제를 적용하고 있다. 그래서 명문 공립학교 근처 주택은 교육열이 높은 중산층 이상의 계층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집값도 비싸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의 2006년 3월 보도에 따르면 영국의 ‘8학군’인 런던과 남동부 지역의 톱클래스 초등학교 인근 집의 프리미엄은 집값 평균의 25%에 해당하는 6만1000파운드(우리돈 1억405만원)를 호가할 정도라고 한다. 학교에서 100m 멀어질 때마다 프리미엄은 8% 가량씩 떨어진다고 한다. 주로 중산층의 자녀가 지원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프리미엄은 큰 편이다. 중산층 가정 출신의 학생들은 명문학교에, 가난한 집 출신은 성적이 좋지 못한 학교에 몰리는 경향이 나타났다. 영국 일간지 ‘데일리 텔레그래프’ 보도에 따르면 전체 공립학교에서 무료급식을 받는 학생은 전체의 17%이지만 명문 공립학교에서 이런 학생은 전체의 3%에 지나지 않는다. 영국 교육부는 ‘장벽’을 제거하는 한편 신청자가 학교 정원을 넘는 경우 추첨을 실시해 학생을 선발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굳이 명문 공립학교와 가까운 곳에 살지 않아도 명문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 제도는 2월부터 실시돼 2008학년도 신입생을 모집할 때부터 적용된다. 각 학교들은 이 기준에 따라 학생 선발에 관한 세부지침을 만들어 시행해야 한다. 이런 정책은 물론 반발을 사고 있다. 근처에 사는 학생을 멀리 떨어진 학교로 보내야하고 멀리 살고 있는 학생을 버스에 태워 수송해야 하는 등 각종 부작용이 나타난다는 비판이다. ‘더 타임스’는 2007년 1월 11일자 기사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부모들이 평등이라는 명제 하에 자녀들에게 유리한 위치를 제공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좋지 않은 학교에 보내려고 할까? 물론 아니다. 그들은 아마 멀리 떨어진 시골지방으로 이사해 그곳에 있는 학교를 대신 ‘식민지화’ 할 것이다.” 도심 지역보다 넓은 시골 지역은 통학 문제 때문에 거주지 중심 배정원칙이 계속 적용될 예정인데, 학부모들이 이 틈을 파고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기사는 이어진다. “부모들이 사악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녀에게 최고를 제공하고 싶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자녀의 학교를 선택하고 학교는 학생을 선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나쁜 학교는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모든 이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존슨 교육부장관은 ‘기회의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 존슨 장관은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교육부가 마련한 기준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 등 개인 배경에 관계없이 모든 학생이 그들이 원하는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갖는 시스템을 만든다”고 말했다. 교통문제 등 다른 부작용이 발생하더라도 모든 학생이 부모의 능력에 공정한 기회를 갖도록 정책을 펴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2007.03.19 특별기획팀
- “강남 공룡에 소 몇 마리 던져준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세번째 주제로 <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①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②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 변천 ③ 토지투기 억제와 토지공개념의 변형 ④ 뜨거운 감자, 재건축-개발이익 환수의 역사 ⑤ 교육과 부동산 ⑥ 균형발전 2006년 1월 초,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정점을 향해 치닫던 정부의 재건축 규제 흐름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보고서를 냈다. “재건축은 재개발과 더불어 이미 개발이 완료된 기성 시가지에서 주택공급을 확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지만 우리 사회는 재건축 그 자체를 규제하고 있다. 재건축을 억제하면 결국 강남과 같은 지역의 주택가격은 더욱 상승한다. 강남과 같은 기성 시가지에서 주택가격 안정을 위해서는 재건축이 억제되기보다 오히려 활성화되어야 한다.”(재건축 규제의 허와 실, 최막중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주택가격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재건축을 억제하면 주택 공급이 확대될 수 있는 길을 봉쇄해버려 오히려 강남과 같은 기성 시가지의 집값은 더욱 상승한다는 논리다. 주거복지연대가 이보다 조금 앞서 내놓은 <참여정부의 주택정책 평가와 과제>(2005.11.4)는 이 같은 공급론적 시각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재건축 억제에 비판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신규 택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서울에서 재건축 규제는 공급 부족 현상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재건축 딜레마, 한여름의 뜨거운 논쟁 과연 정부는 재건축의 공급적 측면이나 시장원리를 무시하고 규제 일변도 정책을 선택한 것일까.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보자. 8·31 정책을 한창 준비 중이던 2005년 7월 어느 날. 각 부처 장관들의 격론을 듣고 있던 이해찬 총리가 이날 회의를 이렇게 매듭짓는다. “현 시점에서 섣불리 재건축 이야기를 꺼내면 다시 시장이 불안해질 수 있습니다. 재건축을 통한 공급확대 방안은 안정기조가 확고히 자리 잡은 뒤 다시 논의키로 합시다.” 한 달 전 “다시 원점에서 근본대책을 마련하라”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부동산대책회의는 재경부, 건교부, 행자부 등 관계부처들이 그때까지 불거진 모든 문제를 하나씩 풀어가는 식으로 진행됐다.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회의는 언제나 격론으로 치달았지만 재건축을 주제로 한 이날 회의는 특히 뜨거웠다. 업계의 주장처럼 재건축이 강남 지역의 주택공급과 직결된 문제라는 걸 잘 알기에 더욱 결론을 내기 어려웠다. 건교부 측의 기본 입장은 ‘철저한 개발이익 환수를 전제로 한 용적률 확대’였다. 당시 건교부 측 실무자였던 박선호 주택정책과장의 회고다. “임대주택 의무건립 등을 통해 재건축 개발이익만 철저히 환수할 수 있다면 일정 수준 용적률을 높여 재건축을 허용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런 경우 임대주택도 확보할 수 있고, 강남지역 주택공급도 숨통이 트일 테니 일석이조라는 판단에서였다. 7월 당시의 고위당정협의 때도 그런 방안을 내놓았다.” “개발이익만 환수한다면…” 이는 2005년 6월 당시 김수현 국민경제비서관이 재건축을 특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청와대브리핑을 통해 공개적으로 밝힌 주택정책 기조와 맥락을 같이한다. “개발이익을 합리적으로 환수하고, 공공이 직접 나서서 주택을 공급한다면 설령 고층아파트를 짓더라도 국민적 동의가 가능하다. 