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태극기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콘텐츠 영역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니 입으로 깨닫겠는가

[손철주의 옛 그림으로 무릎치기 ②] 정선 ‘어초문답(漁樵問答)’

2012.10.19 손철주(미술평론가)
글자크기 설정
인쇄하기 목록

정선, ‘어초문답’, 18세기, 비단에 채색, 23.5×33㎝, 간송미술관 소장
정선, ‘어초문답’, 18세기, 비단에 채색, 23.5×33㎝, 간송미술관 소장

겸재 정선이 그린 산수화 한 점을 보자. 산수화이긴 한데, 인물이 떡하니 무대 중앙에 자리를 잡았다. 잎들이 무성한 두 그루 나무와 그 곁에 거품이 일 정도로 콸콸거리며 내달리는 계곡 물이 보인다. 두 사람의 신분은 뻔하다. 나무꾼과 어부다. 길쭉한 지겟다리 뒤로 빼곡히 쌓인 땔감이 푸지다. 등짐을 부리고 나서 나무꾼은 편히 다리쉼을 한다. 어부도 옆으로 길게 다리를 뻗었다. 낚싯대와 망태기, 그리고 벗어놓은 삿갓이 가지런하다. 그들은 지금 한갓진 얘기를 나눈다. 참 태평스러운 분위기다.

이 그림을 그저 그런 산골 풍경이라고 치부하면 안 된다. 나무하러 다니고 고기나 낚은 이들이 뭐 그리 대수냐며 의문을 품을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옛 문헌은 이들을 달리 치장한다. 남루한 차림새에 지혜를 감춘 은사이거나 고수로 나온다. 아닌 게 아니라, 어부 ‘漁(어)’ 자와 나무꾼 ‘樵(초)’ 자는 속이 깊숙한 선비들의 호에 자주 나오는 돌림자다. 그러니 시쁘게 보다가는 큰코다친다. 겸재는 자기 그림 속에 제목을 써놓았다. ‘어초문답(漁樵問答)’. 곧 ‘어부와 나무꾼이 묻고 답한다’는 뜻이다. 과연 무엇을 묻고 무엇에 대답하는 것일까.

두 직업인이 주고받는 대화는 중국의 문헌에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얘기는 북송의 학자 소옹(邵雍)의 것이다. 어부와 나무꾼이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는데, 처음에는 각자 하는 일에 대한 궁금증으로 실타래를 푼다. 그러다 점점 단수가 높아진다. 그들은 마침내 천지만물의 의리까지 논한다. 숱한 담론이 오고가지만, 내가 읽은 바로는 말로써 말 많은 세상을 꾸짖는 대목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소옹은 어부와 나무꾼의 입을 빌어 요약한다. ‘군자는 행동이 말을 이기고, 소인은 말이 행동을 이긴다.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망지(妄知)이고 입으로 깨닫지 못하는 것이 망언(妄言)이니, 어찌 망인(妄人)을 따르겠는가.’

망지, 곧 요망한 지식이란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개혁적인 신법으로 잘 알려진 왕안석은 총명한 아들 원택을 두었다. 원택의 재능은 어려서부터 소문났다. 어떤 이가 노루와 사슴 한 마리씩을 왕안석의 집에 보냈다. 원택에게 누가 물었다. “어느 놈이 사슴이고 어느 놈이 노루인가?” 원택은 어느 게 어느 건지 몰랐다. 그래도 대답했다. “노루 옆에 있는 놈이 사슴이고 사슴 옆에 있는 놈이 노루다.” 이게 망지다. 모르는데 모른다고 하지 않고, 얼버무려 자신의 졸렬함을 덮으려는 아만(我慢)에서 요망한 지식은 나온다. 망언은 알다시피 요망한 말이다. 원택의 대답도 워딩 그대로 보면 망언이고, 망언을 내뱉게 하는 그 마음자리로 따지면 망지다. 무릇 망지에서 망언이 샘솟는 법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우리는 잘 안다. 알면서도 하기 어려운 것이 또한 ‘제대로 말하기’다.

조선 후기 학자 김창흡은 말로써 말 많은 세상에서, 말 제대로 하고 말 제대로 알아듣는 일이 왜 힘든지를 조목조목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말을 주고받을 때 앞뒤가 잘 맞지 않은 이유를 먼저 들려준다. 첫째, 거칠고 엉성하여 말의 맥락을 살피지 못한다. 둘째, 치밀하고 고지식하여 말의 논리에 얽매인다. 셋째, 너무 영특하여 억측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넷째, 어리석고 식견이 짧아 귀착점을 찾지 못한다. 다섯째, 비근한 말을 듣고 고원한 데서 탐구하거나, 오묘한 의론을 듣고도 천박하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논리로 밀리게 되면 이기려는 마음이 발동해 남의 말에 흠집을 찾아내 억지로 꺾으려 한다. 말의 앞뒤를 다 잘라먹고 달랑 한 구절만 거론하거나 본뜻을 살피지 않고 지엽적인 것만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 이리 되면 벌어질 소란은 불문가지다. 멱살잡이와 드잡이가 뒤따른다.

다시 겸재의 작품으로 돌아가자. 어부와 나무꾼이 얘기 나누는 품새를 차분히 보라. 저런 것을 일러 ‘흉금을 터놓은 모습’이라 한다. 말을 하되 말꼬리를 물고 늘어질 심산이 없다. 물어보나 마나, 시시콜콜한 세상사 시비를 의론에 올리고 싶지도 않을 게다. 소설 ‘삼국지’의 서시(序詩)에도 어부와 나무꾼이 나오는데,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다. 그들은 물보라처럼 스러진 숱한 영웅을 헛되이 여기고 그저 가을 달과 봄바람을 즐길 뿐이다. 마침내 한 잔의 탁주를 나누며 그들은 노래한다. ‘예부터 지금까지 크고 작은 일 끊이지 않았지만(古今多少事)/ 그 모두가 웃으며 하는 말에 부칠 따름(都付笑談中).’ 한데, 나 같은 범인은 어부와 나무꾼처럼 초탈하지 못하니 근심이다. 말에 대해 말을 해야 할 때는 어찌할꼬. ‘함께 말할 만한 상대인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는 것이고, 함께 말할 상대가 아닌데 말하면 말을 잃는 것이다.’ 참으로 어렵구나, 공자의 가르침이여.

◆ 손철주(미술평론가)

◆ 손철주(미술평론가)
 서울경제신문 기자, 국민일보 문화부장, 동아닷컴 취재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그림 보는 만큼 보인다’ ‘꽃피는 삶에 홀리다’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속속들이 옛 그림 이야기’ 등이 있고, 공저로 ‘다, 그림이다’ 등이 있다.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동한다.

하단 배너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