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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으로 푸는 우리유산]고구려와 이집트 고분 벽화는 쌍둥이

베 짜는 여인, 고깃간, 방앗간 등 똑 같아

2004.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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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를 처음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이집트의 수많은 유적지에 산재한 벽화나 조각이 1000년, 심지어는 2000년씩이나 차이 나는데도 불구하고 인물의 구도가 한결같이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벽화나 조각에 묘사된 인물의 옷이나 장식을 비교한 후에야 비로소 서로 다른 시대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벽화나 조각의 내용들은 그들이 체험했던 과거의 경험을 표현한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농사짓고 고기를 잡으며 포도주를 만들고 빵을 굽는 것은 물론 머리를 깎고 면도하는 장면도 있었다. 무용은 물론 죽은 사람 앞에서 통곡하는 장면까지 실생활을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고분의 벽화만으로 이집트인들의 일상생활을 모두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등장인물 모두 매우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 하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가축 사육 장면을 그린 이집트 벽화.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식량을 재배하고 물고기나 가축을 기르는 장면을 벽화로 그렸다.


이집트인은 어느 민족보다 낙천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하고 죽음 또한 행복한 인생의 연장이라고 생각했다. 신이자 통치자인 파라오의 강력한 지배하에 살았지만 이집트인의 생활은 전체적으로 볼 때 결코 불행한 생활은 아니었다. 물론 3200년의 역사 동안 전쟁이나 정치적 혼란, 기근 등으로 불안한 기간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평온한 생활을 영위했다. 지리적 조건상 정치적으로 침입자에게 짓밟히고 약탈당하는 다른 민족에 비하면 이집트인의 생활은 훨씬 평안하고 근심도 별로 없었던 것이다.

또한 고대 이집트의 풍습에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들의 계급이 세대를 내려가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파라오의 가계에서 파라오가 나오고, 재상의 가문에서 재상이 나오며, 장군의 가문에서 장군이 배출되었다. 벽돌공이나 상형문자를 새기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직업이 세습되었다.

파라오의 세습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파라오가 임명하는 재상이나 장군도 한 가문에서 계속 이어받는다는 것은 현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파라오는 자신이 총애하는 사람을 언제든 재상이나 장군으로 임명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에서 이러한 파격적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 앞에 정해진 벽을 깨뜨리려 하지 않고 자신의 운명에 스스로 순종하려고 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집트인들은 현생의 시간은 짧은 것이며 죽어서야 비로소 영원히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파라오는 파라오며, 재상은 재상이라고 믿었다. 더구나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음식을 먹고 음악을 들으며 놀이도 할 것이므로 그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하고 물고기나 가축도 길러야 했다. 죽어서 신하나 하인들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면 살아 있을 때 잘해주어야 했다. 공연히 제도적인 틀을 바꿈으로써 잡음을 일으킴으로써 신하들을 화나게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충격을 받은 것은 이집트 벽화의 그림이 바로 우리나라 고분벽화의 그림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주로 고구려의 벽화이지만 베를 짜는 여인이나 부엌, 고깃간, 방앗간 등은 물론 사냥을 하는 장면, 무용하는 장면 등 무덤의 주인이 체험한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전통과 풍습은 물론 종교도 다르고 지역적으로도 멀지만 벽화만을 놓고 볼 때 이집트와 고구려의 차이점은 없었다. 아니, 죽은 후에도 내세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은 오히려 두 사회의 공통점이었다. 고구려인들도 이집트인처럼 이승에서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육체가 소멸해도 영혼의 삶이 천상에서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고인의 물건을 무덤에 옮겨놓고, 고분의 벽과 천장에 고인의 생전 생활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이다.

〈고구려인의 긍지 고분벽화〉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중국 요령성 환인지방(桓因地方)에서 나라를 세우고(북한은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기원전 277년에 건설되었다고 주장) 기원후 3년에는 압록강 중류지역인 만포진 건너 중국 길림성 집안 통구(通溝)평야의 국내성에 도읍했다. 그 후 주변국과의 수많은 전투를 통해 한민족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으며(남북국시대의 발해는 고구려보다 1.5∼2배 정도 넓었던 나라로 추정) 427년 장수왕 때는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다.

따라서 고구려 무덤은 중국 요령성 환인지방에 750여 기가 남아 있고 통구 지방에 1만2358기가 있다. 그리고 현재 발견된 벽화 고분은 약 80여 기로 통구 지방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유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안악(安岳)지방에서도 발굴된다.

