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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올랐나'①경기부양]“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은 1960년대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함께 크게 움직이기 시작해 지난 40년간 도시화에 따른 수급 불균형과 공급시차, 경제성장에 따른 소득향상과 과잉 유동성, 건설경기 부양 유혹, 부동산 투기심리에 대응한 제도와 정책 미비 등의 요인들에 의해 변동을 겪었다.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국토연구원·금융연구원과 공동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총론에 이어 ‘제1부, 왜 올랐나’라는 주제로 이들 4가지 가격변동 요인을 분야별로 4회에 걸쳐 싣는다. <1부> 왜 올랐나 1-경기부양과 부동산의 딜레마 2-유동성과 부동산 3-공급시차와 시행착오 4-부동산 심리와 정책불신 2006년 7월 12일,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이날 인사청문회는 청와대 정책실장에서 경제부총리로 옮겨온 권오규 후보자와 열린우리당 강봉균 정책위의장간 설전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주제는 경기진단과 경기부양. 두 사람은 과거 경제기획원(EPB)에서부터 상하관계로 일해 오며 인연이 깊었다. 강봉균 열린우리당 정책위의장=만약에 작년도에 4%밖에 성장이 안됐다면 내년쯤에서 6% 성장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될 게 없는 거란 말이에요. 경기부양이라는 것은 거시경제 정책을 운용하는 정책 당국의 인위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 후보자=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주거나 지나치게 확장적으로 경제 운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경제정책 방향은 잠재성장률 경로를 따라가는 한에 있어서는 인위적인 부양을 하지 않는다는 스탠스를 유지하는 것이 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강 의장=지금 체감경기가 너무 어려운 상황이기 때문에 잠재성장률 기준을 놓고 보더라도 1, 2% 정도 성장을 높일 수 있는 방법만 있다면 이것을 해서 하나도 나쁠 게 없다 이게 제 생각인데. 권 후보자=저는 그점은 조금 생각이 다릅니다. 잠재성장률 경로에서 벗어나는 쪽으로 일단 경기가 들어가게 하면 그 다음 단계에는 분명히 잠재성장률 아래쪽으로 반작용이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성장률 경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속기록) 경기부양을 둘러싼 입장차는 얼마 뒤 제주에서 열린 전경련 하계포럼에서 다시 불꽃을 튀었다. 같은 달 29일 강 의장은 “건설경기는 정부정책에 의해 강온조절이 가능한 유일한 분야다. 건설분야를 단기적 경기관리 수단과 영역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기 전반을 살리기 위해 ‘건설경기 부양’ 카드를 과감히 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하루 전날 같은 자리에서 권 부총리는 “인위적 건설경기부양은 바람직하지 않다. 경기가 좋지 않다고 해서 재정을 투입해 건설경기를 띄우던 시절은 지났다”며 정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경기부양을 보는 관점 경기부양에 대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한 나라의 잠재성장률을 어느 수준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다. 만약 잠재성장률이 낮은데도 이를 초과해 경기를 부양한다면(인플레이션 갭) 경기과열, 물가상승 등이 일어난다. 반면 잠재성장률이 높은데도 실질성장률이 여기에 못미친다면(디플레이션 갭) 경기침체 등의 부작용이 나타난다. 거시경제에 대한 시각차 외에 정치적 입지도 경기부양에 대한 입장이 갈리는 이유이다. 여론에 민감한 여당으로서는 체감경기와 일자리에 직접적으로 연관된 경기부양에 적극적인 반면, 경제의 안정적 운용을 중시하는 정부는 경기부양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정부가 잠재성장률을 웃도는 경기부양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인위적인 경기부양은 당장의 약발은 좋지만, 궁극적으로 경제의 기초체력(성장잠재력)을 갉아먹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특히 부동산시장이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재정확대, 규제완화 등 대대적인 경기부양은 투기심리를 자극해 큰 낭패를 초래할 수 있다. ◆ 참여정부의 뼈아픈 실책 참여정부도 딱 한 번 경기부양의 유혹에 흔들린 적이 있다. 그 결과 투기의 부활이라는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된다. 2004년 6월 18일 열린 경제장관간담회에서 당시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성수기인데도 건설·제조·서비스업은 물론 농업부문에서도 고용증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고 포문을 연 뒤 며칠 뒤 정례브리핑에서 “건설수요는 올 4분기부터 내년에 걸쳐 전반적으로 가라앉을 것이며, 건설투자의 급감을 막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한다. 당시는 2003년 10·29대책으로 건설경기를 중심으로 내수가 위축되면서 침체된 경기를 살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한창 힘을 얻고 있을 때였다. 건설경기 회복을 돌파구로 정한 이 부총리는 다음달 1일 사회간접자본(SOC) 등 건설투자를 확대하고, 주택건설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의 ‘건설경기연착륙방안’(7·1방안)을 발표한데 이어 8월에는 전국에 골프장 250개를 지어 일자리를 만든다는 ‘골프장 경기부양론’을 들고 나온다. 때마침 한국은행도 당시 3.75%인 콜금리 목표치를 13개월 만에 3.5%로 낮춘다. 당시 박승 한은총재는 “예상치 못한 고유가로 경제성장률이 떨어진데다 내수는 더디게 회복되는 반면 수출·건설경기가 너무 빠르게 식고 있다. 금리인하가 물가를 자극할 수도 있지만 지금은 경기를 살리는 게 더 급하다”고 인하 배경을 설명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 부총리는 “오히려 만시지탄(晩時之歎)의 감이 있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한은의 콜금리 인하가 결정되던 바로 그날, 당시 재경부 이종규 세제실장은 “부동산경기가 하락할 때 쓰는 정책은 상승할 때의 정책과 같을 수 없다”며 종합부동산세 등 부동산세제의 완화를 시사한다. 