개발이익을 환수하면서 주택공급도 늘리는 패키지 밖에 없는 것이다.” 문제는 ‘재건축의 딜레마’라고 부를만한 당시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였다. 시장이 정부 정책을 재건축 완화 신호로 받아들이면 또다시 투기세력이 달려들어 재건축 집값이 상승하고, 반대로 규제 신호로 받아들이면 공급 부족을 예상해 미래 수익을 노린 돈이 몰려 재건축 아파트 값이 오를 태세였다. 이 문제는 달궈질 만큼 달궈진 터라 어떻게 건드려도 터질 것 같은 상황이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당시의 선택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박선호 주택정책 과장이 잘 말해준다. “강남 재건축 허용은 집값 안정에 도움 안 돼” “강남의 주택시장이라는 것이 재건축을 통해 공급을 늘리는 것만 가지고 과연 집값을 잡을 수 있을 것이냐는 부분을 가지고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런데 강남에 대한 주택수요는 이제 지역적인 부분에 국한된 시장이라기보다는 서울과 수도권, 더 나아가서 지방의 돈 있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투자를 하려는 그런 특성을 가진 시장이기 때문에 재건축 규제를 풀어 공급을 조금 늘려서 집값을 잡는 긍정적인 측면보다 오히려 재건축으로 인한 시세차익 기대가 훨씬 커지기 때문에 투기적인 수요가 대거 유입되는 부정적인 측면이 더 크다고 보게 됐다.” ‘강남 주택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공급 확대가 능사가 아니다’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김수현 비서관의 회고가 당시의 ‘정서’를 잘 보여준다. “김병준 정책실장이 건교부가 원했던 강남 대체를 반박했다. ‘강남은 공룡이다. 그 공룡에다가 소 몇 마리 먹으라고 던져준들 공룡이 배가 차지 않는다, 우리가 국가균형을 이야기하면서 수도권 균형은 왜 생각 안하느냐, 급하다고 이걸 먹으면 안 된다’며 재건축 규제 완화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대처했다.” 이런 판단을 내리기까지 실증적인 분석도 이뤄졌다. 예를 들어 특정 기간 중 강남에 집을 산 사람들 중 강남에 원래 살던 사람이 산 집이 얼마를 차지하고,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 강남으로 들어온 사람이 얼마며, 또 다주택자가 산 부분이 얼마고, 또 지방에서 산 사람이 얼마인지를 다각도로 분석했다. 그 결과 공급확대를 통해서 해당지역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고, 적정한 수준의 수요관리정책이 단기적인 측면에서는 먼저 강구되어야 될 부분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재건축 논의 아예 없던 일로 2005년 7월말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현재 서울 강남 재건축 규제 완화는 전혀 논의하고 있지 않으며 8월 말 부동산 종합대책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재건축에 관한 한 논의 여부조차 밝히기 곤란할 만큼 민감했던 것이다. 당시 고위당정협의에서조차 재건축 방안에 관한 한 서류를 회수하고 “논의 자체를 없었던 일”로 했다. 8·31 정책 실무 기획단 팀장이었던 김석동 현 재경부차관는 당시 재건축에 관해 논의됐던 방안은 8·31 정책 발표 때 제외시켰고 이듬해 발표한 3·30 대책의 재건축 개발이익 환수장치는 사실 8·31때 준비됐던 것이라고 회고했다. 오래돼 낡을수록 비싼 아파트 사실 재건축 딜레마의 뿌리는 역사적이다. 준공된 지 20년이 지나야 재건축이 가능하도록 한 준공연수 제도는 재건축 허용 초기부터 주요 통제수단으로 이용됐지만 이 제도가 오히려 투기를 부추겨왔다. 노후화에 비례하여 떨어져야할 아파트 가격이 준공된 지 20년에 가까울수록 치솟고, 용적률이 낮은 아파트일수록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다. 재건축 사업과 관련한 법적인 규정은 1984년 ‘집합건물의 소유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의 제정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법 집행을 위한 구체적인 시행령이 만들어지지 못해 1987년 주택건설촉진법에 재건축의 법적 근거를 도입하기 전까지 재건축 사업은 원활하지 못했다. 주민-건설업체-정부의 3박자 이해관계 재건축에 대한 요구는 19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지어진 아파트 가운데 일부가 노후화로 질적인 문제를 겪으면서 높아졌다. 특히 마포 아파트, 잠실 1단지, 동부이촌동의 공무원 아파트 등이 거론됐다. 1960년대에 지어진 대부분의 아파트는 용적률(전체건축연면적/대지면적*100)이 100% 미만으로, 1987년 당시 건축법에서 허용하는 용적률 250%에 높이 25층까지 건설할 경우 2~3배 이상의 면적 증가를 가져올 수 있었다. 결국 면적증가를 통해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의 욕구가 재건축 제도를 활성화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건설업체의 입장도 이와 맞아떨어졌다. 신규택지조달 문제와 택지구입비용 문제가 일정 부분 해결되는 재건축 사업의 장점 때문에 주택업체의 경쟁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공동주택의 부실 문제를 방치할 경우 대규모 단지가 슬럼으로 변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고, 노후 주택을 재건축할 경우 기존 주택보다 많은 수의 주택공급이 가능하다는 점을 중요하게 고려했다. 정부의 자금 및 행정 지원 없이도 손쉽게 주택공급을 진행할 수 있는 정책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1988년 12월 마포아파트 재건축조합이 최초로 사업인가를 받은 이후 재건축사업은 급격히 증가했다. 이후 1990년대 중반까지 재건축 적용대상을 확대해주거나 재건축 사업촉진책을 펴는 등 비교적 일관된 장려책이 줄을 잇는다. 당초 재건축 대상주택은 엄격하게 규정돼 있었다. 구조적으로 안전사고의 우려가 있거나, 준공 후 20년이 경과하고 유지관리비가 많이 소요되거나, 주변 환경에 비해 현저하게 효용이 낮게 이용되고 있는 주택에 대해서만 재건축을 허용했다. 이 허용요건은 1993년 3월 주택건설촉진법이 개정되면서 20년이 경과하지 않아도 재건축이 가능하도록 완화된다. 용적률과 소형주택의무 완화 개발이익이 조합과 주택업자에게만 돌아가는 재건축 사업의 특성에 결정적으로 불을 댕긴 건 수익성을 크게 높여준 두 가지 정책이었다. 첫 번째는 건축법. 1988년 주택건설 200만호 계획이 추진되면서 건축법이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1988년 주거지역의 용적률 상한이 400%로 완화된 것을 비롯하여 용도지역지구제가 대폭 완화됐다. 그리고 1992년 이후부터는 초고층 아파트의 건설이 가능하도록 동과 동 사이의 거리 규제를 크게 완화했다. 건축법의 두 조항이 만나는 1992년부터 용적률 300%가 넘는 고밀도 개발과 초고층 아파트 건설이 가능해진 것이다. 두 번째는 소형주택 건설 의무비율을 완화해 중대형아파트를 짓기 쉽도록 한 조치다. 1994년 12월까지만 해도 재건축 아파트는 75% 이상을 전용면적 25.7평 이하로 지어야하고, 40% 이상은 18평 이하로 건설해야했다. 따라서 기존 주택의 면적이 큰 아파트를 재건축할 때는 수익성이 떨어졌다. 그렇지만 1995년 1월부터는 소형주택 건설의무비율과 관계없이 기존 주택 수만큼 중대형아파트를 건설하거나 모든 조합원이 기존 평수의 1.5배 큰 주택을 가질 수 있도록 건설하는 두개의 방안 중 하나를 재건축조합이 실정에 따라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아파트 공화국'…재건축 물량 급증 이런 조치들에 힘입어 1995년 주택 재건축사업물량은 전년의 2.7배로 늘어난다. 1995년 서울시가 재건축사업 승인을 해준 물량은 총 1만1357가구로 1994년의 4215가구에 비해 169.4%나 증가했다. 