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 간장, 고추장. 한식에 있어 너무나 기본적인 재료라 장이 빠진 한식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깊은 맛과 감칠맛을 내는데 빠질 수 없는 재료들이기 때문이다.
장은 콩을 재료로 하여 소금에 버무려 만든 양념의 일종이다. 요즘에는 전통 장을 직접 만드는 집들을 보기는 힘들지만, 우리나라의 장 담그는 과정은 무척 특별하다. 옛 어른들은 장을 담글 때 길일을 골라 고사를 지내고, 부정과 잡귀를 막아 장맛이 상하지 않길 바라며 금줄을 둘렀다고 한다.
알이 굵고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콩을 골라 푹 무르게 삶아 메주를 만든다. 만들어진 메주는 항아리 속 소금물에 부어 담근다.
이렇게 두 달을 지내고 나면 메주와 소금물을 분리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소금물을 먹은 메주는 치대어 항아리에 담아둔다. 이게 된장이 된다. 메주를 품고 있다가 검붉게 변해버린 소금물은 된장과 다른 항아리에 옮겨 담아 간장이 된다.
메주를 쑤고, 장을 담그고, 장을 가르는 작업까지 6개월이 걸리는데, 긴긴 겨울잠을 재우듯 발효의 시간을 들이는 동안 장의 맛은 점점 더 깊어진다. 일본의 장이나 중국의 장과 구분되는 점이 이 부분이다.
간장이면 간장, 된장이면 된장. 각각 처음부터 분리하여 만드는 일본과 중국의 장과는 다르게, 우리나라의 장은 같은 항아리에서 시작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에 각자 자기 항아리를 찾아가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메주로 1차 발효를, 장을 담가서 2차 발효를, 장을 띄우는 동안에서 3차 발효까지 거쳐 비로소 우리가 아는 간장과 된장의 모습이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장 담그기는 단순한 소스 만들기나 노동과는 구별된다. 사람의 노동과 햇빛, 바람과 같은 자연의 역할, 발효를 돕는 미생물, 오랜 시간이 함께 어우러져 완성되는 걸작이다.
걸작이라고 부른 이유는, 전통 장을 담그는 각각의 가정마다 특색을 담게 되기 때문에 어느 하나 완전히 같은 맛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나라에는 장 담그는 문화가 있다는 말이 생긴 것이다.
이런 우리나라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되었다. 지난 4일, 농림축산식품부와 국가유산청은 파라과이 아순시온에서 개최한 제19차 ‘무형유산보호협약 정부간위원회’에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으로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밝혔다.
장 담그기 문화까지 등재되면서 유네스코에 등재된 한국의 인류무형무산은 총 23개가 되었다. 2013년에 김장 문화가 음식 문화로서는 처음 등재되었고, 이번이 두 번째 이룬 쾌거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에서는 “밥과 김치와 함께 한국 식단의 핵심인 장을 정성껏 만드는 기술과 지혜는 물론, 장을 만들고 나누는 과정에서 형성된 가족과 사회 공동체의 정신을 전승해왔다”라며 이 부분을 높게 평가하였다.
마침 한식진흥원에서 한국의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에 등재된 것을 기념하여 장 담그기 문화의 의미와 가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상설전시 [기다림이 빚은 맛의 향연- 장]를 기획하였다고 한다.
이곳 한식문화공간에서는 한식관련 전시, 체험, 홍보, 교육을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전시뿐만 아니라 직접 전통식품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도 있고, 한식을 배워볼 수도 있다.
체험도 해보고 싶어서 전통식품 체험 프로그램 중 고추장 체험을 예약했다. 내 손으로 직접 전통 장을 만들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식품 명인의 레시피와 쌀조청을 활용하여 직접 고추장을 만드는 체험인데, 평일 화, 수, 목, 금 중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사전예약을 한 사람만 체험을 할 수 있다.
고추장 체험 외에도 한과체험, 간장 활용 전통음식 체험, 전통주 빚기 체험, 김치 담그기 체험, 다도 체험 등이 마련되어 있으며 체험비는 각 체험마다 조금씩 상이하다.
