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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와 출자, 그거 정말 구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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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손에는 성장잠재력 확충, 다른 손에는 사회안전망 확대’. 참여정부는 특히 IMF 외환위기 이후 심화된 사회경제적 양극화를 완화하기 위해 사회투자를 확대했다. 경제성장과 사회복지가 함께 가는 동반성장전략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제시했다. IMF 외환위기 이후 고질병이 된 ‘저성장 속 양극화’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고자 했다. 그럼에도 민생의 어려움은 짙은 그림자로 남았다. 우리 경제의 낡은 유산과 싸우며 새로운 성장전략을 추구했던 참여정부의 이러한 비전과 고투가 한국경제의 터닝포인트로 기록될지 여부는 역사의 몫으로 남아 있다.
국정브리핑은 재정경제부·한국금융연구원·한국조세연구원 등과 함께 참여정부 경제정책의 탄생 배경과 전개과정, 정책효과와 의미 등을 실록 형태로 정리한 ‘실록 경제정책’을 기획, 연재한다. 전·현직 정책 담당자들의 증언과 각종 정부기록물, 학계 연구보고서 등을 밑그림으로 삼아 ‘읽는 재미’와 함께 경제정책의 원리와 방향을 이해할 수 있는 폭넓은 안목을 제공하려 한다. 연재 내용은 단행본으로 묶어 출간할 예정이다. <편집자>
① 카드사태와 금융시장 안정: “문 닫을까요, 외국에 팔까요, 당신이 살 거요?”
② 신용불량자 뇌관 해체: 신불자 딜레마, 딜레마…“원칙이 이기더라”
“소비심리와 투자의욕이 위축되고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 예외 축소, 금융계열사 분리청구제 등 소비나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는 기업 정책은 경제계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야 한다.”
2003년 4월 3일 오전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박용성 대한상공회의소장, 손길승 전국경제인연합회장, 김재철 무역협회장 등 경제 5단체장은 이라크전쟁과 북핵 위기로 난국에 빠진 경제상황 극복을 위한 ‘경제계 의견’을 발표했다.
■ 경제가 위기? 재벌이 위기!
재계는 이날 “경제가 위기”라며 IMF 외환위기에 버금가는 현재의 경제난국을 극복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이들의 위기의식은 다름 아닌 ‘재벌개혁’에 대한 것이었다.
국민의정부에서 추진된 재벌개혁이 미완에 그쳤다는 평가 속에서 2003년 ‘개혁정부’의 이미지를 안고 참여정부가 출범하자 국민들은 다시 재벌개혁에 주목했다.
“최태원 회장 출국금지·SK압수수색, 새정부 ‘재벌 길들이기’ 시작인가”(한국일보) “‘벌써 칼 뽑았나’, 재계 당혹·긴장”(경향신문) “‘비위 재벌 모두 손보나’, 초긴장”(국민일보)…. 참여정부 출범을 며칠 앞둔 2003년 2월 17일. 참여연대가 고발한 SK그룹 주식 부당 내부거래 의혹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새 정부의 ‘재벌 개혁 신호탄’이라는 관측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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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그룹 주식 부당 내부거래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해 보도한 2003년 2월18일자 중앙일보. |
그도 그럴 것이 노무현 대통령당선인은 사흘전 전경련 최고경영자 신년포럼에서 ‘참여정부의 경제정책 방향’ 강연을 통해 기업의 투명성과 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했었다. 제16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백서(2003)에 실린 당시 강연내용이다.
“외형을 부풀리고 지배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대기업 집단들의 건전하지 못한 행태가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다. 분식회계·허위공시·주가조작 같은 명백한 불법행위가 아직 남아있다. 땀 흘리지 않고 쉽사리 부를 이전하고 축적하는 후진적 풍토는 이른 시일 내에 불식돼야 한다. 지나친 경제력집중이 사회통합과 계층통합을 해치고 있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 국민의정부, 미완의 재벌개혁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에서 정의한 ‘기업집단’, 이른바 재벌에 대한 개혁 요구가 커진 것은 외환위기 이후다. 압축성장과 산업화 시대를 거치며 선단·문어발식 경영으로 덩치를 키운 대기업들은 IMF 사태의 직격탄을 맞으면서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의 종지부를 찍었다. 1998년 초 한국의 재벌 구조는 외환위기의 또다른 원인으로 지목되면서 국민적인 개혁 요구를 받았다.