이는 1990년부터 1994년까지 5년간의 재건축사업 승인물량 1만2895가구에 육박하는 양이었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저서 <아파트 공화국>에서 “서울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아파트 단지들은 강력한 권위주의 정부가 재벌과 손을 잡고 급격한 성장을 추구하면서 만들어낸 한국형 발전모델의 압축적 표상”이라고 했다. 특히 “서울의 가옥 갱신 주기는 서구 도시보다 훨씬 짧다”며 “도시가옥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한국인 대다수의 무심함”을 언급하는 대목은 재건축의 사례와 잘 맞아떨어진다. 초고층 아파트 바벨탑 봇물 터진 재건축 사업의 와중에 부작용이 없을 수 없다. 1988년 이후 10여 년 동안 재건축은 보통 집을 짓듯이 사업계획을 세워 구청장의 승인을 받으면 할 수 있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지자체의 권한 안에 있던 재건축은 무수히 많은 논란을 낳아왔다. 1996년 11월 서울시가 잠실 등 5개 저밀도 아파트지구를 재건축할 때 용적률을 285%로 높여 최고 25층의 중대형 아파트 지역으로 재건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하자 여론이 악화된다. 11월16일자 서울신문은 ‘아파트 초고층화 문제 많다’는 사설을 통해 “그간의 고밀도 재건축 불가원칙 위배와 교통난 및 자연경관 훼손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며 “이 용적률은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선 분당신도시 아파트 용적률이나 고층아파트 군이 있는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과 대치동보다 80% 포인트 이상 높은 것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더불어 이들 지역에 대한 투기 조짐까지 일자 서울시는 구청 직원들을 현장에 집중투입, 투기혐의자를 찾아내 국세청에 세무조사를 의뢰하겠다고 밝히는 한편 재건축기간과 물량 등의 계획을 보완해 3일 만에 수정안을 내놓는다. 같은 달, 강남구는 15년밖에 안된 10~12층짜리 고층아파트를 25층 안팎의 초고층으로 재건축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를 두고 언론은 강남구가 건물 안전에 지장이 없다며 재건축조합 인가를 보류했다가 1년 만에 번복한 경위에 의혹을 제기했다. 강남구의 불씨 지피기 강남 중층아파트 초고층 재건축 논란은 계속 이어졌다. 2005년 4월28일자 서울신문 기사가 그 단면을 잘 보여준다. “강남 압구정동 일대 한강변 아파트에 초고층 재건축을 허용하겠다는 소문은 지난해 말부터 솔솔 피어나기 시작했다. 불씨는 강남구가 지폈다. 올 2월에는 그럴듯한 그림까지 제시하면서 초고층 아파트 건립 분위기를 띄웠다. 강남구는 압구정동 일대 현대·한양·미성 아파트 11개 단지 1만여 가구가 오는 7월쯤부터 30~60층의 탑상형 초고층 아파트로 재건축된다고 밝혔다. (중략) 시장은 요동쳤다. 압구정동 구현대 1차 65평형 시세는 연초 12억 5000만원했던 것이 초고층 재건축 허용 발표 이후 껑충껑충 올라 4개월 동안 1억 2000만원이나 폭등했다.” “가구당 3억4000만원의 개발이익” 그사이 재건축 시장에 불었던 ‘묻지마 투자열풍’이 집값 상승의 주범이란 인식이 확산됐다. 2003년 11월 KBS ‘한국사회를 말한다’는 2002년 9월 잠실 주공 2·3단지 총 7730채의 등기부등본을 떼어 분석한 결과, 실제 거주자는 13.9%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특히 비거주 소유자 중 59%가 강남권 거주자인 것으로 나타났다. 강남에 살면서 재건축 아파트를 또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2005년 5월에는 경실련이 강남지역 5개 재건축 아파트 단지에서 생길 총 개발이익이 6조5000여억원에 이른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경실련은 “단지 당 1조원 이상의 개발이익이 발생해 한 가구당 3억400만원, 평당 2200만원의 개발이익이 생기며, 이 개발이익은 아파트 소유자와 시공사 등 사업주체에게 고스란히 돌아갔다”고 말했다. 비리의 복마전 속으로 성큼성큼 재건축을 둘러싼 각종 비리 사건이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재건축은 일종의 복마전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2003년 7월 검찰은 아파트 재건축을 추진하면서 20억원대의 금품을 상납 받은 재건축조합 간부와, 인허가 청탁과 함께 뒷돈을 받은 시청 간부, 조합 비리를 폭로하겠다며 10억원대를 뜯어낸 은행원 등 10명을 무더기로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2004년 10월에는 야당의 전 당 대표 보좌역이 재건축 사업승인을 받도록 해주겠다며 4억원을 받아 챙긴 혐의로 구속 기소되는 사건도 터졌다. 재건축이 초기에 주택공급이라는 순기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복마전처럼 돼버린데는 건설사의 수익 챙기기에 따른 조합으로의 비용 전가, 이에 따른 주택가격의 상승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재건축 시공사들이 조합과의 본계약 이후 갖가지 명목으로 수십억~수백억원의 추가정산금을 요구하고, 조합이 이를 거부하면 공사 자체를 중단하겠다고 나오기 때문에 추가부담을 피해갈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건설업체의 흙탕물 싸움 2000년1월21일 동아일보는 “재건축이 진행 중인 서울 16개 아파트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10곳에서 시공사가 가구당 2000만원 이상의 추가정산금을 챙겨간 것으로 나타났다. 5000만원 이상을 받은 곳도 4곳이나 됐으며 무려 9000만원을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더불어 “행정당국은 ‘사인(私人) 간의 계약’이라며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형 건설사들이 재건축 사업의 이권을 놓고 ‘흙탕물 싸움’을 펼치기도 했다. 2000년 7월 공정거래위원회가 개포 주공1단지 재건축 사업 수주를 위해 경쟁을 벌이면서 상대 업체에 불리한 거짓광고를 한 현대건설, 현대산업개발, 삼성물산에 대해 광고 금지와 법 위반사실 신문공표 명령을 내렸다. 같은 해 9월에는 서울 강동 시영 1차 아파트 재건축 수주경쟁을 놓고 현대건설과 대림산업이 법정 싸움을 벌였다. 시공사 선정투표가 잘못됐다며 투표결과에 승복하지 않아 소송이 벌어진 것이다. 강남 재건축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 10여 년간 지속된 재건축 완화의 흐름이 규제 강화라는 긴 파동을 타기 시작한 것은 외환위기 이후 부동산값이 들썩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2001년 상반기 서울의 아파트 가격이 7.74% 오르면서 부동산 시장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는데, 같은 시기 재건축 아파트의 상승률은 그보다 3배 가량인 21%에 이르렀다. 그러자 7월말 건교부는 ‘소형주택 건설 의무제’를 부활하겠다고 발표한다. 이어 8월말에는 서울시가 고밀도 지구의 재건축 용적률을 250% 이하로 제한하는 내용의 조치를 확정한다. 주춤했던 재건축 시장은 반년이 채 못 가 다시 급등세를 보였다. 2001년 말 반포주공 3단지의 시공사가 선정되자 16평형 아파트 시세가 불과 한 달 만에 1억3000만원이나 뛰었다. 기본계획도 나오지 않고, 안전진단도 통과하지 않은 상태였다. 