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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연금개혁의 역사적 의미

2025.04.17 석재은 한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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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개혁은 단순 보험료 인상이 아니라, 기금이 고갈되기 전 구조개혁을 준비할 수 있는 전략적 시점에 이루어진 역사적 전환이었다. 더불어 모수개혁을 넘어 구조개혁 논의를 본격화하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번 개혁은 제도의 '완결'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연금을 향한 로드맵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석재은 한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석재은 한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2025년 봄, 지난했던 국민연금 개혁이 마침내 일단락되었다. 국민연금은 도입 이후 5년마다 재정계산을 통해 개혁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그때마다 논의는 반복적으로 유예되어 왔다. 이번 개혁은 통상 세 번째 개혁으로, 무려 18년 만의 결실이자 정치권의 역사적 결단을 통한 사회적 합의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이번 개혁안은 보험료율을 13%로, 소득대체율을 43%로 인상하는 모수개혁안이다. 이는 국민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에서 부담을 높이는 동시에, 노후소득의 보장성을 일정 수준 강화한 정치적 절충안으로 평가된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분명 진일보한 개혁이지만, 기금고갈 시점을 8~15년 연장하는 수준에 머무른 점에서 여전히 불완전한 개혁이라는 한계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 개혁은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당장 수년간은 적립기금을 헐어 쓰지 않고, 보험료 수입만으로 연금 지출을 충당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금의 운용수익이 재정의 한 축으로 온전히 유지될 수 있게 되었고, 기금운용수익이 훼손될 수 있던 위기국면에서 '급한 불'을 끄고, 보다 근본적인 구조개혁을 위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이번 개혁은 제도의 '완결'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연금을 향한 로드맵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여야가 지난달 20일 국민연금 개혁안에 최종 합의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2025.3.20.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여야가 지난달 20일 국민연금 개혁안에 최종 합의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구 국민연금공단 서울북부지역본부. 2025.3.20.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개혁안에는 청년세대의 불안을 해소하고 제도에 대한 신뢰를 제고하기 위한 조치들도 포함되었다. 국민연금법 제3조의 2를 개정하여 국가의 연금지급 책임을 명문화하였고, 출산크레딧을 첫째아부터 12개월 인정하도록 확대하고, 군복무크레딧도 12개월로 확대하였다. 더불어 저소득자에 대한 보험료 지원 확대 등 청년층의 연금가입 기간을 보완하고 보장성을 높이기 위한 장치들이 마련되었다.

무엇보다 이번 개혁의 역사적 의미는 국민연금 도입 37년 만에 제도설계시 결정되었던 '3-6-9% 인상계획' 이후, 처음으로 보험료율 인상이 단행되었다는 데 있다. 1988년 3%로 시작한 보험료율은 1998년 9%까지 단계적으로 인상된 이후, 무려 27년간 동결되어 있었다. 이번 인상은 단순한 재정수지 보전 조치를 넘어, 연금재정의 운영방식을 준(準)적립방식(partially funded)으로 전환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깊은 의의를 가진다.

전통적인 부과방식(pay-as-you-go) 연금은 일하는 세대가 은퇴 세대의 연금을 부담하는 구조로, 고령화가 진행될수록 보험료 부담이 가파르게 증가한다. 실제로 많은 유럽 국가들이 적립기금 없이 이 구조를 유지하다가, 보험료율을 20% 이상으로 올리거나 대규모 국고를 투입해야 했다. 반면 적립방식(funded)은 세대 내부에서 자율적으로 부담과 급여를 조정할 수 있는 '셀프 부양'구조로, 고령화 충격에 보다 자유롭고 탄력적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나라다. 2050년에는 인구의 40%가 65세 이상이 되고, 2070년에는 생산연령인구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울트라 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연금재정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는 기술적 문제를 넘어, 세대 간 정의와 제도의 존속을 위한 핵심적 관건이 된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은 아직 기금이 존재하는 시점에서 선제적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국민연금은 현재 1,200조 원 이상의 적립기금을 보유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기금이 계속 쌓이고 있는 구간에 있다. 이번 보험료율 인상은 이 기금 누적 구간을 연장하여, 기금운용수익과 보험료수입이 재정의 양축으로 기능하는 '준 적립방식'의 연금 운영구조를 제도적으로 가능케 한 첫 걸음이었다. 즉, 9%에서 13%로의 보험료율 인상은 단지 기금고갈 시점을 미루는 조치가 아니라, 기금을 유지하고 운용수익을 확보함으로써 제도의 지속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높이려는 '철학적 전환'이라 볼 수 있다.

기금이 존재하는 한, 보험료 수입과 운용수익이라는 두 개의 재정 축이 작동하면서 노동인구 감소의 충격을 흡수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생산인구 1명이 노인 1명을 부양해야 하는 시대가 오더라도, 적립기금이 잘 운용된다면 청년세대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보험료 부담은 피할 수 있다.

실제로 제5차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는 이러한 가능성을 시뮬레이션으로 입증했다. 소득대체율 40% 기준으로 보험료율을 15%로 인상하고, 수급연령을 2048년까지 68세로 상향하며, 기금운용수익률을 5.5%로 유지할 경우, 70년간 기금 고갈 없이 지속 가능한 연금 모델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제시되었다. 현 개혁안이 적용한 소득대체율 43% 기준에서도 보험료율을 16.5%까지 점진적으로 인상하고,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하여 인구 및 경제 변동에 따른 미세조정을 시행하면, 수지균형보험료율인 21.2%보다 낮은 수준에서 준 적립방식 운영이 가능하다.

결국 이번 개혁은 단순한 4%포인트의 보험료 인상이 아니라, 기금이 고갈되기 전 구조개혁을 준비할 수 있는 전략적 시점에 이루어진 역사적 전환이었다. 한국은 연금의 위기시계가 본격화되기 전, 먼저 대응할 수 있는 소수의 나라 중 하나다. 이번 개혁은 미래세대를 위한 준비의 첫걸음이었다.

더불어 이번 개혁은 모수개혁을 넘어 구조개혁 논의를 본격화하는 사회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향후 개혁과정에서는 보험료율 추가 인상, 수급연령 상향, 자동조정장치 도입 등 지속가능성 제고를 위한 마스터플랜 수립이 필요하다. 보장성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기초연금은 빈곤해소에 집중하고, 국민연금은 소득비례 연금으로 재편하며, 적용포괄성과 가입기간 확대, 퇴직연금의 내실화 등 다층 노후소득체계의 정비 방향도 함께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공적연금은 특정 세대의 이익을 위한 제도가 아니다. 그것은 세대 간 신뢰를 지키고, 공동체 전체의 미래를 위한 사회적 기반 인프라다. 이번 개혁은 그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미래를 향한 첫걸음을 디딘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시도였다. 준적립방식과 기본보장의 방향을 따라, 우리 모두가 연금을 다시 성숙하게 논의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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