외환위기 직후 출범한 국민의정부는 재벌개혁에 나섰다. 재벌구조의 핵심인 ‘문어발식 경영’과 ‘총수의 제왕적·세습적 지배구조’를 바꾸는 데 초점을 맞췄다.
1998년 1월 발표된 ‘기업 구조조정 5원칙’(기업경영의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의 해소,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핵심 역량 강화, 지배주주 및 경영진의 책임강화)과 뒤에 따라붙은 ‘실천 3원칙’(기업 스스로 한다, 정부는 가이드라인만 제시한다, 수단은 은행을 이용한다)인 ‘5+3 원칙’에 의해 빅딜(대규모 사업거래)과 퇴출, 워크아웃 등을 통한 재벌 구조조정이 진행됐다.
구조조정과 개혁으로 기업의 재무구조는 크게 개선됐다. 수익성을 중시하는 경영풍토가 형성됐다. 주주존중 마인드도 생겨났다. 상당한 성과를 거둔 셈이었다.
하지만 기업경영의 투명성과 기업집단 소유·지배구조의 본질적 부분에는 변화가 미흡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였다. 국민의정부는 특히 전면금지됐던 재벌 소속 금융계열사의 타업종 주식에 대한 의결권 제한을 풀어 2002년 30%까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공정거래법을 개정했다. 임기 말 “재벌개혁이 좌절됐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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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여정부 시장개혁 원칙과 전략
참여정부 출범으로 재벌개혁은 다시 도마에 올랐다. 그러나 재벌개혁에 대한 사회적 요구와 상황은 5년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외환위기를 거치며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오고 글로벌 경쟁체제가 강화되면서 재벌비판이 많이 사라졌다. 오히려 외국 거대기업과 경쟁하려면 ‘글로벌 플레이어’를 육성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재벌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일부에서는 ‘개혁 피로증’이란 말이 오르내리기도 했다.
특히 참여정부 출범 초기인 2003년에는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 카드채 파동 등으로 경기가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개혁보다 경제부터 살려라”는 요구가 높았다.
참여정부는 재벌정책의 방향을 바꿨다. 정부의 ‘직접규율’이 아닌 시장의 ‘자율감시’에 역점을 뒀다. ‘재벌개혁’이라는 표현 대신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질서(자공시) 확립’을 과제로 삼았다. 국민의정부의 5+3원칙과 상시 구조조정 정책을 이어받되,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 질서를 만들고 이를 통해 대내외 신뢰도를 높인다는 계획이었다. 참여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경제1분과위윈회 간사를 맡았던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현 경북대 교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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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30일 확정·발표된 로드맵에는 출총제를 합리적으로 개선해 기업집단(재벌)의 소유·지배 괴리를 줄이고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폐해를 막아 투명·책임경영을 강화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 출총제 탄생과 변천: ‘출자’=‘투자’ 아니다
“출총제가 필요하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이견이 너무 분분합니다. 재계는 출자규제 때문에 투자 못한다고 아우성인데, 출자를 투자로 볼 수 있습니까? ‘출자’가 곧 ‘투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참여정부에서 ‘시장개혁 전도사’로 불리며 초기 3년간 공정거래위원장을 지낸 강철규 서울시립대 교수는 “노 대통령이 종종 이런 의문을 던졌다”고 회고했다.
국민의정부의 신용카드 버블과 부동산 경기 부양의 후유증을 안고 출범한 참여정부의 경제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인위적 경기부양은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명확히 했던 참여정부에서 경기부양과 성장률 제고의 돌파구는 기업들의 투자에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들은 투자를 활성화시키고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으려면 출총제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1986년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이후 재계는 끊임없이 이 제도의 폐지를 요구했다. 특히 1997년 IMF 외환위기 때 재계의 주장은 더욱 강해졌다. 외국기업의 국내기업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막고 외국기업과의 역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논리였다. 결국 1998년 2월 출총제가 폐지됐다.
그러나 제도 폐지 후 오히려 대기업집단의 계열사 간 순환출자가 급격히 증가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출총제 폐지 후 30대 기업집단의 다른 회사 출자는 3년 사이에 약 271%가 증가했다. 1997년 4월 기준 16조 8000억원에서 2000년 4월 기준 45조 9000억원으로 늘었다. 사업을 문어발식으로 확장하는 ‘선단식 경영’도 다시 나타났다.
