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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귀신 쫓는 드므, 들어보셨어요?”

‘황쌤’의 조선 궁궐·왕릉 이야기 ②

2017.01.20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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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입구의 영제교를 지나면 근정문이 보입니다. ‘근정(勤政)’이란 부지런히 나랏일을 돌본다는 뜻입니다. ‘경천근민(敬天勤民)’, 즉 하늘을 공경하고 부지런히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임금의 가장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근정문으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임금과 세자, 중국의 사신만이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신하들은 양옆에 있는 작은 문으로 드나들었지요. 오른쪽의 일화문(日華門)은 문관이, 왼쪽의 월화문(月華門)은 무관이 출입하는 문이었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근정문은 단순한 문이 아니고 국가의 중대한 행사가 열리는 공간이었습니다. 그중 가장 중요한 행사는 새 왕의 즉위식이었습니다. 즉위식은 대개 선왕이 세상을 뜬 지 일주일 안에, 즉 상중(喪中)에 열립니다. 선왕은 새 왕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높지요. 아버지 상중에 즉위식을 해야 하는 경우, 왕위를 이어받는 것을 몹시 애통하고 민망한 일로 여겼습니다. 근정문 앞에 준비된 옥좌에 앉을 것을 사양하고 또 사양한 끝에 “전하, 해가 저뭅니다”라는 신하들의 재촉에 마지못해 엉덩이 끝만 살짝 걸쳤다 일어나는 것으로 즉위식을 마치기도 했습니다.

1454년에는 제6대 임금 단종의 왕비를 책봉하는 예가 근정문에서 열렸습니다. 단종의 왕비는 정순왕후 송 씨입니다. 책봉 예식을 치른 지 불과 1년여 만에 단종은 임금 자리를 내놓았지요. 이후 정순왕후는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고, 급기야 남편과 친정아버지가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 겪었습니다. 왕비로 간택되어 근정문에 들어서던 정순왕후는 불과 3년 만에 그런 엄청난 비극을 겪게 될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 왕비 자리가 편치 않을 것이라는 점은 예상했을 것입니다. 단종이 왕비를 들인 것도 숙부인 수양대군의 강요에 의한 일이었으니까요.

근정전 행각의 기단, 남쪽과 북쪽 끝 깊이가 거의 1m 정도 차이 난다.
근정전 행각의 기단, 남쪽과 북쪽 끝 깊이가 거의 1m 정도 차이 난다.

근정문을 지나면 근정전의 장엄한 자태와 마주하게 됩니다. 근정전은 경복궁의 정전(正殿)입니다. 즉위식을 비롯하여 세자나 왕비 책봉, 주요 왕족의 혼례 후 축하 행사가 벌어지는 곳이며 사신을 맞이하는 외교의 장소였습니다. 행사 날 외에도 한양의 관리들은 매달 1일, 5일, 11일, 15일, 21일, 25일에 근정전에 모여 임금에게 문안을 드렸습니다. 이때 문무백관은 각자의 품계석 앞에 서서 네 번 절하는 의식을 치렀는데 이를 조회(朝會)라 불렀지요. 원래 나랏일을 논의하는 ‘조정(朝廷)’은 이 정전의 앞마당을 일컫는 말입니다.

조정에 모인 신하들의 자리를 정하는 품계석은 모두 24개입니다. 정1∼9품까지, 종1∼3품까지 12품계의 문반과 무반을 양옆으로 나눠놓았지요. 문반은 동쪽에, 무반은 서쪽에 섭니다. 그래서 각각 동반과 서반이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근정전 마당은 수평이 아닙니다. 근정전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점점 깊어집니다. 행각의 기단으로 그 차이를 가늠해보면 남쪽과 북쪽이 거의 1m 정도의 깊이 차이가 납니다. 임금을 우러러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고, 비가 왔을 때 배수가 잘되게 하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지요. 마당의 박석은 일부러 울퉁불퉁하게 깔았습니다. 미끄럼도 방지하고, 발밑을 잘 보고 조심해 다니도록 하는 조치입니다.

근정전 석상 서수 가족.
근정전 석상 서수 가족.
근정전의 멋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근정문에 들어서서 오른쪽 행각 모퉁이로 가야 합니다. 거기에 서면 근정전의 처마 밑 공포의 선이 북악산 산자락 선과 거의 평행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북악의 기운을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근정전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중층 지붕과 두 층의 돌 기단은 근정전을 더욱 장엄하게 보이도록 해줍니다. 전각 앞의 돌 기단을 월대(月臺)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임금이 일식과 월식을 관찰했다 하여 붙은 이름이지요. 월대는 궁중 연회가 열릴 때 무대로 사용되는 공간입니다. 다른 궁궐의 정전과 달리 근정전 월대에는 난간이 설치되어 있는데, 그 난간 위에는 수많은 돌 짐승상이 서 있습니다.

근정전 돌 짐승상은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신(四神) 상으로, 상월대 난간 동서남북에 있습니다. 남쪽의 붉은 봉황 ‘주작(朱雀)’, 동쪽의 푸른 용 ‘청룡(靑龍)’, 서쪽의 흰 호랑이 ‘백호(白虎)’, 북쪽의 검은 거북과 뱀 ‘현무(玄武)’가 그것입니다.

둘째 부류는 십이지신(十二支神) 상입니다. 열두 짐승 가운데 개, 돼지, 용의 상이 없습니다. 개, 돼지를 세우지 않은 것은 그들을 깨끗하지 못한 동물로 여겼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용은 청룡과 겹친다 하여 만들지 않았다지만 백호와 겹치는 호랑이상은 만들어놓았습니다. 십이지신은 임금의 주변에 사악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상징물들입니다.

세 번째 부류는 상서로운 동물인 서수(瑞獸)입니다. 서수들은 난간 모서리에 서 있는데, 새끼까지 동반한 가족 서수도 있습니다. 이 서수들의 시선은 각기 다른 곳을 향하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나타날 수 있는 나쁜 기운을 빠짐없이 막아보려는 의도에서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방화수 그릇 ‘드므’.
방화수 그릇 ‘드므’.
월대 위에는 드므와 향로도 있습니다. 둥글고 넓적하게 생긴 ‘드므’는 방화수 그릇으로, 그 안쪽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불귀신이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 설치한 것입니다. 그 물은 초기 진화용 방화수로 쓰였겠지요. 청동으로 만든 향로는 국가적인 행사가 열릴 때 향을 피우던 그릇입니다.

근정전 내부는 위아래 층이 트인 통층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정면에 마련된 어탑 중앙에 임금이 앉는 어좌가 있고, 그 뒤로 일월오봉병(日月五峰屛)이 둘러쳐져 있습니다. ‘일월’은 해와 달, ‘오봉’은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백두산, 중앙의 삼각산으로, 음양의 조화와 임금의 위엄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근정전 천장에는 황금색 칠조룡(七爪龍)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칠조’는 발톱이 7개라는 뜻입니다. 원래 발톱은, 황제는 7개, 왕은 5개를 그렸습니다. 또 용 자체가 황제를 상징하는 동물로,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정전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습니다. 하지만 경복궁 근정전에는 7개의 발톱을 가진 쌍룡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경복궁을 중건했던 고종 때는 중국의 영향력이 다소 약해진 후였기에 이런 조각이 가능했겠지요? 임금이 사는 궁궐의 장식물까지도 중국의 눈치를 봐가며 만들어야 했던 조선의 처지가 새삼 애잔하게 여겨집니다.

글 · 황인희 역사칼럼니스트

[위클리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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