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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단상

책이 입을 열기까지

[공직 단상] 책이 사라지는 세상, 그럼에도 책과 소통하는 사람들

2025.02.11 한숙희 국립중앙도서관 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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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입을 열기까지는 큰 인내심이 필요하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책이, 그러니까 누군가가 말이 더디다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
한숙희 국립중앙도서관 사서
한숙희 국립중앙도서관 사서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소설이자 프랑수아 트뤼포(Francois Roland Truffaut)의 동명 영화로도 잘 알려진 '화씨 451도'는 책이 사라진 디스토피아적 세계를 다룬다.

소설의 제목에서부터 책의 내용이 잘 드러난다.

'화씨 451도'는 종이의 발화점(사실 종이의 발화점은 화씨 451도가 아닌 섭씨 451도다)을 뜻하는데 방화수들은 늘 시민들을 감시하고, 책을 발견하는 순간 그 전부를 태워버린다.

그리고 '화씨 451도'는 방화수 중 한 명이었던 주인공 몬태그가 책을 만나며 변화되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있다.

'화씨 451도'가 보여주는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다.

물론 방화수가 있는 것도, 책을 태워버리는 것도 아니지만 책은 제법 우리에게 낯선 존재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층뿐만 아니라 노년층까지도 일명 숏폼(short-form)에 중독되어 있다.

틱톡과 유튜브 숏츠와 같이 빨리 말하고 빨리 즐기는, 불과 60초가량의 영상들이 유튜브를 비롯한 각종 소셜미디어 속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불의 참된 아름다움은 책임과 결과를 없애 버린다는 데 있지. 견디기 힘든 문제가 있으면 화로에다 던져 버리면 돼"라는 소설 속 구절은 이들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극도의 단절과 고립 또한 우리 사회의 풍경이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새삼 그러한 풍경 또한 책과 멀어진 것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로 생각해본다.

몇 년 전부터 문해력이라는 말이 흔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성인 문해력에 대한 뉴스들이 나오기도 하였다.

책을 읽는 것이 생경하게 되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사회적, 정서적 고독에 대한 뉴스들도 쏟아져 나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물론 모두 매체가 일면 이러한 만남을 전제로 하고 있으나, 책과의 만남은 느리고, 불편하고, 때로는 답답하기도 하다.

국립중앙도서관 한 켠에 적힌 문구. "세상사에 시선이 따뜻한 사람이 시인이다. 시를 안써도 시인이다"
국립중앙도서관 한 켠에 적힌 문구. "세상사에 시선이 따뜻한 사람이 시인이다. 시를 안써도 시인이다". 그 앞에 올해 출간한 첫 시집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어>.

책이 입을 열기까지는 큰 인내심이 필요하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책이, 그러니까 누군가가 말이 더디다면 더욱이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

누군가의 말을 듣는다는 것에는 크나큰 많은 관심이나 정성이 요구된다는 것, 그리고 관심과 정성이 이내 큰 즐거움으로 돌아온다는 것.

그래서 좋은 독자는 곧 좋은 사람이지 않을까?

도서관에는 유독 좋은 사람들이 많다.

도서관의 프로그램에 빠짐없이 참여하는 이용자들을 보면 늘 반갑고 기쁘다.

특정 분야에 대한 관심이기보다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것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노력, 이들은 도서관에서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라면 가리지 않고 도서관으로 향한다.

책과의 만남을 통해 더 깊고 풍부한 소통을 추구하는 이들이라 더 소중하고 귀하다. 

올해 1월, 시집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어>를 출간했다.

시집을 건네받고 기뻐하는 사람들로부터 시(詩)로 소통하는 또 다른 대화를 할 수 있음에 큰 기쁨을 느끼는 중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습을 통해 사서로 사는 삶을 돌아본다.

나를 거쳐 간 많은 책들, 그리고 주위에 있던 수많은 도서관 이용자들과 함께.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어

지나쳐버린 수많은 겨울이
서툰 이별 앞에 서서 외면한 채
차가운 시선에 마른 꽃을 피운다

생각이 생각을 줄 세우고
가리어진 가슴 언저리에서
먹물 같은 바람이 바닥에 누워 있다
흥겨운 밤이 넘실거리다
허물어지더니
눈물 맺힌 아침이 찾아온다

잘 그려지지 않은 낯선 말들이
질퍽거리는 종이 위로 튀어 오른다

- 한숙희 詩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어'

한숙희

◆ 한숙희 국립중앙도서관 사서

국립중앙도서관 국제교류홍보팀 근무, 2021년 공직문학상 시 부문 은상 수상, 같은 해 <시인정신>으로 등단했다. 우리가 행복한 도서관'을 만들기 위해 오늘도 출근하는 36년 차 사서이자 도서관에서의 일상을 시로 구현해내는 시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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