위기를 느낀 정부는 2001년 4월 출총제를 부활시켰다. 하지만 각종 예외조항이 도입되며 칼이 무뎌졌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출총제를 ‘누더기’라고 비판하는 이유다. 그럼에도 2004년에는 출총제를 놓고 재계와 공정위의 한판 힘겨루기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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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4월26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브리핑실.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은 재계를 향해 쓴소리를 했다.
“우리(공정위)는 ‘출총제 때문에 기업투자가 저해된 사례가 있으면 알려달라, 성실하게 검토하겠다’고 (전경련에) 누차 얘기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직접 얘기하지 않고 기자브리핑을 한다든가, 정치적 발언을 통해 현 제도가 투자 저해의 주범이라고 발표하는 것은 잘못이다.”
바로 전날 전경련이 ‘출자총액규제로 인한 투자저해 실태와 시사점’ 보고서를 내고 출총제 조속 폐지를 주장한 데 따른 것이었다. 보고서의 요지는 “13개 출총제 기업집단을 대상으로 투자 저해 실태를 조사한 결과, 9개 기업이 출총제로 신규투자를 포기했거나 기업구조조정이 지연된 경험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강 위원장의 설명은 그 반대였다.
일상적 업무일 수 있는 기관의 보고서 발표에 강 위원장은 왜 이처럼 민감한 반응을 보였을까. 공정위는 2003년 7월 전경련에 “출자규제 때문에 투자를 못하는 사례가 있으면 검토할 테니 가져와 달라”고 요청했다. 전경련은 수개월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으로 일관했다. 출총제 때문에 투자를 못한 사례를 찾아내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재계와 공정위의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경련은 2004년 10월 24일 ‘출총제 규제로 인한 투자저해 및 경영애로 사례’ 보고서를 내고 출총제로 인한 투자 차질액이 7조 1211억원에 달한다며 재차 출총제 폐지를 주장했다.
강 위원장은 “전경련이 가져온 사례를 하나하나 검토했다. 당시 재계가 제한을 받았다고 주장했던 ‘투자’는 대부분 실물투자보다 지배력을 늘리기 위한 지분투자였다”고 지적했다. 강 전 위원장의 말이다.
“‘출자총액제한제도’라는 이름 때문에 입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뜻을 살리자면 ‘타사 주식보유 총액규제’로 이름이 바뀌어야 한다. 재계는 출총제가 투자를 억제한다고 주장하지만 전혀 사실과 다르다. ‘출자’는 계열사 등 타회사 지분취득을 의미하는 것인데 반해 ‘투자’는 공장 신·증설 등을 위한 자금투입을 의미한다. 또 필요한 출자는 현행 제도에서도 대부분 예외를 인정하고 있어 실제 투자저해 효과는 거의 없다. 재계가 출총제를 ‘투자 저해의 주범’으로 지목하는 것은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것이라고 본다.”
■ 출총제 때문에 투자 못한다던 재계의 엄살
2006년 11월21일 공정위가 발표한 ‘2006년 출총제 기업집단 출자 현황’은 과도한 규제 때문에 투자하기 힘들다고 말해 온 재계 주장을 무색케 했다.
조사 결과 2006년 4월 현재 출총제 규제를 받는 14개 기업집단의 출자여력(출총제를 위반하지 않으면서 추가로 출자할 수 있는 금액)은 20조 4860억원이었다. 이 금액은 2004년 약 7조원의 3배, 2005년 약 10조원에 비해 2배 수준이었다. 대기업집단별 출자여력은 삼성 10조 950억원, 현대자동차 3조 8940억원, 롯데 2조 6250억원, SK 1조 9850억원, GS 4120억원 순이었다.
출총제 대상 기업집단의 463개 계열사 중 출총제를 적용받지 않거나 출자할 여력이 있는 기업은 405개(87.5%)에 달했다. 나아가 출자여력이 순자산의 10% 이상 남아 있는 기업집단도 삼성, 현대자동차 등 7개 집단이었다. “출총제가 기업투자의 걸림돌”이라며 줄기차게 출총제 폐지를 주장해온 재계의 입장이 사실무근임을 확인한 셈이었다.
■ 출총제 축소, 순환출자 금지는 어디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지난 주말 읽었는데 가슴에 와 닿았다.”
2006년 11월 13일 오전 공정거래위원회 간부회의.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윤동주의 ‘서시’를 읊었다. 다음날 출총제 개편 정부안 확정을 위한 대통령 주재 관계 장관 회의를 앞두고서였다.
애초 출총제 개편 작업은 정부가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에서 “2006년 말까지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가 개선되면 출총제를 재검토 한다”고 밝힌 데 따라 시작됐다.
