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콘텐츠 영역

똑바로 걸어야만 잘 걷는다는 소리 들을까

[손철주의 옛 그림으로 무릎치기] ⑦ 김홍도 ‘게와 갈대’

2013.03.28 손철주 미술평론가
글자크기 설정
인쇄하기 목록
옛사람의 글이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을 꼽을 때, ‘게’를 빼놓을 수가 없다. 게는 무엇보다 생긴 꼴이 재미있다. 별명도 무척 많다. 우선, 껍질이 딱딱하고 집게가 날카롭다. 옛 글과 그림에 걸핏하면 ‘용감한 장수’로 묘사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껍질은 갑옷에, 집게는 창에 견줄 만하니 병장기를 갖춘 군인처럼 의인화되기에 그럴 듯한 존재다. 조선시대 문인 김시습은 ‘금오신화’에서 게를 ‘곽 개사(郭介士)’라고 이름 지었다. 게가 걸어가는 모양을 본 딴 말이 ‘곽삭(郭索)’인데, 그걸 줄여 ‘곽 개사’라 부른 것이다. ‘곽’은 성곽이나 둘레를, ‘삭’은 얽히고 꼬인 모습을 각각 뜻한다. 다리를 요란스럽게 놀리며 걷는 이미지가 그 명명 속에 담겨져 있다. ‘개사’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절개 있는 선비’란 얘기다.

게의 또 다른 이름은 ‘무장공자(無腸公子)’다. ‘무장’은 창자가 없다는 얘기다. 게의 껍질을 벗겨보면 내장이라 할 만한 게 별로 없다. 거의 텅 비어있다. 겉보기는 용맹한 무사와 빼닮았는데 막상 속을 까보면 창자가 없어, 이를테면 ‘배알 빠진 떠꺼머리’ 꼴이다. 창자가 빠지면 실없는 꼬락서니가 될까. 천만에, 오히려 남부러운 성정도 생긴다. 단장(斷腸)의 슬픔, 곧 창자가 끊어지는 서러움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미물에게 ‘공자’라는 점잖은 신분을 안겨준 연유다. 한말의 유학자 윤희구는 그래서 ‘공자는 창자가 없으니 진정 부럽구려/ 평생 단장의 아픔을 모를 터이니’라고 읊었다. 근대 화가들이 이별하고 눈물짓는 이를 달래려고 게 그림을 선물로 건넨 것도 다 그런 까닭이 있어서다.

옛 화가들이 게를 그릴 때 맨 먼저 작심하는 뜻은 ‘과거(科擧)’다. 이유는 뻔하다. 게는 등딱지가 제일 먼저 눈에 띄는 특성이다. 하여 껍질 ‘갑(甲)’으로 뜻이 전용될 수 있고, ‘갑’은 또 ‘일등’이나 ‘장원’과 통한다. 게야말로 ‘장원 급제’를 기원하는 그림 소재가 되기에 딱 알맞다 하겠다. 이 작품을 보라. 단원 김홍도가 그려놓은 게 그림이다. 게 두 마리가 갈대꽃을 집게발로 꽉 붙들고 있다. 여기에 무슨 뜻이 들어있을까. 게는 앞서 말한 그대로 ‘장원’을 상징한다. 갈대는 한자로 ‘로(蘆)’라고 쓴다. 이 글자와 비슷한 발음에 ‘려(月+盧)’자가 있다. 화가는 겉으로 갈대를 그려놓고 속으로는 ‘려’자가 가진 의미를 꿈꾼다. ‘려’는 윗사람의 말을 아랫사람에게 전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옛말에 ‘여전(月+盧傳)’이라고 하면, 임금이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호명한다는 의미가 된다.

김홍도, ‘게와 갈대’, 18세기, 종이에 담채, 23.1×27.5㎝, 간송미술관 소장
김홍도, ‘게와 갈대’, 18세기, 종이에 담채, 23.1×27.5㎝, 간송미술관 소장
 
게 그림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속내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과거에 장원 급제해서 임금이 너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과 동시에 알현하는 영광도 누리기를 바란다.’ 게 그림 하나로도 이렇게 많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옛 그림을 읽는 쏠쏠한 재미이기도 하다. 단원은 게를 두 마리 그렸다. 한 마리를 그린 것과는 좀 다른 요구가 있을까. 당연히 있을 테다. 두 마리를 그리면 소과뿐만 아니라 대과까지 연이어 급제하란 주문이다. 그림 속에 써놓은 글도 눈길을 끈다. 여기서 단원은 소과 대과 장원을 넘어 한술 더 뜬다. 해석부터 해보자. ‘바다의 용왕이 있는 곳에서도 옆걸음질 친다(海龍王處也橫行).’ 이 구절은 출전이 따로 있다. 당나라 시인 피일휴가 쓴 ‘영해(詠蟹)’, 즉 ‘게에 대해 읊다’라는 시의 마지막에 나오는 말이다. 시의 전문을 다 읽어보면 이렇다. ‘푸른 바다에 다다르지 않아도 일찍이 그 이름 알려졌지/ 뼈대가 도리어 살점을 뚫고 튀어나왔다네/ 속이 없다고 우레와 번개 무서워한다 말하지 마라/ 바다의 용왕이 있는 곳에서도 옆걸음질 친다’

게의 용맹성이 무릇 그러하다. 오죽하면 게의 영광스런, 또 다른 하나의 별명이 ‘횡행개사(橫行介士)’이겠는가. 게는 게걸음을 할 따름이다. 그런 게의 본성을 존중한 사람들은 ‘옆걸음질 치면서 절개 있는 선비’라고 불러준다. 게가 사람들 눈에 강골의 이단아로 비쳤던 까닭이겠다. 옛 이야기 하나 덧붙인다. 광해군 시절, 고향에 은거하던 정영방이란 문인이 있었다. 그는 이름난 정치가인 정경세의 제자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판서 벼슬을 지내던 스승 정경세가 정영방을 조정에 천거했다. 뒤늦게 알게 된 제자가 스승에게 선물 꾸러미를 보냈다. 스승이 풀어보니 게 한 마리가 옆걸음하며 나왔다. 스승은 제자의 뜻을 알아차리고 다시는 벼슬을 권하지 않았다. 모두가 ‘예스’라고 할 때, ‘노’라고 혼자 말하는 야무짐이 벼슬하는 자의 기개다. 백성은 게걸음 할 줄 아는 관리에게 박수를 쳤다.

◆ 손철주(미술평론가)

손철주(미술평론가)
 서울경제신문 기자, 국민일보 문화부장, 동아닷컴 취재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꽃피는 삶에 홀리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속속들이 옛 그림 이야기’ 등이 있고, 공저로 ‘다, 그림이다’ 등이 있다.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동한다.

하단 배너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