강남 재건축 시장은 ‘상식과 분석이 통하지 않는 곳’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재건축이 집값 폭등의 발화점으로 해를 넘겨서도 재건축 아파트의 집값 상승 주도는 여전했다. 2002년 상반기 재건축 아파트의 가격 상승률은 서울지역 일반 아파트에 비해 1.5배가량 높았다. 한 부동산정보제공업체가 재건축 조합 추진위가 결성된 서울 137개 단지 시세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2001년 말 평당 1347만원에서 이듬해 8월초 1695만원으로 평균 25.8% 상승했다. 재건축 아파트를 제외한 다른 아파트들의 평균 상승률 17.9%보다 44% 높은 것이다. 2002년 8월 정부는 잇따라 재건축 사업을 규제하는 방안을 내놨다. 건교부는 “실제 사업기간이나 개발이익에 관계없이 일단 시공사만 선정하면 집값이 올랐던 게 현실”이라며 재건축을 추진하는 주민들이 사업계획승인을 받은 뒤에만 시공사를 선정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참여정부 들어서도 재건축 사업을 규제하는 조치는 줄곧 이어졌다. 2003년 5·23 대책을 통해 재건축 아파트에 대해 후분양제를 실시하기로 했고, 같은 해 9·5 대책에서는 수도권 등 투기과열지구에서 재건축 조합원의 분양권 전매를 금지시키고 전체 건설예정 세대수의 50% 이상을 전용면적 25.7평 이하 중·소형 평형으로 짓도록 소형주택 의무비율을 확대하였다. 재건축에 도시계획 심의 규제 적용 이때까지, 즉 국민의 정부 말기부터 참여정부 초반까지 이어진 재건축 규제 강화는 지자체를 제치고 정부가 직접 나서서 재건축 절차를 까다롭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사업 추진을 압박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재건축 사업 자체는 주춤했지만 집값 상승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고, 2003년 들어 재건축에 관한 정책이 근본적이면서 실질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2002년 12월 법제화된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도정법)’이 출발선을 끊었다. 도정법 이전까지 재건축 사업은 구역지정 절차 등 도시계획적 심의 없이 안전진단에 의해 이뤄졌다. 도시계획적 규제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고밀개발로 주변에 미치는 악영향을 합리적으로 해소할 틀이 없었다는 뜻이다. 재건축사업의 수혜와는 상관없는 주변 지역이 기반시설 부족이나 경관악화 등의 불이익을 당했던 것이다. 도정법을 통해 재건축 사업도 정비기본계획·정비구역지정 등 도시계획적 규제를 받도록 바뀌었다. 마지막 카드 ‘초과이익 환수’ 도정법은 이런 거시적 변화와 더불어 미시적으로는 개발이익을 간접적으로 환수하는 장치를 마련했다. 재건축으로 늘어나는 용적률의 25%를 임대아파트로 짓도록 하는 규정이 신설된 것이다. 이는 재개발로 인해 주거공간을 잃게 되는 세입자에 대한 주거안정대책으로 임대주택 건설을 의무화해왔던 방식을 재건축에도 적용한 것이다. 그동안 조합과 주택업자에게만 돌아가던 재건축의 개발이익 일부를 간접적으로 환수해 이를 공공적 성격을 띠는 임대주택 공급으로 돌리겠다는 것이다. 더불어 소형평형 의무비율에 소형평형 면적 기준을 더했다. 25.7평 이하 소형 평형의 연면적을 전체 면적의 50%가 넘도록 한 것이다. 이는 일부 재건축 조합이 18평 이하 소형 아파트 의무건설 비율을 형식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8평이나 12평 등 초소형으로 짓고, 대신 남는 용적률로 중대형 평형을 건설해 수익률을 높이는 편법을 쓰자 이를 막기 위한 조처였다. 한편에선 임대주택 의무건립에 따라 늘어난 용적률의 25%만큼 임대주택을 짓더라도 이를 정부가 원가에 매입하기 때문에 실제 개발이익환수 효과는 크지 않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위헌론 제기하며 격렬히 반대 선 개발이익 환수, 후 재건축을 통한 주택 공급이란 정책 기조는 2006년 3·30 대책의 핵심적 후속 입법으로 그해 5월 국회를 통과한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에 관한 법률’로 절정에 달했다. 글자 그대로 재건축으로 발생하는 초과이익의 일정 부분을 직접 환수하겠다는 것이다. 부담금은 준공시점의 주택가격에서 개시시점(추진위 승인일)의 주택가격과 정상집값 상승분 및 개발비용을 공제하여 산정되는 초과이익을 기초로 부과된다. 조합원당 평균 초과이익이 3000만원을 넘을 경우 초과이익 규모에 따라 0~50%의 누진률을 적용한다. 건교부는 징수된 부담금의 사용처에 대해서는 “주거환경 정비, 임대주택 건설, 저소득층 주거지원 등 주거복지 증진을 위해 전액 쓰인다”고 밝혔다. 처음 3·30 대책이 발표되자 반응은 크게 두 가지였다. “재건축 규제와 관련한 사실상의 마지막 카드”로 재건축이 몹시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상과 개발부담금 제도가 언급될 때마다 단골처럼 등장한 위헌 가능성을 지적하며 법제화에 회의를 품는 것이었다. 후자의 경우, 미실현 이익에 대한 과세여서 위헌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일부 재건축 조합은 헌법 소원을 내겠다며 반발하고 나섰다. 이미 6개월 전부터 위헌론에 대비 건교부는 즉각 진화에 나서 “예상되는 위헌성 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법무법인, 변호사 등 6개의 전문기관 또는 전문가들이 이익환수자체의 합헌성은 물론, 부담금의 산정방법 등까지 자문해 골격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미실현 이득에 대한 과세 또는 부담금 부과는 계측에 있어 고도의 객관성이 요구되나, 실현된 이득에 대해서만 부과할지, 미실현이득에 대해서도 부과를 할지는 입법정책적인 문제로 그 자체로 헌법상 조세원리에 위배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3·30 대책이 사실은 반년 이른 8·31 때 이미 내용적으로 마련했던 것이라는 김석동 차관의 앞선 증언이나 위헌 여부에 대한 치밀한 사전 점검은 정부 안에서도 재건축이 얼마나 ‘뜨거운 감자’였는지를 반증한다. 돌아가는 길, 기반시설 부담금 이재영 건교부 전 토지국장에 따르면, 개발이익 환수 장치가 본격적으로 준비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5월 무렵이다. “정문수 보좌관이 재건축 아파트에 대한 개발 부담금 방안을 검토해달라고 하면서 시작됐다. 처음에는 법리상 맞지 않을 가능성이 높고 개발 이익이 발생하는 시점을 어떻게 잡느냐의 문제 등을 내세워 부정적인 의견을 냈지만 워낙 완강했다. 그래서 싱가포르의 디벨로퍼 차지(developer charge)제도를 원용해보자며 안을 만들기 시작했다.” 싱가포르는 지역별로 지수를 달리 매겨 개발 부담금을 물렸는데, 이를 근거로 계산해보니 강남 32평 아파트를 재건축할 경우 1억~1억5000만원 정도의 부담금이 산출됐다. 강남의 재건축 개발이익은 확실히 환수되지만 전국적으로 계산해보니 파장이 너무 커보였다. “다시 조정해 보고서를 작성했다가 흉내만 낸다고 질책 당해 또 다시 안을 만드는 과정을 5월에 3차례 정도했다. 결국 정문수 보좌관도 당장 재건축 부담금을 시행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 대안으로 나온 것이 기반시설 부담금이었다. 당초 2003년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거한 ‘기반시설연동제도’의 일환으로 시설부담금이 도입됐지만 전면적으로 시행된 적은 없었다. 이는 도시별로 수용인구 등을 감안해 도시에 필요한 도로와 공원 등 기반시설의 총량을 정한 뒤 건축 행위로 인해 유발되는 기반시설의 설치비용을 개발행위자에게 부담시키는 제도다. 건교부는 여기에 재건축 아파트의 경우도 해당될 수 있도록 보완작업을 했고 2006년 1월에 제정된 ‘기반시설부담금에 관한 법률’에 의하여 ‘기반시설부담금’이 도입됐다. 