이 때를 기점으로 정부와 여당 안에서 종부세 도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당시 청와대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 등을 중심으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나섰지만, 2004년 말 입법과정에서 종부세 과세대상은 원래 생각했던 공시가격 6억원 이상에서 9억원 이상으로 완화되고, 가구별 합산도 개인별 합산으로 크게 후퇴한다. 시민단체는 종합부동산세가 ‘종합구멍세’가 돼버렸다며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다. 정책후퇴의 신호 잇단 건설경기 부양책, 종부세 후퇴는 시장에서 정책 후퇴로 받아들여졌다. 2003년 10·29대책 이후 1년 넘게 잠잠했던 집값은 2005년 들어 판교신도시분양, 강남 압구정동 초고층 재건축 추진 등 휘발성 강한 재료와 겹치면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고, 정부는 2005년 8·31대책을 통해 후퇴시켰던 종부세 등을 원상복귀시켜야 했다. 종부세의 후퇴와 원상복귀 과정은 원칙의 후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준다. 특히 투기심리가 팽배한 부동산시장에서 작은 후퇴의 신호 하나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 의미에서 투기꾼들이야 말로 ‘겨울이 지나면 반드시 봄이 온다’는 믿음의 수호자이자 기다림의 달인이다. 이들은 아무리 혹독한 투기근절책이 나와도 언젠가는 풀린다는 사실을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들의 소위 ‘학습효과’를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경기부양의 요구였다. 투기꾼들에게 가장 화창한 봄날은 역설적이게도 IMF외환위기였다. IMF외환위기 이후 경기부양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고, 경기부양을 이유로 각종 부동산관련 규제가 대대적으로 풀리기 시작한다. ◆ IMF외환위기 이후 대대적인 경기부양 2001년 2월 7일, 건설업계가 마련한 당시 김윤기 건설교통부장관 초청 간담회. 이날 행사에서 김 장관이 “올해 건설예산의 85%를 상반기 중 집행하는 등 건설경기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운을 떼기 무섭게 건설사 사장들의 요구가 쏟아졌다. 이중근 부영회장=과거 투기억제 수단으로 도입된 양도세는 주택보급률이 100%에 육박하는 만큼 폐지돼야 한다. 집을 살 때 부담하는 취득·등록세도 주택업을 제조업으로 분류해 감면해 달라. 박성대 대동주택 명예회장=유지, 관리가 미흡해 붕괴사고가 일어나도 건설업계의 책임으로 돌아온다. 시설물의 유지, 관리비 책정을 늘려야 한다. 김언식 삼호건설 사장=대한주택보증 출자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았으나 주택보증의 부실화로 출자금은 날아가고 대출 빚만 남게 됐다. 주택보증 출자금은 업체가 원해서 낸 게 아니라 주택업을 하려면 의무적으로 내도록 했던 것으로 출자금이 없어졌으니 대출금도 탕감해줘야 한다. (중앙일보 2001년 2월8일) 그리고 3개월 뒤인 5월 23일, 정부는 생애최초 주택구입자에게 집값의 70%까지 대출해주고, 2001년 말까지 구입한 신축주택에 대해 양도세 면제, 취득·등록세 50% 감면 등의 내용을 담은 ‘건설산업 구조조정 및 투자적정화방안’(5·23방안)을 발표한다. 국민의정부 들어 10번째 발표된 주택경기 활성화 대책이었다. 당시 정부는 1998~2001년 5월까지 3년 6개월동안 모두 10번, 평균 4개월에 한 번꼴로 부양책을 내놓은 것이다. 정부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업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해 대대적으로 규제를 풀어서라도 건설경기를 살리는 것이 절실했다. 2001년 2월 청와대가 대통령 취임 3주년을 맞아 공개한 김대중 대통령의 메모에는 당시 대통령이 건설경기부양을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김 대통령의 노트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지방경제 어렵다는 여론, 건설경기 위축, 재래시장 문제, 기업 지방 이전, 지방건설업 자율조정, SOC사업 조기 시행’ 등의 친필 메모가 적혀 있었다. 취임 1년 반 만인 1999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IMF졸업’을 공식선언했던 정부는 같은 해 8월 말 대우그룹 사태, 다음해 3월 현대그룹 ‘왕자의 난’ 등으로 경기가 급속히 얼어붙자 경기부양효과가 큰 주택시장 부양책을 쓰기 시작한다. 대대적인 규제완화 1998년 먼저 아파트 분양가를 자율화한데 이어 99년 아파트 분양권 전매 허용, 아파트 재당첨 제한 폐지 등의 조치를 잇달아 내놓는다. 또 2000년부터 아파트 임대사업을 장려하고, 아파트 리모델링 사업자금을 지원하는 대책 등을 본격화한다. 2001년에는 2003년 6월까지 전용 25.7평 이하 신규 주택을 취득할 때 취득·등록세 25% 감면, 부동산 투자회사가 부동산을 취득할 때 취득·등록세 감면, 소형주택 구입자금 저금리 지원 등의 지원이 잇따른다. 이런 조치들은 정부가 암묵적으로 투기를 감수하더라도 주택경기를 부양시키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것이었다. 경기부양을 위한 확장적 재정, 통화정책이 총동원되면서 콜금리도 2001년 한 해 동안 모두 4차례 인하돼 사상 최저치인 연 4%로 떨어진다. 같은해 9월 19일 4번째 콜금리 인하를 결정한 뒤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당시 전철환 한은총재는 “미국 테러 참사에 따른 대외여건 악화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콜금리 인하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규제완화와 풍부한 유동성으로 건설경기를 중심으로 서서히 경기가 달아오르고, 강남 재건축단지를 중심으로 투기조짐이 나타나자 2002년부터 부동산정책은 완연한 안정정책으로 돌아선다. 당시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이었던 이춘희(현 건교부 차관)의 회고다. “2001년 경기가 싸늘할 때 5·23부양대책을 발표하고 한 달 뒤 당시 이기호 경제수석에게 업무보고를 하면서 ‘이제부터는 투기대책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대부분 집값이 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면과제는 투기억제가 아니라 경기부양이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내가 걱정했던 것이 현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2001년 12월부터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고, 연말 이 수석에게 투기대책을 발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래서 2002년 들어 1·8대책, 3·6대책 등이 발표됐다.” 2002년 들어서는 1, 3, 9, 10월 등 하루가 멀다 하고 안정대책이 쏟아진다. 