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이 내리던 아침, 라디오에서 디제이의 차분하면서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가 읊조린 말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감사는 신성한 감정이에요. 마음을 가득 채우지만 끓어 넘치진 않고, 따뜻하게 데워주지만 열이 날 정도는 아니죠.”
그는 영국의 작가 샬럿 브론테가 한 말을 인용했다. 이어서 멜 토메가 부르는 ‘The Christmas song’이 흘러나왔다. 매일 아침 7시에 청취자를 찾아오는 <출발 FM과 함께>를 진행하는 이재후 아나운서의 목소리다. 라디오의 음성으로 들었던 이재후 아나운서를 직접 만날 기회가 생겼다. 라디오에서 클래식 방송을 즐겨 청취한다면 그와의 만남이 즐거울 것이다.
11월 27일 오전 11시 50분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아르떼 도서관에서 ‘아침을 여는 클래식의 힘’이라는 주제의 북 토크가 열렸다. ‘아르떼 북 토크’다. 클래식이라고 하니 클래식 전공자가 초대 손님으로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이재후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아나운서인 그가 클래식과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그는 지금 <출발 FM과 함께>를 진행하고 있다. 이재후 아나운서는 “매일 아침을 열어주는 클래식의 힘은 무엇일까? 여기서 힘을 생각해봤습니다. 힘은 무언가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잖아요. 그렇다면 클래식이 가진 힘이 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한번 말씀을 드리면 좋겠습니다. 클래식 방송과 클래식이 저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라면서 ‘아르떼 북 토크’의 시작을 열었다. 이재후 아나운서의 강연은 하나도 버릴 게 없을 만큼 유익했다. 그중에서 이재후 아나운서가 청중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중심으로 강연 내용을 재구성해 봤다.
이재후 아나운서는 1997년에 아나운서가 된 후 주로 스포츠 중계방송을 진행하면서 클래식과 아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그러다 <출발 FM과 함께>를 진행하면서 클래식을 접하게 됐다. 올해 4월에 히딩크 감독이 서울시립교양악단(이하 서울시향)의 홍보대사로 임명되었다. 히딩크 감독은 2002년 우리나라 월드컵 대표팀 감독을 지낸 바 있다. 그가 지금 서울시향 얍 판 츠베덴 지휘자와 아주 친한 사이다. 두 사람이 친해지게 된 공통점은 무엇일까?
◆ 경청한다는 것
두 사람 다 리더다. 리더로서의 어려움을 같이 고민하는 공통점이 있을 것이다. 축구 감독은 구단과 선수 사이에서,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단원과 사무국 사이에서 위치한다.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철학과 그 팀이 이루어내야 하는 결과물인 성과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을 나누는 과정에서 친해진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면서 두 분이 친해지게 된 공통점이 있냐고 질문했더니 “듣는다”를 언급했다고 한다. 축구 감독은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온몸으로 표현해내는 그 몸짓을,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연주자들이 악기로 표현해내는 그 음악적 표현을 들어야 한다. 그래서 듣는 것이 아주 절대적이다. 여기에서 듣는 것은 “경청”이다.
경청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다. 경청해야만 상대와의 대화를 생산적으로 끌어갈 수 있는 의지가 생긴다. 모든 코칭의 기본은 경청이다. 코칭의 3단계가 있다. 맨 처음이 경청이고 그다음이 경청한 뒤 질문하는 것이고, 그다음이 피드백이다. 히딩크 감독과 얍 판 츠베덴 지휘자는 둘 다 코칭을 하는 사람, 즉 코치다. 듣기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수동적 듣기, 능동적 듣기가 있다. 수동적 듣기는 영어로 하면 히어링이다.
능동적 듣기가 경청이다. 귀 기울여서 듣는 건데 상대가 하는 말의 뜻과 맥락뿐만이 아니라 상대의 표정이나 몸짓 같은 비언어적 행위까지도 듣는 것이다. 그래서 스티븐 코비는 경청에까지 나아가는 5단계를 이야기했다. ‘공감적 경청’이라고 공감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계다. ‘무시하기’는 상대가 이야기해도 못 본 척한다거나 ‘듣는 척하기’는 듣기는 듣는데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거다. 보통 우리는 ‘선택적 듣기’를 많이 한다.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했을 때만 관심을 딱 기울이는 거다. 보통은 ‘듣는 척하기’와 ‘선택적 듣기’인데, 아나운서가 제일 많이 하는 오류가 여기에 있다.
