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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해는 짧다. 산기슭에 들어섰는데 어둠이 내린다. 끼니는 고사하고 잠잘 곳도 마련하지 못했다. 아는 사람도 없고, 찾고 싶은 창대의 무덤이나 볼 수 있을지 걱정과 약간의 두려움이 앞선다. 10여년 전 처음 대둔도를 찾았을 때 기분이었다.
낯선 곳에서 도움을 받을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찾는다는 것은 기쁘고 행복한 일이다. 그때 운좋게 오리에서 장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 ‘장덕순’을 확인했고 또 무덤도 어렵게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흑산도 토박이 이영일과 동행을 하니 소풍가는 기분이다.
대둔도 오리에서 본 흑산도. |
대둔도는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에 있는 작은 섬이다. 흑산도에는 방문객이 30여만 명에 이르지만 대둔도를 찾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큰 섬 주변에 영산도, 장도, 다물도 그리고 대둔도가 있다. 이 중 명품마을에 선정된 영산도는 성수기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머물기 힘들지만 람사르습지가 있는 장도나 낚시객들이나 찾는 다물도는 한산하다. 특히 대둔도는 주민들이이 아니면 오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대둔도는 오리, 도목리, 수리 등 마을이 세 개나 있으며 흑산도 주변의 작은 섬 중에서는 크다. 초등학생 수도 흑산초등학교 본교(42명)를 제외하면 영산도(2명), 장도(1명), 다물도(1명)과 비교할 수 없이 많다. 무려 6명에 이른다.
여섯 명이 많다고 하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먼 바다를 지키는 섬에서 6명이면 적잖은 학생이다. 믿을지 모르지만 1970년대 중반 340여 명이었다. 마을만 많은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인물로 보아도 대둔도는 <자산어보>를 집필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장덕순이 있고 수리에는 섬사람들의 아픔을 임금에게 직접 아뢴 김이수가 있다.
<자산어보>의 집필의 숨은 공로자, 장창대
오리마을에 입구에 세워진 장창대 비석. |
흑산도 예리항에서 대둔도와 다물도를 오가는 배는 도선이다. 버스로 이야기하자면 마을버스쯤 될까. 오리 선착장에서 내려 마을까지 가는 길도 섬 노인들에게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큰 마트에 시장이 있는 예리에서 생필품을 사서 끌고 오르막길을 오르다 큰 비석이 있는 곳에서 멈춘다. 최근 섬에 마을버스를 개통했다는데 이럴 때 이용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한숨을 돌린 노인들은 마을로 들어섰고, 나는 웅장한 대리석 비에 새겨진 글에 눈을 맞췄다. ‘자산어보 탄생의 숨은 공로자, 창대 장덕순’이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때 오리마을 장씨 집안족보에서 확인한 인물이다. 그와 손암 정약전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오리마을. |
손암 정약전은 1807년 신유사옥으로 흑산도로 유배되어 사리(모래미)마을에 머물렀다. 섬의 중심이 진리에는 진이 있고 관리들이 머물렀기에 정반대쪽 마을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한다. 그곳에 사촌서당(沙邨書堂)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이곳으로 대둔도 출신의 창대를 불러 함께 생활하며 흑산바다의 물고기 이야기를 묻고 들으며 <자산어보>를 집필했다. 손암은 <자산어보> 서문에 이렇게 적었다. 임원경제연구소 정명현 소장이 옮긴 <자산어보>에서 옮겼다.
내가(정약전) 섬사람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아 어보를 짓고자 했으나 사람마다 말이 달라 딱히 의견을 좇을 만한 이가 없다. 그런데 섬 안에 덕순 德順 張昌大라는 사람이 있었으니, 문을 닫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독실하게 옛 서적을 좋았했다. 집이 가난해 책이 많지 않은 점을 볼 때, 그가 비록 손에서 책을 놓지는 않았지만 보는 눈은 넓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성품이 차분하고 꼼꼼해 귀와 눈에 수용되는 모든 풀 나무 새 물고기 등의 자연물을 모두 세밀하게 살펴보고 집중해서 깊이 생각해 이들의 성질과 이치를 파악했기 때문에 그의 말은 신뢰할 만했다. 결국 나는 그를 초청하고 함께 숙식하면서 함께 궁리한 뒤, 그 결과물을 차례 지워 책을 완성하고서 이를 <자산어보>라고 이름을 지었다.
