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전자정부 누리집 로고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콘텐츠 영역

[광복50년 포스터]한반도 편에서 찍은 천지(天池) 사진

단순·명료한 숫자의 색동축제

1995.07.17 국정신문
글자크기 설정
인쇄 목록

공식휘장을 안든 경험도 있어 자신있게 제작의뢰를 수락했던 안상수(安尙秀) 교수는 막상 작업에 들어가서는 3개월여에 걸친 산고(産苦)를 겪었다.

광복50주년을 맞아 공보처에서 제작한 포스터가 금주부터 전국에 게시된다. 이번 광복50주년공식포스터 3중은 홍익대 시각디자인학과 안상수(安尙秀) 교수가 기획·도안을 맡아 3개월여의 작업 끝에 환성한 것이다. 포스터소개와 함께 작업에 얽힌 뒷이야기들을 들에 보았다.

‘광복50년 미래로 통일로’.

지난 반세기의 현대사를 확인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중대한 시기에 맞이한 한민족최대의 광복50주년 축제. 안상수 교수는 이러한 광복50주년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와 민족축제 분위기를 담은 포스터를 만들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며 지난 3개월간의 산고(産苦)를 털어놓았다.

포스터라면 누가 봐도 한눈에 쉽고 명쾌하게 뜻이 전달되어야 한다. 수차례의 시안작업 과정에서 安 교수는 마침내 ‘50’이라는 숫자에 착안, 광복50년의 이미지를 표출한 2종의 포스터를 만들게 되었다.

하나는 숫자 50이 중앙에 반쯤 겹쳐진 두 개의 원이 교차하고 있는 형상으로, 어두운 과거로부터 벗어나 밝은 미래로 지향하는 뜻을 간결하게 표현했다. 다른 1종은 숫자 50이 겹겹이 족적을 남기며 달려나가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디자인되었다.

“숫자가 주는 단순 ·명료한 전달성을 이용하고 거기에 색동저고리를 연상시키는 책상을 배합하여 축제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표현하고자 한 것”이라는 安 교수의 설명이다.

나머지 1종의 포스터는 이들 숫자로 구성된 포스터와는 자못 다른 장엄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안상수 교수는 이 작품이 가장 힘들었다면서 “천지와 학 사진의 입수경위 등에 공개하고 싶은 뒷얘기가 많다”고 밝혔다.

먼저 백두산 천지 사진은 우리나라 산악(山岳)사진의 대가인 김근원씨가 소장하고 있는 회귀본이라는 것. 소장자인 김씨에 의하면 일제시대인 1942년경에 한 한국인이 중국쪽이 아닌 우리나라쪽에서 찍은 천지사진인 것으로 밝혀졌다.

“백두산 사진이라면 시중에서 얼마든지 구해 쓸 수 있는데 꼭 이 사진을 써야 한대요. 광복 포스터에 일본사람이 찍은 것을 쓸 수도 없고, 중국쪽에서 앵글을 맞춘 것도 싫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흔쾌히 사용을 허락했지요. 安 교수 그분이 자존심있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김근원씨는 “우리나라 쪽에서 봐야 진정한 동해물이고 백두산이 아니겠느냐”며 그런 의미에서 이 사진에는 민족혼이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安 교수는 이 사진을 빌려다 정밀한 컴퓨터 작업을 거쳐 우리의 백두산 천지 모습을 장엄하게 재현시켜 놓았다. 원래는 흑백사진이었던 것.

비상(飛翔)하는 학(鶴) 사진을 쓰게 된 데에도 사연이 있다. 쓸만한 학 사진을 찾아 도서관을 뒤지다가 마음에 딱 드는 사진을 발견했다. 작가를 보니 곽수돈이라는 사람으로, 安 교수에겐 생면부지의 인물이었다. 수소문해보니 경남 진주에서 내과의사로 일하면서 20여년간 사진작품 활동을 하다가 지난해에 작고했다고 한다.

“그분이 돌아가시면서 자기 작품을 아무에게나 주지 말라는 유지(遺志)를 남겼다는군요”. 그래서 유족으로부터 작품을 빌려줄 수 없다는 통보를 받은 安 교수는 여기서 포기하지 않고 고인과 가장 절친했던 사람(울산 거주의 서진길씨)을 찾아 그의 힘을 빌려 설득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갈망하는 손짓’이라 이름붙여도 좋을 팔 사진은 安 교수가 직접 모델을 구해 촬영한 케이스. 웬만한 사람에게는 그가 의도하는 팔의 근육 형태와 손 모양이 나오지 않았다. 초조하게 날짜를 보내가며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 팔을 살펴보았지만 허사였다. 불현듯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역동적인 무용수의 팔을 떠올리게 된 것. 그길로 경기도 안성에 있는 홍신자(洪信子) 무용단의 ‘래핑스톤(웃는 돌)’ 캠프로 달려가 이틀간의 촬영끝에 구할 수 있었던 사진이다. 모델은 ‘섬’이라는 별명의 남성무용수.
이런 우여곡절 끝에 얻을 수 있었던 3개의 사진이 같은 프레임 안에서 마침내 하나의 포스터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다. “고인이 된 분들의 사진을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분들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는 安교수는 “저는 다만 이분들의 예술작품을 포스터라는 시각매체로 연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겸손해했다.

이전다음기사 영역

하단 배너 영역

지금 이 뉴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