하지만 2006년 초부터 강남의 일부 재건축 아파트 가격이 이상 급등하는 현상을 보이자 이런 간접적인 개발이익 환수장치로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보다 강화된 개발이익환수제를 만들겠다는 3·30 대책이 나오기에 이른 것이다. 개발이익의 사유화와 주택공급 사이의 딜레마 2006년 8월 건교부가 마련한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에 관한 시행방안 연구’보고서를 보면 재건축의 딜레마가 한눈에 보인다. 2000년 이후 서울시에 공급된 신규주택의 40%가 주택재건축에 의한 것이었다. 2000~2002년 강남구에 공급된 주택의 총수는 1만119호이며 이 가운데 아파트는 2558호였다. 그중 재건축 아파트가 2026호로 아파트만 따지면 79%에 이르렀고, 같은 기준으로 송파구는 88%에 달했다. “재건축은 앞으로도 유력한 대도시 내 주택공급수단으로 기능할 것”이라는 보고서의 전제는 그래서 타당하다. 앞으로 재건축이 가능한 아파트가 대부분 중밀도 아파트이기 때문에 재건축 때 용적률을 대폭 상향조정하지 않는 한 주택 순증효과는 크지 않다. 보고서는 또 동시에 “재건축주택의 가격이 폭등함에 따라 초과 이익의 독점적 사유화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며 “초과이익에 대한 과세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건축사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해소를 통한 재건축사업의 활성화를 위해서나 조세정의를 위해서도 재건축 초과이익의 독점적 사유화는 반드시 근절해야 될 사항”이라고 말하고 있다. 개발이익을 공익으로 환원하는 길 그 예로 사업이 진행 중인 잠실저밀도 지구 재건축의 초과이익을 산정해놓고 있다. “13평 기준으로 최근 3년간 2억4000만원에서 7억으로 상승함에 따라 동 아파트의 소유자는 개인적으로 별다른 노력 없이 3년간 4억6000만원의 재산이 증식되었다. 잠실저밀도 세대수가 21,250세대임을 감안하면 총 초과이익은 약 10조원에 달한다. 서울시의 2006년 예산이 약 15조원임을 감안하면, 이들 재건축아파트 소유자들이 향유하는 초과이익이 얼마나 큰지를 잘 알 수 있다.” 과다한 개발이익이 공익으로 환원될 장치가 완비되고 나서야 재건축을 주택공급의 요긴한 수단으로 쓸 수 있다는 시각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주택업계와 일부 언론의 일방적인 공급확대론에 경계를 보여온 김용창 서울대 교수는 용적률 증가분을 기존 소유자의 이익에서 배제하고 분양값 상한제를 적용한다면 “재건축을 주택 신규공급의 원천으로 유용하게 활용한다는 관점을 가져야한다”고 지적했다. 2007.03.16 특별기획팀
- “아무리 자본주의 체제라지만…”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제1부, 왜 올랐나’에 이어 '제2부, 어떤 정책을 폈고, 왜 못잡았나' 를 통해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어떤 우여곡절 끝에 탄생 했으며 역사적 의미와 쟁점은 무엇인지 점검한다. 2부의 세번째 주제로 <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제2부 어떤 정책 폈고, 왜 못잡았나 1.<투명성과 형평성 제고 정책> 2.<안정적 주택공급 정책> 3.<가수요억제와 실수요 전환 정책> ① 분양가규제 논란의 역사 ② 실수요자에게 혜택을-주택청약제도 변천 ③ 토지투기 억제와 토지공개념의 변형 ④ 뜨거운 감자 재건축 ⑤ 교육과 부동산 ⑥ 균형발전 “같은 서울 하늘 아래 봉천동·사당동 등 산꼭대기 달동네에는 움막같은 집 하나에 서너가구가 비참하게 살아가는 반면, 삼청동·성북동·방배동 등에서는 수십억원짜리 집에 초호화판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 아무리 사유재산권이 보장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라 하더라도 이 격차는 줄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문희갑 전 경제수석이 ‘실록 6공 경제’(중앙일보사)에서 밝힌 말이다. 그는 1988년 경제기획원 차관 시절부터 토지공개념 도입 작업에 참가한 후 이듬해 청와대에 들어가 경제수석 자리에 앉으면서 여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입법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유재산권도 법에 의해 제한 가능 토지공개념의 저변에 흐르는 이 같은 생각은 사회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헌법 제23조 “사유재산권의 행사는 공공복리에 적합해야 하고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제한이 가능하다”는 것과 당시 공개념 도입에 적극적이던 여론의 지원에 힘입어 자본주의 테두리 안에서 제도를 마련했다. 하지만 일부 위헌 판정 등으로 토지공개념 3법은 10년이 채 못가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던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이 국회 시정 연설에서 부동산값 안정대책으로 토지공개념 도입까지 검토하겠다고 하면서 또 다시 불이 지펴진다. “지금 정부는 종합적인 부동산 대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도 부족할 때에는 강력한 토지공개념제도의 도입도 검토하겠습니다. 토지는 국민생활과 기업경영의 필수적인 요소인 데 반해서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합니다. 일반상품과는 달리 취급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개헌을 통한 ‘부동산공개념’도입 주장도 이후 토지공개념이란 말은 ‘부동산공개념’으로 새롭게 변신한다. 그 해 11월5일 첫 회의를 시작한 민·관 합동의 부동산공개념 검토위원회가 주택거래허가제, 재건축 개발이익 환수제 등의 도입을 위해 법 조문의 위헌성 여부와 시장에 미칠 파급 효과 등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법제화는 여의치 않았고 개헌을 통한 공개념 도입 주장이 나오기에 이른다. 2006년1월 열린우리당 의장 경선에 출마한 김근태 의원이 향후의 경제 모델로 제3의 길을 언급하면서 “개헌을 통한 부동산공개념 도입 필요성”을 주장했다. 1년 뒤인 2007년2월에는 15년간 건설업체를 경영했던 한나라당 김양수 의원이 부동산 공개념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다. 김 의원은 과거 노태우 정부의 토지공개념에 기초한 법은 반시장적이었다고 평가한 뒤 “토지불로소득은 사회 공동체가 공유하는 대신 개인의 노력소득은 사유화하는 게 경제적으로 효율적이고 진정 시장친화적 부동산 공개념”이라고 주장했다. 국민 81%가 불로소득 환수 공감 우리 국민의 의식조사에 따르면 67.5%는 “재산증식을 위해 땅, 주택, 건물 등을 사고파는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불로소득에 대해서는 81.4%가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환수하는 것에 공감하고 있다. 부동산을 재산증식의 수단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일정한 선을 넘어서는 초과이득은 사회가 되돌려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투자는 인정하되 투기는 용납하기 어렵다는 태도다. 이는 국토연구원이 2006년 9월 중순, 전국의 30세 이상 70세 이하의 국민 18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토지에 대한 국민의식조사’에서 나온 결과다. 정책차원에서 토지투기에 대해 본격 대응한 시기는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토이용관리법(1972), 8·8조치(1978)등의 투기억제대책 등이 이 때 이루어졌는데 당시에는 경제성장을 뒷받침해 줬던 개발용지공급과 이에 따른 불로소득 환수에 초점을 맞췄다. 투기억제정책의 형성기인 셈이다. 1980년대는 토지정책의 정비기로 불린다. 