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잘 보존되어 온 자연만큼이나 국립공원 안에는 잘 간직해 온 문화유산이 있다. 이러한 국립공원을 옛 선조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과거의 국립공원은 우리의 선조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답은 옛 문헌 속에 있다. 솔솔부는 바람과 청명한 하늘, 다가오는 이번 가을에는 옛 문헌작품 속 국립공원으로 발걸음을 옮겨보자.(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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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령 덕유산국립공원사무소 자원보전과 주임 |
덕유산은 예부터 깊고 복된 땅으로 불리어 왔다. 세상을 떠나 숨어든 수행자들이 머무르는 곳이자 도인들과 은둔자들의 비밀 성지였으며, 나라의 보물을 지켜내는 방책이자 왜적을 물리칠 국토의 요충지이기도 한 곳이다.
여전히 많은 탐방객들이 사시사철마다 색다른 빛깔이 빚어낸 아름다운 덕유산국립공원을 찾고 있다.
덕유산은 역사 속 민간 백성들의 의식에도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조선 중기에 세상이 어두워지고 백성의 삶이 고달파지자 나라의 흥망과 개인의 안거에 관한 비결서와 예언서 등이 유행했다.
대표적인 예언서 <정감록>은 덕유산을 우리 국토에서 가장 중요한 10개의 승지(勝地) 중 하나로 언급했으며 이중환의 <택리지>에서도 덕유산 일대를 승지 또는 복지(福地)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골 바깥 쪽은 온 산에 밭이 기름져서 넉넉하게 사는 마을이 많으니, 이는 속리산 이북의 산과 비교할 바 아니다’
이 외에도 덕유산은 <박문수전>, <갈천집> 등 옛 문학작품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기록되어 있다. 허목의 <기언집> 28권 하편, 산수기 덕유산기(德裕山記)에 담겨진 덕유산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작가인 허목은 덕유산을 남방의 산 중에서 가장 기이하다고 말하며 여러 군에 걸쳐 있는 덕유산의 규모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줄기는 붉고 잎은 삼나무 같으며 높이는 몇 길이 되는 특이한 향기의 사철나무가 있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덕유산을 대표하는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주목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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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의 구름 속 일출. |
기록에서는 당시 사람들이 덕유산을 오르는데 주로 이용하던 두 갈래의 길을 안내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지금의 거창 신풍령(빼재)에서 구천뢰(구천동) 60리를 오르는 길이다.
빼재라는 지명은 과거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역으로 수많은 전투로 인해 많은 이들이 뼈를 묻어야 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신풍령은 빼재에 포장도로가 놓이고 신풍령 휴게소가 설립되면서 불리어지게 됐다.
다른 하나는 구천동부터 주봉인 향적봉까지 오르는 길이다. 금강모치가 사는 구천동 계곡과 신라시대 고찰 백련사까지 자연과 문화의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는 덕유산을 대표하는 탐방코스다. 편도 약 8.5㎞ 계곡길을 따라 조성되어 있으며 구천동 33경 중, 15경 월하탄부터 33경인 향적봉까지를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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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고찰 백련사. |
그 중 32경인 백련사는 덕유산의 중턱(920m)에 자리잡고 있다. 신라 문무왕 때 백련선사가 은거한 곳에 흰 연꽃이 피어나 이곳에 백련암을 창건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옛날 구천동 계곡에는 십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백련사만 유일하게 남아 구천동 계곡을 상징하고 있다.
하지만 천년의 긴 세월을 지내며 백련사도 많은 풍파를 겪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소실되었다가 1960년부터 복원돼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팔작지붕 구조의 대웅전과 수선당, 명부전, 사천왕문, 일주문, 범종각, 요사채 등이 복원됐으며 유서 깊은 예전의 백련사지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2호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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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의 전경. |
백련사에서는 여러 고승들이 수도했으며 수많은 선사들이 배출됐다. 그 흔적은 지금도 경내의 곳곳에 유산으로 남아 있는데 백련사계단(전라북도 기념물 42), 정관당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102), 매월당부도(전라북도 유형문화재 43) 등이 있으며, 한국전쟁을 피한 조선 경종 3년(7323)에 주조된 범종도 잘 보존돼 있다.
더위를 피해 시원한 산바람이 솔솔 불고 흐르는 물소리가 귀를 즐겁게 하는 구천동 계곡을 지나 백련사로 가보는 것은 어떨까? 선조들의 흔적을 따라 함께 가는 문화가 있는 산행, 역사가 있는 산행에 함께 동행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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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국립공원 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