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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 속 일제잔재 네티즌들이 찾아낸다 오케바리, 만땅, 기스가 나다, 땡깡부리다, 담배 한 까치…. 젊은 세대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일본말, 일본문화를 네티즌들이 골라내는 캠페인이 국가보훈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펼쳐지고 있다. 보훈터는 광복 60년을 맞이해 7월 4일부터 '일제잔재 뿌리뽑기'캠페인을 '국가보훈처와 함께하는 나라사랑' 미니홈피 (http://www.cyworld.nate.com/lovelovekorea)”에서 실시하고 있다. 이 캠페인에는 매일 40명정도가 꾸준히 참여해 10일 현재 1090명이 응모했다. 많은 네티즌들이 뿌리를 뽑아야 할 일제잔재로 주로 언어들을 응모했으며, 그 대부분은 일제와 관련짓기 어려울 정도로 평상시에 자주 사용하는 것들이다. 한예로 '오케바리'의 경우 일본어의 'おきまり(오키마리)' 에서 온 것. 오키마리란 '결정'이란 의미로, 식당 같은 곳에서 음식주문을 받는다든지 할 때 '오키마리 데스까?'라고 하면 '결정하셨습니까?'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인데 어쩌다 와전돼 '오케바리'가 된 것이다. 또한 쎄쎄쎄는 일본어 'せっせっせ(쎄)'에서 온것으로 원뜻은 '(놀이,게임등의) 준비동작' 이라는 뜻이다. 이밖에도 네티즌들은 가득이란 표현의 ‘만땅(이빠이)’, Dozen(12개묶음)을 의미하는 일본식 영어발음 '다스', 상처나 흠집을 의미하는 '기스', 간질을 의미하는 ‘땡깡(땡깡부린다)’, 속이 텅 비고 의미가 없다는 의미의 ‘가라’, 짙은 청색이라는 뜻의 일본어인 ‘곤색’, 접시를 의미하는 ‘사라’, 담배 한개비를 의미하는 ‘까치’, 다진양념을 뜻하는 ‘다데기’, 깃을 의미하는 '에리' 등을 뿌리뽑아야 할 일제잔재로 지적했다. 한편 문을 연 지 3달 만에 누적방문자수 36만명을 돌파한 국가보훈처 미니홈피는 '광복60년기념관'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및 광복전후의 사진을 전시하고, '광복60년 슬로건 공모', '광복절·팔일오 삼행시짓기', '애국지사 감사편지쓰기', 매일 자신이 독립운동가가 되어 가상체험을 경험하는 '광복릴레이소설', 총방문객수에 숨어있는 'Hit 815를 찾아라'등의 이벤트를 실시중이다. 2005.08.10 취재: 최미랑
- 고증을 통한 일제 잔재청산 각설이타령과 바나나떨이 일본의 전통예능을 수록한 평범사의 역사와 예능 비디오 시리즈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비디오에 실려있는 예능 ‘바나나 떨이’는 한국의 각설이타령과 곡절이 아주 비슷했기 때문이다. ‘바나나 떨이’는 후쿠오카현 모지항(福岡県門司港)의 명물이다. 1900년도 초부터 1940년경까지 대만에서 몬시항으로 대량의 바나나가 유입되었다. 바나나는 아직 파랗게 덜 익은 상태에서 수입하여 일본에서 도매상에 넘어갔을 때 노랗게 익혀서 소매상으로 넘긴다. 그런데 잘못해서 수송선 안에서 익어버리면 그 많은 바나나를 노천상에게 넘겨서 더 익기 전에 팔아버리게 되었다. 한국이라면 남대문시장에서 좌판 위에 올라가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며 “떨이에요, 떨이. 양말 두장에 천원!”이라고 소리치듯이 구성지고 멋지게 대사를 읊으면 손님들이 몰려드는 가운데 바나나를 떨이로 파는 ‘바나나 떨이’의 곡절이 내 귀에는 각설이타령과 아주 유사하게 들렸다. 전체는 상당히 길기 때문에 조금 줄이면 다음과 같다. 자아 자아 모지항 명물 바나나 떨이 볼일이 없으시거나 바쁘시지 않으시면 보고 가십시요, 듣고 가십시요. 보고 듣는 데는 짐이 안 되는 바나나 장사의 자랑거리 바나나 노래 웃기고 재미있게 곡절을 부쳐 고향 가실 때 선물로 사가시게 하는 모지의 명물 바나나 장사 (중략) 한 송이 얼마에 떨이 하느냐, 자아 자아 사세요, 사요 이렇게 좋은 바나나를 600엔에 안 사시면 59 58이면 오팔팔 옛날 옛적 미남자 그 남자한테 반한 고무라사키 58이 비싸다면 55.... 이렇게 처음 600엔을 부른 바나나 가격이 단계를 밟아 400엔까지 내려간다. 바나나 가격을 내려가면서 구경꾼들이 싸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를 감지하면 그 가격에 팔아버리는 장사법이다. 이 비디오를 보는 순간 한국의 각설이타령 곡절이 부산과 가까운 후쿠오카로 넘어갔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이 비디오를 보았을 때가 일본에 유학중이었기 때문에 민속학 세미나에서 이 사실을 일본의 연구자에게 질문하였다. “일본의 바나나 떨이라는 거리예능(일본에서는 大道藝라고 부른다)은 한국의 각설이타령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한국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라는 질문을 받은 그 교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일본에는 ‘바나나 떨이’의 원형이라고 보여지는 숫자세기 노래에 대한 기록은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는 취지였다. 그 교수는 여러 번 한국에 체재하면서 연구활동을 해온 사람으로 한국의 절 중에서 자신이 안가본 곳은 거의 없다고 호언할 정도의 한국통이었다. 아마도 한국에서 각설이 타령을 들었고, 유행하던 품바도 보았을 것이다. 오히려 각설이 타령이 일제시대 때 한국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주장으로 들렸다. 물론 한국의 각설이 타령에 대한 기록도 1875년 신재효 판소리사설집에 등장하고 있고, 구걸하는 사람이 음악을 하였다는 기록은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까지 나는 한국에 있고 일본에 있으면 거의 한국이 일본에 전해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언뜻 비슷한 예능도 각각의 나라에서 오래된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확실하게 영향관계를 입증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게 되었다. 한국 도깨비는 일본 오니(鬼)? 도깨비는 어떻게 생겼을까? 도깨비는 상상상의 존재로서 실제로 본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얼마 전부터 한국민족의 문화원형을 밝히는 일련의 연구와 맥을 같이하는 일로서 한국 도깨비 연구도 활발하다. 그러나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로서 도깨비의 이미지는 오히려 일본의 오니라는 연구가 있다. 김종대 '도깨비의 세계'를 보면 '혹부리 영감'은 일제시대 교과과정의 개편을 통해 일본의 「瘤取爺」가 「혹부리 영감」으로 개칭, 수록됐다고 되어있다 김종대 '도깨비의 세계'(국학자료원, 1997년). 이 이야기는 한국이 일본과 한국이 그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는 증거라며 한일합방의 당위성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조작한 이야기라고 한다. 그런데 1915년부터 30년 동안 교과서에 실렸기 때문에 그 영향력이 커서 이제는 한국민들이 모두 도깨비를 생각하면 일본의 오니를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도깨리라고 하면 머리에 뿔이 달려 있으며, 무서운 방망이, 큰 덩치와 날카로운 송곳니와 같은 아주 무서운 모습을 떠올린다. 이 모습이 바로 일본의 오니의 모습이라고 한다. 20여년동안 한국의 도깨비를 연구해온 김종대씨의 설은 영향력이 커서 인터넷에 올려져 있는 글들에서 우리가 보아오던 도깨비 그림이 일본의 오니 그림이라고 하는 내용이 많이 올려져 있다. 2004년 KBS 설특집 프로그램에서도 1900년도 일본의 교과서와 일제시대 조선 보통학교 교과서의 혹부리 영감 이야기를 비교하여 도깨비와 일본의 오니가 똑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김종대씨의 설에는 일본 오니에 대한 고찰이 빠져있는 점이 아쉽다. 일본 오니의 형상을 그대로 본뜬 것이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일본 오니의 형태를 먼저 살펴보아야 한다. 특히 일본은 한반도의 문화적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일본의 오니에는 한국 도깨비의 요소가 가미될 수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국과 일본의 문화를 비교하면 한국은 사색적이고 일본은 이미지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깨비를 비교해 보아도 한국은 풍부한 도깨비 문화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기록은 빈곤하다. 이에 비해 일본은 너무나도 많은 이미지를 남기고 있다. 일본 오니의 이미지에 대해서 졸고 「일본 鬼(오니)의 도상학(Ⅰ)--鬼面瓦에서 에마키(絵巻)까지」 최경국「일본 鬼(오니)의 도상학(Ⅰ)--鬼面瓦에서 에마키(絵巻)까지」(『일본학연구』제16집,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2005. 4)에서 다루었는데, 여기서 간단히 소개하겠다. 귀면와에서 보면 일본에 기와를 전해 준 것은 백제이므로 초기에는 백제의 영향이 가장 컸다. 그런데 일본에서 뿔이 달린 귀면와가 발달하게 되는 8세기 말 부터는 통일 신라시대 귀면와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던 중 오오사카(大阪) 四天王寺에서 발굴된 기와에서는 외뿔 오니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러한 형태는 한반도에서 출토된 유물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出雲風土記』에서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눈 하나 달린 오니가 첫 번째 구체적인 모습이었으나 이전에 형성된 오니의 모습은 외래 불교의 오니에 의해 모습을 감추게 되고 지옥의 옥졸인 적귀, 청귀와 나찰의 모습의 영향을 받은 오니가 만들어진다. 