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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면서기’ 별명의 공무원 입문기

김동철/지방행정직 9급(2003년 합격)

2010.01.06 김동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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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공직사회에 발을 딛은 지 6년이 넘었습니다.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공직생활을 경험해오고 있습니다.

현재는 충북 음성군에서 근무하고 있으며 나의 일에 만족하며 성취감도 느끼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공무원 준비를 하면서 공부에 손을 놓은지 언 7년여가 돼가지만 그때의 기억을 다시 추억하며 되살려 봅니다.

2000년 3월 군복무를 마치고 남들과 똑같이 부푼 마음을 가지고 대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23살의 어린나이지만 군대도 갔다왔고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도 조금씩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공이 행정학이다 보니 자연스레 공무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고향 음성에서는 공무원 준비 여건이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1년 중 봄여름 가을은 농사일로 바쁘신 부모님을 도와드리다 보면 한해가 그냥 지나가는 것처럼 시간이 빨리 지나갔습니다.

부모님께서 농사일로 힘들어 하시는 것을 보고 있자니 공부가 맘에 걸리고, 공부를 하자니 부모님이 맘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먼 장래를 보았을 때 공부도 때가 있는 것 같아서 어머님께 공무원 준비를 해보겠다고 하자 어머니께서는 음성 소이면 시골집에서 고추를 재배하여 판돈 100만원을 주시며 서울에 가서 한번 준비해 보라고 해서 공무원 준비를 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둘러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노량진으로 갔습니다.

노량진역에 내려 찾아간 학원은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공무원의 목표를 7급으로 잡고 시작했는데 278명인가를 그 해에 일반직 공무원으로 채용한다는 공고문을 보았습니다. 내가 수강을 하는 반에 수강생이 족히 300명 이상은 되었습니다. 처음에 내 눈에 들어온 수강생들은 다 똑똑해 보였고 과연 내가 이들과 경쟁을 하여 공무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맘에 푹 가라앉았습니다.

그렇게 2개월을 노량진에서 7급 준비를 하다가 여름방학이 끝나서 다시 캠퍼스로 돌아와 학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부의 연속성이 깨지고 공부의 효율성도 떨어지게 되었으며 점점 더 제가 목표한 것에 도달하기가 힘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보니 대학교 3학년 2학기가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음성 고향의 여건과 내가 도전해 볼만한 공직은 지방 9급 일반행정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충주대학교 인근에 있는 충주쪽 고시학원에 가서 동영상 강의를 보며 9급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면서 독학이 아닌 학원을 택했습니다. 지방학원이다 보니 영세하여 지금은 흔한 강사분의 인터넷 동영상 강의가 아닌 서울 노량진의 유명한 고시학원에서 강의한 자료를 녹화하여 텔레비전을 통해 보면서 공부 했습니다. 이론강의만 4번을 반복하여 들으니 8개월이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시험준비를 하면서도 내 자격 조건에서 볼 수 있는 공무원 시험은 모두 보았습니다. 최초로 2000년부터 시험을 보기 시작했는데 7급도 보고, 9급도 보고, 충북 지방직 9급, 서울시 지방직 9급, 선거관리위원회 9급, 충북 교육행정직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어느 정도 한 2001년 시험성적이 시간이 지나갈수록 평균 점수는 떨어졌습니다. 65~79점을 오락가락하였습니다. 수험기간이 1년, 2년, 3년이 지나갈수록 마음은 초조해지고 성적은 자꾸 떨어져 도대체 내가 3년동안 무슨 공부를 한 것인지 되묻곤 했습니다. 대학 4학년 졸업반이 다가왔을 때 대학과 취업공부를 병행하며 지내온 대학생활에 아쉬움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처럼 여자친구 캠퍼스도 누비고 싶고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았지만 진로에 더 취중한 나머지 더 못 놀았던 게 후회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취업이 코밑이라 한없이 낭만적인 것에만 빠져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현실은 취업이라는 압박감이 늘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시작했습니다.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구내식당을 열지 않는 방학이나 주말에는 도시락을 싸서 다녔습니다. 아버지의 트럭을 끌고 다녔는데 어머니께서 밥과 김치를 싸주시면 버너와 물을 싣고 다니며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수험준비를 하면서 먹는 것과 운동도 필요하기 때문에 신경을 잘 써야 합니다.

시험을 준비하며 웃긴 일로는 차에서 라면을 삶아 먹으려고 버너에 물을 올려놓고 라면을 끓이는데 차안에 수증기가 꽉차서 차의 유리문을 살짝 내렸더니 차에서 수증기가 막 빠져나갔습니다. 밖에 버스가 지나가면서 그 광경을 본 승객들이 차에 불이 났는지 알고 놀라 저를 바라보던 일도 생각납니다. 차에서 라면을 끓여먹기도 수없이 하였지만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추억이 되었습니다.

공부만 하루 15시간씩 하다보면 멍해질 때가 있습니다. 간혹 스트레스를 운동으로 풀어주어야 하는데 저는 축구를 좋아해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혼자 차며 땀을 흘리곤 했습니다. 남이 볼 때 뭐하는 짓이냐 이렇게 보일 수 있지만 나름 스트레스를 풀어준 운동입니다.

공부를 오래하다보니 대인기피증도 조금씩 생기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학졸업 후 도서관이나 구내식당에서 슬러퍼에 츄리닝 바지를 입은 나의 모습을 후배들이 볼까 이리 저리 피하며 밥을 먹었던 기억과 지나가다 만나면 왜이리 숨고 싶던지…. 정말 수험기간에는 대인관계가 빵점이었습니다.