안국역 2번 출구에서 내려서 조금만 걸어올라가면 한식문화공간 이음이 보인다. 1층에서 전통 차를 즐기고 나서 체험 시간에 맞춰서 실습실로 입장했다. 나는 딸기고추장을 만들어보겠다고 예약을 했는데, 내 자리로 이동하니 딸기, 설탕, 고춧가루, 메줏가루, 소금, 그리고 고추장을 담을 수 있는 통이 마련되어 있었다.
보존성과 저장성이 높은 전통 장인 천리장과 감청장 등 우리 전통 장에 대한 설명을 추가로 듣고 난 뒤 본격적으로 고추장을 만들 수 있었다.
궁중 팬에 딸기 2.5Kg과 물 100ml를 넣고 바닥면이 타지 않게 계속 저으면서 졸였다. 처음에는 센 불에서, 물이 조금씩 끓기 시작하면 중불로 낮춰서 뭉근하게 끓였는데, 딸기를 꾹꾹 눌러 으깨가는 과정에 제법 인내심과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을 느꼈다.
설탕 400g을 넣고 색이 진해질 때까지 졸이면, 거품기로 열심히 저어가면서 즙을 식혀야 한다. 딸기즙이 너무 뜨거우면 고춧가루 색이 짙어지고 메주 냄새도 날 수 있다고 해서 이 과정이 무척 중요하다고 했다. 미지근하게 식은 딸기즙에 소금을 넣고 녹이고, 소금이 녹으면 메줏가루를 넣고 가루가 보이지 않게 섞는다.
고춧가루를 체로 쳐서 곱게 넣은 뒤 함께 섞어준다. 가루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곱게 섞어준 다음 병에 담으면 완성이다.
직접 전통 장을 만들고 나서 썬 채소에 쿡 찍어 먹었더니, 딸기의 달콤함과 메주의 깊은 맛이 동시에 어우러져 찰지고 맛있었다. 엿기름 없이 간단하게 만든 고추장이라 딸기 대신에 다른 재료를 넣어봐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전통 고추장 레시피도 알 수 있어서 뿌듯했다.
비록 항아리에 메주를 담그는 과정을 경험한 건 아니니 전통 장이 지니는 시간의 무게를 직접 체험해볼 수는 없었지만, 고추장을 만들기 위해 졸이고, 끓이고, 으깨며 들어가는 노력과 인내의 과정을 거쳐보니, 우리 장을 만드는데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장을 다 만들고 나서는 상설전시장으로 내려갔다.
상설전시장에는 장의 근원을 소개하는 코너, 장독대에 대한 소개, 한국인의 밥상을 소개하는 코너, 장과 관련된 세시풍속과 기복신앙, 옹기, 발효 음식 등 장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소개해주고 있었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장독대와 옹기를 소개하는 코너였다. 좋은 장이 되려면 좋은 장독은 필수품이다. 옛날에는 장독대의 자리가 좋고, 장독이 번듯하고 가지런하게 놓이면 그 집안이 크게 번성할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거주지를 옮길 때에도 장독대부터 옮겨놓았다고 한다.
항아리, 즉 옹기는 우리나라의 발효 음식과 발효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릇이다. 옹기가 숨 쉬는 구멍은 매우 세밀하게 나 있어서 액체가 들어오거나 새는 것은 막으면서도 공기는 선택적으로 투과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 덕분에 옹기 안에 든 음식물이 부패 되지 않고 발효가 되어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다.
옹기 대신 스테인리스 용기와 플라스틱 용기를 쓰고, 전통 장 대신 시판 장을 사 먹는 요즘이다. 간편하기야 하지만 전통이 주는 깊은 맛과 정성은 느끼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우리의 장 문화가 오랫동안 전승되고 유지되려면 그만큼 우리가 잘 알고, 먹고, 만들고 써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마침 한국 장 담그기 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니 우리 전통 장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