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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장 단상

2019.10.18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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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정말 오랜만에 마주친 단어였다. 아스라한 기억 속에 갇혀있던 세 글자.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눈앞에 있었다. 한글날 이틀 뒤인 10월 11일 대학로에 점심 약속이 있어 나갔다. 휴일도 아닌데 대낮의 젊은이 거리에 어머니들이 많이 있었다. 공원을 가로지르는데 가설무대가 보였다. ‘제37회 마로니에 전국여성 백일장’

백일장. 이 단어를 보는 순간 가슴이 뛰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아니, 4차 산업혁명 5G 속도의 시대에 아직도 ‘백일장’을 한다니. 그런데 정말 백일장이었다. 공원 벤치와 주변 아르코예술극장 계단, 근처 카페 등을 ‘문학소녀’들이 점령했다. 핸드백을 원고지 받침대 삼아 열심히 글을 써나가거나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아이 손을 잡거나 갓난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온 젊은 엄마들, 백발의 할머니, 발랄한 청바지 차림의 20대 직장 여성이거나 대학생, 여고생으로 보이는 이들까지 다양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동아제약의 후원을 받아 1983년부터 주최해온 전통 있는 백일장이었다.

참 보기 좋았다. 태풍이 지나간 후 바람은 삽상하고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세상은 소란하고 다들 먹고살기 바쁘다지만 글의 향기와 삶의 여유가 묻어나는 대학로의 가을 정경은 평화로웠다. 나도 문학소년으로 돌아가 한 자리 꿰차고 앉아 책장이라도 넘기며 그 풍경에 끼어들고 싶었다.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이날 455명의 여성이 문재(文才)를 겨루었다. 사전에 인터넷으로 또는 현장에서 바로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이날 현장에서 개봉된 글제는 ‘약속’ ‘가방’ ‘어제’ ‘일기장’ 네 개였다. 산문과 시, 아동문학(동시, 동화) 세 부문 중 어느 걸 선택해도 된다. 주어진 세 시간 안에 주최 측이 나눠준 원고지에 손으로 써야 한다. 총상금 2,000만 원. 장원(壯元)에게는 등단의 기회가 주어진다.      
       
‘백일장(白日場)’이라는 단어는 사실 그리 문학적이거나 낭만적이지는 않다. 조선 태종 때부터 유생들의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시제(試題)를 내걸고 즉석에서 시문(詩文)을 겨루게 한 행사였다. 달밤에 시재(詩才)를 견주는 망월장(望月場)에 빗대 백주 대낮(白日)에 한다 해서 생겨난 말이라 한다. 백일장은 나라가 주관하는 과거와 달리 벼슬과는 관계가 없고 개인적 명예였다. 

어쨌든 모니터가 원고지요, 손가락 열 개가 펜인 21세기 인터넷 시대에 지필묵 냄새가 물씬 나는 백일장이 버젓이 살아남아 있다는 게 반가웠다.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봤다. 지자체나 대학, 기관, 기업이 주최하는 백일장이 제법 많다. 내가 견문이 부족한 탓이지 백일장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빼어난 문인을 배출한 지역에서 가을에 축제나 예술제를 하면서 백일장을 여는 곳이 많았다. 춘천 김유정문학촌, 양평 황순원문학촌, 평창 효석문화제, 안동 이육사문학축전, 인제 만해축전, 강진 영랑백일장 등이 전통과 권위가 있다. 서울시교육청과 남산도서관이 주관하는 남산백일장, 연세대의 윤동주 백일장, 연세대 한국어학당이 주최하는 외국인 한글백일장, 성균관대 전국고교 백일장, 한국작가회의 전국고교생 백일장 등도 오래 됐고 참가자자가 많다. 각급 기관이나 기업도 백일장이라는 이름을 내건 일회성 행사를 하는데 일종의 홍보나 마케팅을 위한 인터넷 현상공모가 대부분이다.

백일장의 맛은 즉흥, 경연, 손글씨가 아닌가 싶다. 인터넷 검색의 도움 없이 순전히 스스로의 머리와 가슴 속에서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시상(詩想)을 표현하고, 스펙과 상관없이 같은 글제를 놓고 같은 시간 내에 공평하게 재주를 겨뤄 평가를 받고, 손글씨로 빈 종이를 채워나가는 경험…. 모니터를 뛰쳐나와 자연에서 펼쳐지는 오프라인의 세상. 새롭고 놀라운 창작의 마당이다. 문재(文才)는 이곳에서 정직하게 드러난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 어느 어린이신문사가 주최한 백일장에 나가 어쭙잖은 상이나마 탄 적이 있다. 그게 내 진로에 조금은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나이 지긋한 작가들 인터뷰를 보면 학창 시절 백일장 당선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때만 해도 가을은 백일장과 사생대회, 운동회였다.

백일장이 사라지지 않고 더 많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가을이 깊어간다.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지역 축제를 골라 여행도 하고 백일장에도 한번 참가해보면 어떨까. 짧고 경박한 메신저 문장에서 벗어나 긴 호흡의 진중한 글을, 내 필기구로, 내 온몸으로 써본다는 건 삶의 경이로운 경험이 될지도 모른다. 상을 못 받으면 또 어떠랴. 글을 쓸 수 있는 한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글쓰기는 결국 삶의 성찰과 치유와 해방이다. 그러다 혹 장원이라도 하면? 자서전 첫 페이지에 장식할 일이다.     
 
입시와 취업 경쟁의 시대에 청춘문학도 사라졌다. 이 시대 청춘은 모방과 대필과 과장과 거짓의 ‘자소설’에 목을 맨다. 창작이 아니다. 진정한 내가, 내 모습이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스펙을 지어 넣을 뿐이다. 한번쯤 아이들을 데리고 백일장에 나가 보자. 그런 당신은 정말 괜찮은 부모다.  

한기봉

◆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한국일보에서 30년간 기자를 했다. 파리특파원, 국제부장, 문화부장, 주간한국 편집장, 인터넷한국일보 대표, 한국온라인신문협회 회장을 지냈다.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로 언론과 글쓰기를 강의했고, 언론중재위원을 지냈다. hkb82107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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