한편 눈 하나 달린 오니는 신에서부터 출발하였지만 시대가 밑으로 내려가면서 요괴이야기로서 각지에 전승하게 된다. 이로서 보면, 오니의 이야기는 일찍부터 있었지만 구체적인 실체에 대한 인식은 없었다. 오니의 형상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귀면와와 불교 회화이다. 오늘날 오니 얼굴의 구체적인 묘사는 귀면와와 공통점이 있고 다른 신체적 특징은 불교회화에서 취하였다. 『餓鬼草子』의 나찰에서는 호랑이 가죽 하의, 우두귀와 마두귀에서는 적색 피부와 청색 피부, 그리고 훈도시나 호피 허리 장식(나중에는 호랑이 가죽 훈도시로 그려진다), 그리고 철지팡이와 같은 특징이 확립되어 있다.『北野天神縁起』에는 뇌신의 모습과 지옥의 귀졸의 모습이 보인다. 외뿔의 오니, 뿔 둘 달린 오니 등등 오늘날의 오니상을 이루는 요소는 모두 갖추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이 합해져서 근세 에도시대에 이르러 오늘날 오니의 형태가 완성된다. 즉 일본 오니를 이루는 두 가지 특징, 귀면와와 불교회화는 둘 다 일본의 독특한 이미지라고 볼 수 없다. 게다가 귀면와에 그려진 오니는 확실하게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불교회화도 아시아 공통의 문화이다. 오히려 일본 오니가 한국 도깨비의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해야 한다. 지붕위에서 악귀들을 제압하던 도깨비 기와는 한반도에서 많이 발견되는 유물이지만 고려시대까지이고 조선시대로 접어들면 억불숭유정책 탓인지 거의 그 모습이 사라져 버렸고, 백제로부터 도깨비 기와를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지붕 위에서 사방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자리를 확실히 지키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일본은 귀면화가 세계 속에서 일본만이 가진 문화재이며 세계에 자랑할 만한 일본의 고유문화라고 자부하고 있다. 무분별한 일제잔재청산 일본영화를 보고있으면 벚나무에서 벚꽃이 눈처럼 떨어지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漢詩에서 花라고 쓰면 매화를 가리키지만 일본노래에서 花라고 쓰면 벚꽃을 지칭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보통 일본의 國花가 벚꽃이라고 생각하는데 國歌나 國旗처럼 법률로서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도 일본의 국화는 벚꽃이나 국화라고 생각한다. 국화는 천황의 문장이라서 그렇게 생각하지만 절대적인 국민적 지지는 역시 벚꽃이다. 일본제국주의는 벚꽃을 전시중에 많은 젊은이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데 이용하였다. 벚꽃은 한번에 활짝 피었다가 한번에 지고마는 성질 때문에 그 이미지가 특공대에 사용되어 “천황을 위해 깨끗하게 지거라. 사쿠라처럼”이라는 격려를 받으며 많은 특공대원이 죽음으로 떠났다. 일본제국시대에 이런 군가가 있었다. 너와 나는 동기 사쿠라 같은 훈련소의 연병장에 피어 한번 핀 꽃이라면 지는 것을 각오했다 멋지게 지자꾸나, 나라를 위해 (중략) 너와 나는 동기 사쿠라 서로가 멀리 떨어져 진다고 해도 사쿠라의 수도 야스쿠니 신사 봄 가지에 피어 다시 만나자 그러나 이는 벚꽃이 일본군부에 이용당한 것이지 벚꽃의 책임은 아니다. 이러한 벚꽂의 군국주의적인 이미지에 세뇌되어 한국뿐 아니라 중국도 많은 벚나무를 베어내었다. 이제는 일본제국주의가 지구상에서 사라진지 벌써 60년이 지났다. 그런데 아직도 일본 군국주의자의 이미지 조작에 의한 주박에 사로잡혀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위, 진해의 벚꽃을 베어버려야 한다는 주장이 창궐하고 있다. 60여년 전에 시행한 일본 군국주의자의 세뇌에 아직도 빠져있는 그 자체가 일제의 잔재가 아닌가하는 느낌이 든다. 참고로 벚나무는 지구상 20여국에 자생하였고, 특히 일본 벚나무의 주종인 왕벚나무는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연구(국민일보 2001년 4월 11일자)도 있다. 봄을 알리는 꽃으로 사람들을 그 아름다움으로 즐겁게 하는 벚꽃에 쓸데없는 원죄를 덜어주었으면 한다. 위의 세 가지 사례로 볼 때, 우리가 일제의 잔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라도 그 근원을 따져보지 않고는 쉽게 단정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혹은 너무나도 일제시대에 대한 반감이 지나쳐 자연물조차도 일제와 연관시키기도 한다. 이에 나는 일제잔재청산에 몇 가지 원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철저한 고증을 거쳐야 한다. 둘째, 역사로서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셋째, 너무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 넷째 최소화시켜야 한다 등이다. ◎최경국: 명지대학교 인문대학 일어일문학과 부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 졸업, 동경대학교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표상문화론 전공 석, 박사취득(학술박사). 박사논문: 『에도시대에 있어서의 '미타테(metaphorical pictures)' 문화의 종합적 연구』 저서: 『造物趣向種三種』, 太平書屋, 1996.6 역서: 『일본문화론의 변용』, 소화출판사, 1997.6 공저: 『イメ-ジ 不可視なるものの强度(이미지, 불가시한 것의 강도)』, 동경대학출판회, 2000.6 『일본의 문화와 예술』, 한누리미디어, 2000.6 2005.07.01 문화관광부
- 방송에 남아있는 일제잔재 물론 지금은 다 옛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80년대 중반까지는 방송사의 봄가을 정기 프로그램 개편 철이 다가오면 방송사 편성관계자들은 부산 해운대 부근의 호텔이나 여관으로 모여들었다. 개편회의가 명분이지만 실제는 일본 프로그램을 시청하기 위해서다. 당시 부산, 특히 해운대에서는 일본 TV가 양호하게 수신이 됐기에 일본 프로그램을 보면서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얻어오기도 했다. 그러나 심한 경우에는 일본 TV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무대 디자인, 출연진의 구성까지도 그대로 베끼기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방송은 분명 문화이다. 문화란 그 공동체의 구성원이 역사성을 토대로 창조해내고 또 향유하는 정신적 생산물이다. 따라서 문화에서 그 공동체의 독창성과 정체성이 빠진다면 그것은 문화가 아니라 독이요, 차라리 쓰레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80년대까지도 우리방송이 일본문화를 그대로 베껴 와서는 우리 대중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왜색문화에 젖어들게 만드는 첨병 노릇을 했던 셈이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라고해서 그냥 슬쩍 넘어가기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들이 80년대까지 자행됐을까? 이유는 우리방송이 일제강점기에 탄생했다는 태생적인 한계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1925년, 조선총독부 체신부 구내에서 출력50W로 무선 실험을 했고 그 이듬해 경성방송국이 설립되면서 이 땅의 방송역사가 시작됐다. 아직도 쓰이는 '입봉·데모찌·구다리…' 일제가 시작한 방송, 그 목적이 조선인으로 하여금 시대적 보편가치를 공유하게 만들어서 근대적 시민으로 깨어나는 걸 돕는 것이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다만, 방송을 식민지 지배도구로 삼아 내선일체, 대동아공영이라는 제국주의의 악령으로 조선 땅을 뒤덮을 작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방송은 그 출발부터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어찌 보면 이런 사정은 유독 방송계의 사정만은 아닐 것이다. 자발적인 근대화 기회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서 박탈당했던 우리 근대사의 공통적인 아픔일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태생적 한계야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그 이후 방송에 남아있는 일제문화를 청산하려는 방송인들의 진지한 노력이 부족했다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지금까지도 방송계에 남아있는 일제의 그림자 중, 특히 텔레비전 제작용어 부분이 심각하다. 테레비(텔레비전의 일본식 준말), 프로(프로그램의 일본식 준말), 입봉(첫 연출), 데모찌(어깨걸이 촬영), 다찌마리 혹은 다찌마와리(액션 장면), 구다리(씨퀀스, 씬), 삼마이(삼류), 야마(요지, 핵심주제) 등의 용어는 일본식이라는 것이 이제는 충분히 알려져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방송현장에서는 여전히 쓰이고 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처럼 일제문화의 잔재란 것이 널리 알려져 있고 또 대체할 다른 말이 있는데도 이 정도이니 다른 용어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필자가 조연출 시절, 그러니까 80년대 후반의 상황이다. 