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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의 해 맞은 말띠 ‘야신’의 끝없는 질주

[김동훈기자의 스포츠는 살아있다] 고양 원더스 김성근 감독

2014.01.22 문화체육관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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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언론에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구단인 고양 원더스 김성근 감독 소식이 자주 나온다.

올 시즌 중위권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는 남자 프로배구 LIG손해보험 선수들을 위해 특강에 나서는 가하면, 일본 고치로 전지훈련을 떠나며 “나부터 펑고 배트를 쥐겠다”고 ‘강훈련’을 예고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야구 감독이 배구 선수들에게 특강을 한 것부터 화제가 됐다. 주제는 ‘프로정신’.

올 시즌 번번이 승부처에서 역전패를 당한 LIG손해보험 선수들의 정신력을 강화할 필요를 느낀 구단에서 준비한 강의였다. 김 감독은 “남이 못할 만큼 연습을 해야 한다. ‘이것은 무리다’라고 하는 순간 프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김 감독은 일본 고치 전지훈련에 앞서 “원더스가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때다. 목표가 또 하나 생겼으니 ‘전력질주’해야한다”며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고양 원더스는 2012년과 지난해 2년 동안 퓨처스(2군)리그 팀과 매년 48경기씩 치렀지만 올해는 90경기로 늘었다.

김 감독은 비시즌인 겨울에 더 바쁘다. 원더스가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 대화동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에는 낯익은 야구 스타들이 종종 찾아온다.

최근에는 KIA에서 방출됐지만 여전히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불굴의 사나이’ 최향남(43)도 찾아와 원더스에 입단했다. 프로에서 뛰다 원더스에 입단한 김수경(35), 이왕기(28) 등도 그런 경우다.

코치들도 마찬가지다. 김 감독이 두산 감독 시절 코치로 호흡을 맞췄던 김광수 코치와 LG 사령탑 시절 애제자로, 2002년 한국시리즈 준우승의 주역 이상훈 코치도 원더스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다.

왕년의 스타들만 김 감독을 찾는 것은 아니다. 프로팀 지명을 받지 못해 야구인생의 벼랑 끝에 몰린 선수들도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김 감독을 찾아온다.

김 감독은 SK 와이번스 사령탑으로 재임한 네 시즌 동안 세 번이나 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선수 권익에 앞장서다가 구단과 마찰을 빚고 스스로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팀은 뜻밖에도 독립야구단 고양원더스였다. 공교롭게도 69번째 생일을 일주일 앞둔 2011년 12월5일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2년 2개월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절망 끝에 서 김 감독의 가르침을 받은 선수들 가운데 2012년 5명, 지난해 12명 등 모두 17명이나 프로팀에 진출했다.

지난해 말에도 포수 오두철(28) 선수가 기아(KIA)에 입단했고, 좌완투수 여정호(29) 선수가 두산 유니폼을 입었다.

야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늘 최선을 강조하는 그가 청마의 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야구팬들의 기대가 크다.(사진=저작권자(c)연합뉴스.무단전재-재배포금지)  
‘야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고양원더스 감독. 언제 어느 상황에서도 늘 최선을 강조하는 그가 청마의 해 어떤 모습을 보여줄 지 야구팬들의 기대가 크다.(사진=저작권자(c)연합뉴스.무단전재-재배포금지)  

2012년 봄, 필자가 고양 원더스 지휘봉을 막 잡은 김 감독을 만났을 때, 그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노력 여하, 생각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의 말처럼 2년 동안 무려 17명이 꿈에 그리던 프로팀 유니폼을 입었다. 김 감독은 “처음에 들어올 때는 ‘과연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어느덧 프로팀으로 떠나보낼 때는 마음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김 감독의 별명은 잘 알려진대로 ‘야신’이다. 하지만 그는 야신이라는 별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야신은 없다”고 잘라말한다. “언론에서 ‘야신’이니, ‘야통’이니 하면서 너무 남발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태평양 돌핀스 감독 시절 붙여졌던 ‘잠자리 눈깔’이라는 별명을 좋아한다. 리더는 세심한 부분까지 어마어마한 주의력을 가지고 포착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김성근 감독은 재일동포 출신으로 온갖 설움과 역경을 견뎌내고 우리나라 최고 감독으로 우뚝 섰다. 그는 1942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교토 가쓰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산 동아대학교에 스카웃됐고, 실업팀 기업은행에서 좌완투수로 이름을 날렸다.