주택경기 부양을 위한 대대적인 규제완화의 효과, 확장적인 통화정책에 따른 유동성 과잉 그리고 IMF외환위기 이후 3년(1998~2000년)간 연간 50만호를 밑돈 주택공급 부족분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집값 상승도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1970년대 말 부동산 1차 순환기, 80년대 말 2차 순환기 등 집값 폭등기 때의 공통적 특징은 과잉 유동성과 주택공급 부족이 집값 상승의 원인이었다. 2001년 이후부터 참여정부 기간 내내 지속된 최근 집값 파동은 이러한 2가지 원인 외에도 이전 정권에서 이뤄진 대대적인 규제완화의 부작용이 한꺼번에 노출됐다는 특징을 갖는다. 규제완화의 부작용 국민의정부 시절 IMF외환위기 이후 침체된 경기를 되살리기 위해 추진된 대대적인 규제완화가 결국 부동산투기 부활이라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2003년 초 당시 인수위 경제2분과로부터 부동산관련 대책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이렇게까지 많이 풀었습니까”라고 말했다.(이춘희 현 건교부 차관의 회고) 건설경기부양을 위해 일정 수준 규제를 푸는 과정에서 투기억제를 위한 필수 규제마저 무장해제 시켰다는 지적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발표된 일련의 대책들은 이전 정권에서 마구잡이로 해체된 투기억제책을 다시 원상복귀 시키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 82년의 경험 경기부양을 위해 섣불리 규제를 풀었다가 부동산투기를 일으켰던 경험은 5공화국 시절인 1982~84년에도 있었다. 1982년은 이철희·장영자 사채파동을 수습하기 위해 자금이 집중적으로 풀린데다, 그린벨트에서도 목장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초지조성계획’(10년간 1조원 투자사업)이 발표되면서 부동산경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앞서 1980년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는 등 경기침체가 가속화되자 정부는 경기부양을 위해 여러 차례 양도소득세를 내리거나 각종 건축규제를 풀고, 부동산 거래자금의 출처 조사와 특정지역에 대한 투기활동에 대한 감시를 중단한다. 이러한 규제완화의 효과가 누적되면서 1982년부터 한동안 잠잠했던 투기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투기조짐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1982년 11월, 당시 김준성 경제부총리는 긴급대책회의를 열어 대책마련에 나선다. 이에 따라 1983년 4월 아파트 불법전매, 아파트 구입자금 출처, 부동산 중개업소의 불법 거래중개행위 등에 대한 조사를 강화하는 등 주택시장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내용의 ‘4·18조치’가 발표된다. 1982년 12·22 주택투기억제대책, 1983년 2·16 부동산투기억제대책에 이은 3번째 대책이었다. 1978년 8·8조치 이후 침체됐다가 1982년을 전후해 반짝했던 부동산시장은 당시 5공 정부의 투기억제 대책으로 다시 1986년까지 침체기로 빠져든다. 규제완화의 유혹은 언제나 경기부양의 목소리와 함께 시작되며, 규제완화를 동반한 섣부른 경기부양책은 결국 투기의 부활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1982년의 경우에는 어김없이 맞아떨어졌다. ◆ 경기부양의 정치논리 그렇다면 왜 경기부양의 요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일까. 이는 경기 자체가 상승기와 하강기를 반복하는 자율적인 순환사이클을 갖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부가 재정과 금융통화라는 정책수단을 동원해 경기의 진폭을 줄이는 경기부양은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 문제는 한 나라의 경제가 감당하기 힘든 수준(잠재성장률을 초과하는 수준)으로 인위적으로 경기를 자극할 경우 각종 부작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특히 경기 하강기에는 생산 감소, 실업증가 등으로 경기부양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기 때문에 여론에 민감한 정치권은 인위적 경기부양의 카드를 꺼내드는 경우가 많다. 이중 선거는 가장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절이기 때문에 인위적 경기부양의 무리수를 두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선거가 끝난 뒤에는 반드시 부동산투기라는 부작용이 연례행사처럼 뒤따르곤 한다. 6공화국 출범 직전인 1987~88년이 대표적이다. 당시 여야 대선후보들은 전국을 돌면서 선심성 개발공약을 남발, 이들이 지나간 곳은 어김없이 땅값이 폭등하곤 했다. 특히 당시 노태우 후보가 서울과 설악산을 잇는 동서고속전철을 건설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하자 해당지역 땅값은 평당 50만원에서 150만원으로 뛰어올랐고, 역시 노 후보의 공약이었던 서해안종합개발계획으로 평당 8000원짜리 녹지가 1만5000원으로 치솟았다. 2007년 1월 현대경제연구원이 1995~2004년 4월까지 총 8번의 전국 선거(대선, 국회의원선거, 동시지방선거 등)를 분석한 결과 1998년 2회 동시지방선거를 제외한 7번의 선거에서 선거가 열린 달의 전국 아파트 값이 6개월 전과 비교해 빠르게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기간동안 평균 가격상승률은 약 2.8%였으며, 특히 강남은 4.05%의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이는 선거를 앞두고 강력한 경기부양책이 등장하는데다 각 후보들이 득표를 위해 그린벨트 해제, 재건축규제완화, 도시재개발사업 등 각종 선심성 공약을 쏟아내 투기심리를 자극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건설업과 경기부양 그렇다면 경기부양의 요구가 나올 때마다 건설업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직접적으로는 건설업의 특성상 전후방산업연관효과, 고용창출효과가 매우 커 경기부양의 효과가 가장 화끈하기 때문이다. 2005년 건설산업연구원은 1조원의 건설투자가 이뤄지면 대략 2만8000명의 일자리가 만들어지고, 1조9900억원의 부가가치가 창출돼 경제성장률이 0.1%포인트 높아진다고 분석하고 있다.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한국경제에서 건설업이 차지하는 막대한 비중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은행, 통계청 등에 따르면 부가가치를 기준으로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은 2005년 9%였다. 