당시 나이가 한참 든 선배 카메라맨과 자주 일을 했었는데, 야외녹화를 나가면 그가 하는 말 중에는 내가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는 촬영용어는 정말 몇 개 안되었다. 돕뿌(TOP, 장면의 시작 부분), 압뿌(CLOSE UP), 쓰무(ZOOM), 데마이(카메라 가까이 있어서 전면에 크게 잡히는 물체, 혹은 카메라의 앵글 가까운 부분), 카트와리(컷을 나누는 것), 누끼(동일한 씨퀀스에서 같은 카메라 앵글의 컷들을 한번에 몰아서 촬영하는 기법), 시바이(등장인물들의 동선, 영어로는 블라킹), 혼방(OK 컷), 우께(반응, 리액션), 오사마리(끝, 마무리), 바라시(촬영 후 정리작업) 등..... 하여간 그 선배와는 일본식 용어가 들어가지 않으면 촬영현장에서 의사소통이 어려웠을 정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이 땅에 최초로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해인 1956년은 일제 패망 10년이나 지난 시점이다. 그럼에도 이런 일본식 용어들이 TV 프로그램 촬영 현장에 뿌리박게 된 까닭이 어디 있을까? 영화계 사람들이 방송으로 옮기며 사용 해답은 역시 사람의 문제이다. 당시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면서 방송 영상을 담당하는 사람들 대부분을 영화계에서 뽑아왔다. 그들이 몸담고 있던 영화계는 이미 오랜 세월동안 일본식 용어를 관행처럼 쓰는 사정이라 그들이 방송으로 옮아오면서 그 용어들도 아무 저항 없이 그들과 함께 방송계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 카메라맨 선배는 충무로 영화 쪽에서 쭉 일해 오셨으니 그분으로서는 지극히 자연스런 용어들이었을 게다. 물론 이제 그 사용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기는 했기는 했지만, 국민의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대중문화의 생산자와 전달자로서의 방송의 사회적 책임을 생각할 땐 이런 일제잔재가 베어있는 말은 단 단어라도 방송계에 남아있어서는 안된다. 우리 텔레비전 방송도 50년이 다 됐다. 그리고 이제는 디지털 시대이다. 방통융합으로 방송의 새로운 미래를 향한 도약의 시기이며, 동시에 위성DMB, 지상파DMB, IP-TV 등 미처 그 이름을 익히기도 전에 새로운 개념의 기술이 등장하는 그야말로 뉴미디어 시대이다. 이런 첨단을 걷는 뉴미디어 시대에까지 일제의 잔재가 따라다닌다는 것은 우리 방송인의 각성이 부족했고 청산노력이 모자랐다는 이유 외에 어떤 말도 구차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대중문화의 정체성을 바로세우는 일은 바로 방송에 남아있는 일제 문화에 대한 완전한 청산부터 시작돼야 할 것이다. ◎정호식: 1959년생. 한국방송프로듀서연합회장(PD연합회장)/MBC시사교양국 부장. 1986년 MBC 프로듀서로 입사해서 지금껏 시사교양PD로 일하고 있다. 4년 6개월의 조연출 시절을 거쳤으며, 이후‘인간시대’, ‘신인간시대’, ‘그사람 그후’, ‘김한길과 사람들’, ‘다큐스페셜’,‘와! 이 멋진 세상’, ‘MBC스페셜’ 등과 여러 특집다큐멘터리를 연출해 왔으며, 특히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의 내면을 기록하는 일에 관심이 많다. 2005.06.27 문화관광부
- 마지막 조선어 수업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소설이 있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배운 작품 가운데 드물게 잊히지 않는 작품 중 하나이다. 선생님은 교단에 올라서서 "여러분, 오늘은 나의 마지막 수업입니다. 베를린으로부터의 명령으로 내일부터는 알자스와 로렌의 학교에서는 독일말로만 가르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그것은 “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굳센 말이라는 프랑스 말을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비통한 선언이었다. 애석하게도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졌기 때문이다. 어디선가 프러시아군의 나팔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선생님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선생님은 칠판에 ‘프랑스 만세!’라고 썼다. 이 소설을 읽고는 가슴이 뭉클했다. 마음이 아팠다. 남의 나라 얘기지만 더 이상 자기 나라말을 가르칠 수 없다는 선생님의 비통함과 절망감, 프랑스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이 내게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이 소설을 읽은 거의 모든 이들이 다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그와 똑같은 비극이 있었다. 불과 67년 전 일이다. 일제의 식민통치는 지독했으며 잔인했다. 특이했다. 나라를 집어삼킨 것도 모자라 조선민족을 말살하려 했다.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 이후 일제는 황국신민화교육에 박차를 가하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국어(일본어-당시는 일본어가 국어였다)를 더욱 널리 보급하기 위해 급기야 조선어교육을 금지시켰다. 눈으로 보진 못했지만 당시 조선어를 가르치시던 어떤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을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저의 마지막 조선어 수업입니다. 앞으로는 조선 땅에서 더 이상 조선어를 가르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식민지 조선의 슬픔이었고 조선어의 위기였다.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허망한 구호를 외치며 ‘일시동인’이라는 감언으로 조선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조선어를 말살하려 한 것이다. 1942년에는 국민총력운동의 일환으로 ‘국어 상용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함으로써 전 조선인에 대해 일본어 상용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나라 잃은 조선의 백성들은 말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말은 그들의 정신을 담는 그릇이었다. 언어의 소멸은 곧 민족의 소멸이라는 인식 아래 그들은 일제의 압박과 탄압 속에서도 조선어를 지켜나갔다. 1930년대 이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던 조선어 연구와 조선어에 대한 관심은 곧 조선어와 민족 수호운동으로 이어졌으나, 그 와중에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졌다. 1942년의 함흥학생사건을 조작한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체포하여, 조선어의 정리ㆍ통일ㆍ보급을 도모하는 어문운동이 곧 민족운동인 동시에 가장 심모원려한 민족독립 운동의 점진적인 형태라는 구실로 실형을 선고하고 옥에 가두었다. 일경의 모진 고문과 악형에 시달리다가 이윤재 선생과 한 징 선생은 끝내 세상을 떠나셨다. 조선어 말살을 기도한 일제의 만행이었다. 다행히도 1945년 조선은 광복을 맞았고. 조선의 말과 글을 다시 찾았다. 그러나 35년 동안 일제가 남긴 상처는 의외로 깊었다. 1943년 불과 22%밖에 보급되지 않았던 일본어였지만 일본어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더 이상 일본말을 쓰지는 않았지만 자주 일본말이 튀어 나왔다. 관객들은 극장 앞에서 나래비를 섰고 승객들은 붐비는 전차 안에서 쓰리를 맞기도 했으며 학생들은 벤또를 쌌고, 여인들은 미용실에서 고데로 머리를 지졌으며 남자들은 공사판에 나가 노가다를 뛰었다. 이런 말들은 우리 삶 구석구석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영화판, 인쇄소 같은 곳에서는 일본말이 전문용어 행세를 하기도 했다. ‘노예의 씨’라는 최현배 선생의 지적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도 국어학자들과 민족정신을 잃지 않은 국민들이 있어 점차 우리말이 순화되었다. 글쓴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많이 쓰던 빠께스, 쓰메끼리, 다마네기, 닌징, 다꾸앙, 요깡, 와리바시, 자부동, 덴뿌라, 고바이 등은 어느 틈엔가 자취를 감췄다. 무의식중에 툭툭 튀어나왔지만 노력하니 불가능하지 않았다. 요즘 청소년들은 ‘요깡’이나 ‘닌징’ 같은 말은 들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애쓴 결과 일본말 찌꺼기가 많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안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강의실에서 만난 어떤 일본인 선생은 ‘잇빠이’가 원래 한국말이냐고 물었다. 농담이었을까? 그러고 보면 ‘잇빠이’뿐만 아니라 ‘나시’ 입고 ‘후까시’ 주고 ‘가오’를 세워 달라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 아주 많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속담이 있다. 