투기억제를 위해 토지거래허가제실시, 토지공개념제도 도입, 신도시개발 등 보다 적극적인 정책을 마련했다. 그리고 1990년부터는 토지시장 투명화를 위한 정책 단계로 들어선다. 초중반에는 시장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부동산실명제 도입과 토지종합전산망 구축이 추진됐고, 후반부터 2002년까지는 시장개방과 규제완화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며 개발과 보전의 조화를 중시하는 계획적 국토이용시대로 접어들었다. 유례없는 호황, 대선 선심 남발…땅값 천정부지 부동산 공개념의 기원이라 할 토지공개념이 도입되게 된 배경과 취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5공화국과 6공화국 초기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5공화국은 '총외채 350억 불, 세계 5위의 채무국이지만 잠재 경제성장률은 7~8%대'라는 성적표를 가지고 출발했다. 1986년에 3저 호황으로 무역수지가 흑자로 전환되고, 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 등 잇단 국제대회 개최 등으로 생겨난 시중 유동성이 전년대비 연평균 20%내외로 크게 증가하며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의 자금유입을 촉진시켰다. 증권시장은 사상 유례 없는 활황을 맞았고, 토지가격도 급등하기 시작했다. 지가상승률은 1980년 11.7%를 시작으로 5공화국 동안 연평균 10.7%의 상승세를 보였다. 강력한 물가안정대책을 폈던 5공화국 시절, 당시 연평균 소비자 물가상승률이 3.5%로 안정세를 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토지가격 상승은 대단히 높은 편이었다. 1987년 10월 정국은 대통령 선거체제로 돌입하면서 5공화국의 정책은 대선승리에 맞춰졌다. 정부와 여당은 대선 승리를 위해 떨어지는 주가를 잡기 위한 부양책과 국민주 보급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득표전이 치열해지면서 후보자들의 선심공약이 남발됐다. 동서고속전철, 강원권 국제공항 건설, 농어촌 부채탕감···. 공약남발의 꽃은 지방을 돌면서 발표하는 지역개발 공약이었다. 후보자들의 입에서 나온 공약은 바로 땅값 상승으로 이어졌다. 임야, 무인도, 그린벨트 등 가리지 않고 전국적으로 토지투기가 발생했다. 일례로 서해안종합개발계획은 당시 평당 8000원하던 녹지를 1만5000원까지 단숨에 끌어 올리는 부작용을 낳았다.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는 당시 상황을 활용한 경제개혁 공약을 발표한다. 1990년에 토지공개념, 1991년에는 금융실명제를 실시하겠다는 것이다. (토지공개념이란 용어는 1978년 8.8 조치 때 건설부장관이던 신형식 장관이 국회에서 “토지의 사유개념은 시정돼야 한다. 건설부는 토지의 공개념에 입각한 각종 토지정책을 입안중에 있다”고 밝히면서 처음으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공 출범시 ‘폭발 5분전’ 땅값 6공화국이 출범하던 1988년에는 2년 전부터 이어진 국제수지 흑자가 145억 달러로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경제와는 달리 사회·정치적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거대한 민주화 요구 그리고 노사분규의 일차적 매듭인 임금문제에 대해서 6공화국 정부는 점차 물러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회안정 측면에서 부동산 문제에 대한 중요성이 또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다. 사실 부동산투기문제는 6공화국 정부 출범이전에 이미 ‘폭발 5분전’이었다. 이 와중에 1988년 3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졌고, 9월에는 올림픽이 열렸다. 막대한 자금이 시중에 또다시 풀렸다. 이 영향으로 1988년 전국과 6대도시의 지가는 27%, 서울은 28%나 상승하게 되고, 주택가격 역시 13%나 급등했다. 아파트 평당가 1000만원 돌파, 전·월세 파동으로 세입자들의 자살이 속출하던 사회적 불안을 극복하고 선거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건설부와 경제기획원이 중심이 돼 토지공개념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한다. 건설부는 1988년 4월 13일 국토개발연구원(현 국토연구원)과 함께 토지소유상한제·개발이익환수제·등기의무제·과표현실화 등 토지공개념의 골격을 이루는 내용을 중심으로‘토지공개념확대와 투기억제대책을 위한 정책 세미나’를 열고, ‘토지정책의 운용과 과제’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4월 말 이현재 총리에게 보고했다. 같은 해 8월 경제기획원도 과표현실화와 종합토지세 법안을 입안하고 이를 토대로 건설부, 재무부, 내무부 등과 함께 토지공개념의 원리를 정책적으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토지공개념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지원하는 일은 연구기관, 대학교수 등 전문가로 구성된‘토지공개념 연구위원회’의 몫이었다. 반대를 한방에 잠재운 ‘5%가 사유지의 65% 소유’ 걸림돌은 여당인 민정당 안에서 토지공개념 추진 세력을 사회주의자로 비난하며 반대하는 목소리였다. 반전은 여론을 통해 이뤄졌다. 1989년 5월에 마무리된 토지공개념 위원회의 최종연구 결과를 국토개발연구원이 발표하면서 당시 토지공개념 도입을 지지하던 여론이 다시 한 번 들끓게 되었다. “상위 2.8%의 가구가 전체 사유지의 51.5%를, 상위 5%의 계층이 65.2%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88년 당시 땅을 한 뼘이라도 가지고 있던 토지소유자는 모두 1080만명이었다. 이 중 상위 5%인 54만명이 전체 사유지의 65.2%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원회는 이보다 앞서 “74~87년 동안 투자액 모두를 시설투자에 사용한 기업은 3.3배 성장한 반면 전액을 땅에 묻어 놓은 기업은 무려 10배나 성장했다”는 연구를 내놓기도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민정당에서는 당과 상의 없이 여론을 자극하는 자료를 내보냈다고 항의하기도 했지만, 국민적 공분과 획기적인 부동산 대책을 원하는 비등한 여론 앞에서 결국 1989년 9월 7일 민정당 박준규 대표가 ‘정부의 토지공개념 입법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른다. 국회 통과까지 1년여 부처-여당 줄다리기 하지만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1년여 동안 관련부처나 여당과의 사이에는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부처간 이견은 경제기획원·재무부·건설부 등 경제부처와 내무부 사이에서 과표현실화와 종합토지세율을 둘러싸고 극에 달했다. 경제기획원 측에서는 과표현실화율을 당시 15%에서 대폭 끌어올리려 했고, 내무부에서는 조세저항을 불러와 국가안보상 곤란하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종합토지세에 대해서는 토지를 많이 소유한 사람에게 세금을 누진적으로 물리자는 데는 별 이견이 없었으나 세율에 대해서는 경제부처와 내무부·상공부 간에 의견충돌이 발생했다. 