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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사랑도 언젠간 낙엽이리라

[시가 된 노래, 노래가 된 시] (33)차중락,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2023.10.30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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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질은 이별이다. 슬픔이자 허무다. 사랑이 있기에 이별이 있는 게 아니다. 이별이 있기에 사랑이 있는 것이다. 이별을 감추고 있거나 잉태하고 있기에 사랑은 더 뜨겁고 더 아픈 것이다. 이별 후에 남는 건 추억과 회한과 상처뿐이다.

단풍이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단풍은 낙엽으로 한 해를 마치는 나무의 생에서 순간의 화려한 절정이다. 어떤 사랑도 절정이 있기 마련이다. 절정의 다음은 낙하다. 낙하는 낙엽이다. 연인의 온기가, 다정했던 밀어가 채 식지도 않은 공원 벤치 위로 낙엽이 하나둘 쌓인다.

낙엽은 그렇게 시에서, 노래에서 불렸다. 많은 시인과 가수가 낙엽을 보며 사랑의 운명을, 사랑의 끝자락을, 사랑의 추억을 읊었다. 봄엔 사랑의 예감을, 여름엔 사랑의 환희를 노래했지만 가을에 그 사랑의 완성을 말한 노래는 없다. 그래서 늦가을은 실연의 르네상스다. 가을은 실연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시인 유치환은 한 줄짜리 시 ‘낙엽’에서 “너의 추억을 나는 이렇게 쓸고 있다”고 했다.

최백호는 오죽하면 가을엔 떠나지 말라고 노래했을까. 낙엽 지면 서러움이 더하니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 달라고(‘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낙엽도 떨어질 숙명이고, 사랑도 헤어질 숙명을 안고 있다. 정호승 시인은 “이제 누구를 사랑하더라도/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다.(‘선암사 낙엽들은 해우소로 간다’). 사랑의 비극적 숙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이 노래를 들어야 할 시간이다. 그게 우리의 지나간 사랑에 대한 통과의례다.

찬 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곱게 물들어
그 잎새에 사랑의 꿈을 고이 간직하렸더니
아아아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이 낙엽따라 가버렸으니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1966년, 작사 강찬호, 노래 차중락, 원곡 엘비스 프레슬리 ‘Anything That's Part of You’)

1963년 사촌형 차도균의 권유로 초창기 그룹사운드 ‘키보이스’의 보컬이 된 차중락(1942~1968)은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였다. 목소리와 이미지까지 빼닮았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실린 차중락 앨범. 2년 후 그는 우리에게 낙엽으로 남았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실린 차중락 앨범. 2년 후 그는 우리에게 낙엽으로 남았다.

신세기 레코드에서 아예 엘비스의 노래를 번안해 취입하자고 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그렇게 태어났다. 가사는 레코드 사장의 아들 강찬호가 지었는데 그는 당시 실연했었다고 한다. 엘비스가 1962년 발표한 원곡 ‘Anything that’s part of you’(당신의 모든 흔적)도 사랑의 이별을 노래했지만 가사에 가을과 낙엽은 없다.

이 번안곡 하나로 차중락은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낙엽의 가객’으로 남았다. 엘비스가 들으면 놀랄 거라는 말이 나올 만큼 원곡보다 뛰어나다는 평도 많이 나왔다.

차중락은 1960년대 정통 트로트가 전성기를 이루던 시대에 미8군 무대에서 단련된 보기 드문 ‘팝&록’ 가수였다. 이미자, 최희준, 나훈아, 남진, 그리고 불세출의 가수 배호가 가요계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차중락은 함께 원조 ‘오빠 부대’를 몰고 다녔던 최대의 라이벌이자 동갑 친구 배호(1942~1971)와는 장르가 달랐다. 배호는 중저음이 매력인 정통 트로트였지만 차중락은 팝과 라틴 음악까지 소화해 내는 보이스컬러가 있었다. 큰 키에 좋은 체격, 미남이자 모던한 분위기의 두 사람은 여성 팬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는데 배호는 중년 여성, 차중락은 젊은 여성들의 사랑을 차지했다. 그들이 사망할 때 옆을 지키며 간호하던 여성의 신화와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배호는 독립군의 장남으로 태어나 찢어지게 가난하게 자랐지만, 차중락은 집안이 부유했고 다재다능한 끼를 가졌다. 아버지는 공무원, 마라톤 선수, 사업가였고 어머니도 육상선수였다. 차중락도 경복고에 다닐 때 육상선수를 했고 한양공대 연극영화과에 다닐 때는 보디빌더가 돼 미스터 코리아 2위에 입상한 적도 있다. 체육, 미술, 영화 모두에 재능이 있었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이 이종사촌 형인데 둘은 같은 해 사망했다. 그의 사후에 대학 야구선수였던 세 살 아래 동생 차중광(2020년 사망)이 가수로 데뷔해 ‘낙엽 따라 왜 갔나’ 등 곡을 남겼다. 두 형제는 51년 만에 하늘에서 만났다.