잘은 모르지만 이 말도 일제 때 우리 삶 속에 스며든 것 아닐까? 본디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없지 않았는가! 그래서 난 되도록 이 속담의 사용을 피하려 노력하고 있다. 말이란 버릇이나 습관처럼 몸에 배는 속성이 있지만 관심을 갖고 노력하면 일본말찌꺼기를 걷어내고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꿔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올해로 광복 60년이 된다. 일본은 패전 60년이다. 그런데 글쓴이가 보기에 일본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결여하고 있는 일본은 역사마저 왜곡한다. 침략전쟁도 부인하고 남경에서의 학살이나 군대위안부도 부인한다. 심지어 최근에는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교과서에까지 기록한다. 한순간 분노하고 화만 내지 말고 차분하게 대응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 시작이 바로 내 안의 일제잔재부터 지우는 것 아닐까? ◎정재환: 현재 한글문화연대 부대표와 방송사회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1999년에 '자장면이 맞아요, 잠봉은?'을, 2000년에 '우리말은 우리의 밥이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은 받아쓰기 중'을 펴냈다. 1999년에 제1회 KBS 바른언어상과 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에서 주는 푸른미디어 좋은언어상을 받았고, 2000년 10월에는 한글학회로부터 우리말글 지킴이에 위촉됐다. 2003년 2월에는 성균관대 인문학부를 수석졸업했으며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상 대통령상도 수상하였고, 현재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사를 공부하는 사학도이기도 하다. 2005.06.20
- 조선문화 콤플렉스가 야만적 수탈행위로 표출 세계사상 유례없이 가혹했던 일제의 식민통치는 우리의 문화유산에도 원상회복이 힘들만큼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먼저 직접적이고 조직적으로 행해진 문화재 약탈을 들 수 있다.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경멸하면서도 오랜 기간 형성되어온 조선에 대한 문화적 콤플렉스는 감출 수가 없었다. 이들의 조선문화에 대한 경외에 가까운 숭배는 제국주의의 폭력성을 배경으로 야만적 수탈행위로 변질되어 나타났다. 문화재에 대한 약탈, 도굴, 파괴, 일본으로의 반출 등은 질량에 있어 대략적인 추정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전방위로 이뤄졌다. 문화재 수탈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진행됐다. 도자기·서화 등 소품에서부터 불상·동종·탑파·고서적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문화재가 망라됐다. 그런데 이러한 약탈행위를 식민통치기구의 권력자들이 앞장서 자행했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다. 고분 도굴의 공공연한 조장자인 동시에 가장 유명한 고려청자 장물아비였던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시작으로 역대 총독들은 예외 없이 무소불위의 힘을 앞세워 조직적으로 범죄행위를 지원했다. 총독 각자가 약탈의 수괴였으며 총독부는 충실한 수행기관이었다. 총독부 직원들이 개입하여 실록을 포함한 오대산 사고의 소장본을 밀반출하였으며, 최대의 문화재 약탈범이었던 오쿠라는 총독부의 지원 아래 경복궁 자선당을 통째로 옮겨가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 소중한 문화유산들은 화재로 불타버려 영원히 멸실되고 말았다. 극심한 도굴로 우리민족에 심한 상처 남겨 이렇게 일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조선을 문화적인 야욕을 채우는 장소로 삼아 철저히 유린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도굴행위는 전통윤리상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우리 민족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와 자괴감을 남겨주었다. 송산리 고분 등 수많은 고분들이 연구라는 미명아래 공공연히 도굴됐으며, 그 외 한탕을 노린 도굴은 규모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나아가 일본인들은 '굴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산골짜기의 절터라든지, 한 두 명의 승려들이 거주하는 몰락한 명찰(名刹), 그 밖에 교통이 불편하고 외진 유적지에서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문화재를 빼내고, 그것을 팔아 큰 돈을 챙기는 불법행위를 감행했다. 대대적인 불법적 문화재 약탈이 있었건만 해방 후 우리 정부의 대응은 미흡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 당시 한국정부는 조선총독부가 반출한 고분 출토품과 일본인 개인이 약탈한 문화재 4479점의 반환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개인 소유를 제외하고 국공유 1432점만 반환하는데 그쳤다. 현재 일본 내의 우리 문화재는 공개된 목록만으로도 3만4000여 점에 이르고 있으며 개인이 은닉하고 있는 것들을 포함하면 실제 숫자는 수십 배에 달할 것으로 짐작된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문화재를 둘러싼 과거사 청산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미해결 과제인 것이다. 다음으로 일제는 조선 국가의 전통과 문화적 자부심을 말살하기 위해 집요하게 유무형 문화유산에 대한 훼손에 착수했다. 그 대표적인 희생물이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들이었다. 이미 1910년부터 소네 통감 아들의 지휘하에 경복궁의 공원화 작업이 시작됐으며 1915년에는 조선 지배 5주년을 기념하여 조선물산공진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경복궁까지 훼철, 공원화로 민족 자존심 짓밟아 총독부는 공진회를 핑계로 경복궁을 마구 훼철시켜 민족의 자존심을 아예 짓밟으려 획책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 도처의 문화재를 이전하여 공진회장에 전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원주에서 옮겨온 철불 등이다. 원주는 예로부터 철불의 고장으로 알려진 곳이다. 조선 고적조사를 담당한 세키노의 조수인 야츠이 세이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원주군에서는 제법 수확이 있었답니다. 원주읍 부근에는 신라 말의 철불, 석불, 석탑이 흔해 빠지게 널려 있는 것이 경주도 놀라 맨발로 도망을 갈 정도입니다. 철불은 좌상으로 5구가 있고, 석불도 좌상의 것이 7구 가량 있는데 ……" 여기에 나타난 철불·석불·석탑 등 대부분을 공진회장으로 싹쓸이 해가는 바람에 철불의 고장인 원주에는 더 이상 철불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원주 철불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전국 각지의 문화재가 이러 저러한 사유로 인해 현재 그 위치를 떠나있고, 그 이후의 소재지가 확인되지 않는 것도 부지기수다. 공진회 이후 경복궁은 각종 박람회 전람회 등의 단골 행사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창경궁은 유원지화하였으며 창덕궁도 도로공사 등에 의해 훼손됐다. 유서 깊은 성곽이 파괴되는 등 수많은 문화재가 근대화의 미명아래 수난을 당했다. 또 남산의 국사당을 철거하고 신궁을 세웠듯이 전국에 걸쳐 명당을 골라 신사를 조영했다. 이는 능욕에 가까운 정신적 침해라 할 수 있었다. 일본의 발악적인 문화재 파괴는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지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1943년 조선총독부가 각도 경찰부장에게 내린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에 관한 건’ 지시는 반달리즘적인 폭거였다. 항일사상과 투쟁의식을 유발시키는 민족적인 사적들을 모조리 파괴하려고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가 철거대상으로 지정한 왜적 격멸 기념비는 ‘명량대첩비’·‘좌수영대첩비’·‘행주전승비’·‘타루비’·‘사명대사석장비’·‘황산대첩비’·‘정발전망유지비’·‘김시민전성각적비’ 등 20여기에 이르렀는데 이 중 일부는 실제 폭파되거나 명문이 훼손되는 일대 수난을 겪게 됐다. 극히 일부 사례를 예시했지만 일제강점기의 문화재 수난사는 민족문화 나아가 민족 말살정책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그 전모에 대한 연구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광복60주년이라는 전기를 맞아 일제에 의해 반출되거나 파괴되고 변형되어버린 문화재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자료로 남기는 한편, 그 역사적 사실을 후대에 명명백백하게 알리는 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중요한 의무라 할 것이다. 끝으로 무형문화유산에 대한 무관심을 지적해두고자 한다. 지금 유형문화재에 대한 복원사업은 많은 예산을 지속적으로 투입하여 가시적인 성과를 보이고 있다. 더불어 일제에 의해 오염된 무형 문화유산에 대한 점검도 놓쳐서는 아니 된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종묘제례악무와 같은 무형문화재나 민속 등에도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고 변형된 부분이 없는지 철저히 조사하여야 한다. 세계에 자랑하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에 일제잔재가 남아있다면 문화입국을 표방하는 나라의 자존심에 관계되는 문제일 것이다. ⊙윤종일 교수: 경희대학교 사학과 졸, 동대학원 졸(문학박사). 광복60년 문화사업 ‘일제문화잔재 지도 만들기’ 고증심의위원, 민족문제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서일대학 민족문화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한국 근현대사와 향토문화사 연구가 주 관심분야임. 저서로는 ‘1920년대 민족협동전선연구’ ‘동구릉’ ‘구리.남양주 문화유산기행’ 등이 있다 2005.06.15 문화관광부
