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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육 정상화 3원칙 (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

과외와의 전쟁? 통계부터 다시!

[실록 교육정책사 3부 ②] 사교육 대책의 역사

돌고 돌아 제자리…“학교교육 경쟁력·신뢰 회복 선행돼야”

2007.11.01 특별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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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비(과외) 문제는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이다. 공교육을 보완해야 할 사교육이 입시위주 교육풍토에서 역으로 공교육을 구축(驅逐)하면서 공교육 부실의 원인이 되고 있다. 과도한 사교육비 부담으로 인한 출산 기피, 과외비 격차에 따른 사회계층의 확대·재생산 등 사교육비 문제가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있다.

역대 정부는 사교육비 경감을 위해 다양한 대책을 쏟아냈지만 입시위주 교육, 대학서열화, 노동시장의 변화, 학력·학벌주의 등 사회문화 전반의 변화와 유기적으로 맞물린 총체적 대안보다는 단편적 임시처방을 내놓은데 급급했다.

국정브리핑이 기획한 <실록 교육정책사>는 1부 대학입시정책, 2부 고교평준화정책에 이어 3부에서 역대 정부의 ‘과외와의 전쟁사’를 4회에 걸쳐 살펴봄으로써 사교육비 경감과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실마리를 얻고자 한다.


<3부> 사교육비 경감정책
①과외, 왜 줄지 않는가
②과외와의 전쟁
③발상의 전환 : EBS수능강의, 방과후학교
④외국은 어떻게 하나

<1부> 대학입시정책
①인재 패러다임 바꿔야 나라가 산다
-(상) “문제는 서울대 정점 대학서열 구조다”
-(하) “서울대 ‘흉내’로는 대학서열 꿈쩍 않는다”
②문민정부~참여정부까지 대입제도의 진화
③‘3불 정책’, 대학자율 속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
④수능, 과연 필요한가 - 국가고사 변천의 역사
⑤다시 개천에서 용나는 사회를 향해
⑥‘뽑는 경쟁’에서 ‘가르치는 경쟁’으로 대학개혁

<2부> 고교평준화정책
①평준화정책의 탄생과 논란
②자립형 사립고, 평준화 보완인가 해체인가
③외국어고, 입시교육의 사생아
④교육특구 8학군 신드롬


2000년 4월 27일 헌법재판소로 국민들의 이목이 쏠렸다. 한대현 재판관을 주심으로 하는 헌재 전원재판부는 과외 금지가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2000년 4월 헌법재판소의 과외금지 위헌결정은 2000년 이후 과외급증의 한 계기가 됐다. 헌재 결정을 보도한 2000년 4월 28일자 중앙일보
“학교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차별 최소화, 비정상적 교육투자 방지 등을 위해 과외를 금지하는 정당성은 인정된다. 그러나 과외교습 등 사적교육에 있어서는 부모의 교육권과 자녀의 인격발현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점에서 국가가 제한할 경우에도 한계가 있다.

‘원칙적인 금지’와 ‘예외적인 허용’이라는 현행 법률의 제한방식은 고액과외 방지 등 입법목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과외교습까지 지나치게 광범위하게 금지함으로써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다.”

1980년 7월 30일 신군부가 발표한 ‘교육 정상화 및 과열 과외 해소 방안’의 일부로 과외금지를 규정한 ‘학원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에 대한 위헌 결정이었다. 이에 따라 20년간 이어진 과외 금지 조항은 효력을 잃게 됐다. 학교교육 정상화 등을 위한 과외 금지 조치의 정당성은 인정되지만 부모의 교육권 등까지 광범위하게 금지하는 것은 기본권 침해라는 의미였다.

오랫동안 사교육과 전쟁을 펼쳐온 정부로서는 당혹스러운 결정이었다. 이내 사교육 시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과외만 잡아라. 대통령 시켜줄게”

위헌 결정이 났지만 20년 전 과외 전면 금지 조치는 신군부를 미워하는 사람들조차 지지를 했다. 당시 교육계 인사로는 유일하게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문교공보분과 위원으로 참여한 정태수 문교부 대학교육국장(차관 역임)의 회고다.