마을 입구에 전복양식 시설이 가득하고, 바닷가에는 장어와 우럭을 말리는 모습이 있어 예전보다 훨씬 따뜻해 보였다. 장창대의 묘를 다시 찾았다. 수리와 도목리로 가는 길로 나누어진 삼거리에서 도목리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조악한 철재계단이 보였다.
장창대의 묘. |
안내판은 없었다. 옛날 그 길을 찾을 때와 다를 바 없다. 계단을 올라 산길로 접어들었지만 가시덩굴이 길을 막았다. 수풀을 헤치고 들어서니 다행스럽게 묘지 앞에는 안내간판이 있었다. 무덤 앞에도 대리석으로 ‘仁同張氏 昌大 德順之墓’라 새긴 제단도 놓여있었다. 잡목과 풀이 자란 것으로 보아 금년 벌초는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밑도 끝도 없이 새겨진 세 개의 비석과 안내판도 없는 자산어보 집필의 숨은 공로자 장창대를 찾아 나서는 사람도 드물지만 어쩌다 온 사람은 어쩌란 말인가. 어디에 물어볼 만한 곳도 없다.
폐허가 된 섬살이 아픔의 대변자, 김이수 생가
수리마을 김이수 생가로 가는 골목. |
수리마을로 넘어가 김이수의 생가를 찾았다. 흑산도 토박이이자 흑산도 지킴이도 변해버린 마을환경에 몇 번을 확인하고서 생가를 지목했다. 물론 이곳에도 안내판은 없다.
김이수가 정조의 행차를 가로막고 ‘격쟁’을 올렸다. 격쟁은 이금의 행차 길에 징이나 꽹과리를 치면서 시선을 집중시킨 후 직접 백성들이 민원을 호소하는 방법이다. 김이수는 흑산도민이 겪고 있던 가장 큰 폐단인 ‘닥나무’ 세금을 시정하기 위해 관청에 수차례 요청했지만 시정은 커녕 오히려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김이수는 최후의 수단으로 한양까지 올라가 직접 격쟁을 울리고 임금에게 호소한 것이다. 그 결과 세금때문으로 뭍으로 피했던 섬사람들이 돌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김이수 생가. |
<조선왕조실록> 1791년(정조15) 5월 22일 기사를 보면, ‘흑산도 백성이 닥나무 세금 폐단으로 인한 원통함을 징을 쳐 호소니, 이를 시정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흑산도 백성이 ‘김이수’이다. 이로 인해 1767년부터 약 40여년 동안 개선되지 않았던 폐단이 고쳐졌다.
수리 골목에는 ‘김이수로’로 곳곳에 주소로를 알리는 표지가 붙어 있다. 하지만 정작 김이수 생가를 안내하는 안내판은 없다. 생가는 폐허나 다름없다. 안으로 들어가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겨우 담 너머로 안을 기웃거릴 수 있을 뿐이었다.
장덕순이나 김이수, 모두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들의 족적은 결코 작지 않다. 큰 섬에서 같은 일을 했다면 진즉 기념관이네 전시관이네 야단법석을 떨었을 것이다. 집안에 소리를 낼만한 사람이 있거나 표가 된다고 생각했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대둔도 도목리 열목동굴. |
최근 영화 <자산어보>가 촬영 중이다. 흑산도로 유배를 당한 정약전이 섬 청년 창대를 만나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벗의 우정을 나누며 <자산어보>를 함께 집필하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아쉽지만 이 영화는 정약전이 유배생활을 한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 사리마을도, 도초면 우이도 진리마을도 아니다. 장창대가 태어난 대둔도 오리마을도 아니다. 신안군 자은면 둔장리를 중심으로 촬영하고 있다. 실제 두 인물의 활동지에서 촬영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하는 것이 욕심이라는 것은 알지만 내내 아쉽다.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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