한 나라에서 생산되는 총 부가가치 중 9% 가량이 건설업에서 나온다는 뜻이다. 또 2005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대비 건설투자의 비중은 19%였다. 특히 건설업의 총 부가가치 비중과 GDP 비중이 1990년대 초를 전후해 급격히 높아졌다. 부가가치 비중은 1985년 7%에서 1990년 11.3%, 1995년 11.6%까지 높아졌다가 2000년 8.3%로 다소 낮아진다. 또 GDP 비중 역시 1980년대까지 15% 안팎에 머물다가 1990년 22%로 높아진 뒤 1998년까지 20%대를 유지하다가 1999년부터 다소 낮아지고 있다. 1990년대 초를 전후해 건설업의 비중이 획기적으로 커진 것은 이 시기 분당·일산 등 5개 신도시를 포함, 주택 200만호 건설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25만호 수준에 머물던 주택건설 실적은 1989년 46만호로 늘어났다가 1990년 사상 최대인 75만호까지 폭증한다. 건설과열을 빚자 1991년 들어서는 잇달아 건설경기 진정책을 내놓아야 할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주택 200만호 사업을 계기로 건설업의 국민경제적 비중이 확고해짐에 따라 건설업의 부침에 의해 국내 경기 전체가 오르락내리락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인위적 경기부양을 위해 가장 먼저 건설업, 특히 주택부문을 자극하게 되는 구조적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토건국가적 사고방식 건설업이 경기부양의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역사적 뿌리는 1960, 70년대 개발연대의 토건국가적 사고방식일 것이다. 토건국가란 원래 우리처럼 건설업이 비대해진 일본의 정·관·건설업계의 부정적 공생관계를 분석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다. 상지대 홍성태 교수(사회학)는 “개발국가의 가장 타락한 형태가 바로 토건국가”라며 “토건국가는 토건업과 정치권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를 뜻한다”고 말했다. 홍 교수에 따르면 개발독재시대 비대해진 건설, 토건업은 자신의 국민경제적 비중이 커짐에 따라 건설, 토건업이 경착륙하면 경제가 갑작스럽게 침체에 빠진다는 논리를 앞세워 주기적으로 경기부양의 요구를 들고 나온다는 것이다. 반대로 대규모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이에 투자하는 것을 전체 경제성장과 동일시함으로써 끊임없이 대규모 토목·건축사업을 부추기게 된다. 과도한 건설투자(특히 주택부문)의 문제점은 건설업의 한계자본계수(GNP 한 단위를 늘리는데 필요한 자본량)가 제조업에 비해 크기 때문에 수요 진작 효과는 크지만 생산유발효과는 크지 않은, 기본적으로 소비성 투자라는 점이다. 따라서 적정수준을 넘어선 건설투자는 경기부양이라는 반짝 효과는 크지만 장기적인 성장동력 확충에는 별 효과가 없다. 과거의 부정적 유산과 결별 2001년 한국과학기술평가원이 1970~94년까지 25년동안 투자유형별로 1조원을 투자했을 때의 경제적 효과를 분석한 결과 건설경기 부양에 쓸 경우 △첫 해에 0.42%의 경제성장 효과가 나타나지만 △5년 후 첫해 대비 마이너스 0.01% △20년후 마이너스 0.16% △30년 후 마이너스 0.31% 성장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반면 1조원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할 경우 △첫 해에 0.25%의 경제성장을 가져온 뒤 △5년 후 첫해 대비 0.06%로 성장률이 떨어지지만 △10년 후 0.24% 성장으로 높아지고 △30년 후 1.54% 성장하는 등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기여도가 높았다. 2006년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당시 권오규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인위적 경기부양을 요구하는 정치권의 요구에 대해 “나는 조금 생각이 다르다”고 답했다. 이 한마디는 개발독재시대의 토건국가적 사고와 손쉬운 단기 경기부양 처방, 부동산투기를 무릅쓰고서라도 경기부양에 매달리는 모험주의적 정책관행 등 부정적인 과거유산에 대한 참여정부의 결별 선언이자, 정책적 원칙에 대한 확인이었다. 2007.02.04 특별기획팀
- [특별기고] 부동산정책의 과거와 현재 부동산시장을 안정시키려면 일관된 정책을 흔들림 없이 밀고가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 부동산 정책은 경기상황에 따라 투기억제책과 경기부양책을 반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정책효과를 반감시켰다. 현 정부는 과거와 달리 '언젠가 바뀔 것'이라는 투기 기대심리를 꺽기 위해 투기억제, 시장선진화, 주거복지 향상이라는 정책목표를 일관되게 추진하고 있다. 부동산 정책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부동산 정책을 본격적으로 구사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960년대 후반부터다. 급속한 경제개발 과정의 영향으로 부동산 가격이 상승을 시작한 게 바로 이때부터인 까닭이다. 일관된 통계자료가 갖추어진 1970년대 중반부터 보면, 우리나라의 부동산경기 순환주기는 모두 4차례의 상승과 하락기가 있었다. 제1순환기는 1975년부터 1981년, 제2순환기는 1982년부터 1986년, 제3순환기는 1987년부터 1998년, 그리고 제4순환기는 1999년부터 현재 진행 중이다. 1970년대 말에는 중동건설 특수 등으로 부동산 가격이 상승했다. 이에 대응해 정부는 1979년에 ‘8.8 부동산투기억제 및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닥친 제2차 오일쇼크와 경제불황을 타개하기 위한 경기부양책이 시행되자 서울지역 아파트를 중심으로 부동산 투기가 재발됐다. 1980년대 후반 들어서는 올림픽 등 국제행사 개최와 3저 호황 등을 배경으로 유동자금이 부동산시장에 대거 유입되면서 부동산 투기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부동산 가격 급등으로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악화됨에 따라 부동산 문제 해결은 국가적 현안과제가 됐다. 이에 200만호 주택건설 계획이 수립되었고, 1990년 3월에 토지공개념 제도가 도입됐다. 주택 200만호 건설효과가 가시화되는 1991년을 고비로 부동산 가격은 하락세로 반전되었다. 1997년말에 발발한 외환위기는 전대미문의 부동산 가격 폭락을 초래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여러 차례의 크고 작은 경기부양 시책을 시행하게 된다. 