“그때 민심은 ‘과외만 잡아라. 그러면 대통령 시켜준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군인들은 대학 평준화까지 언급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육계는 과외 전면 폐지보다는 과열 과외를 정리하는 수준이 바람직하다 했다. 공교육이 사교육보다 경쟁력이 없는 상태에서 과외를 막으면 공교육도 허물어진다고 본 것이다. 그럼에도 과외 전면 금지로 가닥이 잡혔다. 큰 기차가 지나갈 때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과외의) 큰 가지를 치고 나머지는 적당히 놔뒀어야 했다.”

신군부는 사회적 위화감 해소를 명분으로 고액 과외를 먼저 잡고자 했다. 공직자·변호사·의사 등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자녀 과외를 강력히 단속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현직 교사의 과외와 재학생의 사설학원 수강도 금지했다. 이어 범국민적 과열 과외 추방 캠페인을 전개했고, 위반자는 사회정화 차원에서 처벌했다. 비밀 과외를 적발하는 공무원을 포상했고, 과외를 적발당한 공무원은 사퇴는 물론 구속 수사에 세무 사찰까지 했다. 신군부는 과외를 반국가적 행위로 여겼다.

“집주인은 국민학교 선생, 전세는 중학교 선생, 월세는 대학교수”

신군부가 ‘과외 때려잡기’에 나선 것은 그럴수록 국민적 지지가 상승하리라는 정치적 계산서가 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 이전 정부는 과외 대책을 내놓은 적이 없었던 터였다. 다만 입시정책을 고치는 것으로 대응했다. 과외에 대한 근원처방이라기보다는 입시의 병목 현상을 상급 학교 단계로 이행시키는 대증요법이었다. 이에 따라 ‘국6병’ ‘중3병’ ‘고3병’이 시대를 바꿔가며 학생과 학부모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었다.

1969년 중학교 무시험제가 시행되기 전 국민학교 교사의 방은 방과후 학생들의 과외방으로 변했다. (KTV 동영상자료 캡처 화면)

중학교 입시가 있었던 1968년까지는 국민학생들의 과외가 극성이었다. 명문중학교 입학은 명문대 입학의 보증수표였기 때문이었다. 경기중 입학은 성공의 에스컬레이터를 넘어선 엘리베이터로서 경기고·서울대로 이어지는 입신양명의 첫 단추였다.

이에 따라 국민학교 교사의 집은 방과 후 국민학생 과외방으로 변했다. “국민학교 6학년 담임은 아무나 맡지 못 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학부모들은 명문 중학교의 모의시험 문제를 얻어내기 위해 혈안이었다. “집 주인은 국민학교 선생, 그 집에 전세를 든 사람은 중학교 선생, 그 전세에 월세를 들거나 문전에서 기웃거리는 사람은 대학교수”라는 ‘뼈 있는 농담’이 회자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8년 7월 15일 중학입시의 무시험제도 도입을 발표했다. 국민들은 이를 ‘7·15 해방’이라고 표현했다. 국민학생의 과열 과외는 진정됐다.

1968년 7월 15일 당시 권오병 문교부장관(사진)은 "국민학교 어린이에게 과한 과외공부 등으로 체력저하, 기억력 감쇠, 신경쇠약 등을 가져다 주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중학입시제도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KTV 동영상자료 캡처화면)

‘안방개인지도’와 ‘안방그룹지도’의 범람

일종의 풍선효과일까. 과외 열풍이 중학생 단계에서 부풀었다. 중학생들은 정규수업 외에 1∼3시간의 보충수업을 들었다. 학원 또는 ‘안방개인지도’나 ‘안방그룹지도’ 등의 과외를 받았다.

