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메인메뉴 바로가기

전자정부 누리집 로고이 누리집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입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정부정책 사실은 이렇습니다

콘텐츠 영역

영화 ‘고지전’ 모티브 화천 425고지를 아시나요

[정전협정 60주년] ⑤ 6.25 마지막 승전지 화천 425고지 사흘간의 기록

글:이영선 국방일보 기자

2013.07.17 이영선 국방일보 기자
인쇄 목록

이영선 국방일보 기자
이영선 국방일보 기자
화천 425 고지 전투를 아시나요?

이 고지전은 정전협정을 불과 일주일여 앞두고 벌어진 마지막 전투입니다. 우리 국군의 6.25전쟁 마지막 승전지이기도 하고요.

425고지는 강원도 화천군 북방 철책선 1.2㎞ 앞 비무장지대(DMZ)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425m의 아담한 동산으로 현재 칠성전망대 정면에서 바라보면 맨 눈으로 볼 수가 있는 곳이지요.

정전 협정 전 아군과 적군 최후의 격돌

전사(戰史)에 의하면 425고지 전투는 국군 7사단이 화천으로 이동한 후 책임지역 내에서 수행한 마지막 전투입니다. 425고지에서는 1953년 7월 19일 6·25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시작됐습니다. 이 고지는 높이가 425m에 불과해 주위 고지에 비하면 작은 동산이나 다름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주요 전력 공급원인 화천댐에 이르는 주요한 요충지였습니다. 1953년 7월 휴전협정을 앞두고 김일성이 화천발전소 확보에 혈안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이승만 대통령도 화천발전소의 중요성을 인식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때문에 발전소 절대 사수를 지시하고 7월 19일 2군단 사령부를 직접 방문해 독려했습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군7사단은 53년 7월 중순 이 지역 일대 방어에 나섰습니다. 6월 말 선우고지 전투를 끝내고 2군단 지원작전에 투입된 후였지요.

당시 전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7월 27일 정전협정을 앞두고 중공군은 5개 군 15개 사단을 국군 2군단 전면에 투입하는 등 이른바 7·13 총공세에 돌입했습니다.

정전 성립 전 군사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손에 넣으려는 당연한 시도였지요. 금성 남쪽의 금성천 부근을 장악해 백암산과 적근산을 수중에 넣으려 했습니다.

이곳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경우 아군은 화천 북쪽 방어선에서 크게 물러날 수밖에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별우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금성천 방어선은 작전상 절대적인 최후보루였습니다.

특히 425고지는 별우지구를 서쪽에서 지켜주는 동시에 국군 8연대 주저항선의 주봉인 602고지의 동쪽 능선을 맡고 있는 요새로 절대 사수해야 할 중요한 고지였습니다.

결사특공대 결성, 육탄전 끝에 결국 사수

중공군 135사단은 전략고지인 425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특유의 인해전술을 펼치는 등 맹공을 퍼부었습니다.

이에 대항한 국군의 호국영웅이 바로 7사단 8연대 1대대 1중대장이었던 김한준 대위입니다. 김 대위는 60㎜ 박격포를 이용해 1개 중대 병력으로 중공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빛나는 전공을 세우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지요. 

화천 425고지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화천 425고지 전투를 소재로 한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

김 대위의 1중대는 7월 19일 새벽 방어 명령을 받고 진지에 투입돼 곧바로 진지 구축작업을 실시, 오전 10시쯤 마무리했습니다. 이어 작업을 마친지 불과 30여 분 뒤 적 포탄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개 대대가 넘는 적이 3개면에서 공격해 들어왔습니다. 1중대는 아군 포병지원과 중대원들의 필사적 저항으로 끝내 고지를 사수했습니다.

날이 밝자 전투는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전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새벽 2시, 적의 박격포탄이 다시 아군 진지위에 무차별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상자가 계속 늘어나고, 위기감은 점점 고조되어 갔습니다.

이때 김 대위는 적을 육탄으로 저지하는 길 밖에 없다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중대본부 요원 6~7명으로 결사특공대를 급편했습니다. 김 대위는 각각 5발씩 수류탄을 나눠주고 가장 밀리고 있는 2소대 진지로 나아가 적의 공격축선을 측방에서 공격했습니다.

격렬한 전투에 그는 그만 의식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가 의식을 회복한 때는 중공군이 방어선을 넘지 못하고 425고지를 포기한 뒤였습니다.

196명 중대원들의 굳건한 의지와 단결로 사흘간에 걸친 최후의 격전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이 전투로 사망한 중공군 전사자는 수백명에 달합니다. 기록마다 다르지만 적게는 400여 명부터 많게는 무려 950명에 이릅니다. 생포자도 30여 명이나 되고요.

안타깝게도 아군 희생도 적지 않았습니다. 치열한 전투 속에서 160여 명이나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승리로 국군은 화천댐을 사수하고 휴전선을 38선으로부터 35㎞나 북상시킬 수 있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마지막 전투를 승리로 이끈 김한준 대위에게 직접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습니다.

영화 ‘고지전’으로 재탄생돼 영원히 기억

이처럼 전투는 승리했지만 전쟁은 냉정했습니다. 피와 희생으로 지킨 425고지는 정전협정 결과 그만 남북으로 갈리고 말았습니다.

군사분계선이 고지의 중앙을 가르며 그날의 승리가 반쪽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냉혹한 현실 앞에 고지를 사수했던 국군 병사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고지에서 내려왔다고 전해집니다.

한편 김 대위는 1956년 대위로 예편해 지난해 4월 29일 노환으로 별세했습니다. 육군은 예비역 대위로는 처음으로 장례를 육군장으로 엄수해 425고지 전투의 영웅인 김 대위의 공적을 기렸습니다.

60년전 포화가 가득했던 화천 425고지 주변은 이제 군사분계선이 지나며 녹음이 우거진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이 천국이 되었다.
60년전 포화가 가득했던 화천 425고지 주변은 이제 군사분계선이 지나며 녹음이 우거진 멧돼지 등 야생동물들의 천국이 되었다.

정전협정 60주년을 불과 일주일여 앞둔 현재, 화천 425고지에는 당시 치열했던 전투 흔적은 모두 사라지고, 짙푸른 숲과 분계선만이 남아 그날의 ‘고지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기록이 되고, 또 기록은 감동이 되어 지난 2011년 영화 ‘고지전’으로 재탄생했습니다.

정전 60주년을 불과 일주일여 앞둔 이 여름의 한 자락에, 화천 칠성전망대를 방문해 조국을 수호한 고지전의 용사들을 추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가시기 전에 영화를 보면 더욱 좋고요.

이전다음기사 영역

하단 배너 영역

지금 이 뉴스

추천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