- 일제 찬양 미술가들 해방후엔 위인 동상-영정 도맡아 연전에 청주 3.1공원의 ‘정춘수 동상’이 시민단체에 의해 높은 대좌에서 끌어 내려졌고, 최근에는 논개사당의 ‘논개영정’이 시민단체에 의해 폐출됐다. 친일한 인물의 동상이었고 친일미술인이 제작한 영정인 때문이었다. 전통적으로 사표가 되는 위인을 기리는 방식에는 선정비나 기념비 등 건조물을 세우는 방식 이외에 전각을 지어 영정을 봉안하는 법도 있다. 동상제작은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일본에서 배워온 서구식으로 이미 교육이나 문화사업에 일조를 한 이들의 동상이 우후죽순으로 제작됐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진영은 대개 역사적인 인물이었던 반면 동상은 대개가 당시 일제가 인정할 수 있는 생존한 인사들이었다. 따라서 친일문제는 영정의 경우는 제작자, 동상은 재현 대상과 제작자의 문제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근대기 최초의 동상은 휘문학교 민영휘 동상과 선린상고의 오쿠라남작 동상이었다. 학교 설립과 후원에 기여한 바가 큰 인물들의 상인 동시에 친일인사이자 일본의 한일합방에 공이 큰 일본인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동상들은 태평양전쟁의 동공출로 모두 파괴되어 현재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동상은 광복 이후의 것들이다. 총독아들 동상 만든 윤효중이 이순신 동상도 제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난극복의 의지를 다지기 위하여 이순신장군 동상이 제작됐다. 1952년 진해에는 윤효중이, 1953년 충무와 1955년 부산에는 김경승이 제작한 동상이 봉안되었다. 윤효중은 1945년에 태평양전쟁 당시 사망한 조선총독의 아들이자 가미가제였던 아베의 상을 스스로 만들어 총독부에 헌정한 충성을 보였다. 그는 이미 1943년의 조선미술전람회에 전쟁에 나서기 앞서 천번의 바늘땀을 꿴 천을 소지하면 목숨이 무사하다는 일본 군국주의를 부추기는 내용의 ‘천인침’을 출품해 창덕궁상을, 1944년에는 “시국의 진전에 따라 조선의 여성들이 각 방면에서 발랄한 활동을 하고 있으므로 그 자태를 그리고 아울러 조선의복의 미를 표현하려고 힘쓴” 작품인 ‘현명’을 출품하여 특선했다. 김경승은 1942년에 ‘여명’으로 추가로 무감사특선을 했고 다시 조선총독상을 수상했는데 “일본인의 의기와 진념을 표현하는 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 하에 조각계의 새 길을 개척하는 것일 것”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이 작품은 전쟁물자를 대기 위한 노동하는 인물의 모습이었고, 마지막 조선미전인 23회(1944년)에 출품한 ‘제4반’ 또한 전쟁물자를 대기 위하여 편성된 여성 노동대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다. 제1공화국은 이승만 독재로 인해 정통성이 의심받자 애국선열을 숭상하는 전통에 의탁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해갔다. 이 시기 수많은 동상이 제작됐는데 윤효중과 김경승이 집중적으로 제작했고 이후 1980년대까지도 김경승은 수많은 애국선열동상을 제작했다. 1956년에는 독립협회 시절의 이승만에게 도움을 주었던 민영환 동상을 안국동 로타리에 세웠는데 윤효중이 제작한 것이다. 같은 시기에 세운 아시아 굴지 규모의 이승만 동상은 1960년 4.19혁명 때 철거됐다. 종자개량으로 식량증산에 도움을 준 우장춘 박사 흉상부조, 동학혁명의 주역 최제우동상도 윤효중이 건립한 것이다. 민족적 위인들 동상 대부분 친일 미술인들이 만들어 윤효중 사후인 1960년대 중반 이후 김경승은 이순신장군 동상 이외에도 이충무공승첩기념탑, 맥아더장군동상, 군인충혼탑, 국립경찰충혼탑, 안중근의사 동상, 4.19기념탑, 세종대왕, 김구(민복진 공동작업), 김유신, 정몽주, 안창호, 이상재, 전봉준 등 동상과 학교 설립자 동상과 대학 총장의 동상들을 도맡아 제작했다. 친일미술인으로 분류되어 있던 이들이 국가의 공공 조형물을 제작하고 있는 것은 많은 수의 조소예술가가 월북한 탓도 있었지만, 한국전쟁기 반공전선에 적극 협조한 때문이었다. 민족정기를 일깨우기 위하여 국가적인 규모로 조성된 위인의 동상이 국가와 민족에 대한 반역행위를 한 친일미술인의 손에 의해 제작됐다는 사실은 결코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넘길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에서 지정한 표준영정이나 진영 또한 친일미술인이 제작했고 아직까지 통용되거나 신앙의 대상으로 모셔진 것이 많다. 동상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기 이순신 장군 진영을 새로 조성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 이상범이 그린 것을 1953년에 장우성이 그린 것으로 교체해 현충사에 봉안했다. 동양화가 장우성은 1941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푸른전복’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942년에는 ‘청춘일기’로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수상했는데 수상식에서 장우성은 감격에 떨리는 목소리로 “총후 국민예술 건설에 심혼을 경주해 매진할 것을 굳게 맹세”하는 답사를 했다. 장우성은 유관순 열사, 김유신 장군, 권율장군, 정약용 선생, 강감찬 장군, 정몽주 선생, 윤봉길 의사, 장보고 등 위인들의 진영을 그렸다. 김은호는 국민총력조선연맹 경성미술가협회에서 출발한 조선미술가협회 평의원, 동양화분과 역원을 지냈으며 1942년의 ‘반도총후미술전’ 위원작가였다. 1937년 ‘금채봉납도’ 1942년 ‘방공훈련’을 제작했던 그는 이순신 장군 진영, 신사임당 초상을 비롯해 어용화사였던 점을 인정받아 역대 조선왕들의 진영을 제작했고 논개, 춘향, 아랑의 진영을 그렸다. 일제때 많은 상 탄 김기창화백도 숱한 위인들 영정 그려 김기창은 반도총후미술전 초대작가로 ‘폐품회수반’을 제작했다. 매일신보 1943년 8월7일자에 ‘님의 부르심을 받고서’를 게재했으며 12월8일자에는 ‘천마’를 실었다.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에 <적진육박>을 출품하여 조선군보도부장상을 수상했고, 그해 4월 중순에는 총력연맹 증산 제일선인 목포조선에 소설가 이태준과 함께 파견되기도 했다. 1만원권 지폐의 세종대왕 초상을 제작한 이외에도 고산자 김정호, 의병장 조헌, 을지문덕 장군, 신숭겸, 태종무열왕, 문무대왕 등의 영정을 제작했다. 친일미술인에 대한 비판 앞에 일각에서는 당시 실력있는 미술가는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친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논박하기도 한다. 하지만 혈죽이 돋아날 정도의 기개를 가지고 자결한 민영환 선생 동상의 섬약하기 그지없는 얼굴, 금방이라도 주저앉아버릴 것같이 힘이 없어 보이는 이상재 선생 동상, 꽃다운 나이에 만세를 부르다 살해된 유관순의 심술궂은 얼굴, 거의 판박이인 논개·춘향·아랑의 모습 앞에서 과연 ‘실력있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의문이 든다. 자고로 진영이란 핍진해야 한다고 했다. 묘사하는 인물의 털끝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 인물이 아니라 한 것은 대상의 정신을 담아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경의를 표할 위인의 동상과 진영에서 감동적인 이미지를 확인할 수 없는 이유는 이들이 역사의식 없는 친일미술가의 손에서 탄생된 때문이다. 창작자의 마음을 속이지 못하는 미술작품의 진실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조은정(43세):현재 한남대학교 대학원 겸임교수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졸업,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 박사과정 수료. 제2회 조각평론상 수상,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주간. 저서로 '한국조각미의 발견' '권진규'. 공저로 '비평으로 본 한국미술' '김복진의 예술세계' 등 여러 권이 있다. 주요논문으로 '한국전쟁기 남한미술인의 전쟁체험에 대한 연구' '1950년대 전반 한국미술에서 타자읽기' ' 한국근현대 아카데미즘 조소예술에 대한 연구' '수묵채색의 친일미술인' '조선미술전람회와 친일미술인' '이승만동상 연구' 등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제1공화국의 국가권력과 미술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2005.06.13