180㎝의 큰 키에 왼손 투수였는데, 빠른 직구를 주무기로 1961년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때 대표팀 에이스로 활약했다. 또 국내 실업야구에서도 노히트노런을 한 차례 기록했고, 1964년에는 시즌 20승을 달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나친 혹사로 어깨 부상을 당한 뒤 야수로 전업했고 1969년 27살 때 은퇴했다.그때부터 마산상고 감독을 시작으로 고양 원더스까지 44년째 야구감독을 하고 있다.

프로팀에서는 두산, 태평양, 쌍방울, 삼성, LG, SK 등 6개 구단 감독을 맡았다. 주로 약팀에서 감독 생활을 했지만 최강 해태와 삼성 감독을 맡았던 김응용 현 한화 감독에 이어 역대 최다승 2위를 기록중이다.

김 감독은 44년 감독 생활 중 세번 눈물을 흘렸다. 충암고 감독이던 1977년 신일고와의 황금사자기 고교야구대회 8강전, LG 감독이던 2002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6차전, 그리고 SK 감독이던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이다. 세 경기 모두 상대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고 땅을 쳤다.

김 감독은 이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경기로 1977년 황금사자기 8강전을 꼽았다. 당시 신생팀 충암고는 대구에서 선수를 끌어모았다. KT 사령탑을 맡고 있는 조범현 감독도 당싱 충암고 멤버였다.

이들은 대학 진학이 지상 과제였는데, 전국대회 4강에 들어야 대학 진학 자격이 주어졌다. 그래서 전국대회 8강전은 결승전부터 더욱 절박했다.

1977년 황금사자기 8강전에서 충암고는 9회초까지 투수 기세봉의 노히트노런을 앞세워 2-0으로 앞서갔다. 그러나 9회말 신일고 김남수에게 역전 3점 홈런을 맞고 2-3으로 졌다.

선수들은 그 자리에 모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선수들은 버스에 올라서도 울음을 그칠 줄 몰랐다. 김 감독은 “서울 동대문야구장에서 응암동 학교까지 오는 버스가 마치 영구차 같았다”고 했다. 김 감독도 그때 버스 안에서 많이 울었다. 그는 “그 경기가 나를 많이 성장시켜준 경기였다”고 회고했다.

실의에 빠질 법도 하지만 김 감독은 선수들을 더욱 독려했다. 그리고 충암고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처럼 한달 뒤 열린 봉황대기 고교야구 8강전에서 신일고에게 복수했고, 내친 김에 그 대회에서 팀 창단 첫 우승까지 차지했다. 눈물을 닦은 뒤 이를 악물고 땀을 흘린 결과였다.

김성근 감독은 감독은 ‘훈수꾼’이 돼야 더 잘 보인다고 했다. 그는 “2002년 한국시리즈 때 김성근과 김응용이 있었고, ‘훈수꾼’ 김성근이 또 있었다”고 했다. “김성근이 김성근과 김응용을 다 보고 있으니 전체가 보이더라”고 했다. 당시 한국시리즈에서는 전력상 압도적이었던 삼성이 LG에 고전 끝에 간신히 정상에 올랐다.

김성근 감독은 “6차전 9-6에서 한 점만 더 내면 7차전까지 이긴다고 봤는데, 결국 그 한 점을 보태지 못했고,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김 감독은 장외에서 지난달 끝난 프로야구 포스트시즌을 지켜보며 ‘훈수’ 한마디를 던졌다. “준비가 얼마나 중요한 지 느끼게 해줬다. 모든 팀이 상대팀 분석이나 순간적인 판단 등 준비가 부실했다. 그런데도 조금 유리할 때 승리에 도취해 승자가 패자가 되고, 패자가 승자가 됐다.”

김성근 감독은 1942년 말띠 생이다. 임오년 말띠해에 ‘노감독’의 지칠 줄 모르는 질주를 기대해 본다.

◆ 김동훈(스포츠기자)

김동훈(스포츠기자)
 한겨레신문 기자. 사회부 정치부 등을 거쳤으며,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등 역임한 뒤 현재 스포츠부 차장을 맡고 있다.  전 TBS 해설위원이었으며 현재 WKBL-TV 해설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천하무적 어린이야구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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