공정위는 2006년 7월 시장경제 선진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갑론을박 끝에 출총제를 폐지할 경우 순환출자 금지라는 대안이 적절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각종 예외 규정으로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실효성은 떨어지면서도 재계로부터 기업 활동을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아온 출총제 대신 ‘순환출자 금지’라는 정공법을 택했다.
순환출자는 재벌 계열사들이 돌아가며 출자해 총수가 적은 지분으로도 많은 지배력을 행사하도록 하는 출자 방식이다. 현행법상 A→B에 출자한 후 B→A로 다시 출자하는 상호출자는 금지돼 있지만 A→B→C→A로 이어지는 순환출자는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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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공정위의 원칙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재계는 “순환출자 금지는 출총제보다 더 센 규제”라며 “차라리 출총제를 유지하는 것이 낫다”고 노골적으로 반대했다. 정부에서도 산자부와 재경부를 중심으로 “기업규제가 더 강해지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견이 지속적으로 흘러나왔다.
2006년 10월 23일 열린 시장경제 선진화 TF 마지막 10차 회의에서도 순환출자 규제를 둘러싼 찬반 논란은 팽팽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로드맵을 만들 당시 출총제를 3년간 운용하다가 지배구조 등이 개선되면 조건 없이 폐지할 예정이었으나 아직 미진한 수준으로 판단해 순환출자 규제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다.”(이동규 공정위 사무처장)
“10개의 그룹 중 6개 그룹이 순환출자를 악의적으로 활용한다 하더라도 나머지 4개 그룹에까지 일괄 규제를 하는 것은 과잉규제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거래위원장이 순환출자 규제를 공언하는 것은 자제해야 할 일이다”(김호원 산자부 산업정책관)
“새로운 규제의 도입시에는 규제의 필요성, 당위성 뿐만 아니라 구체적 실현가능성이나 규제로 인한 부담 등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여러 가지 제도들이 지속적으로 도입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경제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부담을 야기하는 순환출자 규제는 자칫 과잉규제가 될 수 있다”(노대래 재경부 정책조정국장)
시장경제 선진화 TF에 참여한 한철수 공정위 경쟁정책본부장(현 시장분석본부장)의 말이다.
“출총제 대안과 관련한 논란은 전경련과 산자부 대 공정위와 시민단체의 구도로 진행됐다. 재경부는 가운데서 조율하는 편이었지만 전경련과 산자부의 입장을 옹호하는 쪽이었다. TF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결국 관계 장관 회의에서 결론이 났다.”
■ 2006년 선거 패한 여당, ‘타협’ 시도
여기에다 야당은 물론 여당조차 기업규제를 완화해야 한다고 나섰다. 2006년 7월 30일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은 재벌과의 뉴딜(New Deal)을 담은 ‘사회적 대타협’을 발표했다. 국내투자 확대, 신규채용 증대, 하청관행 개선, 취약계층 노동자에 대한 배려 등을 경제계가 결의한다면 출총제 폐지, 경영권 보호, 규제완화 조치 등을 여당이 나서서 실행에 옮기겠다고 제안했다.
여당은 2004년 총선에서 압승한 뒤 재계와 야당 등의 반대를 무릅쓰고 재벌의 금융 계열사 의결권 축소 등을 담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그해 말 통과시켰었다. 하지만 2006년 5·31 지방선거와 7·26 재·보선에서 참패하면서 재벌정책에 있어 원칙보다는 현실과의 타협으로 돌아섰다. ‘서민경제의 주름살 펴기’를 정책 1순위로 꼽아가며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개혁 대상이었던 재벌은 타협 대상이 됐다.
2006년 11월 15일 당정협의를 거쳐 발표된 ‘대규모 기업집단시책 개편방안'(2007년 공정거래법 16차 개정에 반영)은 출총제 적용대상을 자산 10조원 이상 기업집단 중 자산 2조원 이상 계열사로 상향조정했다. 출자한도도 순자산의 25%에서 40%로 완화했다. 기존에는 자산 6조원 이상 그룹에 속하는 모든 계열사가 적용대상이었다.
출총제 축소와 더불어 공정위가 추진해왔던 ‘순환출자 금지’는 개편안에서 빠졌다. 국내 경제 여건이 어려운 점을 감안해 기업에 대한 규제를 축소하고 투자 활성화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해야 한다는 현실론에 의해 재벌정책에 대한 원칙이 한 발 뒷걸음친 것이었다.