이런 경기부양책은 부동산 시장의 급격한 침체를 막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2000년 이후 저금리, 과잉유동성과 맞물리면서 서울의 일부지역과 아파트를 중심으로 가격이 급등하는 등 그 후유증도 만만치 않았다. 이와 같은 과거 부동산 정책의 추진과정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우선 경기상황에 단기대응하면서 투기억제 대책, 경기활성화 대책을 반복할 경우 당장은 부동산 가격이 안정되지만 장기적으로는 가격의 변동성이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가격이 하락하더라도 경기부양정책에 의해 재상승할 것이라는 학습효과가 나타나게 되고, 결국 정책효과를 반감시키게 된다. 또한 부동산시장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시장불안을 원천적으로 해소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투명하지 못한 부동산거래, 불공정한 부동산세제 등 부동산시장에 내포된 문제점이 제대로 치유되지 못하면 부동산 투기를 억제할 수 없다. 참여정부 부동산정책과 기대되는 성과 2000년대 초반부터 부동산 과열 현상이 지속되자 부동산 가격 상승을 진정시키고 시장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는 정책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참여정부는 투기억제, 시장 선진화, 주거복지 향상이라는 부동산 정책의 기조를 설정해 추진하고 있다. 먼저 가격안정 측면에서 ‘투기억제’를 통한 실수요자 위주의 시장을 만들고, ‘공급확대’를 통해 수급불안 문제를 해소하는 한편, '시중자금 관리’를 통해 부동자금을 보다 생산적인 곳으로 유도하는 선순환 구조를 확립했다. 이 같은 정책에 따라 앞으로는 부동산 투기가 시장에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참여정부는 부동산시장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부동산 가격 및 거래의 불투명성을 제거함으로써 시장 선진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부동산 실거래가 신고제 도입, 종합부동산세를 비롯한 세제 개편 등의 정책들은 거래과정을 투명화하고 시장을 정상화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또한 서민 주거복지 향상을 위해 공공임대주택의 재고를 확대하고, 전세자금 지원 등 서민금융 지원을 확대해 서민의 주거안정을 확립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앞으로 서민들이 부담가능한 범위 내에서 안심하고 거주할 수 있는 주거복지사회가 구현될 것으로 기대된다. 앞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과거 부동산시장은 주기적으로 불안한 상태를 경험해 왔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경험을 거울삼아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정책기조가 지속적으로 유지·정착되면 우리나라의 부동산시장이 선진화된 시장으로 재편되고 국민이 주거불안 없이 살 수 있는 사회가 올 것이다. 2007.01.29 최병선 국토연구원장
- 집값 최고 상승 1990년, 최대 하락 1998년 우리나라는 1967년 이후 2007년까지 40년 동안 4차례 땅값과 집값이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는 ‘부동산 경기 순환주기’가 있었으며, 59건의 주요 부동산 정책과 조치를 내놓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정홍보처의 국정브리핑이 정부 부동산 정책의 40년 역사를 정리하는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기획을 위해 각종 정부 기록물과 학계 보고서 등을 종합한 결과, 부동산 정책 가운데 투기 억제 및 가격안정을 위한 정책이 31건이었으며 부동산 규제완화 등을 통한 경기활성화대책이 17건, 임대주택 확대 등 서민 주거복지 정책이 11건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부동산 정책은 1967년 11월29일 발표된 ‘부동산투기억제에 관한 특별조치법’으로 이에 근거해 서울과 부산에서는 부동산 양도 때 무조건 차액의 50%를 ‘부동산 투기 억제세’로 매겼다. 당시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로 촉발된 강남 말죽거리(현 양재역 부근)의 땅 투기열풍은 1966년 초 평당 200~400원이던 땅 값을 1968년 평당 6000원선까지 끌어올렸다. 정부는 자고일어나면 오르는 땅값을 잠재우기 위해 대책마련에 나섰고 민간 연구용역 끝에 ‘부동산투기 억제에 관한 특별조치세법’을 제정, 이듬해인 1968년 1월부터 시행했다. 조사 결과 토지 가격이 가장 많이 상승한 시기는 부동산 경기 1차 순환기인 1978년으로 전년대비 49.0%나 급등, 박정희 대통령이 소위 8.8조치로 불리는 ‘부동산 투기 억제 및 지가 안정을 위한 종합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주택 가격이 가장 많이 오른 시기는 1987년부터 시작된 3차 순환기의 최고 정점인 1990년으로 전년대비 21.0%나 집값이 급등하는 투기열풍이 일어났다. 당시 전세 값 파동은 1987년 국제수지 흑자와 88올림픽 이후 통화량 급증에 따른 물가오름세 심리 확산에 따른 것으로, 정부는 1988년 ‘8.10부동산 종합대책’과 신도시 건설 구상을 담은 1989년 ‘긴급부동산 투기억제대책(2.4)에 이어 1990년에만 3차례 투기억제 및 물가안정을 위한 특별대책을 내놓았다. 특히 당시 전세가격이 16.8%나 치솟는 전셋값 폭등 속에서 생활고를 비관한 10여 명의 가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태가 보도되기도 했다. 집값이 가장 안정됐던 시기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로 5년 연속 하락했다. 외환위기로 1998년 12.4%나 폭락했던 집값은 정부의 대대적인 건설경기 부양과 부동산 규제 철폐로 1999년부터 상승세로 돌아서 2003년까지 5년 연속 최장기간 상승세를 지속했다. 특히 월드컵이 열린 2002년에는 집값이 16.4%나 뛰어 2000년대 들어 최고 상승률을 기록했으며 땅값도 9.0%나 급등했다. 2003년 6건의 잇따른 부동산 가격 안정대책 및 서민 주거복지 정책 발표의 영향으로 2004년 잠시 주춤하던 집값은 2005년부터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지난해 11.6% 상승률을 기록했다. 우리나라의 부동산 정책은 주기적인 가격상승과 하락에 대응하여 대책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 긴급 부동산 대책을 발표하고 이에 따른 문제점이 발생하면 후속조치를 시행해 가격 안정을 찾는 형태로 유형화 돼 온 것으로 분석됐다. 