라이벌이자 동갑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인기를 양분했던 배호(오른쪽)와 함께. 배호는 두 해 후 같은 11월에 차중락을 따라갔다. (자료=KBS)
라이벌이자 동갑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인기를 양분했던 배호(오른쪽)와 함께. 배호는 두 해 후 같은 11월에 차중락을 따라갔다. (자료=KBS)

가수의 운명은 노랫말을 닮아가는가. 차중락은 이 노래 발표 2년 후인 1968년 11월 10일 스물여섯의 나이로 급성뇌수막염에 걸려 낙엽을 따라 떠났다. 10월 중순 청량리 동일극장무대에서 공연 중에 쓰러져 신촌세브란스 병원으로 실려간 후 일어나지 못했다.

당대의 인기를 한몸에 안고 활동했던 그는 몸도 마음도 지쳤을 것이다. 이렇게 외로웠을까. “외로워 외로워서 못 살겠어요/하늘과 땅 사이에 나 혼자/사랑을 잊지 못해 애타는 마음/대답 없는 메아리 허공에 치네”(‘사랑의 종말’, 동양방송 라디오 연속극 주제가).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1968년), ‘마지막 잎새’(1971년)를 부른 배호도 그 두 해 뒤인 1971년 11월 7일 가을 안개 속에 마지막 잎새가 떨어지듯 우리 곁을 떠났다. 스물 여덟이었다.

차중락은 망우리 공원묘지에 묻혔다. 묘비엔 시인 조병화의 추모시 ‘낙엽의 뜻’이 새겨져 있다. 

“세월은 흘러서 사라짐에 소리 없고/나무닢 때마다 떨어짐에 소리 없고/생각은 사람의 깊은 흔적 소리 없고/인간사 바뀌며 사라짐에 소리 없다/아, 이 세상 사는 자, 죽는 자, 그 풀밭/사람 가고 잎 지고 갈림에 소리 없다”

그의 묘지엔 사후 20년이 넘도록 어느 이름 모를 팬이 편지와 꽂바구니를 바쳤다고 한다.

이듬해인 1969년 차중락을 기리는 ‘낙엽상’이 제정됐다. 1회는 나훈아, 그 후엔 김세환, 이수미 등이 받았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1970년에는 김기덕 감독이 문희 주연의 영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만들었다.

벌써 산속엔 서리가 내렸다. 스산한 북풍에 한잎 두잎 낙엽이 진다. 이브 몽탕의 그 유명한 샹송 ‘고엽’을 들어야 할 시간이다.

“낙엽이 무수히 쌓이네/추억도 미련도 함께/북풍이 낙엽을 실어가네/망각의 차가운 밤으로/당신이 불러준 노래를 잊지 않아요/그대는 나를 사랑했고 난 당신을 사랑했지요/그러나 인생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갈라놓네/아무 소리도 없이/파도는 헤어진 연인들의 발자욱을 지우네”

또 있다.

“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눈동자 입술은/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세월이 가면’, 노래 박인희, 박인환 시)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겨울에 기나긴 밤/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나는 어쩌면 생겨 나와/이 이야기 듣는가/묻지도 말아라/내일 날에/내가 부모 되어서/알아보리라”(‘부모’, 유주용 노래, 김소월 시)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라.

한기봉

◆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과 신문윤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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