라디오나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면 인터뷰를 한다. 미리 질문이 준비된 상태에서 질문을 차례대로 한다. 인터뷰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듣는 척만 하고 그다음 질문할 것만 생각하고 있다. 인터뷰이의 답변에서 질문을 찾는 게 아니라 그냥 머릿속에서 질문을 생각하고 있어서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아까도 말씀을 드렸지만”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가 경청으로 나아가기 어려운 단계다. 경청에서 더 나아가면 공감적 경청, 즉 상대의 입장에서 들을 수 있다. 상당히 어려운 커뮤니케이션 기술 중의 하나다. 커뮤니케이션 쪽에서는 의도적으로 훈련해야 하는 기술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재후 아나운서는 감독과 지휘자의 이야기를 듣고 본인은 그렇게 하지 못 했다고 생각했단다. 그가 휴대하는 노트를 보여줬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일상에서 생각하거나 할 때마다 좋은 글을 적어놓았다. 그는 방송할 때 노트를 갖고 들어갔다고 했다. 상대의 사연이나 말에서 반응이 나와야 하는데 먼저 결과를 상정해놓고 과정을 꾸미는 식으로 방송했다. 되짚어보니 그랬던 것 같다고 말했다. 2020년 1월에 <출발 FM과 함께> 진행을 맡았다. 라디오는 거의 처음이었다. 방송을 맡은 지 7개월 만에 언론에서 “시청자 사연을 읽고 낄낄거렸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 공감한다는 것
공감은 다양성을 기초로 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도 맞을 수 있고, 내 의견도 꼭 올바르지만 않다는 것, 아주 확신에 차 있는 그런 생각이나 주제도 유력한 가설에 불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클래식은 공감 능력을 키워줄 수 있는 아주 유력한 도구라고 설명한다. 한 명의 작곡가가 곡을 만들었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수백 명 또는 수천 명의 사람이 그 곡을 연주했다. 자신만의 해석으로 수많은 연주자가 연주하는 곡을 들었던 청중들도 그들 방식대로 달리 해석하면서 들었을 것이다. 클래식은 기본적으로 공감에 기초해서 들을 때 훨씬 잘 들린다.
클래식은 다양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다양한 곡을 들을 수가 없다. 클래식은 다양성을 키워주고, 그 다양성은 공감의 가장 기초가 된다. 연주하다가 틀릴 수 있다. 그런데 잘못된 해석은 있을 수 없다. 음악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인생은 먹고 살기도 바쁘고, 사는 것도 힘들고 때론 고통스럽고 괴롭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루 24시간을 전부 다 고민하고 걱정하고 괴롭게 살 수는 없다. 한 5분은 짧게 분리해서 조금 덜 고통스럽고 덜 불안한 시간으로 만들어놓을 수 있는 게 바로 예술의 힘이다.
◆ 친절해지는 바탕이 되는 위로를 준다는 것
이재후 아나운서가 관찰을 해본 적이 있단다.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이 끝나고 앙코르 직전에 빠져나왔다. 공연장에 들어갈 때와 공연장에서 나올 때 관객들의 표정과 몸짓이 달라져 있었다고 했다. 공연을 보면서 삶의 고통과 불안과 괴로움을 떨쳐 버린 거다. 그 순간만큼은(물론 그 순간이 길면 좋겠지만) 오롯하게 평화의 시간을 보낸 거다. 그렇듯 클래식은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위로가 왜 중요하냐면 타인에게 친절해질 수 있다. 위로를 받은 사람은 주위를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위로를 주는 클래식 3곡을 잠깐 들려줬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쇼팽의 ‘녹턴 2번’, 브람스의 ‘교향곡 3번’이다. 오랜 세월 서양 음악사가 이어져 오면서 검증된 화성과 선율과 그 구조 이런 것이 사람의 마음을 건드린다는 설명과 함께. 조금이라도 알면 좋겠지만 그냥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이재후 아나운서는 라디오를 듣는 것을 추천했다. KBS 클래식 FM은 전공자들도 많이 있다. 그들이 2시간짜리 선곡을 하기 위해서 혼신을 다한다며. 작년에 방송협회에서 주는 아나운서 개인상 부문 방송 대상을 <출발 FM과 함께>로 받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출발 FM과 함께>가 상을 받았다. 그는 “클래식이, 클래식 방송이 저를 이렇게 바꿔놨습니다. 조금 잘 들을 수 있게 해주고, 조금 공감할 수 있게 해주고, 저에게 위로를 주니까 다른 사람한테 좀 친절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클래식에 관한 상식도 좀 쌓였어요.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그런 마음을 여러분도 느껴보길 권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이재후 아나운서의 북 토크가 끝난 뒤 북토크에 참여했던 이나용(41세, 성북구 거주) 씨에게 소감을 들어봤다. 그는 “이재후 아나운서가 클래식 방송을 오래 진행해와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했다”며 “클래식이 보수적이어서 닫혀 있다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오히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공감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되었어요. 아르떼 북 토크가 자주 열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클래식에 문외한이었던 분이 클래식으로 인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고 그 사연을 참여자에게 들려주는 자리였다. 클래식을 들으면서 위로를 받았던 적이 있는 참여자라면 그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을 것이다. 이 자리에 온 참여자들은 그의 말에 경청하면서 공감하고, 위로를 받은 것 같았다. 나도 그랬다.
‘아르떼 북 토크’가 열리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는 도서관이 있다.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아르떼 도서관은 문화예술교육 관련 자료가 총망라된 저장소다. 문화예술교육 분야의 자료를 찾는다면 이곳을 방문해 보자. ‘아르떼 북 토크’는 8천여 권의 문화예술교육 서적을 보유한 교육진흥원 도서관 '아르떼 도서관'에서 진행한다. 문화예술교육 전문도서관인 아르떼 도서관의 기능과 역할을 강화하고, “시민과 가까이, 일상 속 문화예술교육을 매개하는 장(場)”으로서 저자와 시민이 교류하는 시간을 제공하고자 기획됐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은 올해 12월까지 문화예술 저자 초청 ‘아르떼 북 토크’를 문화가 있는 날에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2회차인 ‘아르떼 북 토크’는 문화·예술·인문학 분야의 저자를 초청해 문화예술이 개인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문화예술교육 전문도서관 기획 프로그램이다. 7·9·11·12월 마지막 주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점심시간에 인근 주민이나 직장인을 대상으로 진행한다.
‘아르떼 북 토크’에 참여를 원하는 사람은 진흥원 누리집을 통해 온라인으로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