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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미술가다=예술은 사기다”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영원한 예술동업자 백남준 VS 요셉 보이스

2016.10.31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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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미술가가 될 수 있다.’ ‘예술은 사기다.’

모든 사람이 미술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은 사기다라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앞말는 독일의 전위예술가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가 뒷말은 비디오 아트 창시자 백남준(1932~2006)이 한 말이다.

정신적 쌍둥이로 불리며 플럭서스 활동을 함께한 예술동업자였던 백남준과 요셉 보이스는 숱한 기인적 행위와 더불어 현대미술사에게 커다란 족적을 남긴 아티스트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진부함을 멀리하고 언제나 파격적이고 미술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두 사람의 퍼포먼스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시대를 앞선 행위미술로 평가받는다.

피아노 퍼포먼스로 맺은 우정

백남준이 비디오 작품을 대중에 처음 전시를 개최한 것은 1963년이다.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음악의 전시회 : 전자 텔레비전(Exposition of Musik/ Electronic Television)>이란 타이틀로  TV 모니터를 사용한 전시였다.

심혈을 기울인 전시인 만큼 특별한 퍼포먼스까지 준비했다. 1962년 <바이올린 독주> 공연에서 바이올린을 바닥에 내리쳐 부순 퍼포먼스로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은 지 1년 만이다.

백남준<적분된피아노1>, 1963,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 요셉보이스,<그랜드피아노를 위한 균질적인 침투>, 1966, 프랑스, 파리, 퐁피두 센터
백남준<적분된 피아노1>, 1963, 백남준아트센터 소장 / 요셉보이스,<그랜드피아노를 위한 균질적인 침투>, 1966, 프랑스, 파리, 퐁피두 센터

퍼포먼스에 등장한 악기는 피아노이다. <바이올린 독주> 때보다 훨씬 확장된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또 한 번 거대한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 예상했다.

무엇보다 화랑 입구에 피가 뚝뚝 떨어지는 황소머리를 메달은 충격적인 행위로 이미 대외적으로 관심을 유발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백남준이 야심차게 마련한 비장의 퍼포먼스는 뜻밖의 사건으로 실행되지 못했다.

퍼포먼스가 막 시작되려던 순간 백남준 보다 앞서 피아노를 부순 방해꾼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백남준이 준비해둔 중고 피아노를 도끼를 든 한 남자가 산산히 부수고 있었다.

백남준이 기획한 퍼포먼스를 순식간에 가로챈 남자는 1년 전 <바이올린 독주> 때 백남준의 퍼포먼스에 지지를 보냈던 요셉 보이스였다.

앞으로 세기를 대표할 예술가들이 공식적으로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며 각자의 예술세계에 무한한 지지를 보내는 예술동업자의 길을 걸었다. 

창작의 시원이 된 지방덩어리와 펠트

백남준보다 열 한 살 연상인 요셉 보이스는 백남준을 만나기 전까지 무명에 가까웠다.

하지만 정치성 짙은 설치작품과 상식을 뛰어넘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로 그는 이미 예술인들 사이에서는 유명 인사였다.

요셉 보이스의 예술세계는 알려진 대로 철저한 자신의 경험이 창작의 시원이었다.

<요셉보이스의 주요 퍼포먼스 장면>
<요셉보이스의 주요 퍼포먼스 장면>

제2차 세계대전 시 독일 공군에 입대하여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했을 때 소련군의 폭격을 맞고 러시아 크리미아 반도에 추락하여 생사를 오가는 힘든 고통을 겪었다.

추락 후 죽을 고비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유목민(타타르인)들의 극진한 보살핌 덕분이었다.

특히 보이스의 몸 체온 유지를 위해 유목민이 그의 몸을 감싸 주었던 지방덩어리와 펠트가 그의 목숨을 살린 결정적 치료제 역할을 했다.

이때부터 지방덩어리와 펠트는 요셉 보이스의 작품을 지배하는 신화적 재료가 되었다. 지방덩어리와 펠트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일 때마다 요셉 보이스는 마치 샤먼 지도자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요셉 보이스가 동시대 미술계에 끼친 많은 영향 중 미술에 대한 차별화된 시각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특히 ‘모든 사람이 미술가가 될 수 있다’고 호언한 내용이 유명하다.

(자신의 조각수업을 듣고자 한 학생들을 모두 수강할 수 있게 한 이유로 뒤셀도르프 아카데미강단에서 쫓겨났다.)

사실 모든 사람이 미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누구나 자신이 맡은 바 일에서 잠재적 창조자로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일에 최선(몰입, 집중)을 다할 때 타인이 끄집어낼 수 없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생산해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요셉 보이스의 퍼포먼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65년에 선보인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과 1974년에 발표한 <나는 미국을 사랑하며, 미국도 나를 사랑한다>이다.