유신정권은 급기야 1974년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을 내놓았다. 그러자 과외 전쟁은 대입을 위한 고교생들의 몫이 됐다. 입시제도의 개혁은 과외의 전쟁터를 옮겨놓는 효과가 있었을 뿐, 과외를 줄이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신군부의 7·30 조치는 역대 정부의 사교육 대책 역사의 분수령이었다. 신군부는 과외 자체를 뿌리 뽑고자 했다. 그러나 과외에의 열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신군부는 1980년 7·30교육조치를 통해 과외를 전격 금지했다. 사진은 과외금지 조치가 발표되자 서울의 한 학원이 '재학생은 수강등록을 받지 않는다'는 안내문을 게재한 모습. (KTV 동영상자료 캡처화면)

‘몰래바이트’ 성행, 자녀 비밀과외로 제주 시장 옷 벗기도

신군부는 적발, 면직, 구속 등의 ‘강력한 무기’를 사용했다. 7·30 조치 2주 만에 경찰의 단속이 시작됐다. 단속 첫날인 1980년 8월 12일 충남·대구 등지에서 4건의 불법과외가 적발됐다. 정부는 1983년 7월 29일 “3년 동안 불법과외 관련자 1290명(학생 623명, 교습자 117명, 학부모 550명)을 적발, 이 중 교습자 69명을 입건하고 교사 4명과 학부모 58명 등 62명을 면직 조치했다”고 발표했다. 1986년에는 제주시장이 자녀에게 영어 비밀과외를 시켰다는 이유로 해직됐다.

그럼에도 부유층에서는 비밀과외가 성행했다. 단속반을 피해야 한다는 ‘위험 수당’ 명목으로 과외비가 크게 올랐다. ‘승용차 과외’ ‘별장 과외’ ‘심야 과외’가 등장했다. 중산층들도 “공부하는 게 죄냐”면서 ‘몰래바이트’에 합류했다. 과외 금지를 지지한 서민층을 제외하면 경제적 중상위층 사이에서는 실제로 과외금지의 방둑이 무너져가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무장 해제되는 과외금지 조치들

그러다 1986년 대법원은 “지식을 교습하는 행위는 반사회적이거나 반국가적인 불법한 내용이 아닌 한 제한할 수 없다”는 학습권 존중 판결을 내렸다.

이후 정부는 과외 금지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과외에 대한 열망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정책을 취했다.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 시절은 사교육 완전 금지 시기에서 벗어나 ‘사교육 금지 정책을 보완하는 과도기’였다. 6공화국 정부는 1989년 대학생의 과외 교습을 허용했다. 또 초·중·고교 학생들의 방학 중 학원 수강을 허용했다. 문민정부는 학기 중에도 학생들이 학원 수강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결국 문민정부는 1997년 방과 후 교내 과외교습을 허용했다. 이어 위성방송을 통한 과외 강의를 시작했다. “과외를 과외로 막으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과외 금지 조치가 완화됐다고 해서 고액 비밀과외가 줄지는 않았다. 1997년 6월 4일자 신문들은 당시 서울지방검찰청이 3개월간 약1500명을 소환조사한 ‘고액과외 수사’에 대한 뒷이야기를 적나라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수사를 지휘한 안대희 서울지검 특수3부장은 “각종 공무원 뇌물수수 사건을 수사하면서 과외가 망국병의 주요한 원인의 하나라는 생각을 해오던 터였다”면서 수사 이유를 설명했다. “뇌물수수사건을 수사하면 100만원짜리 수표가 학원 강사에게 흘러들어가는 ‘이상한 연결고리’가 자주 포착됐다. 과외비라고 했다. 부패 사슬의 정점이자 ‘만악의 근원’인 사교육 비리에 칼을 대야 한다는 공감대가 수사검사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이 과정에서 학원가의 은어인 ‘돼지 키우기’(부유한 학생만 골라 초고액과외를 하는 것) ‘팀장엄마’(학부모이면서 학생들을 모으는 브로커) ‘대강사’(학원장들이 서로 모시려 하는 일류대학 출신의 유명강사) 등이 세간의 화제가 됐다.

