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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새내기 직원 울린 팔순 어르신의 고백
올해 여름은 유난히 길었다.
이대로 겨울이 오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계절은 어느새 본연의 자리를 찾아 들었다.
숨을 들이쉬면 콧속으로 들어오는 찬 공기에 살짝 탄 장작 냄새가 섞여 있는 계절, 겨울은 제시간에 무사히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겨울의 길거리에서 맡을 수 있는 ‘겨울 냄새’는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부른다. 스무 살, 대학 동기들과 함께 거닐었던 크리스마스 전야의 명동 거리. 스물아홉 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눈물로 올랐던 도서관 언덕길.
그리움이 끄집어낸 기억들은 아무렇게나 불쑥불쑥 튀어나와 정처 없이 떠돌다가 마지막은 꼭 같은 곳에서 끝난다.
“첫 추위에 얼면, 겨우내 얼어 지낸다. 옷 뜨시게 입고 다녀라.”
추위가 시작되면, 얇게 입고 다니는 손녀딸이 걱정돼 항상 염려 섞인 당부를 하시던 나의 할머니. 삼십여 년을 함께 산 할머니가 소천하신 계절이 딱 이맘때 겨울이었다.
그리고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리다 보면 함께 생각나는 또 한 사람이 있다.
우체국 금융 새내기 시절, 항상 내 2번 창구 앞에 서 계시던 할머니 고객님이다.
십 년 전, 나는 강원도 최북단 지역의 한 우체국 금융 창구로 첫 발령을 받았다.
다행히 읍내에 한가운데 위치한 총괄국(시·군 지역을 총괄하는 우체국)이었던 터라 아주 변두리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고객들의 연령대가 아주 높은 편이었다.
그중 특히 할머니 고객은 대부분 전표 작성을 곤혹스러워했다.
“아가씨가 대신 좀 써주면 안 돼?”
“네, 자필 작성이 원칙이라서요. 제가 먼저 큰 글씨로 써볼 테니, 제가 쓰는 거 보시고 천천히 따라 써주세요. 1 옆에 동그라미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개. 잘하셨어요! 이제 성함 적어 보실게요. 동그라미 하나, 그 옆에 세로 작대기. 네, 맞아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벌어지는 작은 실랑이였다.
고객님들을 격려해 가며 어렵게 ‘찾으실 때’를 작성하고 나면 삐뚤빼뚤한 글씨가 부끄럽다며 멋쩍게 전표를 내미는 분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은 유난히 글씨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던 고객을 만났다.
추운 날씨에 걸어오셨는지 찬바람을 가득 품고 오신 할머니 고객은 가뜩이나 못 쓰는 글씨가 손이 얼어서 더 안 써진다고, 못 배워서 그렇다고 하소연 섞인 넋두리같은 고백을 쏟아내셨다.
그 모습에 본가에 계시는 할머니가 생각났다.
“고객님, 저도 집에 팔순 넘으신 할머니가 계시는데요. 저희 할머니가 그러시는데, 예전에는 여자가 많이 배우면 팔자가 사납다고, 여자는 학교를 안 보냈대요. 6.25 전쟁도 있었고요. 고객님 잘못이 아니니 너무 부끄러워 마세요.”
그 말에 할머니 고객님이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젊은 아가씨가 말을 참 고맙게 한다고. 너무 고맙다고….
한참을 눈물을 흘리다 자리를 떠나신 그분은 이후 우체국에 방문할 때면 항상 내 2번 창구 앞에 서 계시다가 짧은 안부 인사라도 한마디 건네주시곤 했다.
첫 발령지를 떠나온 지 칠 년이 지난 지금도 찬 바람이 부는 계절이 오면 떠오르는 잊지 못할 고객이다.
관공서, 은행.
이 두 기관의 공통점은, 업무를 보러 방문할 때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는 점이다.
알 수 없는 어려운 전문 용어들과 그보다 더 난해한 서류 더미들 사이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앞에 앉은 담당자뿐이다.
담당자의 말 한마디에, 나는 잔뜩 주눅이 들기도 하고, 환한 웃음을 짓기도 한다.
관공서이자 은행인, 우체국을 방문하는 분들 역시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한다.
그렇기에 나는 우체국을 방문하는 분들이 미소 지을 수 있도록, 작은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건네고 싶다.
나뿐 아니라, 우정사업본부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이 역시 그러할 것이다.
앞으로도 우정사업본부가 ‘우체국’ 하면 떠오르는 빨간색의 따뜻한 이미지처럼, 항상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기관이길 바라본다.
◆ 이재우 강원지방우정청 주무관
강원지방우정청 회계정보과 소속으로 2022년 공직문학상 동화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우체국 업무를 수행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동화로 옮겨내 수상의 기쁨을 얻었다. 우체통과 편지가 사라지고 있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우체국에는 온갖 이야기를 담은 우편물과 택배가 가득하다. 이들 속에 담긴 수많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고 동화로 옮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