두 퍼포먼스 모두 동물을 등장시켰는데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는 얼굴에 꿀과 금박을 온통 뒤집어 쓰고, 한 발에는 펠트를, 다른 발에는 쇠로 창을 댄 신발을 신었다.

괴상한 차림에 죽은 토끼를 안고 약 2시간 동안 미술관을 돌며 토끼에게 웅얼거리며 그림을 설명하는 퍼포먼스였다.

<나는 미국을 사랑하며, 미국도 나를 사랑한다>는 코요테와 공간에 함께 있으며 무언의 시간을 갖는 퍼포먼스였다.

두 퍼포먼스 모두 굉장히 난해하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궁극에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시작해, 생명은 죽음을 통해 다시 태어나고, 치유와 회복을 거치며, 반성과 성찰을 통한 삶과 예술의 의미를 묻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셉 보이스의 많은 활동 중 사회적 조각을 만들었던 장기프로젝트는 그가 떠나고 없는 지금에 오히려 그 유력을 발휘한다.

유럽 교외 지역 이곳저곳에 심은 수천그루의 떡갈나무를 심은 퍼포먼스를 진행했던 것이 지금은 거대한 숲을 이뤘다.

한 사람의 퍼포먼스가 대자연의 이루는 결과를 이끌어낼지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예술의 역할과 영향은 언제나 상식을 벗어날 때 그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성공한 반란자

요셉 보이스의 ‘모두 사람이 미술가가 될 수 있다’는 말에 맞먹을 만한 백남준의 어록은 1984년 <굿바이 미스터 오웰>이란 작품을 선보인 후 인터뷰에서 말한 ‘예술이란 원래 사기다. 속이고 속는 거다. 예술가는 사기꾼의 사기꾼, 즉 고등 사기꾼이다.’라는 말이다.

어릴적 음악적 소양을 쌓았던 백남준은 다방면에 재능을 보였고, 일본유학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떠나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기 까지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통해 점차 자신이 지닌 예술적 재능을 확장시켜나갔다.

<백남준의 주요 퍼포먼스장면>
<백남준의 주요 퍼포먼스장면>

백남준의 예술성과 천재성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실질적으로 그가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활동할 수 있었던 저변에는 그의 예술적 역량에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보냈던 이들이 많았다.

요셉 보이스 외에서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했던 존 케이지를 비롯해 샬럿 무어만, 조지마키우나스, 오노 요코, 쿠사마 야요이까지 세계적으로 명망있는 작가들과 함께 퍼포먼스를 하거나 교류를 한 인맥의 힘을 무시할 수 없다.

예술인생 함께 해 준 아내 구보타 시게코

무엇보다 백남준의 삶과 예술적 완성은 아내 구보타 시게코의 헌신적인 내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백남준의 주요 인맥도>
                                     <백남준의 주요 인맥도>

특히 뇌졸중으로 쓰러진 1996년부터 74번째 생일을 다섯 달 남기고 떠난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고 함께했던 시간은 백남준의 예술적 완성을 이끈 보이지 않은 힘이었다.

백남준이 타계한 직후 <뉴욕타임즈>가 ‘기존의 심미적 관념에 대한 반란자로 성공적인 삶을 보여준 위대한 예술가’로 칭하고, “인류 최초의 화가와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디오 아트의 창조자는 누구인지 확실하다. 백남준, 그야말로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이자 조지 워싱턴이다.”라는 또 다른 언론의 평가는 막연한 칭송은 아닐 것이다.

실제 ‘저의 스승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빌 비올라) ‘백남준이 등장하면서부터, 모든 이들을 위해 새로운 길을 열었다.’(존 핸하르트 구겐하임 미술관장),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큰 힘이었다.’(오노 요코) 등 백남준과 동시대를 함께 했던 많은 행위예술가, 플럭서스 멤버, 비디오 작가들이 2006년 그의 장례식에서 했던 말들은 새로운 소통의 세계를 이뤄낸 백남준의 글로벌한 시각에 관한 평가였다.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이 서로의 예술관을 존중하면서 보여준 예술활동은 우정을 넘어 현대미술에서 진정한 진보적 예술이 무엇인지를 느끼게 한다.

누구보다 현실에 안주를 거부하고, 진부함을 멀리했던 두 사람은 진정 의미 있는 예술 활동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관객과 의사소통을 중시하고, 전달하는 메시지는 문명 비판적이지만 정작 표현은 직설적이기 보다는 풍자적, 은유적으로 담아냈던 백남준. 개념미술, 설치미술은 물론 신표현주의까지 영향을 끼친 요셉 보이스. 두 사람의 변치 않은 우정과 그들이 보여주었던 퍼포먼스는 언제나 흥분과 놀라움을 경험하게 했다. 

참고자료-구보타 시게코 , 남정호 지음『나의 사랑 백남준』아르테, 2016. 허나영 지음『화가 화가』은행나무, 2011. KBS1 방송 80년 특별기획 ‘백남준 청춘 광시곡’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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