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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날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자취

[손철주의 옛 그림으로 무릎치기 ④] 윤두서 ‘설산부시(雪山負柴)’

2012.12.11 손철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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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눈이 내리면 아이와 강아지가 좋아한다. 눈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순수의 상징이다. 아이가 더 신명나는 게 그래서일까. 덩달아 강아지까지 흥겹다. 노인은 눈을 싫어한다. 낙상이 두려워서가 아니고, 늙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져서 그렇단다. 나는 그런 분을 실제로 봤다. 눈이 왔다 하면 방문을 아예 나서지 않는다고 그 노인은 말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눈처럼 하얀 수염이 민망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씀에 어쩐지 낭만적인 엄살기가 풍겼다. 백발이 무슨 욕이라고…. 놀라운 건 그런 고백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진익중이 쓴 ‘눈 온 뒤’라는 시가 그렇다. ‘백발노인은 눈 보기가 부끄러워/ 아침 내내 문밖을 나서지 않는다네/ 아이가 병이나 들었는 줄 의심하여/ 방이 차가운지 따듯한지 짐짓 물어보네’ 이런 노인의 안타까운 속을, 물정에 어두운 아이가 어찌 알아주겠는가.

윤두서, ‘설산부시’, 17세기, 비단에 수묵, 24×17㎝, 간송미술관 소장
윤두서, ‘설산부시’, 17세기, 비단에 수묵, 24×17㎝, 간송미술관 소장
그런가 하면 당나라 시인 나은은 다른 이유로 눈 오는 날이 걱정이다. 헐벗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여겨서다. 그의 시 ‘눈’은 이렇다. ‘눈 오자 풍년 들 징조라 하네/ 풍년 들면 다들 좋아지는가/ 장안에 가난한 사람들 많은데/ 좋다 해도 말 지나치면 안 되지’ 참으로 속정 깊은 시인이다. 그의 사려가 눈보다 깨끗하다. 눈보라가 몰아치면 누가 먼저 힘 드는가. 아무래도 굶주린 사람들일 테다. 눈이 하얗다한들 그게 쌀밥이 될 리는 만무한 일이다. 그러니 눈 오면 풍년 든다는 말조차 가려서 해야 한다. 눈발이 드세게 날리면 걱정하는 이가 또 있다. 바로 먼 길을 떠난 자식이다. 그의 마음은 아리다. 고향에 계신 부모의 추위가 염려스런 까닭이다. 조선의 문인 이안눌도 마찬가지다. 그는 집으로 보낼 편지에 자신의 고된 타향살이를 적어나가다 백발의 부모가 떠올라 아차, 주춤한다. 그의 시 ‘집으로 보낸 글’을 보면 콧등이 시큰해진다. ‘집에 보낼 편지에 고됨을 말하려 해도/ 흰머리 어버이 근심하실까 걱정이 되어/ 깊은 산 쌓인 눈이 천 길이나 되는데/ 올 겨울은 봄보다 더 따뜻하다고 말씀 드리네’ 누가 내리사랑만 깊다 하는가. 이안눌의 시에 나타난 치사랑이 그에 못잖다.

눈 오는 날을 그린 그림 하나를 보자. 어깨에 올린 멜대가 활처럼 휘어졌다. 버겁게 나뭇짐을 진 사내 몰골이 텁수룩하다. 내려오는 비탈길이 매우 조심스럽다. 그의 표정은 잔뜩 긴장해있다. 먼 산은 등성이만 남아 몸통이 보일락 말락하고 나뭇가지는 간밤에 내린 폭설을 옴팍 뒤집어썼다. 눈이 그쳐도 산바람은 매섭고 차갑기 마련이다. 사내는 실눈을 뜨고 입을 앙다물었다. 짚신이 허술하니 발인들 얼마나 시릴까. 미끄러질세라 감발을 친 아랫도리가 엉거주춤한 기마자세다. 저 사내 역시 한 집안의 가장일 것이다. 행색으로 보건대, 아래로 자식을 수발하고 위로 어른을 모시는 삶이 고단한 실정이다. 먹여 살릴 가족을 생각해서라도 그는 이 한겨울의 고된 노동을 멈출 수 없다.

그림 제목은 ‘눈 내린 산에서 나무를 지다’라는 뜻의 ‘설산부시(雪山負柴)’다. 그린 이는 17세기의 문인화가인 공재 윤두서다. 그는 국보로 지정된 ‘자화상’을 그린 작가로 널리 알려진 선비다. 공재는 민촌의 소박한 풍경을 따스한 시선으로 화폭에 자주 옮겼다. 이 그림도 힘겹고 지겹고 각박할지 모를 나무꾼의 하루가 간략한 필선과 맞춤한 구도로 표현돼 있다. 공재는 그러나 나무꾼의 발자국을 그리지 않았다. 우리 옛 그림이 일쑤 그러하다. 대낮에 길을 걸어가도 그림자가 없고, 푹푹 빠지는 눈길을 딛어도 자취가 남지 않는 것이 옛 그림이다. 무슨 다른 심오한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림에서는 현실의 합리성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눈길을 걸을 때는 발걸음을 조심하라고 옛 어른들은 말했다. 뒤에 올 사람의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다. 아닌 게 아니라 청나라 조관의 시는 눈밭에 찍힌 나무꾼의 발자국을 심오하게 받아들여 노래한다. 그의 시 ‘답설’을 읽어보자. ‘눈을 밟고 산중의 나무꾼을 찾아가니/ 나무꾼은 눈을 밟고 가버렸네/ 한 가닥으로 난 짚신 자국을 따라/ 소나무 숲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네’ 이 시에 나오는 나무꾼은 예사 나무꾼이 아니다. 고결한 품성을 지닌 채 세속을 등진 은자를 일컬어 흔히 ‘산중 나무꾼(山樵)’이라 한다. 그의 발자취는 이른바 ‘한소식’을 듣고자 하는 추종자를 끌어 모으기 마련이다. 공재의 나무꾼은 어떤가. 이 나무꾼에게 삶은 멈출 수 없고 견딜 수밖에 없는 날들의 연속이다. 겨울을 넘겨 입춘이 오면 저 사내도 땔나무를 팔아 설날에 복조리를 사리라. 그리고 보잘것없는 문간이지만 춘방(春榜)을 붙이며 한해의 소망을 빌었으리라. 겨울눈이 아무리 덧정 없어도 봄이 오면 녹는다. 발자취조차 남기지 않은 사내지만 다가올 훈풍을 그리며 그는 시리디시린 한설을 오늘도 밟는다.

◆ 손철주(미술평론가)
 
서울경제신문 기자, 국민일보 문화부장, 동아닷컴 취재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꽃피는 삶에 홀리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속속들이 옛 그림 이야기’ 등이 있고, 공저로 ‘다, 그림이다’ 등이 있다.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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