■ “먹튀 외자보다 재벌이 낫지”…‘반(反)외자 정서’
‘경제위기’를 앞세운 현실론과 더불어 참여정부 시장개혁 정책의 또 다른 걸림돌은 “외국자본보다는 재벌이 낫다”는 ‘반(反)외자 정서’였다.
국민의정부에서 재벌 구조조정은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부흥개발은행(IBRD)이라는 외국기관의 영향 하에 추진됐다. 그 과정에서 국내경제에서 차지하는 외국자본의 비중이 급격히 늘었다. 일각에서는 외국자본에 의한 한국경제의 종속 위험성까지 제기했다.
외환위기 이후 형성된 반외자 정서는 참여정부 들어 대기업집단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재계는 반외자 정서를 무기로 삼았다. 경영권 방어와 역차별 등을 내세우며 정부의 대표적 시장개혁 정책인 출총제와 금산분리 원칙을 공격했다.
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4월 발생한 ‘소버린 사태’는 반외자 정서를 키웠다. 2003년 초 SK글로벌 분식회계 등으로 SK그룹이 흔들릴 때 영국계 투자펀드인 소버린 자산운용은 자회사 크레스트씨큐러티즈를 통해 SK㈜ 주식을 싸게 사들였다. 소버린은 1768억원으로 SK㈜ 지분 14.99%를 매집, SK㈜의 제1주주가 됐다. 외국자본에 의한 적대적 M&A 가능성이 제기됐다.
SK㈜ 사태의 근본원인은 SK글로벌의 분식회계에서 비롯된 경영실패였다. 그럼에도 재계는 “출총제 때문에 외국자본의 적대적 M&A 시도에 맞선 경영권 방어에 문제가 생긴다”고 탓했다.
2006년 칼 아이칸의 KT&G 공격이 있었다. 이어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팔아 수조원 넘는 이익을 남길 상황이 벌어지자 ‘국부 유출론’까지 제기됐다. 2007년에는 우리은행 민영화 일정(2008.3)이 다가오자 재계는 “우리금융지주마저 외국 자본에 넘겨줄 것이냐”며 금산분리 원칙을 유지해온 정부를 공격했다.
■ 또 하나의 시장원칙 ‘금산분리’
출총제와 더불어 재벌정책의 핵심인 ‘금산(金産)분리’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분리시키는 것을 말한다. 금산분리는 산업자본이 계열금융기관을 사금고처럼 이용하지 못하도록 도입한 원칙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산업자본(재벌)의 은행 소유는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다. 반면 보험사 등 비은행 금융기관은 소유는 하되, 소유에서 오는 역기능을 막기 위해 의결권 제한과 같은 강한 규제를 두고 있다. 금융전업그룹 역시 산업자본을 소유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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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시절인 1986년부터 재벌 소속 금융기관의 계열사 주식에 대한 의결권 행사를 전면 금지해왔지만 국민의정부는 2002년 이를 30%까지 완화했다. 외환위기 후 외국자본의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해 공정위가 실태조사를 벌인 결과 상당수 재벌들이 금융사 의결권을 M&A 방어보다는 주식취득과 자산관리에 써온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위가 2003년 9월 9일 공개한 ‘재벌들의 금융사 의결권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공정위가 지정한 기업집단 소속 금융·보험사가 지분을 갖고 있는 계열사는 2001년 4월 114개에서 2년만에 144개로 26.3% 증가했다. 이들 기업집단 금융·보험사가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 지분은 2001년 4.62%에서 2003년 8.06%로 2년 만에 1.7배 늘었다.
또 2002년 1월~2003년 7월말까지 행사된 금융사 의결권은 모두 193회로, 이 가운데 공정거래법상 M&A 방지 조항에 따라 사용된 경우는 70회에 불과했다. 반면 금융업을 위한 주식 취득 등 다른 목적으로 사용한 경우는 169회로 M&A 용도의 2.4배를 넘었다.
참여정부는 의결권 완화에 따른 부작용을 바로잡아야 했다.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을 바탕으로 2004년 마련된 공정거래법 개정안에는 금융 계열사 의결권을 절반으로 줄이는 내용이 포함됐다. 2006년부터 연 5%씩 줄여나가 2008년까지 15%가 되도록 한다는 계획이었다.
재계는 외국자본에 대한 경영권 방어를 위해서는 의결권 제한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맞섰다. 이 같은 논리는 “한국 대표기업인 삼성을 외국자본에 넘길 것인가”라는 주장으로까지 확대됐다. 삼성전자의 적대적 M&A 주장은 현실성이 희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었다. 그럼에도 일부 정치권과 언론은 ‘반(反)외자 정서’를 등에 업고 재계의 주장에 맞장구를 쳤다.