고구려 벽화가 축조된 시기는 대부분 고구려가 절대 왕권을 중심으로 한 국가체제를 완비하고 한국사에서 가장 광대한 국토를 영위하며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중국과 교류하면서 불교를 비롯한 종교와 문화를 수입한 후 자신의 문화로 흡수시켰다. 그러한 긍지가 곳곳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고구려 벽화이다.

벽화고분의 그림은 현세적인 풍속화와 내세적인 상상화로 구분된다. 풍속화는 죽은 사람의 초상화는 물론 살아 있을 때의 생활 모습을 비롯하여 그가 살던 집이나 성곽 등 되도록 고인과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것을 정성스럽게 그린 반면, 내세의 그림은 상상력의 산물로서 당시 믿음을 토대로 사신도, 신선도, 천상도 등 종교적인 내용으로 채워졌다.

안악3호분(고국원왕릉으로 추정)의 부엌에서 조리하는 장면. 여자들이 부뚜막 아궁이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불을 지피고 시루 앞에서 요리를 하며 탁상에 반상기를 두 줄로 쌓아 올리고 있다. 푸주간에는 개와 사슴이 준비되어 있다.


풍속화는 대부분 4세기에서 6세기 초반으로 추정되는 고분에서 나타난다. 이후부터는 풍속화와 사신도가 공존하는 벽화고분들이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사방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사신(四神)은 중국 고대 민간신앙에서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대개 5, 6세기로 추정되며 다실묘에서 단실묘로 변하는 과도기적 형식을 취하고 있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이르면 고구려 고분은 단실묘가 대종을 이루며 고분벽화도 많은 변화를 보인다. 입구에는 현세적 그림을 그리고 고인의 관이 안치된 현실에는 내세적인 사신도만 그렸다. 후기의 고분벽화는 사신도로 통일된다. 천장에는 대체로 선인상(仙人像), 산악도(山岳圖) 등을 그렸는데 이는 고구려 말기에 유행한 도교와도 관련이 있다고 추정된다.

〈내세에 대한 믿음을 고스란히〉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은 벽화들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그려졌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들이 활을 쏘는 기상이라든가 춤을 추며 돌아가는 남녀의 낙천적인 모습, 달리는 말과 도망치는 동물들, 씨름하는 남자의 표정과 옆에서 구경하는 노인의 얼굴, 동심이 어려 있는 듯한 산과 나무와 새들의 모양 등에서 그림을 그린 이의 의도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즉 고구려 화가들은 고구려인들이 갖고 있는 전투적이며 씩씩한 모습과 낙천적인 삶으로 충만된 풍족한 감정을 나타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승에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 했던 온갖 악과 질병으로부터 무덤의 주인을 지켜줄 수호신까지 만들었다.

또 자연 앞에서 결코 오만하지 않았던 고구려인들은 천재지변 앞에서는 자연을 두려워했지만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도 자연에서 찾았다. 더구나 자연을 주관하는 주체를 하늘로 보고 이를 벽화로 그림으로써 천상의 세계를 무덤 주인이 영위할 수 있는 궁극의 세계로 보았다. 고구려인들의 이와 같은 영혼불멸사상은 삶을 훨씬 여유롭게 만들었으며 고구려가 최고의 강대국이 되는 데 일조하였다.

고구려인들이 언젠가 죽는다는 불멸의 진리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죽음은 이승에서의 삶이 끝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강인함과 용기를 보일 수 있었던 것도 지상에서 최선을 다한다면 사후 천상세계에서 보다 풍요로운 삶을 지속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벽화무덤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안악 3호분으로 영화(永和) 13년(357)에 사망한 중국의 망명객 동수(북한은 고국원왕으로 추정함)의 무덤으로 추정하며 방형의 봉토 안에 여러 개의 석실이 만들어져 있으며 벽화고분 중에서는 연대가 가장 이르다. 남쪽 입구로 들어가면 현관 같은 연실이 있고 그 안에 전실인 사랑채가 있으며 그 양옆에 안채와 측실이 있다. 안채인 서측 측실에 주인 부부의 초상화와 시종들이 그려져 있고 동쪽 측실에는 부엌과 마구간이, 그리고 전실 벽에는 노래하며 춤을 추는 의장도가 그려져 있다.