1997년엔 ‘100만원짜리’ 과외가 사회문제가 됐다면, 1998년엔 ‘1000만원 이상’의 족집게 과외가 매스컴을 탔다. 그 압권이 바로 강남 고액과외 사기사건이었다.

1990년대 들어 점진적으로 과외가 허용됐지만 간헐적으로 적발되는 일부 부유층들의 고액 쪽집게 과외는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됐다. 이를 보도한 1998년 9월 1일자 중앙일보
1998년 가을 이른바 ‘서울 강남 한신학원 불법고액과외 사기사건’이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고교 교사 등이 브로커 역할을 맡아 당시 서울대 총장과 의사·변호사·고위공직자 등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족집게 과외 강사를 연결시켜 최대 8000만원짜리 과외를 시켰다. 학부모 명단이 공개되고 연루 교사들이 대거 징계를 받은 사건이었다.

국민의정부는 과외 문제의 심각성을 줄이기 위해 1998년 문용린 교육부 장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교육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사교육특별위원회는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해체됐다. 문 전 장관의 회고다.

“과외에 관한 학문적 연구와 자료 축적이 드물었다. 위원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핏대를 올리는’ 식으로 논쟁을 벌였다. 생산적인 토론이 불가능했다. 사교육특별위원장 활동은 남들에게 ‘제 경력에서 지워주세요’라고 부탁하고 싶을 만큼 성과가 없었다.”

국민의정부는 또 교육청에 고액과외 특별단속대책반과 국세청과 지방경찰청 등으로 단속기동 점검반을 편성해 고액과외에 대해 합동단속을 벌였다. 그러나 단속의 실효가 없었다.

헌재 결정 “과외금지는 위헌”

부분적인 과외 금지 정책조차 일거에 없어지게 한 헌재의 결정은 이즈음 과외교습 혐의로 기소된 한 과외강사의 재판에서 비롯됐다. 서울지법은 1998년 11월 PC통신에 과외방을 개설해 문답식 과외교습을 한 혐의로 기소된 과외 강사 공판과정에서 과외금지 법 조항에 대한 위헌 제청을 냈다. 2000년 4월 과외금지 조치에 대한 위헌 결정이 나왔다.


사교육의 메카, 대치동의 등장

사교육 시장은 규제 중심에서 자율 시장으로 변했다. 그 2000년의 과외 풍속도를 대표하는 게 바로 교육특구의 등장이었다.

서울 강남 대치동 일대는 사설 학원들의 천국으로 ‘사교육의 메카’라는 입지를 굳혔다. 아파트값이 덩달아 오르면서 “8학군 지역으로 전학은 못 가더라도, 대치동 학원은 다녀야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자녀의 인생 전체를 디자인하면서 아이의 하루 일과를 시간 단위로 관리하는 ‘대치동 엄마’들이 탄생했다.

‘대치동 엄마’와 ‘사교육 특구’의 급팽창은 입시 구도의 복잡화를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사교육 시장은 외국어고와 과학고 등 특목고의 부각으로 보다 복잡해졌다. 사교육시장은 “특목고에 진학하려면 초등학교 때부터 준비해야 한다”며 학부모들의 불안 심리를 건드렸다.

정부는 김신일 서울대 교수와 문상주 학원연합 회장 등 전문가 23명을 위원으로 하는 과외교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고액과외 방지 대책을 마련했다. 역시 ‘불 앞의 얼음’이었다.

박영숙 교육인적자원부 사교육대책추진팀장은 최근 10년간 사교육 시장이 폭발한 배경에 대해 이렇게 진단했다. “IMF외환위기와 과외 금지 조치에 대한 위헌 결정 이후 사교육이 늘었다. 학부모의 고학력화, 가계 소득 증가, 자녀 수의 감소, 맞벌이 부부의 증가, 영어교육 열풍, 지나친 선행학습 풍조 등의 요인이 보태졌다.”

초등학생, 다시 ‘과외 뺑뺑이’

21세기의 시계가 40년 전으로 돌아갔다. 초등학생들이 사교육의 전면에 등장했다.