근본적이기보다는 임기응변적 처방은 결국 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부동산 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일관성 있는 투기 억제 및 부동산 가격 안정 정책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20가지 부동산정책 주제별로 정책담당자 증언, 에피소드, 숨겨진 사연 담아 국정브리핑과 주택도시연구원, 국토연구원, 금융연구원이 공동으로 기획한 ‘실록 부동산정책 40년’ 시리즈는 전-현직 부동산 정책 담당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각종 정부 기록물, 국회 속기록, 학계 연구 보고서와 간행물 등을 토대로, 각 부동산 정책의 시대 상황과 내용, 정책 탄생의 갈등과 에피소드, 주요 사건, 시장 반응과 이후 영향 등을 상세하게 분석했다. 특히 강남 불패 신화의 근원과 투기와의 숨바꼭질의 역사, 신도시 건설의 숨은 이야기, 부동산 세제개편에 얽힌 저항과 좌절의 역사 등 20여 가지 주제별로 우리 부동산 시장을 둘러싼 만성화된 투기 메커니즘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면서 정부의 정책적 노력, 숨은 이야기, 정책적 유산 등을 전한다. '실록 부동산정책 40년'은 이밖에도 강남 개발이 2000년대까지 지속되며 경부고속도로 축선을 따라 남쪽으로만 도시 개발이 진행되는 사연, 70년대 투기부인에서부터 '빨간바지 복부인'을 거쳐 2000년대 '떳다방'까지 투기의 변화와 투기세력과의 숨바꼭질 역사, 부동산 양도소득세의 후퇴 과정, 오락가락한 아파트 분양가규제의 숨은 딜레마 등 각 정책의 시대별 변화를 정책 담당자들의 목소리와 정부기록, 언론보도 등을 통해 사실적으로 전달할 계획이다. 또 분당과 일산 판교 신도시 건설에 얽힌 숨겨진 이야기, 불임시술자에게 특혜를 주던 청약제도가 다자녀 가정에 혜택을 주는 제도로 바뀌기까지의 과정, 공인중개사 시험의 역사, 강남8학군 특목고 등 교육과 집값의 방정식, 종합부동산세를 둘러싼 정부 내 파워게임, 부동산실명제와 실거래가 등기제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전세 제도가 우리나라에만 지속되는 사연 등을 소개할 예정이다. 2007.01.29 특별기획팀
- [총론]‘부동산 신호등’ 세우기 40년 걸렸다 #저항 “과표현실화는 조세저항을 불러일으키므로 국가안보상 곤란합니다.” 88서울올림픽이 끝나면서 집값과 땅 값이 폭등하자 경제기획원은 당시 15%에 불과하던 과표현실화율을 3년에 걸쳐 토지는 60%, 건물은 50%까지 대폭 끌어올리려 했다. 실제 1억원에 거래되는 땅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기준인 과세 표준액이 1500만원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기준으로 과세하는 것은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투기를 잡을 수도 없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당시 반대 여론을 등에 업은 내무부는 조세저항에 따른 체제불안과 북한과의 대치상황까지 거론하며 과표현실화에 대해 반대론을 폈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당시 정부에게 조세저항은 체제위기로 인식됐고 실제로 불안요인을 안고 있었다. “내무부의 반대는 예상보다 훨씬 거세더군요. 내무부 모 국장은 회의도중 ‘경제부처와는 더 이상 대화할 수 없다’며 회의장을 뛰쳐나간 적도 있습니다. 당시 내무부가 내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한 제대로 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이장규 전 중앙일보 기자(현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대표이사)의 저서 ‘실록 6공 경제’는 실무팀 관계자의 말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당시 나웅배 경제기획원 부총리는 5차례나 장관회의를 열어 설득을 거듭한 끝에 합의를 끌어내는 듯 했으나 결국엔 여론에 민감한 내무부의 반대로 과표현실화는 백지화됐다. #그리고 2007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2007년 1월. 8·31 국민참여 부동산정책에 따라 토지와 주택에 대한 과표는 점진적으로 현실화돼 재산세의 기준이 되는 공시가격은 실제 가격의 80%까지 반영된다. 양도소득세의 과세형평을 높이기 위해 1년 유예기간 끝에 2007년 1월부터 모든 부동산에 대한 양도세는 공시가격이 아닌 실거래가로 부과됐다. #좌절 “지금까지 역대 정권은 집권초기에 세제 및 세정의 혁신으로 공평세제 및 신뢰세정을 구현한다는 개혁안을 내놓곤 했다. 그러나 집권 뒤 일정 시일이 지나면 선거 등을 의식한 정치권의 압력과 이익집단의 로비 등으로 번번이 용두사미격으로 개혁의지가 흐지부지되곤 했었다.” (한겨레신문 1993년 5월27일자) 문민정부 출범 초기인 1993년 5월26일 재무부가 ‘신경제 5개년 계획 세제부문 개혁안’을 내놓으면서 공시지가 대비 평균 21% 수준에 머무르고 있던 토지과표를 1996년부터 공시지가로 전환하고 보유세 부담을 높이는 등 부동산투기 및 과다보유를 막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를 갖추겠다고 하자 한겨레신문은 다음날 해설기사에서 이렇게 적었다. 아니나 다를까. 1995년11월17일, 정부와 민자당은 당정회의를 열어 종합토지세 과표적용비율을 동결하고 일부 토지에 대한 세율을 낮추는 내용의 지방세법 시행령 개정안에 합의했다. 이 때문에 ‘총선을 겨냥한 땅부자 달래기’라는 지적이 뒤따랐고 종토세 과표를 공시지가로 전환해 ‘땅 많이 가진 것이 고통이 되게 하겠다’던 약속은 흐지부지 돼갔다. 종합토지세의 경우 처음 시행된 1990년 1월에도 고액자산가와 땅 재벌들의 조세저항에 부딪쳐 과표현실화를 포기했었다. 당시 서울신문(1990.1.10)은 "정부가 우리 경제를 좀먹는 부동산 투기의 요인을 근절시켜 경제의 안정기조를 다져보려고 모처럼 칼을 빼들었으나 제대로 한번 휘둘러 보지도 못하고 칼집에 되돌려 넣은 셈”이라고 비판했다. #그리고 2007 17년이 지난 2006년 12월. 공시가격 기준 6억원으로 과세기준이 강화된 부동산 보유세제인 종합부동산세를 놓고 언론은 연일 ‘세금폭탄’론을 거론했다. 또다시 ‘조세저항’이라는 표현이 신문을 덮었지만 종부세는 98.2%의 높은 자진신고율을 보이며 정착했고 2007년 1월 종부세 논란은 꼬리를 감췄다. #유혹 외환위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1998년 3월17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건설회관에서는 정부 여당과 22개 건설관련 단체장과의 상견례가 열렸다. 정부를 대표해 나온 이정무 건설교통부 장관과 여당인 국민회의 김원길 정책위의장이 건설경기를 살리기 위한 선물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양도세를 우선 대폭 인하하되 궁극적으로 폐지하는 방향으로 세제를 개편해 오는 4월 임시국회에서 입법화할 방침입니다.” 김 의장은 회의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화끈한 ‘1면 톱기사거리’를 제공했다. 건설경기를 살리기 위해 실현가능한 모든 처방을 내놓으려는 정부와 정치권의 움직임은 1998년부터 1999년까지 분양가 전면 자율화, 양도세 한시적 면제, 분양권 전매 허용, 토지거래 허가 및 신고제 폐지, 택지소유상한제 폐지, 민영아파트 재당첨 제한기간폐지, 무주택 우선공급제도 폐지 등 부동산 관련 규제를 줄줄이 완화하거나 없앴다. 