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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남북정상회담

2018년 4월 27일, 프레스센터에서 역사를 보았다

2018.05.04 김보협 한겨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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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밤을 낮으로 낮을 밤으로 뒤 바꾸는 일이라구
하늘을 땅으로 땅을 하늘로 뒤엎는 일이라구”

지난달 27일 경기도 고양 킨텍스에서 폭풍같은 하루를 보내고 난 뒤 오래 전 읽었던 시가 떠올랐다. 자신의 시처럼 역사를 살다 간 문익환 목사의 ‘잠꼬대 아닌 잠꼬대’라는 제목의 시다. 

문 목사는 30년전인 1989년 초 이 시를 발표하고 두 달 뒤 평양을 방문했다. 그 날 밤, 문 목사처럼 역사를 살지는 못했지만 역사를 적었다는 사실에 달궈진 가슴이 쉽게 식지 않았다.

남북정상회담 전, 그 많던 우려와 야유와 저주를 말끔하게 씻어버린 12시간의 마법이었다.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난달 4월 27일 아침 경기 일산 킨텍스 메인프레스센터에서 취재진이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출발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2018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지난달 4월 27일 아침 경기 고양 킨텍스 메인프레스센터에서 취재진이 문재인 대통령의 청와대 출발 생중계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쪽 판문각에서 모습을 드러낸 9시30분부터, 만찬을 마치고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의 환송을 받으며 차에 오른 밤 9시30분까지 실내에서 열린 회담과 만찬을 제외하곤 대부분 생중계됐다. 

2000년과 2007년 정상회담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동과 재미가 있었다. 내외신 기자 3000여명이 모여있는 메인 프레스 센터에서도 중계된 영상을 보는 것은 마찬가지 아니냐고 묻는다면, 2002년 월드컵 축구 경기를 집에서 보는 것과 거리에서 붉은악마들과 응원하면서 즐기는 것은 다르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다. 

프레스 센터에 있던 기자들의 ‘본업’은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지만, 그들도 사람인지라 가슴 졸이고 눈물 흘리다 웃음이 터져버리는 장면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저마다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꼽는 부분은 다를 것이다. 

필자는 정상회담 사흘 전인 24일치 <한겨레>에 ‘문 대통령, 군사분계선 넘어가 김정은과 함께 내려올까’라는 제목으로 “남북 정상이 수십년간 분단의 상징이었던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함께 넘나든다면, 분단의 ‘선’을 평화와 화해의 ‘면’으로 바꾸자는 10여년 전 합의를 직접 실천해 보이는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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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아무렇지 않게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장면이 압권이었다. 두 정상이 군사분계선에서 만나 악수하는 순간 환호와 박수가 터져나오기 시작하더니, 손을 잡고 북쪽으로 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넘어서자 숙연해졌다. 

프레스 센터가 웃음바다로 바뀐 적도 여러번이었다. 두 정상만 카메라 앵글 안에 들어오기로 했던 순간에 김여정·김영철 등 북쪽 수행원들이 따라 붙었다가 황급히 화면 밖으로 사라진 장면이나 두 정상 대신 북쪽 기자의 엉덩이가 화면을 가득 채운 순간은 각본없는 코미디였다. 전세계로 타전된 그 영상 속 주인공을 언젠가 만나게 되면 ‘세상에서 가장 얄미운 엉덩이를 가졌다’고 놀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면발이 불지 않도록 평양 옥류관 수석주방장이 제면기까지 직접 공수해서 대접한 평양냉면.
면발이 불지 않도록 평양 옥류관 수석주방장이 제면기까지 직접 공수해서 대접한 평양냉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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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되어 북쪽 인민들 앞에서 늘 근엄한 모습으로만 비쳤던 김정은 위원장의 유머도 내외신 기자들의 피로회복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김 위원장은 남북정상회담 머리발언에서 “평화와 번영, 북남관계에서 새로운 역사를 쓰는 그런 순간에서, 출발선에서 신호탄을 쏜다는 그런 마음”이라고 말했다가 ‘신호탄을 쏜다’는 표현이 걸렸던지 묘한 웃음을 지었다.

현장에 있던 한 기자는 “당신은 앞으로 아무 것도 쏘지 마”라고 말하기도 했다. 멀리서 온 평양냉면을 얘기했다가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을 돌아보며 “멀다고 말하면 안 되갔구나?”하고 말하는 대목에선 현장의 기자들도 함께 웃었다.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로 인한 위기가 고조되고 북한과 미국이 ‘말의 전쟁’을 벌일 때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다.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길을 열었으니 기자들은 그야말로 ‘고난의 행군’을 앞두고 있다. 

5월만 해도 한미, 북미 정상회담이 예정돼 있고 잘 풀리면 남북미, 북중, 북러, 남북미중 회담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취재를 하다가, 기사를 쓰다가 쓰러질 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 없다. 남북이 둘로 갈리기 전엔 국제역이었던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나 런던까지 갈 수 있는 날이 빨리 온다면. 문익환 목사처럼 몸을 던져 역사를 살지는 못하더라도 역사를 쫓아가며 기록하면서, 밤이 낮으로 낮이 밤으로 바뀌는 일을 보고 하늘이 땅으로 땅이 하늘로 엎어지는 일을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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