- 5.16후 정부가 오히려 국민들 마음속 일제 잔재 불러내 오까네가 나이? “오까네가 나이.” 갓 국민학교에 들어갈 무렵(그때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 불렀다), 아버지가 어머니와 얘기하시던 중에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시며 하신 말씀이었다. 오까네가 나이? 무언가 비밀스런 말씀이겠거니 생각은 하였지만, 그 뜻은 도통 알 수 없었다. 나와는 관계가 없었기에 구태여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말은 알아들었다. “한용아, 오차를 곱뿌에 담아 오봉에 내어 와라. 그리고 덴뿌라랑 다꽝과 닌진 그리고 다마네기랑 삼마 두 마리 사와라. 주리는 주봉 보겟또에 잘 챙겨오고. 참, 주리는 야마시이 하면 안된다.” 우리 말로 풀자면 이런 뜻이었다. “한용아, 차를 잔에 담아 쟁반에 내어 와라. 그리고 어묵과 단무지와 당근 그리고 양파와 꽁치 두 마리를 사와라. 거스름돈은 바지 주머니에 잘 챙겨오고. 참, 거스름돈은 속이면 안된다.” 나는 이것이 일본말인줄 몰랐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이 말을 배운 적도 없었다. 그저 ‘부산 사투리라서 학교에서 가르치나 않는가 보다’ 라고 생각했다. 내 부모님은 일제시기 국민학교를 다니셨고, 일본어를 모국어로 배우셨다. 그것이 그분들의 학력 전부였고, 그분들이 사용하던 일제의 언어는 고스란히 내게로 전수되었다. 난 그 일본어를 부산사투리로 알고 배우며 자란 것이다. 1960년생인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내가 익숙하게 들었던 일본말은 점차 내게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곳곳에서 일제 잔재를 만났고, 그것은 나와 함께 자라왔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자라난 일제의 흔적들 어린 시절 밤이면 동생과 함께 어머니가 가르쳐 준 ‘오재미’ 놀이를 즐긴 적이 있었다. 긴 겨울밤에는 징용에 끌려가신 외할아버지가 여자로 둔갑한 ‘다누끼’(너구리)와 깊은 산속에서 살았다는 믿지 못할 얘기를 어머니 턱 밑에서 눈을 깜박이며 들었다. 우리나라 여우는 둔갑을 하더라도 꼬리를 감출 수 없듯이, 다누끼는 사람으로 둔갑해도 사람과 달리 뒤꿈치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다방구’,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장께이뽀’(가위바위보), ‘도시락고 헤이’와 같은 놀이를 즐겼지만, 그것이 우리 부모님들이 일제 강점기 일본 아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약주를 즐기신 고모님은 가끔 내게 일본 동요를 가르쳐 주시기도 했다. 뜻도 모르고 따라 부르다 외었던, “유야게 고야게떼 히가구레떼. 야마노 오떼라노 가네가에루···”라는 일본 동요를 내가 일본인 유학생에게 불러주면, 일본인 학생은 대번에 놀라곤 했다. ‘어떻게 1930년대 일본 동요까지 알고 있나요?’ 라며. 차마 일제 때 유치원을 다닌 고모한테 배웠다는 소리는 못하고, 일제 강점기를 연구하다가 알게 되었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추억은 좋든 나쁘든 성장하면서 사라져가는 법이고, 그리움이라는 안개 속에 뒤섞여 버린다. 부모님들도 이젠 칠순이 훨씬 넘어 더 이상 그때를 되새길 여력이 없으시다. 골목길 놀이 문화가 사라진 지금 나도 더 이상 내 아이들에게 어린 시절 내가 배웠던 일본 아이들의 놀이를 가르치지 않는다. 아아, 이렇게만 되었다면 일제 잔재는 그 시대를 살았던 노인들의 추억 속에서, 그리고 그 흔적만을 어렴풋이 이어받은 우리 세대에서 하나의 잔재로 끝났을 것이다. 이른바 세월의 잔영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제 잔재는 이런 동심의 세계에서 소박하게 남아있는 것보다 더 심각하게 우리 사회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재생산되고 있었다. 국가가 나선 일제 잔재 재건운동 우리 사회에서 세월의 잔영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일제 잔재는 박정희시대에 오히려 국가 통치 시스템으로 확고하게 되살아나고 뿌리박았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후 ‘재건운동’이란 게 곳곳에서 벌어졌다. 동네 사람들은 아침 일찍 마을회관 앞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재건체조”를 따라해야 했다. 이 재건체조란 게 일제 때 의무적으로 했던 ‘황국신민체조’(흔히 라디오체조라 불렀다)를 부활시킨 것이었다. 재건체조의 순서를 그린 전단 또한 일제 때 만들어진 ‘황국신민체조’의 그것과 똑같은 형식이었다. 재건체조를 만든 이들은 일제 때 교사나 군인을 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에 의해 일본 군국주의 문화는 국가 재건이란 미명으로 되살아났다. 국가재건은 일제 잔재 재건이었다! 국민학교라는 일제 때의 학교 명칭이 그대로인 채, 우리는 ‘애국조회’ 시간에 운동장에 줄을 선 채로 ‘교육칙어’ 대신 ‘국민교육헌장’을 외어야 했다. 종례 시간에 담임선생은 국민교육헌장을 다시 외우게 했고, 미처 다 외우지 못한 아이들은 옥수수빵을 배급받지 못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자 ‘유신체제’ 아래 좀더 강도 높게 일제식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때 눈이 아프게 보았던 “방공방첩”이란 표어가 일제 때 처음 만들어졌던 것이란 것을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민방공훈련이 실시되고 공습경보 발령이 나자, 어머니는 당신이 어릴 때 “규쥬께호(공습경보)” 훈련을 받았던 시절을 회상하시곤 했다. 아둔한 나였지만 가끔 상장을 받았다. 대부분 상장에 적힌 글귀는 “위 학생은 품행이 방정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이에 상장을 수여함” 따위였다. 성적만 좋았을 뿐인데 품행도 좋다는 게 (기분은 좋았지만) 이해는 안 되었다. 후일 내가 일제시기 상장을 구해 읽어보니 내용이 똑 같았다. 다만 품행 대신 조행(操行)이란 글귀가 대신했다. 일제시기 조행이 불량하면 상급학교 진학이 어려웠다. 일제에 그만큼 충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발상 아래 만들어진 상장이 해방 후 아무런 반성 없이 그대로 사용된 것이다. 국민교육헌장보다 짧아서 한숨을 돌렸지만, “국기에 대한 맹세”는 일제시기 “황국신민의 서사”를 본떴다는 점에서 여전히 지금도 불쾌하다. 그러나 나는 마흔 여섯이 된 지금도 “국민교육헌장”과 “국기에 대한 맹세”를 욀 수 있다. 세뇌 교육이란 게 이렇게 오래 가나보다. 후크를 찬 교복과 비듬이 생기는 교모가 답답하던 학창시절, 머리 가운데 ‘경부고속도로’가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던 ‘두발검사’와 군대 내무검사를 방불케 한 ‘용의검사’ 등이 청춘을 욱죄었다. 일본 제국해군의 세일러복은 여학생 교복(세라복)으로 부활되었고, 오늘도 중년 여성들은 세라복의 추억에 잠긴다. 일제시기 황국신민교육이란 명목으로 자행된 수많은 교육범죄들이 유신이란 이름 아래 되살아나 학생들을 복종하는 기계로 만들었고, 우리는 그것이 일제 잔재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추억’으로 흘러버렸다. '애국반'·'도나리구미'는 '반상회'로 부활 어른도 예외는 아니었다. 주부는 반상회로 집결되었다. 반상회는 일제 때 만들었던 “애국반” 또는 “도나리구미”에서 나온 것이었다. 행락철이 되면 ‘창경원 벚꽃놀이’가 시골사람들에겐 큰 화제였다. 너도 나도 갔다 오면 구경 자랑에 입이 쉴 새가 없었다. 노인들은 일제 때의 벚꽃놀이를 회상하며 감개에 휩싸이기도 했다. 냇가에 천렵이라도 가면 으레 돗자리 위에서 화투(하나후타)판이 벌어졌다. 화투야 세종 때 양녕대군이 즐겼다는 기록도 있지만, ‘육백’이 우리의 놀이일 리는 만무하고 그림 또한 우리 것은 아니었다. 남정네들은 술 한잔 걸치면 “십팔번”을 뽑아댔고, 일본식으로 어깨띠를 대각선을 맨 포대기로 아이를 업고 있는 젊은 아낙네의 찌푸린 모습도 눈에 선연하다. 한국적 민주주의, 민족적 민주주의를 외치고 유신을 외치던 그들은 “조국근대화”란 미명 아래 일제의 잔재들을 국가주의 통치 시스템을 활용하기 위해 부활시켰다. 국가에 의해 일제잔재는 제도화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용되면서 어느덧 우리 것인지 남의 것인지도 모르게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으니, 이를 과연 잔재라 할 수 있겠는지. ◎ 박한용: 고려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수료,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실장, 한성대학교 역사문화학부 강사,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 한국 근현대사 특히 민족해방운동사와 한국 민족주의 분야 연구. 아울러 역사바로잡기 운동의 하나로 한일 과거사청산과 친일문제 진상 해명 활동에 종사. 대학에서는 오래 동안 전통문화와 관련해 강의 중. 논문으로는 '1931년 경성제대 반제동맹사건 연구' '1930년대 민족통일전선과 반제동맹 연구' '근대를 넘어 선 근대' '한국 민족주의의 신화와 현실'이 있다. 공저 '빼앗긴 조국 끌려간 사람들' '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 역사 1·2 ' '우리 민족해방운동사' '밀양독립운동사' 사진집 해설 '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 등이 있다. 2005.06.10