가격폭락과 거래단절로 침체에 빠진 부동산 시장을 하루아침에 과열로 바꿔놓을 첫 단추는 이렇게 끼워졌다. #그리고 2007 그로부터 9년이 지난 2007년 1월. 정부는 분양가 상한제를 전면 시행하고 수도권과 투기과열지구에 한해 민간택지 분양원가를 공개하기로 했다. 양질의 주택을 ‘싸게, 많이, 그리고 빨리’ 공급해 무주택 서민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주려는 정부 정책에 대해 언론은 ‘복합 불황 우려’라는 과장된 유혹과 흔들기를 계속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반값 아파트 공약’ 등 ‘부동산 정치 세일’이 한창이다. 저항과 좌절과 유혹의 역사 집 값과 땅 값을 안정시키고 서민들에게 내 집 마련 기회를 주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부동산 정책의 험난한 ‘오디세이’는 숱한 저항과 좌절, 그리고 유혹의 역사다. 땅 부자 · 집 부자와 투기꾼들의 조직적 저항, 이해관계에 따라 전전긍긍한 정책적 좌절, 현상을 타개하려는 임기응변식 처방과 정치적 유혹은 끝없이 시장을 왜곡했다. 요동치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공룡’인 부동산 시장 앞에 정부의 정책은 끊임 없이 시험 받았고 때로 경기부양의 표준식단으로, 때로 시장개혁의 상징으로 정책환경에 따라 변화를 거듭했다. 40여년 전인 1967년 강남 땅 투기열풍을 막기 위해 도입된 ‘부동산 투기 억제세’에서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혁명적 조치’라며 내놓은 1978년 ‘8.8대책’, 그리고 참여정부의 ‘8.31정책’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동안 쏟아낸 부동산 정책들은 현재의 가격흐름과 부동산 불패 신화의 이력으로 남아있다. 풀고 조이고…규제 강화와 완화의 반복 <국정브리핑>이 주택도시연구원, 국토연구원, 금융연구원 등의 도움을 받아 정부가 부동산 문제 해결과 시장안정을 위해 내놓은 정책을 조사한 결과, 1967년부터 2007년 1월11일까지 발표한 부동산 및 주거복지 관련 정책은 총 59건이었다. 이 가운데 부동산 투기 억제 및 가격안정을 위한 정책이 31건이었으며 규제완화 등을 통한 경기활성화대책이 17건, 임대주택 확대 등 주거복지 정책이 11건이었다. 정부는 부동산 가격이 급등할 때는 규제와 세금, 공급정책 등을 통해 시장을 진정시키고, 반대로 경기가 침체하면 손쉬운 경기부양 수단으로 건설 규제 완화를 택했다. 일례로 1977년 분양가 규제와 78년 8.8대책에 이어 1980년부터 82년까지는 주택경기 활성화 조치를 5차례나 쏟아냈고, 1989년에는 강력한 규제정책인 토지공개념 도입과 함께 주택 200만호 공급을 추진했다. 1997년 외환위기로 경기가 침체되자 경기 부양을 위해 부동산 관련 규제를 전면 완화하는 쪽으로 부동산 정책 방향을 틀었다. ‘발등에 떨어진 불’에 부동산 시장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과 안정화에 대해선 언론도 침묵했다. 이런 ‘냉온탕’을 오가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국민에게 경기 조정의 종개념이나 임시방편으로 인식되면서 ‘때가 되면 바뀌는 것’이란 잘못된 인식을 키워왔다. 주택 건설을 촉진할 필요성이 클 때는 부동산 시장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부동산 시장으로의 투기자금 유입이 경제에 부담을 주기 시작하면 이를 억제하는 식으로 규제 강화와 완화를 반복하며 경기의존적으로 바뀌었다. 예컨대 미분양사태가 빚어질 경우 융자제도 등을 통해 구입능력을 높여서 분양받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양도소득세를 감면하는 등의 수단으로 능력 있는 자에게 주택이 돌아가도록 해왔다. 주거안정과 경기조절이라는 다소 상충하는 두 가지 목표 사이를 시소 타듯 오가면서 ‘부동산 10년 주기설’이란 세간의 공식을 만들었다. 부동산 정책, 그 구조적 딜레마 이처럼 부동산 정책이 온갖 저항과 좌절과 유혹 속에 시장의 기초 질서를 다루는 제도적 장치와 근본적 시스템을 만들기보다는, 현상을 타개하는 ‘대증요법’이 되어 버린 데는 우리나라 부동산시장의 구조적 딜레마가 자리 잡고 있다. 우리의 주택공급 시스템은 재정지원이 극히 한정된 가운데 민간자금에 크게 의존하면서도 행정규제 수단으로 시장을 통제해 주택건설을 촉진하거나 억제하고 또 주택의 배분을 관리하는 체제이다. 자본주의 체제이면서도 선진자본주의와는 다르고, 또 싱가포르 같은 후발자본주의 사회와도 다르게, 민간 주도이면서 국가의 행정적 통제를 심하게 받는 주택공급체계를 가진다. 이 때문에 시장이 우선이냐, 공공 이익이 우선이냐의 논란은 역대 부동산정책과 함께 한다. 주택도시연구원 임서환 연구원은 “정부는 민간 자금을 유인하여 공급을 촉진하는 대신 주택의 규모 가격 공급절차 등을 통제하여 주택이 저소득층에 돌아가도록 한다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 결과 정책은 투기성 자금의 변덕스러운 흐름에 일일이 대응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경제규모가 커질수록 주택 정책은 경기조절 대책이나 물가대책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주택건설 부문이 실물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간단치 않았다. 경기 부양의 유혹도 그만큼 컸다. 대형 건설공사가 하나가 벌어지면 철근 합판 등 수많은 건자재 하청업체는 물론 인부, 공사판 식당 함바집까지 고용창출효과가 생기고 주변 유흥가까지 경제적 활기가 돌았다. 미국 국제개발처(AID)의 한 보고서(Planning and Developnent Collaborative International 1977)는 1970년대까지 우리나라에는 주택정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평가하고 있다. AID는 “주택과 관련한 대부분의 결정이 그 결정에 따른 행위 또는 방치가 갖는 함의를 충분히 서면으로 입증할 수 있는 데이터나 분석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확한 통계나 과학적 분석을 통한 정책이 아니라 ‘한국에는 주어진 자금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일정한 질적 수준의 주택을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짓는다는 일반적 목표 이상의 주택정책이 없다”고 지적했다. “돈 생각하지 말고 공급해라” 이같은 구조적 딜레마와 그에 따른 정책적 고민은 현 정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가 지금까지 주택정책을 하는데 있어서 주택의 수요, 정책의 수요와 목표를 먼저 전제하고 거기에 맞도록 정책을 맞춰가지 못하고 돈의 조달, 재원의 한계를 먼저 생각하고 그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려는 그런 수준인데 여기에 발상의 대전환을 아직 못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번에는 좀 각별한 결단을 해야 한다.” 2006년 4월25일 대한주택공사 국민임대주택 홍보관에서 열린 ‘주거복지정책 토론회’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주택정책의 ‘발상의 대전환’을 강조하며 “재정 능력에 맞춘 공급정책이 아니라 수요에 맞춘 공급정책으로 전환합시다”를 몇차례 반복했다. 