도심지의 빌딩과 같은 영업용건물에 대한 과세율과 과세방법이 문제였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행되던 토지공개념 도입작업은 1989년 6월 16일에 종합토지세를 신설하고 12월 30일 토지공개념 관련 3법인‘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에 의한 택지소유상한제, ‘토지초과이득세법’에 의한 토지초과이득세제, ‘개발이익환수에관한법률’에 의한 개발부담금제가 국회에서 입법화되면서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러한 공개념제도 시행에 필요한 지가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1989년 4월 ‘지가공시 및 토지 등의 평가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공시지가제도가 도입됐다. 택지소유상한제, 개발이익환수제 및 토지초과이득세제를 시행함으로써 당시 전국을 뒤덮고 있던 주택 및 토지투기 바람을 잠재우기 위한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토지초과이득세는 재무부의 작품 택지소유상한제와 개발부담금제는 각각 토지공개념 연구위원회 분과들의 연구결과를 제도화한 것이지만, 토지초과이득세는 재무부가 독자적으로 구상한 제도다. 당초 건설부는 개발이익환수법을 통해 개발지역에 대해서는 개발부담금을, 그 주변지역에 대해서는 개발이익환수금을 각각 부과하려 했으나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는 개발이익환수금의 과징금적 성격과 가상이익에 세금을 매기는 것은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이의를 달았다. 대신 재무부는 종합토지세 강화를 주장했지만 내무부의 벽에 막힌 상태였고 별다른 대안이 없자 개발이익환수제를 재무부가 맡는 것으로 정리된다. 결국 재무부로 넘어오면서 이것이 토지초과이득세로 바뀐 것이다. 토지공개념제도 적용…‘재벌은 예외?’ 토지공개념 3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시행까지 또 다시 적지 않은 애로가 있었다. 1990년 벽두부터 건설부에서는 토지공개념 실시에 따른 지가조사와 관리업무를 담당할 지가조사국이 신설되는 등 직제개편이 한창이었지만, 정부와 정치권에 대한 국민여론과 언론반응은 차가웠다. 토지공개념 3법 시행령 입법예고(1.15)를 앞두고 정부는 재벌기업의 골프장 허가 건으로 그리고 정치권은 3당 통합을 앞두고 잇단 토지공개념 약화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기 때문이다. 1990년 1월 초 언론들은 삼성·럭키금성·코오롱·동아 등 4대 재벌기업에 대한 신규 골프장 허가를 문제 삼으며 6공 정권존립의 이념적 기반의 하나로 강력 추진해온 토지공개념 확대도입 시책이 이 조치 하나로 제도시행에 대한 국민적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고 일제히 비난했다. “재벌들의 땅투기가 골프장이란 미명으로 합법화되고 토지공개념은 힘없는 중산층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비난이 일고 있다. 은행감독원이 89년 12월 초 은행 빚 많은 47개 계열기업군의 골프장 스키장 진출을 금지하는 여신관리제도를 규정했으나 시행일자를 늦춰가며 몇몇 기업에 사실상 예외조치 준 것이다. 30대 재벌이 88년말 4억2700만㎡, 금액으로 10조 500억원의 땅을 소유하고 있다.” (동아일보. 1990.1.6) 3저호황 끝나자 성장기조로 선회 정치권에서는 1989년 3저 호황이 끝나고 경제성장률 하락, 수출증가율 둔화, 그리고 인플레이션 진행 등 경기하강의 조짐이 나타나자 집권 초 형평과 분배를 중시하던 정책기조가 성장과 효율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더욱이 1990년 1월 ‘3당 통합’을 계기로 성장주의 경제정책으로 회귀하고 있었다. 정치권의 변화로 금융실명제 및 토지공개념의 도입 등 ‘경제민주화’를 위한 개혁 작업들이 무산될 수 있다는 우려가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박태준 당시 민정당 대표가 3당 통합과 관련한 기자간담회 중 “토지공개념 관련법안 등에 대한 시기선택이 잘 됐다고 보지 않는다. (중략)아무리 좋은 경제정책이라도 급진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동아, 1.25)”고 하는 등 토지공개념 연기 내지 완화 가능성을 연일 시사하고 있었다. 시민단체와 교수의 '토지공개념' 시국선언 정부와 정치권의 이 같은 행태에 대해 경실련이 토지공개념 등의 개혁조치들이 극소수 기득권층의 저항과 이들에 의해 과장된 일부 부작용을 빌미로 늦춰지거나 완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성명을 연이어 발표한다. 대학가에서도 교수와 학생들이 시국선언과 시위를 통해 토지공개념 등 개혁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경제전문가들도 경제개혁조치를 후퇴시킬 경우 정국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를 잇달아 내놓았다. 위기상황의 불을 끄기 위해 정부 측에서 먼저 입장을 밝히고 나왔다. 노태우 대통령은 1990년 1월 30일 건설부 업무보고 자리에서 권영각 장관에게 “금년에는 토지공개념 관련 법률을 차질없이 시행토록 하고 필요하다면 새로운 정책을 개발해서 부동산투기가 더 이상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라”고 토지공개념의 연내시행을 지시한다. 조순 부총리 “경제민주화 제도개혁 예정대로” 조순 부총리도 한 강연에서 “토지공개념 확대 도입 등 경제민주화를 위한 제도개혁을 예정대로 추진하겠다(90년대 한국경제의 전망과 대응방안,1990.1.30, 서울 롯데호텔)”는 의지를 밝힌데 이어 1990년 첫 경제관련 당정회의(조순부총리, 민자당 경제대책 6인)에서 토지공개념을 예정대로 추진할 계획임을 밝히고 당 측도 토지공개념 계획 불변 방침에 동의한다. 당시 이승윤 민자당 경제대책위원은 “이 자리에서 당 측은 종토세의 경우처럼 부작용이나 역기능이 생길 소지를 없애도록 보완에 힘써야한다고 지적했다. 보완책 마련이 연기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한국일보, 1990.2.13)”는 말로 입장을 명확히 한다. 이렇게 하여 그해 2월 28일 국무회의에서 토지공개념 3법 시행령이 채택·시행된다. 택지초과상한제도 위헌결정 하지만 1990년 3월 2일부터 본격 시행된 토지공개념 3법은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종이호랑이라는 평을 듣게 된다. 우선 ‘택지소유상한제’의 경우, 6대 도시외의 지역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또 6대 도시 내 200평 이상 택지 보유자 신고대상은 6만2000명이지만, 실제 부담금이 부과된 택지는 1992년 1만5590건, 1995년 1만838건 등 총 2만6000여 건에 불과해 제도가 확대되지 않는 한 별반 실효성이 없다는 문제가 제기됐다. 부담금 부과실적도 1993년 3257억여 원을 정점으로 점차 감소해 1997년까지 총 1조 3710억여 원이 징수됐다. 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은 제정이후 4차례 법률을 개정하며 유지되다 외환위기로 인하여 촉발된 부동산 매물 증가와 부동산 가격 급락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수요를 촉진하고 공급을 억제하는 차원에서 1998년 9월10일(시행령은 1998.9.25) 폐지됐다. 다음 해인 1999년 4월 29일에는 5년여의 심리 끝에 헌법재판소로부터 면적·개인·적용시점 등에 대한 일률적 소유상한 적용 등이 헌법상의 재산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위헌적 규정이며 신뢰보호의 원칙 및 평등 원칙에 위반된다는 취지로 위헌판정을 받았다. 사적소유권을 강하게 인정하는 헌법재판소의 이 판결은 다른 토지에 대한 규제입법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전문가들은 토지소유권의 공공성과 사회성이 전환점을 맞게 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오락가락 개발부담금제 ‘개발부담금제’는 택지개발, 공단조성, 골프장건설 등 30개 개발사업에 대해 개발이익의 25~50%를 부담금으로 과한 제도다. 1990년 5월 건설부가 확정한 개발부담금 부과대상은 9442만7000평, 건수로는 1021건이다. 