2003년 한국교육개발원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들의 과외 비율은 83.1%로서 중학생(75.3%)과 일반고교생(56.4%)보다 높았다. 초등학생들의 연간 사교육비도 7조1643억 원으로 각각 4조원과 2조2000억원으로 추정되는 중·고교생에 비해 많았다.

피아노·수영·미술 등 예·체능 사교육은 부모의 ‘한풀이’ 측면이 강할지라도 자녀의 특기와 적성, 그리고 인적자원개발의 효과가 커 긍정적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특목고 입학을 위해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선행학습’을 하는 입시 과외는 공교육을 약화시키고 이로 인해 과외 수요를 확대재생산하는 악순환의 주요 고리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02년 한국교육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과외 중 선행학습의 비중은 초등학생의 경우 67.7%, 중등 학생(수학)은 74.6%에 이르렀다. 이렇게 선행학습을 받은 학생들은 학교 공부를 소홀히 하고 있다.

2003년 한국교육개발원의 자료에 따르면 학원 공부 때문에 학교 공부에 대한 진지성을 상실하거나 소홀히 한다는 응답자가 절반 가까이 됐다. 학교 공부는 공부 잘 하는 학생은 이미 알고 있어서, 공부를 못 하는 학생은 아무리 따라가도 모르므로 누구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돼가는 형국이다.

IMF외환위기와 초등학교 영어 교과 채택 이후에는 영어 사교육 열풍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영어 사교육비는 학교 급이 높아질수록 지출 액수도 늘었다. 2007년 교육부의 실태조사 결과 초등학생의 영어 사교육비는 월 14만3000원, 중학생 17만원, 고교생은 20만2000원이었다.

‘대치동 엄마들’ 따라 해외로…가정 해체 등 사회문제 생겨나

초등학생들의 영어 갈증은 조기유학 열풍을 만들어 냈다. 유학을 위해 출국한 초·중·고 학생 수는 IMF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부터 지속적으로 늘어난다. 교육부 자료에 따르면 1998년 1562명이었던 조기유학생은 이듬해 1839명으로 늘었다. 2002년 1만 명을 돌파한 이후 2005년에는 2만 명을 넘어섰다. 2006년에는 3만 명에 육박했다. 방학 중 단기 연수생 수는 부지기수다.

조기유학 결과 ‘기러기 아빠’와 ‘기러기 엄마’가 등장했다. 영어 실력 향상과 세계화 경험 축적이라는 긍정적 효과에 못지않은 부정적인 측면이다. 2007년 4월 기획예산처가 영어권 국가에 자녀를 조기유학 보낸 부모 29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해 내놓은 ‘조기유학 관련 조사결과 보고서’는 이를 잘 말해준다.

학부모들은 “중·고교생 등이 외국에서 조기유학을 하면 인종갈등의 문제를 인식하고 한국출신 학생들끼리 어울리고, 이럴 경우 영어실력이 늘기 어렵다”고 밝혔다. 조기유학 중인 중·고생들은 영어실력 부족으로 과학·사회 등의 과목에 대한 이해가 떨어져 학교수업을 받는 데 어려움을 겪게 돼 유학초기에는 영어 과외, 나중에는 영어·수학·과학 등에 대한 과외를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연간 학비는 평균 5000만원이었다.

물론 조기유학에는 “공교육에 대한 불만보다 전략적 선택”이라는 측면을 간과하기 어렵다. 2007년 10월 정일준 고려대 교수(사회학)는 ‘교육 지구화와 문화 변동 - 조기유학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에서 공교육 만족 여부와 조기 유학의 상관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밝히고 있다.

조사 결과 자녀가 국내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어도 국외 유학을 보내겠느냐는 질문에 ‘그래도 보낸다’는 응답(56.9%)이 ‘보내지 않겠다’는 대답(43.1%)보다 높았다. 정 교수는 이에 대해 “이는 조기유학이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장기적 추세로 자리잡을 가능성이 많음을 보여 준다”며 “조기유학에 부정적이면서도 조기유학을 보낼 의향이 있다는 이가 22.4%에 이르는 점도 이를 뒷받침 한다”고 말했다.

