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하면 백범 김구 선생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임시정부=김구’ 라는 등식이 성립할 정도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중국 내 임시정부 탐방에 대한민국 정책기자단 일원으로 참여했다. 임시정부의 산증인이라 할 수 있는 백범의 흔적이 궁금했다. ‘백범일지’는 이미 전부터 읽어왔던 터. 다시 백범일지를 손에 들었다. 백범일지 속 흔적을 찾아 중국 임시정부 탐방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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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
백범일지는 광복 후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국사원, 1947년)라는 표제로 첫 출간됐다. 하지만 원본을 현대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친필 ‘백범일지’와는 그 내용과 표기 방법, 서술 형식이 다른 판본이 됐다. 이후 1994년 백범의 둘째 아들 고(故)김신 장군이 친필 원본을 공개하고 ‘친필을 원색 영인한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집문당)가 간행되면서 친필 원본이 일반 독자들에게 알려지게 됐다.
‘다른 위원들은 거의 다 가권이 있었으나 나는 아이들 둘도 다 본국 어머니께로 돌려보낸 뒤라 홑몸이었다. 그래서 나는 임시정부 정청에서 자고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집 저집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 하면 전차 회사의 차표 검사원인 인스펙터가 제일 많은 직업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과 저녁을 빌어먹는 것이니 거지 중에는 상거지였다. 다들 내 처지를 잘 알므로 누구나 내게 미운 밥은 아니 주었다고 믿는다’ (백범일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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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정 청사 내 김구 선생 집무실.(백범일지 상권 집필 장소) |
54세 때 집필한 백범일지(상권, 1929년)는 ‘영경방’(융칭팡, 임시정부 요인 가족 거처)에서 짧은 가정생활 밖에 나누지 못한 두 어린 아들(인과 신, 11세, 7세)에게 아비의 걸어 온 길을 알리는 유서로 쓴 글이다.
지금은 가장 서구적인 모습으로 변했지만 1920년대 이곳 영경방에는 임시정부 요인의 숙소가 있었다. 백범도 영경방에서 모친 곽낙원과 아내 최준례 그리고 두 아들과 살았다. 이곳에서 둘째 신을 얻었지만 아내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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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모친과 아들 침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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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자 위에 놓인 가족 사진. 사별한 아내 최준례의 모습이 없다. |
‘서대문 감옥에서 청소를 하면서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면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다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를 한 적이 있었소. 그래서 나의 호를 백범이라고 고쳤던 것이니 내게는 문지기가 가장 적당하오’ (백범일지 중)
김구는 상해 임시정부 초대 내무총장인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하게 해달라고 부탁을 하나, 다음 날 안창호가 문지기가 아닌 경무국장을 맡아 달라며 그를 설득하자 결국 초대 경무국장에 취임한다.
경무국장 시절, 김구는 일제의 정탐을 방지하고 임정 요인의 신변을 보호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일제는 어떻게 해서든 김구를 임시정부가 있던 프랑스 조계지 밖으로 유인해 체포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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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정 요원 거주지 영경방. |
자신의 호 백범(백정과 범부)이 의미하듯 그는 정녕코 문지기와 같은 삶을 원했지만 시대는 그를 한국 현대사에 길이 남을 민족의 지도자로 기억한다. 그의 70평생에는 늘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일찍이 사람을 죽였고(치하포 사건, 1896년 3월 9일 백범 김구가 황해도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를 타살한 사건. 당시 21세), 이로 인해 투옥과 탈옥을 경험했다.