이 중 건설중인 골프장이 87건, 3694만1000평으로 전체 대상의 39%를 차지했다. 하지만 1990년도에 실제로는 부과된 개발부담금은 188건, 226억 9400만원에 그쳤다. 개발부담금은 이듬해인 1991년부터 본격적으로 부과됐다. 1991년 562건 1083억여 원, 92년 688건 1748억여 원 등 부과건수가 점차 확대되어 1998년 7월말까지 8478건 1조 2458억여 원을 징수했다. 그러나 1997년 IMF 외환·금융위기 이후 경제의 어려움으로 자금난이 심화되고 개발사업이 위축됨에 따라 1998년 9월 법률개정으로 통해 1999년 12월 31일까지 한시적으로 개발부담금을 부과유예하고, 부과율도 50%에서 25%로 인하한다. 이후 2001년 12월 31일 ‘부담금관리기본법’에 따라 일시 운용을 정지했다가 2005년 12월 7일‘개발이익환수에 관한 법률’ 개정을 통해 ‘부담금관리기본법’ 부칙 제3조를 삭제함으로써 2006년 1월부터 다시 부과하고 있다. 토초세의 운명 ‘토지초과이득세’는 유휴토지 등의 소유자에 대해 3년 단위로 토지초과이득의 30%(1000만원 이하), 또는 50%(1000만원 초과)의 세금을 물리고자 한 제도다. 그러나 이 제도는 이중 과세로 재산권 침해가 과도하다는 이유로 94년 7월 헌법불합치결정을 받았다. 이 결정에서 헌법재판소는 ① 미실현이득에 대한 과세를 비롯하여 ② 기준시가의 산정방법 위임, ③ 지가의 계측수단, ④ 지가가 하락한 경우 보충적 규정의 부재, ⑤ 50%의 단일비례세, ⑥ 소유제한범위 내 택지와 관계없는 과세, ⑦ 유휴토지에 임대토지의 포함, ⑧ 일부만 양도소득세에서 공제하는 것 등의 사항을 판시했다. 이후 ‘토지초과이득세제’는 외환·금융위기 이후의 부동산 경기침체, 미실현이득에 대한 과세, 동일물건에 대한 이중과세 등의 문제점과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결정 등으로 인해 1998년 12월 28일 폐지됐다 부동산공개념 시대로…불로소득 원천 차단, 공익과 사익의 조화 추구 토지공개념 도입 이후 1990년 20.6%나 상승했던 지가는 1991년 12.8% 그리고 1992년부터 1994년까지는 마이너스 상승률을 기록(1992년 1.27%, 1993년 7.38%, 1994년 0.57%)하며, 2001년까지 매우 안정적인 추세를 유지했다. 이러한 성과는 토지에 대한 투기를 막고 가격 상승을 방지하기 위한 강력한 수요관리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1986년 이후의 호황이 3년만에 끝나고 미국의 통상압력과 걸프전이 발발한 1990년과 1991년 들어 경상수지가 각각 22억 달러와 87억 달러의 적자를 보이며 경기가 침체된 데도 원인이 있다. 따라서 당시의 지가안정은 여러 요인이 작용한 것이지만 그래도 땅값이 떨어지고 가수요가 줄어드는데 토지공개념이 적지 않게 기여를 했다는 것을 전문가들은 부인하지 않는다. 부작용도 있었다. 토초세를 피하기 위해 유휴지를 가진 지주들이 마구잡이로 건물을 지어대는 바람에 주택200만호 건설과 시기가 맞물리면서 자재난, 인력난을 초래하기도 했다. 우리가 어릴 적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놀이터였던 공터나 동네 테니스장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또한 토지공개념이 비록 투기억제정책의 종합이라 할 수 있으나 시장기능에 기초하여 수립된 정책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이고 직접적인 강제성을 띤 제도였다는 점에서 문제점을 지적받고 있다. 토지소유를 이용 위주로 인식바꿔야 가용토지 전국토의 4%, 높은 인구밀도, 그리고 1인당 집을 지을 수 있는 면적이 일본 27평, 대만 17평인데 비해 우리는 14평에 불과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토지이용 문제는 심각한 실정이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경제발전, 도시화, 공업화로 지역간·계층간 불균형이 심화되고, 또 땅에서 생겨난 불로소득과 한탕주의는 대다수 국민에게 허탈감과 좌절감 그리고 분노를 심어주고 있던 상황에서 토지공개념이 탄생했다. 토지공개념 3법 중‘택지소유상한에관한법률’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에서 보듯이 우리나라는 토지의 사소유권을 강하게 인정하고 있다. 건설부 토지국장으로 토지공개념제도 도입의 산파역을 맡았던 이규황씨는 1990년대 중반 “토지공개념의 효과를 단순히 땅값안정에서 찾아서는 곤란하다. 이것이 토지소유에 대한 인식을 이용위주로 바꾸는데 기여했는가 그리고 토지소유구조의 재편을 이뤄낼 수 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실록 6공 경제)고 말했다. 토지의 소유집중도가 토지공개념 도입의 중요한 논리를 제공했듯이 현재 주택의 소유집중도 역시 주택공개념 도입의 중요한 논리를 형성했다. 부동산공개념을 통해 소유 및 개발로 발생하는 불로소득의 환수, 이용 기회의 형평추구, 공익과 사익의 조화를 찾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강남 5만여 세대가 주택 20만호 소유 참여정부 출범당시 주택시장의 상황은 1989년 토지공개념이 검토되던 시기의 부동산 시장 상황과 비슷하였다. 셋집도 없어 방 한 칸을 임대한 세대가 100만을 상회하는데, 전체가구의 33.2%인 276만 세대가 814만호의 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2003년 행자부 통계)으로 나타났다. 지역별로는 서울의 경우 44만 세대가 141만호의 주택을 소유함으로써 평균 3.24호를 소유하고 있고, 강남에서만 5만 5세대가 20만호의 집을 소유, 평균적으로 3.67호의 주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참여정부는 다주택 소유자로 하여금 주택을 팔게 하거나 다주택을 소유하는 데 따른 합리적인 부담을 매기는 것이 주택의 수급불균형을 해소하고 투기적 가수요를 억제하는 첫걸음이라고 보고 있다. 즉, 주택시장에서의 소유편중을 바로 잡고 주택이 지나치게 상품화해 투기의 대상이 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은 ‘10.29 대책’에서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 방침으로 연결됐다. 토지공개념은 주택부문까지 확대 또 주택 매매를 통한 불로소득을 막기 위해 주택거래신고제,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제도, 실거래가에 근거한 양도소득세 부과제가 도입돼 시행됐다. 재건축 개발이익환수, 실거래가 과세, 보유세 강화도 값비싼 주택을 소유한 가구는 대가를 내고 주택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좋은 점(amenity)을 향유토록 한다는 점에서 불로소득 환수와 맥을 같이 한다. 국토연구원 이수욱 연구위원은 “참여정부는 노태우 정부에서 도입했던 필수재로서의 토지에 대한 공개념을 주택부문까지 확산해 소유편중을 시정하고, 개발과 거래· 보유에 따른 불로소득을 환수하는 방식으로 다주택자가 보유하고 있는 주택이 자연스럽게 시장에 나오도록 함으로써 주택가격을 안정시키고자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2005년 인구총조사 결과, 전 가구의 16%인 255만 가구가 최저주거기준에도 못 미치는 열악한 주거시설에 거주하고 있다. 주택 자가보유율도 55.6%로 그다지 높지 않다. 주택에 대한 국민적 갈증은 계속될 것이지만, 과거처럼 한 가구가 3~4채의 주택을 소유하는 것은 사회통합 차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주택도 토지처럼 과다한 소유에는 정당한 부담이 따라야 한다. 거주를 목적으로 하는 주택에서 과도한 수익을 창출하려는 시도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사회통합을 추구하는 국가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2007.03.15 특별기획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