안악3호분 대행렬도. 관이 있는 현실의 회랑 벽에는 250명의 문무백관과 악대, 기마대들이 수레에 앉은 주인공을 수행하는 행렬도가 그려져 있으며 고구려 벽화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또 관이 있는 현실의 회랑 벽에는 250명의 문무백관과 악대, 기마대들이 수레에 앉은 주인공을 수행하는 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고구려 벽화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큰 대행렬도는 'ㄱ'자형으로 꺾인 두 벽면(2×10미터)을 가득 채운다.

이 벽화가 주목을 끄는 것은 당시의 생활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부엌은 지붕과 기둥만 있고 앞의 벽은 없애버렸는데 그 안에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여인, 부뚜막에 얹혀 있는 시루 안을 보는 여인, 그릇을 손질하는 여인들의 모습 등이 보인다. 지붕 오른쪽 끝에는 까치가 한 마리 있고 부엌과 도살실 사이에 개 두 마리가 어슬렁거린다. 많은 식솔을 거느리고 있던 주인공의 풍족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건립 연대를 6세기 중반으로 추측하는 통구의 무용총은 현실이 8각 천장이고 전실은 장방형으로 된 2실묘로 현실 북벽의 장방 인물을 중심으로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북벽의 우측에 새의 깃을 꽂은 관모를 쓰고 통 넓은 바지를 입고 의자에 걸터앉은 인물을 둘러싸고 승려로 보이는 삭발하고 수염이 난 두 사람이 중심 인물을 향해 앉고 변관을 쓴 8명의 인물이 서있다.

북벽을 중심으로 동벽에는 북벽을 향한 인물들과 주방, 무용하는 그림이 있고 서벽에는 주로 수렵 장면을 그려져 있다. 그 가운데 5인조가 춤을 추며 돌아가는 장면은 각자의 동작과 표정에서 낙천적인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또 사신도로 유명한 강서대묘는 평남 강서군 삼표리에 위치한 세 기의 분묘 중 가장 크다. 현실 네 벽에는 각각의 방위에 해당하는 사신이 그려져 있고 천장 중앙에는 원을 그리며 구름 속에서 몸을 트는 황룡(黃龍)의 모습이 있다. 사신도가 현실 각 벽화의 주제로 등장한 분묘는 여러 기가 있으나 강서대묘의 사신들, 특히 북벽의 현무와 남벽의 주작들은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신비한 색감과 생동감으로 고구려 벽화를 세계적으로 알린 걸작품이다.

중국의 집안에는 20여 기의 벽화무덤이 있지만 일반에게 공개하는 것은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는 다섯무덤(오회분) 중에서 다섯번째 묘인 5호분 뿐이다. 현실의 네 벽에는 거대한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로 나뉘어져 있는데 사신도가 그려진 바탕에는 인동무늬, 연꽃무늬, 부채꼴로 된 불꽃무늬가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다.

오회분 중 4호분의 용을 탄 신선도. 4호분과 5호분은 음양의 조화로 천지창조의 장면을 연출했는데 이 벽화는 천지창조 설화를 주제로 그린 세계 유일의 벽화이다.


4호분과 5호분은 내용이 유사한데 네 면의 벽 위에 약간 밖으로 내어 쌓은 부분이 있는데 이를 들보라 하며 여기에 서로 얽힌 용의 그림이 이어져 있다. 이 용들은 천상세계를 받치고 있는 것으로 천상과 천하를 가르는 상징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들보의 각 귀퉁이에 고구려 고분의 특징인 삼각형 돌판을 올려 1, 2단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용, 해와 달의 신, 수레바퀴 제조신과 돌을 다루는 신, 소머리신과 불의 신, 하늘나라의 신선, 세 발 달린 까마귀를 들고 있는 남신과 두꺼비를 들고 있는 여신도 발견된다. 용을 타고 연주하는 천상의 사람, 해와 달, 북두칠성과 남두육성 별자리, 춤과 피리부는 신선들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동양에서 까마귀와 두꺼비는 '해'와 '달'을 의미한다. 이는 곧 음양의 조화로 천지창조의 장면을 연출한다. 이 벽화는 천지창조 설화를 주제로 그린 세계 유일의 벽화이다.

