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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등록말소자를 ‘복지 안으로’
인류 역사상 그 유래가 없는 독특한 주민등록제도는 군사정부의 필요에 의해 제정되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의 주민등록제도가 정주개념에 근거해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권력기관이 누가 어디에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 후, 언제나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에는 찾아가서 조사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 것이다. 이렇듯 주민등록제도가 국가권력이 원할 때면 항시라도 국민을 체포할 수 있는 감시체계 아래에 두기 위하여 주거지와 연계하여 관리됨에 따라 주거지를 잃으면 주민등록이 말소된다.
주민등록말소자는 취학통지서를 받을 수 없어서 교육의 의무를 수행하지 못하며, 징집영장을 발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국방의 의무도 수행할 수 없고, 선거권도 피선거권도 없다. 뿐만 아니라 기초생활보장을 비롯한 장애수당, 경로수당, 모부자가구수당 등의 각종 사회보장 수혜도 받을 수 없다. 그 외에도 신분확인을 요구하는 취업, 금융기관 이용, 전월세·부동산 계약 등 국민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거의 모든 활동들이 불가능해진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주민등록말소자 대부분이 극심한 주거빈곤층으로서 다른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사회보장수혜가 필요한 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주거복지, 국민기초생활보장, 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의 복지수혜 대상에서 배제된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러하기 때문에 주민등록말소자는 심각한 빈곤의 덫에 걸려 있으면서도 국가권력에 의해 빈곤탈출의 희망이 거세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렇듯 가혹한 주민등록제도가 지난 45년 동안 큰 저항 없이 시행되어 온 것은 말소자의 수가 적었고, 거의 대부분이 힘없는 노숙인이거나 반노숙 상태의 소수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2000년 이후에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심각하게 주민등록제도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있는 원인은 신용불량사태로 인한 채무불이행자(예전의 신용불량자)에 대한 직권말소로 주민등록말소자수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2004년 말의 주민등록말소자수는 69만6606명으로 전체 주민등록인구의 1.43%였으나, 채무불이행자의 수가 감소함에 따라 2006년 10월에는 64만6765명으로 약간 줄어들어서 전체 주민등록인구 대비 주민등록말소자의 수는 1.32%로 감소했다(행자부, 2006). 다행히 수가 줄어들고 있다고는 하지만 1만명 중 132명 꼴로 주민등록이 말소된다는 것은 이들의 존재를 국가가 나서서 부정하고 있는 격이어서 심각한 인권침해가 아닐 수 없다.
전체 주민등록말소자의 수보다 더욱 의미 있는 수치는 통반장이나 채권자의 요청에 의한 신규발생 직권말소자의 수인데, 2000년에 새로 발생한 직권말소자의 수는 14만6847명이었는데, 채무불이행자수의 증가에 따라 해마다 증가되어 2004년에는 25만8913명으로 늘어났다. 주민등록말소제도가 한 해에 25만명이나 되는 집 없는 가난한 사람들과 채무불이행자들을 사회 바깥으로 쫓아내는 취지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주민등록말소자들은 엄연히 살아 생존하고 있는 실체이기 때문에 설령 정부에서 아무런 소득활동을 못하도록 막아 놓고 사회보장 수혜권리마저 박탈하더라도 살아가기 위하여 몸부림 칠 수밖에 없는데, 이렇듯 사회 테두리 안에서의 생활을 막아 놓으면 이들은 지하경제시장으로 밀려난 채 활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하경제의 규모는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띠고 있다.
따라서 주민등록말소자가 대량으로 발생되면 일반인의 생활도 안전할 수 없으며, 사회통합에도 지장을 초래한다. 특히 채무불이행자들도 근로능력이 있고, 젊고, 학력이 높으며 도전의식도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양질의 노동력으로 활용될 수 있는 사람들을 주민등록말소 상태로 내몬 채 방치하고 있는 것은 재검토 돼야 한다.
주민등록제도의 인권침해성에 대한 시민단체와 언론의 비판이 들끓는 가운데 주민등록이 말소된 30대 여인이 아무런 사회보장 수혜를 받지 못한 채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자, 행자부는 지난 1월 26일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열고 주민등록말소로 인한 어려움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았다. 이 대책들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주민등록 말소제도는 전, 월세 보증금을 다 소진할 정도로 극심한 빈곤상태에 처한 사람들이 거리에 나앉게 된 시점에 발생되기 때문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정책은 주거복지정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부처 실무자 대책회의에 주거복지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건설교통부 관계자들이 참석하지 않았고, 따라서 아무런 주거대책도 나오지 않았다.