■ 재계·언론의 합창, “삼성전자 적대적 M&A 된다?”
정부의 시장개혁 정책을 공격하기 위한 ‘비현실적’인 현실론은 2006년 12월 22일 금융산업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때도 그대로 반복됐다.
5공화국때부터 있었던 출총제와 금산분리를 참여정부의 ‘비뚤어진 반(反)재벌 코드’라고 비판한 일부 언론과 경제신문들은 금산법 개정안 통과 문제를 다루면서도 편향된 시각을 보여줬다. ‘삼성보다 더 호들갑스런 언론’이란 기사(미디어오늘 2006년 12월 25일자) 내용(요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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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은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금산법의 기본 취지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면서 오로지 삼성의 ‘적대적 M&A 노출’에만 방점을 찍는다. ‘손발 묶인 삼성전자 적대적 M&A 노출’(한국경제), ‘외국기관 2∼3곳 뭉치면 삼성전자 M&A 당할 수도’(매일경제) 등을 비롯, 서울경제 사설 ‘삼성전자마저 경영권 불안에 내몰려서야’는 '삼성 사보'의 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경향신문이 사설 ‘기업의 투명한 지배구조를 세우는 계기로’에서 지적했듯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의 금산법 개정을 계기로 앞으로는 기업의 소유 및 지배구조 행사가 투명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여러 핵심 계열사로 이어지는 순환출자를 이용해 계열사에 대한 경영권을 편법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금산법 개정안을 마련했는데 이에 대한 언급이나 평가는 없이 오로지 ‘삼성 경영권 방어’나 ‘적대적 M&A 노출 위험성’만 부각하는 것은 형평성 차원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다. 위험성의 지나친 과장의 이면에는 결국 ‘재벌개혁’에 대한 칼날을 더 무디게 하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 금산법 개정안을 둘러싼 논란
금산법 개정안은 2006년 말 국회를 통과하기까지 2년 가까이 개정 논의가 진행되면서 팽팽한 찬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금산법 개정안은 국내 대표 기업집단인 삼성그룹의 소유·지배 구조와 맞물려 있었는데, 삼성이 이 규정에 위반된 것이 문제였다.
금산분리를 대원칙으로 하는 금산법 제24조는 금융기관을 이용한 기업결합을 제한하기 위하여 기업집단에 속하는 금융기관이 다른 회사 주식을 20% 이상 소유하거나, 다른회사 주식을 5%이상 소유하면서 다른 회사를 사실상 지배(최대주주가 되는 것)할 경우 미리 금융감독위원회의 승인을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1997년 3월부터 시행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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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초 금융감독위원회는 삼성카드가 에버랜드 주식을 25.64%나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금감위는 2004년 6월 대기업의 금융계열사들에 대한 일제조사를 통해 삼성생명이 삼성전자의 지분 7.2%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 등 총 11개 기관의 금산법 위반행위를 적발했다. 금감위는 위반 회사들에 대해 법 위반 상태를 해소할 것을 요구했다. 모두 이를 이행했다. 유독 삼성만 이를 거부했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을 금산법이 제정된 1997년 이전에 이미 소유하고 있었다. 또 삼성카드는 1998년 중앙일보 계열분리와 2004년 삼성캐피탈 합병 과정에서 금감위 승인을 받지 않고 삼성에버랜드 지분 25.6%를 보유하게 됐다.
하지만 금산법에는 이상하게도 위법상태를 적극적으로 시정할 수 있는 수단(의결권 제한, 처분명령 등)이 없었다. 2000년 법 위반 회사에 대한 벌칙과 과태료 부과 조항이 추가됐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삼성 금융계열사는 위법상태로 계열사 지분을 계속 보유할 수 있었다.