이외에도 1988년에 발견된 평정리 고분에서는 묵화로 그린 산수화가 발견되었고, 동명왕릉으로 불리는 진파리 10호, 1976년에 발견된 덕흥리 벽화 등도 유명하며 2002년 황해북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왕릉급으로 보이는 고분벽화가 발견되었다. 서기 4∼5세기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이 고분 벽화는 일부 훼손된 부분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양호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전실과 현실로 이루어진 무덤은 전체 봉분의 직경이 30미터에 이를 정도로 거대하다.

꼬리털까지 세세하게 묘사된 흰둥개, 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려 호랑이 그림도 있고 고구려 여인의 얼굴은 초생달 같은 눈썹과 붉은 입술, 까만 눈동자가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있다. 말 탄 자세에서 상체를 돌려 활을 자유자재로 쏘며 호랑이를 �는 무사들도 보이며 고구려 초기의 무덤의 양식인 회를 바른 뒤 천연안료로 그렸다. 이 벽화는 고구려인들의 뛰어난 미의식을 보여주는 예로서 크게 평가받았다.

〈벽화가 1500년 이상 보존된 비밀〉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1500년이나 지난 것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그 섬세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그 비밀을 찾기 위한 연구가 미진한 감은 있으나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안병찬 교수가 발표한 회벽의 제작 기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시료는 집안의 하해방지구 제31호분에서 출토된 벽화 파편이다.

현미경 조사에서 석회의 마감층은 밀도가 치밀하고 일정하며 균열이 거의 없는데 이것은 석회 건조시 수축이 매우 적었음을 말해준다. 석회는 입도가 미세하고 균일할 경우 수축율이 적어진다. 바탕층에는 짚으로 판단되는 식물종 여물이 포함되어 있지만 현대에 생산되는 볏짚과 비교해서 줄기의 조직과 모양이 흡사하지만 크기는 현저하게 현대종보다 가늘고 섬세했다.

고구려 벽화 그리는 장면. 고구려벽화는 대부분 회가 마르기 전에 그림을 그리는 프레스코 기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현재까지 원형이 보존될 수 있었다.(『한국생활사박물관(03)』)


벽화를 그릴 때 석회는 동서양 고금을 통해 벽화의 바탕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석회는 다른 재료와는 달리 자연에서 손쉽게 얻어지는 1차 원료가 아니라 특별한 가공법을 이용해야 얻을 수 있는 재료이다.

석회는 원래 석회석(Limestone, calcite, CaCO3)을 900도 정도의 높은 온도로 가열하여 얻는데 이때 만들어지는 석회가 잘 알려진 생석회(강회(剛灰), quicklime, CaO)이다. 생석회는 반죽을 만들기 위해 물과 섞으면 급격하게 발열반응을 일으키면서 소석회(Ca(OH)2)가 되는데 이때 다량의 열을 방출하기 때문에 미장 작업에는 곧바로 사용하지 않고 하루 또는 일주일 정도 묵혀 소화(消和)시킨 상태에서 사용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유럽에서는 석회석이 많이 생산되므로 많은 건물들을 석회석으로 건축한다. 그런데 건물을 건축할 때 생석회를 접착제 용도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문화재 파괴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그것은 석회석으로 생석회를 만드는 공정에서 광산에서 석회석을 채취하는 것보다는 인근에 있는 건축물들을 파괴하여 접착제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편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십자군 전쟁 때 십자군은 전략지점에 많은 성들을 건설했는데 이때 필요한 생석회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적 유적들을 용광로 속에 집어넣었다. 유명한 세계 7대 불가사의 등이 파손된 이유이기도 하다.

여하튼 고구려 벽화에 사용된 회반죽은 소석회에 물과 함께 점토 및 여물 등 적절한 첨가제를 섞어 용도에 맞는 물성의 반죽으로 가공하여 벽에 바른 것이다. 소석회 반죽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여분의 물이 증발하고 딱딱한 물질로 응고된다. 소석회의 응고 과정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반응해 고착되면서 표면부터 원래의 물질인 방해석(석회석, calcite, CaCO3)으로 전환된다. 이것은 종유석과 같은 결정이므로 고구려벽화가 1500년을 넘기고도 오늘까지 변함 없는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시료로 사용된 하해방지구 제31호분의 벽화에 사용된 회벽은 모두 세 개 층으로 구분되어 벽면 층으로부터 초벌, 바탕, 마감층으로 시공되었다. 초벌층은 깬돌 또는 막돌로 쌓아 만든 석실의 벽면에 최초로 석회를 바른 층을 말하는데 석재의 요철이 심하고 표면이 거칠므로 회반죽의 점성이 높아야 효과적이다. 따라서 초벌층 회반죽에는 점성이 높은 붉은 점토를 주로 섞고 가능하면 얇게 발랐다.