- 일제 수탈관리 살았다고 근대건축물 철거하나?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 190-10호 는 현재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선교교육원이 있다. 이곳은 면적 1200여 평에 약 100여년 된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1917년에 발간된 ‘경성부관내지적목록’을 보면 H. 모리스라는 서양인 소유로 등기가 되어있다. 모리스라는 사람은 1889년 우리 정부가 경인철도 건설권, 광산 개발권을 주었던 사람 이름과 동일하지만 같은 사람인지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이 건물은 1910년대에 서양인 H. 모리스 소유의 토지로 밝혀졌다. 일제시대 북간도에서 활동하던 캐나다선교회는 한국전쟁때 거제도로 피했고, 이후 이 건물을 매입(기증)해 활동했으며, 1970년 본국으로 철수하면서 한국기독교장로회측에 기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건물은 등기가 되어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때 충정로는 김옥균과 갑신정변을 계획했던 다케조에 공사의 이름을 딴 ‘다케조에 마찌’로 불렸으며, 주로 서양인과 일본의 식산은행, 동양척식회사 직원들의 공동주택 또는 고급주택지였으며, 해방 이후에도 서울의 부자들이 주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기독교장로회측은 이미 2003년 90년이 된 부속건물인 신우관을 철거했고, 2004년 선교교육원 건물까지 철거하겠다는 것이었다. 선교교육원 본관 건물은 건축물로서의 미학적 가치는 물론 1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초기 근대 건축물로서의 보존 가치가 매우 높은 근대건축물이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건물은 캐나다 선교사들의 한국교회 사랑과, 그 가운데서도 기장교회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중한 건물이라는 데 있다. 말 그대로 캐나다 선교사들의 억압받는 조선민들과 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교회를 위한 기도와 헌신과 수고 등 ‘시간의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은 ‘기억의 건물’이다. 때문에 선교교육원 건물은 기장의 역사유물만이 아니라 한국교회의 역사유물이기도 하다. 캐나다 선교사들 우리 민족의식 끝까지 지켜 줘 캐나다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민주화운동의 주역이었던 기장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선교 초기로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되기까지, 그리고 서슬 퍼런 5.16 군사독재기에 이르기까지 캐나다 선교사들의 기장교회 사랑은 각별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우리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고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때, 일제에 동조한 미국 선교사들과는 달리, 캐나다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의 민족의식을 끝까지 지켜줬고, 그 같은 민족의 주체성과 뜻을 지닌 선각자들을 발굴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줬다. 그들의 지도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로 기장의 선각자들이다. 기장의 스승 김재준 목사 역시 캐나다 선교사들의 후원과 사랑을 받았다. 기장 사람들이 ‘뜻’을 지닌 이들이었기에, 한국 사회에 대한 직접 사역을 마친 캐나다 선교부가 자신들이 가꿔놓은 모든 재산을 기장에 헌납한 것이다. 초기 역사의 개략만을 살펴봐도 캐나다 선교사들의 기장교회 사랑이 얼마나 정성스러웠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해방 전, 한국교회 선각자들은 자주적인 지도력 양성과 신학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조선신학교의 태동은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이를 감지한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에서 자기들의 위상과 권위를 잃지 않기 위해 한국인의 자주력과 신학운동을 규제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때 캐나다 선교부는 진심으로 조선 사람들과 한국교회의 발전을 약속하고 스코트 박사를 조선신학교 교수로 파송하고, 한국교회의 신학운동을 지원했다. 1970~80년대 안병무, 서남득 목사가 1, 2대 원장을 지냈고, 해방·민중 신학의 산실로 알려지고 있으며, 종로5가 KNCC 사무실과 함께 해직교수, 기자, 노동자, 학생들이 모여 토론하고, 시대의 아픔과 민족의 장래를 논의하던 곳이다. 또한 퇴학당한 학생들을 신학교육을 시켜 목사로 양성한 공간이기도 하다. 소유주 마음대로 문화재 철거 가능 기장총회측은 민중의 역사와 건축사적으로 근대문화유산의 가치가 충분한 100년이나 된 건물을 철거하고 지상 13층 지하 3층의 임대건물을 신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가, 선교교육원 건물이 철거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기장측의 젊은 목회자와 시민단체(문화연대,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에 의해 저지되었고 문화재청은 근대건축물로 등록을 했다. 일단 당장의 철거는 막을 수 있었으나 등록문화재는 소유주의 결심만 있다면 언제든지 철거가 가능하다. 근대건축문화재의 등록제에서 지정제로의 전환이 필요하며 50년 이상된 건축물의 철거때는 현행 신고제보다 허가제 도입이 절실히 필요하다. 기장총회측은 일제때 우리를 수탈한 은행관리가 살았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철거해야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으나, 이는 건물이나 대지의 역사와 의미를 기록하지도 않고,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기장총회측의 몰역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개 문화유산 하면 국보나 보물, 가격은 얼마나 하겠는가만 생각하지만, 정반대의 것도 있다. 이를 부(負) 문화유산, 즉 ‘네거티브 문화유산’ 이라고 하는데, 인류의 과오를 보여 주는 장소와 건물을 말하며 특정 민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건물이나 장소(청태종에게 항복했던 삼전도비, 수탈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등 일제에 의해 완성된 건축물)를 말하며 아우슈비츠 수용소, 바르샤바 역사 지구, 히로시마 원폭 돔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인류 역사상 더 이상 이런 비극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유명해지는 경우가 많다. 또한 친일화가 고희동 가옥, 친일과 권력주변의 해바라기였던 미당 서정주의 양옥집, 친일파 지식인 이광수의 고택등을 보존하자는 것은 그 집과 사람들을 ‘기념’ 하자는 것이 아니라 ‘기록’ 하자는 것이다. 즉 ‘기념관’ 과 ‘기록관’을 분명히 구분하고 당사자들의 모든 ‘공과 오’를 기록해 역사교육의 자료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 황평우 위원장은.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 문화연대 문화유산위원회 위원장, 문화재청 정책평가위원, 문화재 전문위원 등 엮임. 2005.06.07 문화관광부