민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주택공급에서 벗어나 공공의 공급능력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이것을 국민들의 마음 속에 그리고 주택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 도장이 박히도록 해야 한다”는 노 대통령의 주문은 진행형이다. 우리나라 부동산 정책의 역사가 갖는 구조적 딜레마와 재정적 한계를 감안한다 하더라도, AID가 지적했던 ‘정책 부재론’과 주택공급정책의 발상전환은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일관된 신호등 없었던 부동산 시장 이동성 전 건설부 주택국장은 “정치상황, 경제상황에 밀려 전매제한 등 부동산 시장의 질서를 잡는 데 꼭 필요한 것까지 오락가락하며 풀었다 죄었다를 반복한 것은 큰 불행”이라고 말했다. “사고가 나지 않더라도 교통질서를 위해 신호등이 필요하듯, 부동산시장의 질서를 잡는데 꼭 필요한 제도와 시스템들이 있다”며 “그런 것까지 풀어버려 제도들이 일찍부터 자리를 잡는데 실패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하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부동산 시장이라는 얽히고 설킨 도로에 제대로 된 신호등 기능을 해야 할 제도와 시스템들이 어떤 때는 빨간불에 건너지 말라고 했다가 상황이 바뀌면 빨간불에도 건너고 초록불에 건너지 말라고 한다. 부동산 열풍이 지나갈 때마다 정부는 투기꾼이나 중개업자에 대해 사법조치의 의지를 밝히는 등 대증요법을 꺼내들고 허겁지겁 ‘수신호’로 부동산 시장의 무질서를 정리하기 급급했다. ‘신호등’ 세우고 투기소득 숨을 곳 없애는 데 40년 돌아 실제 거래된 가격을 신고해 이를 등기하고, 이에 합당하게 세금을 매기거나 선진국처럼 고액의 부동산을 소유하는데 따른 보유세 부담을 높이거나, 분양권의 전매를 제한하는 것과 같은 시장의 기초 질서를 다루는 ‘신호등’같은 인프라와 시스템을 만드는데 우리는 40년을 빙빙 돌아온 셈이다. 사실 우리의 부동산 시장은 수십 년 동안 ‘명의(이름)도 가짜, 가격도 가짜’였다. 1995년 도입된 부동산실명제가 ‘이름’ 부분의 시장 투명화 조치였다면, 2006년부터 실시된 부동산 실거래 가격 신고제(1월) 실거래가 등기부 기재(6월)는 ‘가격’부분에서 부동산 시장을 투명하게 만든 획기적 제도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 사회에서 이제 투기소득이 숨을 거처가 사실상 없어졌다. 과거에는 장부상 부동산 가격이 실거래가와 다르고 국세와 지방세가 각각 다른 과표를 가지고 있어서 거래자들은 실제 거래된 가격과 무관하게 낮은 가격으로 신고하고 그 덕분으로 세금을 적게 내는 데 동참했다. 전 국민이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투기소득 불감증에 걸려 있었던 셈이다.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은 “종부세 등 보유세의 강화 조치는 지난 수 십년 간 역대 정부가 하지 못한 것들이다. 실거래가 신고 역시 금융실명제에 버금갈 정도로 부동산 시장에서는 획기적 조치다. 정부로서는 이제 투기는 더 이상 발붙일 수 없게 제도를 정비했다고 자부한다”며 “하지만 이런 조치들이 효과를 나타내려면 한참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투명한 시장거래 자료는 부동산시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만 아니라 항후 부동산 정책 수립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8.31 정책의 세제부문 입안을 주도했던 김용민 전 재정경제부 세제실장(현 조달청장)은 “실거래가 과세로 부동산 거래질서를 바로 잡고 부동산 투기이익을 환수하며 능력에 맞게 보유세를 부담하도록 하는 8.31 세제개혁은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고 했다. 취득세와 등록세를 낮추기 위하여 이중계약서를 작성하고 실거래가격이 전혀 파악되지 않아 실제 양도차익에 대하여 양도소득세를 과세하지 못하며, 많은 부동산을 보유함에도 너무 낮은 보유세를 부담하는 등의 잘못된 관행과 제도가 아주 느리지만 분명하게 역사 속으로 묻혀 가고 있다. 투기억제 인프라 깔기, “꿀릴 게 없다” 6공화국 시절 경제수석과 건설부 장관을 지내며 1기 신도시를 입안했던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국정브리핑>과의 인터뷰에서 “부동산 보유과세 강화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하려다 여러 가지 저항 때문에 못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유세 강화 조치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역사적인 개혁조치로 평가할 만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불투명한 거래관행과 형평성 없이 턱없이 낮았던 부동산 세제는 “세금 부담도 없는 가장 확실한 재테크는 부동산”이라는 한국사회의 잘못된 신화의 원인제공자였다. 부동산에서 발생하는 초과이익을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환수’하는 것은 부동산 가격의 거품을 빼는 출발점이다. 참여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가격안정 측면에서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부동산 세제 정상화와 거래투명화 등 부동산 시장의 제도적 인프라를 처음 놓았다는 측면에서는 또 다른 역사적 평가가 기다리고 있다. 돌이켜 보면 40여년 동안 부동산 정책이 일관된 제도와 시스템으로 자리잡지 못한 것은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이해관계와 잘못된 관행에서 비롯됐다. 수십년간 주택 수요자와 공급자, 정부 모두가 ‘개발연대’의 패러다임에 길들여져 왔고, 남의 돈을 꿔서라도 집을 산 사람은 이익을 남겼고 이사를 많이 다닐수록 돈을 많이 버는 결과를 낳았다. 이제 부동산 정책 40년 역사를 돌아보며 미래의 희망을 담는 사회적 합의를 추구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이 반드시 성공하고 일관되게 뿌리내려야 하는 이유는 어느 정부의 정책 성패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의 삶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07.01.29 특별기획팀
- 연대별 주요 부동산정책과 부동산 가격 변화 2007.0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