정부는 금산법의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법률 개정에 나섰다. 2004년 7월 금감위는 금융기관의 법 위반행위를 시정할 수 있도록 재경부에 금산법 개정을 요청했다. 재경부는 11월말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재경부는 다음해 1월31일 법제처에 개정안 심사를 요구했다. 법제처 심사과정에서 당초 입법예고된 부칙 조항의 내용을 보다 명확히 기술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따라 입법예고안에서 2개였던 부칙 조항은 △1997년 금산법 제정 이전에 취득한 주식은 금감위 승인을 받은 것으로 간주 △처분명령 등 시정조치는 개정 법률 시행 이후 적용 △법률 개정 이전 취득한 주식은 의결권만 제한 등의 내용으로 구체화되며 6개로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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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5일 노무현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 이날 회의에서는 금산법 개정안을 두고 설전이 벌어졌다. 오른쪽에 한덕수 당시 경제부총리가 앉아있다. <사진=연합뉴스> |
“조항 일부가 특정 재벌(삼성)에 면죄부를 준다는 논란이 있던데 설명을 해보라.”
2005년 7월 5일 국무회의 석상에서는 보기 드문 설전이 벌어졌다. 노 대통령은 이날 금산법 개정안에 대한 설명을 듣고 한덕수 부총리에게 이같이 물었다. 노 대통령은 국무회의에 앞서 이정우 당시 정책기획위원장에게 금산법 개정안의 부칙조항에 대한 보고를 받은 터였다. 이 전 위원장의 회고다.
“국무회의에 재경부의 금산법 개정안이 상정된다는 사실을 그 전날 저녁 ‘우연히’ 알게 됐다. 중요한 안건의 경우 미리 관계장관과 청와대 참모들의 회의를 거친다. 이같은 조율 과정도 없이 중요한 안건이 국무회의에 올라간 전례가 없었다. (조율 없이 올라왔기 때문에) 상당히 의심스러웠다.
그날밤 몇 시간 동안 알아본 끝에 내용을 파악해 다음날 국무회의에 앞서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국무회의 도중 문제를 제기했다. 법률안은 그날 통과됐지만 대통령 지시로 민정수석실에서 재경부와 금감위 등 관련부처를 상대로 개정안 마련 경위에 대해 조사했다. 정실 개입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 문제에 대해 ‘뭔가 이건 좀 이상하다’ 싶은 게 마음에 남아 있다.”
■ 삼성 봐주기? 저마다 다른 해석
정책기획위원장의 눈에도 이상하게 비춰졌던 금산법 개정안이 국민들에게 정상적으로 비춰졌을 리 만무했다. 시민단체와 여당 일부 의원들은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위반 주식에 대해 당장 매각명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정안 마련 과정을 둘러싼 재경부의 ‘삼성 봐주기’ 의혹이 제기됐다. 특히 박영선 의원(열린우리당)은 “삼성카드의 삼성에버랜드 지분은 과거 위법 상황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금산법을 위반한 주식은 모두 강제 처분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자체 개정안을 발의했다. 정부안과 박영선 의원안을 놓고 당 내에서 의견이 엇갈렸다.
사실상 삼성을 유일한 대상으로 하는 금산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여론도 만만치 않았다. 재계와 야당은 “삼성 때리기”라며 정부를 공격했다. 당사자인 삼성은 “처벌규정이 없었던 당시 취득한 지분에 대해 소급해 처분명령을 적용하는 입법은 위헌”이라고 맞섰다.
우여곡절 끝에 삼성카드의 에버랜드에 대한 초과보유지분에 대해서는 5년 내에 매각하도록 하되, 삼성생명의 삼성전자에 대한 초과보유지분에 대해서는 의결권만 제한하기로 하는 개정안이 최종적으로 2006년 말 국회를 통과했다.
삼성그룹에 대한 영향이 커 숱한 의혹을 낳았던 금산법 개정안. 개정 과정에 직접 참여했거나 혹은 이를 가까이서 지켜봤던 사람들의 해석은 저마다 다르다.
개정안 마련 과정에서 재경부와 날카롭게 맞섰던 박영선 의원은 2006년 말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관료가 부패했거나 투명하지 못하다는 차원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사무관이 된 순간부터 의사결정권자가 되기까지 약 20년 동안 접하는 이들이 주로 재벌이나 건설업자들이고, 반대쪽 목소리를 들을 기회가 많지 않다 보니 빗방울에 돌이 뚫리듯 그쪽 논리에 젖어들 수밖에 없다는 걸 (법안 심의과정에서) 느끼게 된다.”
2004년 금산법 위반사례 조사 등을 지휘한 이동걸 금감위 부위원장(현 금융연구원장)의 설명은 이렇다.