2·17 대책, 사교육 수요 공교육으로 흡수하자는 발상

참여정부의 사교육대책은 과외의 실체를 인정하고, 이를 공교육 내로 흡수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2004년 2·17대책에서는 EBS수능강의 실시, 방과후학교 활성화 등의 대책이 담겼다. 이를 보도한 2004년 2월 18일자 중앙일보
역대 정부의 과외와의 전쟁사는 번번이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참여정부 역시 2004년 2월 17일 사교육비 경감 종합대책을 내놨다. ‘어차피 잡지 못할’ 사교육 수요를 공교육 안으로 흡수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1980년 전면적인 과외금지 조치 이후 과외에 대한 정책적 패러다임이 변한 것이었다. 서범석 전 교육부 차관(참여정부 사교육비경감대책위원회 위원장 역임)의 회고다.

“사교육 경감 대책은 대선 공약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관심을 갖고 교육부 장·차관, 청와대 비서실장, 정책 실장 등 10여명과 함께 여러 차례에 걸쳐 서너 시간씩 토론을 거듭했다. 국민과의 약속이었으므로 취임 1년 만에 대통령이 직접 발표했다. 학교 내로 학교 외의 학습을 끌어들이고, EBS를 적절히 활용하자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총 10개 분야의 대책 가운데 학부모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유명학원 강사들을 EBS로 초빙해 무료 인터넷 강의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과외 소외 지역 학생들로부터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과외 수요를 공교육 내로 흡수하겠다는 방안은 사실상 학교 교육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결국 공교육 내실화 달성에 걸림돌이 된다는 비판의 소지도 있다. 노 대통령과 교육부가 “궁극적으로는 공교육의 질 제고를 통해 사교육을 진정시키겠다”는 ‘원칙론’을 누누이 밝히는 배경이다.

뒤늦은 자각, 기초적인 통계조사부터 다시

사실 사교육을 공교육의 자장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발상의 전환은 정부가 ‘사교육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던 역사와 패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자는 자세와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이를 위해 정부는 사교육과의 전면전을 선포하는 대신에 사교육의 뿌리부터 차근차근 되짚어보는 ‘긴 호흡’으로 응전하고 있다. 정확한 통계의 마련과 사교육대책추진팀의 ‘독립’이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다.

우선 정부는 그간 변변한 사교육 통계조차 없었던 오류를 바로잡기로 했다. 2007년 3월 20일, 김신일 교육부총리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통계청과 매년 두 차례 사교육비를 정기적으로 조사, 사교육 실태를 파악해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보고했다.

이 계획은 △2007년 4월 EBS영어전용방송 실시 △2008년까지 모든 농산어촌지역의 방과후 학교 지원 및 원하는 초등학교에 방과후 보육프로그램 운영 등의 대책과 함께 ‘3·20 사교육대책’으로 발표됐다.

정부 차원의 사교육비 조사가 일관된 기준에 따라 정기적으로 실시되지 않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이뤄졌던 점을 고려하면 획기적인 조치다. 사교육비 문제와 관련된 엄격한 실증연구와 기초통계조차 없는 상황에서 문제의 실상과 원인을 판단하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하지만 앞으로는 사교육의 ‘모든 것’이 물가 지수처럼 일목요연하게 손에 잡힐 것으로 기대된다.

첫 해인 2007년 7월과 10월엔 1인당 사교육비를 지역별, 학교단위별, 인구특성별, 사교육 유형별로 나눠 조사했다. 전국 272개 학교의 학생과 학부모 5만2000명을 대상으로 했다. 분석 결과는 2008년 2월 발표될 예정이다. 여기서 사교육비는 학원과 교습소, 개인과외, 학습지, 인터넷 수강 등의 수강료로 규정(방과후 학교와 EBS 수능강의 교재비는 포함하지 않음)했다.