둘째, 금융감독위원회는 금융기관이 내부업무처리 목적이나 채무자에 대한 심리적 압박 목적으로 무리하게 말소민원을 제기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지도·감독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주민등록 말소자의 37%가 ‘양수금 및 대여금 반환 청구소송’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는데, 법원이 채권자가 채무자(피고) 소재를 파악하지 못할 경우 피고의 주민등록말소 등·초본을 근거로 공시송달한 뒤 궐석재판을 진행하는 한, 금감위에서 아무리 잘 지도·감독하더라도 말소민원이 제기되는 것은 막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무부 관계자 또한 대책회의에 참가하지 않았고, 따라서 법무부 차원의 대책 또한 나오지 않고 있다. 이 문제의 핵심적인 개선은 법무부가 ‘양수금 및 대여금 반환 청구소송’의 궐석재판 시에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우체국의 부재자 증명을 주민등록말소 서류 대신에 받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행정자치부는 주민등록 일제 재등록 기간을 정례적으로 운영함으로써 말소자 재등록을 적극 유도하고, 노숙자 등 거주지가 없는 경우에도 노숙자 쉼터 등 정부가 인정한 사회복지시설을 주소지로 주민등록이 가능토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행자부는 주민등록 일제 재등록 기간을 정례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노숙자 쉼터 또한 이미 주민등록 등재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선안에는, 국가가 엄연히 살아 있는 국민을 국민이 아니라고 부정해도 되는 것인지, 말소가 헌법, 기초생활보장법,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유엔 사회권규약 등에 명시된 인권을 침해하는 것인지, 왜 이렇게 많은 주민등록말소자가 발생하고 있는지, 말소자를 양산하는 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등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고 있다.
행자부가 진정으로 국가권력이 국민을 국민이 아닌 신분으로 내모는 주민등록말소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먼저 전국적 규모의 표본조사를 실시하여 말소자의 현황을 파악하고 관련법을 검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넷째, 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정책은 주민등록이 없어도 기초생활보장 수급요건을 갖추면 기초생활보장번호를 부여하여 보호하는 제도인데, 제도를 몰라 불이익을 받는 사례가 없도록 리플릿 등을 활용한 기초생활보장제도 홍보를 강화하고 일선 복지 담당공무원 교육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 제도는 운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400여 명만이 기초생활보장번호부여제도를 통하여 수급을 받고 있다.
이렇듯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적이 낮은 이유는 홍보부족도, 담당공무원의 제도에 대한 이해부족도 아니다. 단지 복지부가 말과는 다르게 이들을 제도권 안에서 보장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복지부가 진정으로 불쌍한 주민등록말소자들의 기초생활을 제도권 안에서 보장해 줄 의향이 있다면 애꿎은 복지담당 공무원만 탓하지 말고, 정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여 기초생활보장번호 부여를 통한 수급권자로 새로 책정될 가구 수를 추정하고, 그 자료를 근거로 예산을 책정한 후에 등재할 주거지가 없는 주거부정자도 수급권자로 책정해 주겠다고 하면 된다. 방랑인, 반노숙인, 노숙인 등의 주거부정자에 대한 기초생활보장번호부여를 통한 수혜는 선진국에서 실시하고 있는 제도로서 특별히 고민할 필요 없이 그냥 기존의 기초생활보장번호 부여제도를 제대로 실시하기만 하면 된다.
다섯째, 한국빈곤문제연구소의 조사에 의하면 주민등록말소자의 반 정도는 9년 동안의 의무교육을 마치지 못한 저학력층이다. 이들에게 의무교육기간까지 성인교육을 실시하고, 교육기관을 통하여 교육훈련비 명목으로 기초생활보장 수급에 버금가는 혜택을 주고, 이들이 의무교육 연한을 채운 후에도 취업을 못할 경우에는 직업훈련을 시켜 주면서 직업훈련 수당을 통하여 기초생활을 보장해주는 방안을 도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주민등록말소자들이 알콜중독, 인터넷중독, 도박중독, 소비중독(과도한 충동구매) 등의 중독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들에 대한 치료센터를 운영하고 센터에서 기초생활보장 번호를 부여한 후 급여를 지급하는 것도 한 방안이다.
진정으로 정부가 완전한 사회적 배제상태에 방치된 불쌍한 주민등록말소자들을 주류사회로 편입시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현행 주민등록제도를 폐지하고 시대에 걸맞으며, 국민의 인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를 새로이 도입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근본적인 폐지가 어렵다면 적어도 채권기관의 요청에 의하여 주민등록말소가 불가능하도록 제도를 개선하고, 주민등록말소자에게도 사회보장 혜택을 줄 수 있는 현실성 있는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서울대 가정대 졸, 미 페어리디킨슨대 MBA 졸, 동국대 석사 및 박사. 한국가정생활개선진흥외 수석연구원,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 등을 역임했고 현재 한국빈곤문제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빈곤(김동춘 외 공저)’, ‘소득분배와 사회복지(이정우 외 공저)’, ‘한국사회의 신빈곤(한국도시연구소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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