“금산법 개정안이 나오게 된 것은 삼성과 관련이 깊다. 2004년 일제 조사 후 다른 회사들은 모두 시정했는데 삼성만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삼성은 금산법 24조가 그룹 지배구조의 핵심문제라고 여겼다. 소급입법 논란과 관련, 2004년 금감위 법무팀은 이 사안을 부진정 소급으로 판단, 소급적용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삼성쪽에서는 아니라고 버텼다. 그때부터는 파워게임 양상이었다. 결과적으로 삼성에 유리하게 개정안이 만들어져 이후 무수한 의혹과 논란의 대상이 됐다.”
당시 재경부 금융정책과에 근무했었던 최용호 서기관은 “시민단체에서는 (삼성)초과 보유주식을 처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했을 경우 현실 경제에서의 (삼성)영향력이나 파급효과 등을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단칼에 무 자르듯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정부는 현상(주식소유)은 유지시키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대주주 규제를 만드는 등 후속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질서, 어디까지 왔나
참여정부의 시장개혁 정책의 핵심 과제였던 ‘자공시(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질서)’는 어느 정도 달성됐을까.
상속·증여세 완전포괄과세와 증권분야 집단소송제가 각각 2004년과 2005년에 도입됐다. 공정거래법 개정으로 금융계열사 의결권은 30%에서 15%로 축소됐다. 2007년 통과된 상법 개정안을 통해 ‘회사기회 유용 금지’ 등과 같이 지배주주의 사익추구행위에 책임을 묻는 상법상 사후규율제도도 도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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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거래위원회는 2007년 기업집단에 대한 정보를 한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포털 사이트 '오프니(http://groupopni.ftc.go.kr)'를 개설했다. 오프니 메인화면. |
2004년 1월 마련된 ‘산업자본의 금융지배에 따른 부작용 방지 로드맵’에 따라 2007년 6월에는 산업자본의 금융지배를 막는 장치를 담은 증권거래법 등 7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법안에는 비은행 금융기관과 대주주간 거래 등에 대한 이사회 결의 및 공시를 의무화하고 사외이사 선임 비율을 늘리는 등 규제 장치를 강화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특히 참여정부 들어 투명한 시장 질서를 위한 정보공개가 대폭 확대됐다. 정부는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에 따라 2004년부터 대기업 집단 총수일가의 소유·지분 구조를 분석한 일종의 ‘지분족보’를 매년 공개하고 있다. 공정위는 2007년에는 기업집단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는 포털 사이트를 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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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대기업집단에 대한 지주회사로의 전환 유도로 소유·지배구조가 단순화된 지주회사는 참여정부 들어 크게 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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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출총제는 대폭 완화됐다. 금산분리 원칙은 유지와 완화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참여정부의 시장개혁 정책, 쉽게 말해 재벌개혁 정책이 ‘전투에서 이겼지만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인상을 주는 이유가 여기 있다.
대기업집단, 이른바 재벌은 어쩌면 과거 정부가 전략적으로 키운 우리 경제의 ‘스타플레이어’다. 우리나라는 1960∼80년대를 거치며 정부와 대기업, 금융의 밀접한 연계를 특징으로 하는 시스템을 통해 산업화를 추구했다. 부족한 자본을 국가가 동원하되, 이를 특정 기업에 집중 지원함으로써 고저축·고투자의 선순환을 유지했다.
재벌은 이 과정에서 한국의 고도성장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동시에 외환위기에서 보듯 시장 왜곡을 야기해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순환출자는 지분을 훨씬 뛰어넘는 의결권으로 계열사 전체를 지배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었다. 이로 인한 권한과 책임의 불일치는 책임경영을 사실상 불필요하게 만들었고, 도덕적 해이와 과잉투자를 낳은 주요인의 하나였다.
스타플레이어일수록 경기규칙을 잘 지켜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재벌들은 영향력을 등에 업고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경기 규칙을 바꾸거나 없애라는 요구를 끊임없이 했다.
참여정부에서 3년 동안 시장경제 파수꾼을 자처했던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의 의견이다.
“공정거래를 위한 제도들은 규제가 아니라 룰이다. 반칙에 대한 기준이다. 그런데 이걸 규제라고 생각하고 자꾸 ‘반(反)시장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유재산권이나 계약·거래의 자유를 침해하고 제약하는 게 반시장적인 것이다. 공정거래를 위한 규율은 시장적인 것이다. 시장의 규칙을 바로세우는 일은 기업을 돕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참여정부는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질서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재벌의 순환출자나 소유·지배구조의 괴리 등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다. 재계의 주장처럼 출총제는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제도다. 그렇지만 ‘재벌’ 역시 우리나라에만 존재한다. 재벌이 시장의 자유경쟁을 가로막는 한 재벌정책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