- "무형으로 의식 지배, 해독주는 것이 일제문화잔재" '국정브리핑'은 광복60주년기념 문화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황병기, 이하 추진위)와 공동으로 특집기획 ‘일제문화잔재 바로알고 바로잡기’를 연재한다. 건축·기념물·각종 조형물 등의 유형 문화잔재, 언어와 놀이문화, 문화예술ㆍ관광ㆍ스포츠·문화산업, 교육ㆍ제도 전반에까지 곳곳에 여전히 숨어있는 일제 흔적을 찾아내고 이를 청산함으로써 진정한 문화독립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앞장서고자 한다. 올해는 을사늑약 100년, 강제병합 95년, 해방과 분단 60년, 한일협정 40년 등 우리 근현대사를 다시 한번 반추하고 조명해 보아야 할 의미 깊은 시점이다. 때맞추어 문화관광부는 광복 6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일제문화잔재 지도 만들기’를 국민참여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는 식민통치 가해자인 일본의 위정자와 극우세력에 의해 역사왜곡과 우경화가 노골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진행되고 있는 우리 내부의 자성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60여건의 사례와 대안이 제시되는 등 시민들의 호응도 활발하고 언론도 비중 있게 취급하고 있다. 그런데 일제잔재에 대한 개념과 범주, 이의 극복 방안에 관해서는 합리적인 기준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고 있다. 왜색이 반드시 일제잔재라 할 수는 없어 일제잔재란 일본제국주의가 식민통치 기간에 우리 땅에 남겨놓은 모든 형태의 부정적 유산을 말한다. 일제잔재는 신사나 황국신민서사탑 등 건축조형물 형태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무형의 형태로 존재하며 부지불식간에 우리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면서 사회에 해독을 끼치고 있는 요소들이다. 여기에서 흔히 혼돈하는 바와 같이 왜색이라고 해서 반드시 일제잔재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일반적 인식과 달리 일제잔재와 왜색은 분간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색은 일본풍 일본양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시기를 불문하고 일본의 영향이 짙게 밴 문화경향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저급한 왜색문화도 경계의 대상이긴 하지만 명백히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될 사안인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뿌리내린 일제잔재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일관된 의도 아래 장기간에 걸쳐 구축된 식민지배구조의 유제란 점에서 왜색문화와 차별성을 갖는다. 일제는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고 조선지배를 영속화하기 위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각 부문은 물론 민중의 삶 깊숙이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를 주입시키고 이를 구조화하고자 기도했다. 일제는 우민화정책을 추진 노예의식과 패배주의를 만연시킴으로써 민족자존의 의지를 원천 봉쇄했으며 폭압적인 관료제와 권위주의적인 법령체계를 채택하고 헌병ㆍ경찰 통치를 통해 조선 민중을 순응시키고자 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식민지 권력과 결탁한 매판자본을 제한적으로 육성하고 수탈구조를 체계화시켰다. 사회면에서는 사회관계를 학연ㆍ지연ㆍ혈연 단위로 분산해 분리ㆍ지배했다. 문화면에서는 감상적 허무주의 정서를 조장해 사회 비판의식을 마비시키고 현실도피에 빠지게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조선민중을 침략전쟁에 동원하는 것은 물론, 만주지배 등에 첨병으로 악용하여 2등 신민으로서 아류제국주의의 망상에 빠지게 하였으며, 침략 피해국들의 민족적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종국에는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을 추진하여 아예 민족의 언어와 문화 나아가 민족 자체의 말살을 기도했다. 친일 인맥이 각계에 자리잡고 잔재청산 방해 그런데 우리 사회는 해방 이후에도 일제잔재 청산에 실패함으로써 일제강점기에 구축된 인적 물적 토대를 허물지 못하고 반민족적 반민주적 지배구조를 온전히 유지하고 말았다. 친일 인맥은 각계에서 주류로 행세하면서 과거 청산을 저지 방해하고 일제 잔재를 존속시키는 주요인으로 기능하여 왔다. 일제잔재 중 가장 구조적이면서 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큰 분야가 법과 제도 의식 등 관념체계 속에 남아 있는 식민 유제들이다.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사상과 양심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면서 획일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도구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에 시행된 각종의 국가주의적 시책은 사실상 식민지 지배정책을 답습한 결과였다. ‘황국신민의 서사’와 ‘교육칙어’를 모방한 ‘국기에 대한 맹세’와 ‘국민교육헌장’, 주민통제를 목적으로 한 반상회나 치안유지에 관한 여러 법들이 바로 그것이다. 10월 유신은 식민지 지배구조의 재현이었으며 천황제 이데올로기의 총화였다.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사회 곳곳에 남아 있던 일제잔재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해방 이후 60년 동안 과거 청산이 미루어지고 식민유제들이 방치되거나 오히려 활용됨으로써 일제잔재라는 독소는 여전히 위력을 보이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식민유제 이외에도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 문화적 잔재는 우리의 생활 주변에 널려 있다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교육계의 각종 의례나 제도 교과내용 등은 황국신민을 양성하던 획일적인 식민지교육체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문화예술계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도 결코 소홀히 보아 넘길 수 없다. 국가 주도 관 주도의 각종 문화행사나 서열주의 도제관계 등은 창의적인 발상을 가로막아 궁극적으로 문화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또 일제강점기에 스며든 다양한 형태의 문화예술 양식이 아무런 문제제기도 없는 가운데 마치 우리 고유의 것인 양 거리낌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훼손되고 변형된 우리의 유·무형 문화유산에서 일제잔재를 씻어내고 원형을 복원하는 일도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일상 속의 언어와 전문분야의 용어·서식에도 일제잔재가 남아 있으며 놀이문화·풍속·지명 등에서도 쉽게 식민지시대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군대나 체육계에 일상화되어 있는 기합과 구타도 그 뿌리가 군국주의 일본의 황군에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생활 전반에 걸쳐있는 문화잔재는 어떻게 청산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일제의 영향 특히 파시즘적 독소를 지닌 법이나 제도ㆍ의례ㆍ용어ㆍ관행 등은 그 부정적 측면을 고려해서 빠른 시일 내에 철폐하거나 개선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기세가 죽지 않은 획일주의 전체주의 이런 따위들은 민주사회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바로세우기가 무조건적 흔적지우기 되면 곤란 그러나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의 역사임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역사바로세우기가 철거와 같은 흔적 지우기로 갈 때, 우리는 또 다른 역사말살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게 된다. 최근까지 전국에 산재한 식민통치 유적은 아무런 통제 없이 파괴 멸실되고 있다. 건축문화사적으로 가치 있는 건축물은 마땅히 보존되어야 하며, 신사나 보국탑ㆍ내선일체탑ㆍ황국신민서사탑 등 조형물들은 치욕의 시대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세한 내력을 담은 표석을 설치하고 기억과 책임의 근거로 삼아야한다. 부득이한 경우일지라도 박물관이나 자료관으로 옮겨 교육자료로 활용해야 할 것이다. 규모 있는 일제강점기 군 관련 건축물이나 관공서·은행·농장관리소 등은 침략사나 수탈사자료관으로 활용하면 보존과 반성 양 측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35년간에 걸친 세계사상 유례를 보기 힘든 가혹한 식민통치의 결과, 우리 민족은 막대한 경제적 수탈과 강제동원으로 인한 물적 인적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러한 가시적 피해도 컸지만 보다 깊은 상처가 남은 곳은 민족의 정신세계였다. 일제강점기 민족문화는 일제의 치밀한 계획아래 말살되고 오염되었다. 물질적 피해는 쉽게 복구할 수 있지만 한번 훼손된 정신문화를 온전히 치유하고 복원하는 데는 지속적인 노력과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해방 60돌을 맞은 지금까지 우리가 일제잔재 특히 문화 속의 일제잔재 청산을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나서서 왜곡되고 오염된 민족문화를 온전히 복원하고 한 단계 발전시키는 역사문화운동을 벌여나가야 할 것이다. ◎ 조세열 박사는 현재 광복60년 문화사업 ‘일제문화잔재 지도 만들기’ 고증심의위원이며,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총장으로서 경희대학교 사학과에 겸임교수로 출강하고 있다. '일제 식민통치기구 및 협력단체' 국내편과 해외편 집필에 참여하는 등 한국 근ㆍ현대 기초자료 조사와 과거사 청산문제 연구에 진력하고 있다. 근현대 민족문제와 통일시대의 역사문화운동이 주요한 관심 분야. 저서로는 ‘친일파의 축재과정에 대한 역사적 고찰과 재산환수에 대한 법률적 타당성 연구’(국회법제사법위원회), ‘식민지조선과 전쟁미술’ (민족문제연구소) 등이 있다. 2005.06.02 문화관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