교육계 내부에서는 솔직한 반응이 나왔다. “정기적인 통계조사의 실시는 교육부의 과외 경감 대책 실패를 인정하는 것” “통계 조사를 분석·발표할 시점은 2008년이어서 참여정부로서는 실익이 전혀 없는 것”이란 주장 등이다.

반면 “다음 정부에 가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사교육 시장이 유포하는 정보에 무방비로 노출된 학부모들에게 정확한 통계분석 자료를 제공함으로써 합리적 선택을 도울 수 있으리란 기대다. 만시지탄이지만 사교육비를 줄이기 위한 조치가 첫발걸음을 내디딘 형국이다.

교육부는 또 학교정책실에서 다뤘던 사교육정책을 정책홍보관실로 옮겼다. 사교육의 실체를 인정하고, 초·중등·대학 등 교육부문 뿐 아니라 경제구조, 노동시장, 사회문화적 환경을 포함하는 종합적 구도에서 사교육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다.

한 교육계 관계자는 “그간 교육 당국은 과학적인 통계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노력 자체도 드물었다”면서 “정확한 통계가 드러나면 정부의 사교육 경감 대책의 실패를 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최고 대안은 ‘공교육의 질 높이기’

역대 정부의 사교육 경감 대책은 백화제방을 방불케 한다. 온갖 아이디어와 비전들이 넘쳐흐른다. 그중에서도 공교육의 질 제고야말로 사교육에 대한 근원 처방이라는 데 이견이 드물다.

그래서 2004년 발표된 ‘사교육비 경감종합대책 백서’는 “학교교육의 경쟁력을 제고하고 신뢰를 회복하는 것만이 사교육의 근원적 해결책”이라고 결론지었다. 이를 위한 정책 방향으로는 학교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 우수교원 확보 및 수준별 교육 강화, 학교생활기록부의 신뢰성을 높여 내신중심의 대입선발을 유도해 대학입시에 예속된 고교교육의 정상화로 가닥을 잡았다.

장기적으로는 학벌주의 극복을 위한 사회제도·문화·의식개혁을 추진한다고 돼 있다.

그러나 공교육의 현실은 1992년 대선 후보들의 공약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당시의 대선 후보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교육재정 GNP 5% 확보’를 외쳤다. 그러나 2007년 OECD교육지표에 따르면 지금도 우리나라 교육재정 규모는 GDP 대비 4.4%로, OECD 평균인 5%에 미치지 못한다.

이와 더불어 공교육의 책무성 강화도 거론된다. 김영식 전 교육부 차관은 “교사평가제 도입이 하나의 정답이 될 수 있다”면서 “교사가 적어도 자기가 맡은 학생을 책임지고 학부모의 신뢰를 얻으면 사교육은 줄게 돼 있다”고 말했다.

“학교 교사와 학원 강사들의 태도 자체가 다르다. 학원 강사들은 학생의 출결이나 성적이 자신의 수입과 직결되므로 원인을 파악해 문제점을 해소하려 든다. 재미있는 강의를 위한 교수법 연구에도 열심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 교사들은 어떤가.”

교육정책만으로는 풀 수 없는 숙제

그러나 과외문제는 교육정책만으로 부족하다. 과외문제는 대학서열화, 학력·학벌사회 등 ‘고질적 한국병’과 깊숙이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박영숙 사교육대책추진팀장은 그래서 “교육부도 교육정책만으로 과외 문제를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다는데 공감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사교육 문제는 교육뿐 아니라 노동시장 전망과 국민의식 등 갖가지 함수가 들어있는 고차 방정식이기 때문이다. 김미숙 한국교육개발원 입시제도연구실장의 말이다.

“사교육은 교육부만의 문제도 아니고, 교육부가 모두 해결해야 할 문제도 아니다. 교육은 노동시장 및 사회복지 등과 맞물려 있으므로 이 같은 복잡한 특성을 고려한 입체적 대책을 장기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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