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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도장 찍어주던 관행 사라진다…중소출판사 환영
[전국] “결제는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신용카드로 해주세요.”
7월 28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에 위치한 대형서점에는 주말을 맞아 책을 구매하기 위해 찾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평소 읽고 싶었던 소설책을 골라 계산대로 가져갔다. 계산을 마친 뒤 서명을 확인한 서점 직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책의 옆면에 빨간색으로 된 작은 도장을 찍었다.
“이 도장은 왜 찍는 거에요?”
“아, 저희 서점에서 판매한 책이라는 확인 도장이예요. 도난 사고가 일어나거나 경보 시스템이 잘못 울릴 경우에 대비해서 찍고 있습니다.”
책을 사들고 돌아오는 길에 계속 그 빨간 도장이 신경쓰였다. 집에 와서 책꽂이를 확인해보니 서점 직원의 말대로 책을 구매한 서점별로 크기와 모양은 다르지만 제각각 도장이 찍혀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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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판매되는 책에 일종의 인증마크로 도장을 찍어두는 ‘도장인’ 관행이 지속돼 왔다. 대형 서점에 진열된 도서에서 특히 ‘도장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서점에 따라 입고된 모든 책에 도장을 미리 찍어두는 경우도 있고, 결제하면서 직원이 도장을 찍어주는 경우도 더러 있다. |
현재 오프라인 서점은 도난 방지를 위해 도서 입고 시에 판매서점을 표시하는 도장을 찍고 있으며, 이는 서점업계의 오래된 관행이다. 도장이 찍힌 채로 반품되는 도서는 다른 서점으로의 재납품이 어려워 중소 출판사들에게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대형 서점들의 이런 관행에 경종을 울리고 나섰다. 공정위는 오프라인 서점 입고 시와 판매 시 도서에 판매 서점의 도장을 찍는 ‘도서 판매 서점 표시제도(일명 : 도장인 관행)’를 개선, 출판사들이 서점으로부터 반품 받은 도서를 재납품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서점의 경우 누구나 자유롭게 드나들 수있는 공간이어서 도장을 찍어두지 않으면 고객이 갖고 온 책인지 서점에 비치돼 있던 책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또 중고시장에서도 새 책이 다량 매물로 나올 경우 도장이 찍혔는지를 확인해 도난품 여부를 가리고 있다.
현재 이러한 ‘도서 판매 서점 표시제도’로 인해 훼손되는 출판물의 양은 전체 도서의 10~15%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또 도장이 찍힌 도서는 다른 서점으로의 재납품이 불가능해, 중소 출판사가 부담을 떠안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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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점에서 '도장인'을 찍는 것은 아니다. 동네의 인근 서점에서 ‘도장인’이 찍혀 있지 않은 도서를 만날 수 있었다. 서점 주인은 먹고 살기 힘든 것은 출판사나 서점이나 비슷해서 도장인을 찍을 수가 없었다고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
중소 출판사는 ‘도서 판매 서점 표시제도’의 도범 적발 및 도난 예방의 측면에서의 효과는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판매 서점의 도장을 찍는 방법 외에 좀 더 근본적인 도난 방지 대책을 대형서점에서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한출판문화협회 이대현 상무는 “도서 판매 서점 표시제란 서점이 도난 방지 차원에서 책을 입·출고할 때 책에 서점 도장을 찍는 관행”이라며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때문에 반품된 도서를 다른 서점에 재납품하기 어려워 중소 출판사에는 큰 부담이 돼왔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까지 출판사들은 반품된 책의 도장 표시 부분을 얇게 잘라내 다른 서점에 판매했는데, 이 과정에서 책에 변형이 생기고, 추가비용이 발생해 출판사의 손해가 컸다.”며 “책에 찍히는 도장 때문에 중소 출판사들이 연간 150억 원가량의 손해를 입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공정위는 2013년 6월 29일, 대한출판문화협회(중소 출판사를 대표해 참석)와 대형서점 3사(교보문고, 서울문고, 영풍문고)가 참석한 회의에서 세 차례에 걸쳐 ‘도서 판매 서점 표시제도’ 개선을 위한 장·단기 방안을 도출했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유통거래과 노현재 조사관은 “서점들 자체적으로도 이런 제도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잘 알지 못할 만큼 오랜 관행으로 굳어져 있었던 게 사실”이라며, “이번 개선안을 통해 연간 150억 원에 달하는 손실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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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내에 수북히 쌓여있는 도서들. 판매되지 않는 책들은 출판사로 반품되는데, 만약 책에 도장이 찍혀 있다면 그 책은 더 이상 판매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도장인 관행을 개선하는 것만으로돈 중소출판사에게는 숨통을 트여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
개선안에 따르면, 대형서점 3사는 도서에 찍힌 판매서점의 도장을 완전히 지운 후 출판사로 반품해야 한다. 또 7월부터 서점의 관리 소홀 등으로 인해 판매서점의 도장이 지워지지 않은 채 출판사로 반품된 도서에 대해서는 대형서점 3사에 중소 출판사들이 도서를 재납품할 수 있도록 했다.
아울러 장기적으로는 중소 출판사와 대형서점 간 상생 협의체를 구성해 도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RFID 시스템 도입 방안도 강구하기로 했다.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시스템은 IC칩과 무선을 통해 식품, 동물, 사물 등 개체의 정보를 관리할 수 있는 인식 기술이다.
중소 출판사들은 이번 개선안을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대형 서점의 눈치를 봐야 하는 중소출판사 측에서는 그동안 말도 못하고 끙끙 앓아왔었는데 공정위가 시원하게 문제를 해결해줬다는 것이다. 중소출판사인 L 출판 관계자는 “주로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책을 출판하고 있다.”며 “솔직히 도장이 한 번 찍힌 책은 판매가 불가능하다.”라고 털어놨다.
L 출판 관계자는 이어 “간혹 도장이 찍히거나 서점의 바코드가 붙어서 책이 반품되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손님들이 중고책 내지는 헌 책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에 다시 판매할 수가 없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출판사 몫이 된다.”며 “이번 개선안이 관계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지만,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는 정말 큰 비용을 줄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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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 서점은 사람들로 붐빈다. 온라인 판매가 성행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대형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대형서점을 통해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 많다보니 중소 출판사가 불만이나 어려움이 있어도 대형서점에 이를 제대로 제기하지 못했었다. |
또 다른 Y출판사 관계자는 “도장이 찍힌 책을 판매했다가 고객에게서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며 “서점에 납품하기만 하면 새 책이 중고책이 돼버리니 책을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운빠지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헌 책이나 다름없는 새 책은 출판사가 별도 비용을 들여서 폐기하거나 출판사의 자료로 남겨둔다.”며 “한 번 반품되면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의 책들이 되돌아오기 때문에 그 손해가 막심했다.”고 말했다.
Y출판사 관계자는 “거래하고 있는 대형 서점으로부터 이제 다른 서점의 도장인이 찍힌 것도 받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공정위의 발표 후 바로 그 효과가 전달되는 것 같아 기쁘다.”고 덧붙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이번 개선안이 대형서점 3사 외에 다른 오프라인 서점으로도 확산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며, 향후 유통 옴부즈만 활동 강화를 통해 중소 납품업체의 애로사항을 적극 발굴,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을 개선해나갈 예정이다. 또한, 대규모 유통업 시장에서 합리적인 사유에 의해 생겨난 관행이라도, 시대적·사회적 환경의 변화로 ‘손톱 밑 가시’로 작용하는 구시대적 관행을 지속적으로 개선해나간다는 방침이다.
정책기자 강윤지(직장인) hi_angi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