벽화 단면 상세도.
바탕층은 초벌층과 마감층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아래로는 굴곡 있는 벽면을 고르게 하면서 위로는 표면의 얇고 단단한 마감층을 밀착해 잡아주어야 한다. 특히 고운 석회로 이루어진 마감층이 건조하면서 일으키는 수축을 완화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층의 회반죽 제작기법은 여물과 모래 등 첨가제를 넣고 물은 적게 사용하며 신속하게 섞어 내부에 기포를 다량 혼합시킴으로써 방수효과를 높이고 수축균열을 방지하게 했다.

마감층은 직접 그림을 그려 넣는 면이므로 면이 깨끗하고 요철 없이 매끈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층은 가장 순도가 높은 석회를 사용하여 적당히 묽은 반죽을 만들어 한차례 바른 후 곧 표면을 흙손 등을 사용해 강하게 눌러 문지르는 작업을 통해 반질반질하며 경도가 높은 치밀질 상태로 마감했다고 추정한다. 이 때문에 첨가제도 엄선된 작은 입자의 모래만 약간 포함되었다.

요약하면 초벌층은 회반죽에 점토를 섞고, 바탕층은 여물을, 마감층은 순수한 석회만 사용하여 표면을 치밀하고 매끈하게 만드는 등 석회를 용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한편 국립중앙박물관의 보존과학실에서 쌍영총의 벽화조각을 통해 본 채색 방법을 『역사 스페셜』에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쌍영총의 벽화조각에는 주로 붉은색과 검은색 안료가 나타나는데 적색인 경우에는 수은과 황의 농도가 높게 나왔다. 이는 황화수은을 안료로 한 것이고 흑색은 먹을 사용했다. 벽화의 주색인 적갈색은 황토같은 산화철 계통의 흙을 가열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그 외 산화납, 크롬 계통의 산화물 같은 천연재료를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벽화에 쓰인 안료들의 대부분이 물에 녹지 않는 천연 광물성 재료들이므로 이들을 벽에 고착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검은색 안료는 돌에 바른 석회에 잘 붙어 있는 반면에 붉은색 안료는 엉성하게 떠 있었다. 이것은 석회와 안료가 탄산칼슘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프레스코적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채색되었기 때문이다.

접착제 없이 천연안료로 벽화를 그리면 벽에 바른 석회가 마르면서 안료가 그 틈으로 스며드는데 이것이 프레스코 기법(중세시대의 미켈란젤로가 바티칸 교황청에 벽화를 그린 기법으로 중세 시대 중요 건물의 벽화나 천장화는 이 기법으로 그렸다)이다.

채색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돌을 쌓고 그 위에 굵은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1차로 벽을 바른다. 그 다음 중간 굵기의 돌가루와 석회, 마지막에 고운 돌가루와 석회를 섞어 3번 가량 회벽을 입힌 후 석회가 마르기 전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나 고분벽화의 넓은 표면을 모두 회벽이 마르기 전에 그린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화공들은 프레스코 기법을 주로 사용하면서 그림이 완성되기 전에 회벽이 다 마른 부분은 아교와 같은 것을 섞어 채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레스코 기법의 장점은 젖은 상태에서 안료와 석회가 함께 굳으므로 벽화 자체가 회벽의 구실을 한다. 또한 습기나 빗물이 무덤 안으로 스며들어도 석회수가 되어 일종의 코팅 현상이 일어나므로 그림에 훼손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교와 안료를 섞어 칠한 부분은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없으므로 안료가 떨어져 나가는 박락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1500년이 지나도 원형을 유지할 수 있는 비밀은 바로 프레스코 기법이었다.

이종호(과학저술가)

<이종호 님>은 1948년생. 프랑스 뻬르삐냥 대학교에서 건물에너지 공학박사학위 및 물리학(열역학 및 에너지) 과학국가박사로 88년부터 91년까지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해외연구소소장(프랑스 소피아앤티폴리스)과 92년부터 이동에너지기술연구소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 최고의 우리 문화유산>, <신토불이 우리 문화유산>, <세계를 속인 거짓말>, <영화에서 만난 불가능의 과학>, <로마제국의 정복자 아틸라는 한민족>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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