가족의 죽음, 사랑하는 이들의 수많은 죽음을 보았고, 지옥과 같은 전장, 폭격, 산더미 같은 시신 곁에서 살아났다. 총알에 맞아 빈사 상태를 헤매기도 했고, 결국엔 흉탄에 그 굴곡진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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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임시정부 전경. |
3.1운동 직후 상해(상하이)로 망명을 떠난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나 자금난과 독립운동을 둘러싼 여러 계파간의 대립으로 혼란과 침체를 거듭하다 임정 활동 7년 8개월 만에 이동녕의 간곡한 재청으로 국무령의 중책을 맡는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을 계기로 한인애국단을 창단하여 1932년 5개월 동안 4건의 의거를 진두지휘하며 괄목할 만한 성과를 얻는다. 우리가 잘 아는 이봉창의 도쿄 일왕 투탄 의거(1932년)와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가 대표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이 의거는 장개석(장제스) 총통이 “우리 중국 사람들도 하지 못한 일을 한 명의 조선 청년이 했다”며 감탄할 만큼 조선인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세계 만망에 알린 사건이다.
소수의 임정 요원으로 독립운동 극대화를 노렸던 한인애국단의 활약은 임시정부를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지만 백범 개인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으로 내몰린다. 60만 원(현재 금액으로 약 200억 원 상당)의 현상금이 걸려 항주(항저우)에서 중경(충칭)까지 거의 8년 이상을 풍찬노숙에 가까운 여정을 보내게 된다. 이 모진 시기에 모친과 장남(인)을 잃는 아픔을 겪지만 그는 오로지 독립만을 꿈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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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임시정부 청사(연화지) 전경. |
‘내 나이 이제 육십칠(1942년) 중경 화평로 오사야항 1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에서 다시 이 붓을 드니, 오십삼 세 때에 상해 법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에서 백범일지 상권을 쓰던 때에서 14년의 세월이 지난 후이다’ (백범일지 중)
중경으로 온 임시정부는 그 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위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중경에서의 4번 째 청사이자 마지막 청사이기도 한 연화지에 70여 칸 건물을 빌려 사용했고, 1년 임대료만 40만 원일 정도였다.
중경에서의 임시정부 업적이라고 하면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정부(임시정부)-당(한국독립당)-군(한국광복군)이라는 체계를 갖췄다는 점일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입지가 그만큼 탄탄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 뿐만 아니라 우리 동포의 지원도 물밀듯 밀려들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행된 신한민보에서 ‘광복군 후원 모금’을 고정란으로 마련하자 시카고, 쿠바 교민, 멕시코 유카탄 반도 애니깽 농장에서 선인장 가시에 찔려가며 노예처럼 일하던 한국인 이민자들도 독립운동 비자금을 송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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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경교장 2층 김구 선생의 응접실(서재).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의 숙소이자 환국 후 임시정부의 마지막 청사다.(사진=저작권자(c)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
‘만일 누가 어떤 모양으로 죽는 것이 네 소원이냐 한다면 나는 최대한 욕망은 독립이 다 된 날 본국에 들어가 영광의 입성식을 한 뒤에 죽는 것이지마는, 적어도 미주와 하와이에 있는 동포들을 만나보고 오는 길에 비행기 위에서 죽어서, 내 시체를 던져 그것이 산에 떨어지면 날짐승 길짐승의 밥이 되고, 물에 떨어지면 물고기의 뱃속에 영장하는 것이다’ (백범일지 중)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독립을 맞았지만 그 시절, 백범일지 하권을 쓸 무렵 ‘작은 소망’과 달리, 1949년 6월 26일 현역 군인인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하고 만다.
탐방을 마치고 몇 줄의 기사로 백범과 그의 칠십 평생의 삶을 제대로 표현할 길이 없다. 더 자료를 수집하고 공부를 해도 채워지지 않을 부족함에 죄스러움마저 느껴진다. 진정 그가 추구한 인생에 가치는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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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경 임시정부 청사 내 김구 선생 동상. |
김구 선생이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서산대사의 오도송(悟道頌, 고승들이 수양을 통하여 깨달음을 얻은 순간 깨달음을 얻은 내용과 자신의 감회를 적은 글)을 끝으로 아쉬움이 남는 필자의 임정 탐방기를 마친다.
답설야중고 불수호난행(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 수적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눈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가는 이 길은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