수험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1년이 정말 짧게 느껴졌습니다. 커피 한잔하면서 새싹이 돋고 나뭇잎이 파래지는 봄이 왔다 생각하니 어느새 매미가 맴맴거리는 여름이 오고, 그러다 보니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오고, 금새 첫눈이 내려 온 세상을 하얗게 만드는 겨울이 왔습니다. 그렇게 곰처럼 동면을 하고 나면 다시 봄이 오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보니 1년이 정말 짧았습니다.

수험기간 3년째는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수험준비 2년차에 시험을 보았더니 다 떨어지고 오히려 점수는 더 하락하여 마음이 보통 무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으로 사회복지사 시험을 2002년도에 보려고 했는데 자격조건이 사회복지사 3급 이상 있어야 하는데 그 조건을 보지 않고 응시원서를 내는 통에 총무과에서 전화가 온 일도 있습니다.

“김동철씨! 사회복지사 자격증 있나요?” “아니요. 없는데요?”했더니 시험에 응시할 조건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럼, 대형운전면허증 있나요?”하고 묻자 “예, 있습니다.”하고 답을 했더니 그럼, 소방운전직에 응시할 수 있으니 소방운전직을 보시려면 접수를 해주신다고 하시길래 “고맙습니다.”하고 응시원서를 접수하고 시험을 보았으나 쉽게 생각했던 이 시험 조차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떤 시험도 쉬운 시험이 없구나, 정말 어느 정도 해야 합격하는 것일까 늘 그것이 고민이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나 3년차에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모님을 뵐 면목이 없어 집에서 농사를 많이 지으니 농사를 짖겠다고 하자 아버지께서 담배 한 대 피우시고 오시더니 어머니를 통해 1년만 더해보라고 하셔서 이를 악물고 1년을 더했습니다.

그때 생긴 버릇이 모나미 볼펜 머리를 질겅질겅 이로 씹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스트레스를 볼펜에 푼 것 같습니다. 그 딱딱한 볼펜자루를 씹어서 납작하게 만들 정도로 이에 무리를 주어 턱이 아플 때도 있었습니다. 자리에 오래앉아 있고 내용은 머리에 잘 안들어오고 초조해질 때마다 볼펜 뚜껑을 무는 습관이 강해졌습니다. 지금도 그 볼펜을 갖고 있습니다. 저의 소중한 보물입니다. 그 볼펜을 보면서 어려운 일이 있거나 지금 하는 일이 힘들 때 마음을 다잡고 되새기곤 합니다.

3년 되던 해 국가직 행정 9급을 보려고 하니 경쟁률이나 나의 실력상 좀 힘들것 같아서 정보통신 9급으로 돌렸습니다. 조금이라도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서였죠. 그러나 역시 불합격. 그날 참 눈물이 났었습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로 목부분을 거의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담이 들어 양약주사를 맞고 간신히 목이 좋아져 한 달 남은 지방직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첫 시험을 엉망으로 보니 나머지 시험 볼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아니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부모님께 3년동안의 미안함 그리고 내동생에게 형으로서 뭔가 보여주지 못한 아쉬움 등 내 마음은 예전에 다짐했었던 그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마지막으로 믿고 있었던 건 농사였습니다. 이번 지방직 시험을 마지막으로 치르고 나서 농사를 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먹었더니 한없이 가벼워졌습니다. 남은 2주를 기본서를 천천히 정독하고 모의고사집을 마지막으로 풀었습니다.

그렇게 2주가 지나 충북 지방직 행정 9급을 제천시로 지원하여 보았습니다. 아침에 동생이 “형! 힘내. 편히 잘 보고와.”하길래 ‘그래 알았어. 어차피 마지막 시험이니까 이제 차타고 서울, 대전, 청주까지 다닐 필요가 없겠네’ 속으로 생각하며 차를 타고 청주로 향했습니다.

아침밥을 준비해주신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오늘 만큼은 좋은 결실이 있었으면 좋겠다 했지만 시험장소에 들어서자 자신감이 뚝 떨어졌습니다. 시험반이 10반인데 이 중에서 15명이 합격한다고 하니 한 반에 2명꼴도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 답답했습니다. 시험지를 받고 암기과목 먼저 서서히 풀어 갔습니다.

그런데 암기 과목을 푸는데 평소와는 다르게 막힘이 없었습니다. 수월하게 암기과목을 풀고 나니 제천시청이 머리에서 빙빙 돌고 손이 떨렸습니다. 이러다가 내가 합격하는거 아닐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국어와 영어가 늘 큰 당락을 좌우하기에 마음을 가다듬고 국어와 영어를 풀었습니다. 다소 애매한 문제가 국어에 2문제, 영어에 4문제가 있었는데 나중에 채점결과 국어는 2개다 동점으로 다 맞았고, 영어는 4개 중에 2개가 맞아 평균 91점의 높은 점수가 나왔습니다. 정말 어리벙벙하고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습니다.

합격자 명단 발표날에 ARS를 통해 알아보았는데 내용을 내 귀로 들을 ?자신이 없어?동생에게 확인하라고 했습니다. 동생이 전화를 걸어 수험번호를 입력하고 나자 ‘축하합니다’라는 음성이 전화기의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을 때 나는 우리집 천장까지 점프를 뛰며 만세!만세!만세!를 쉴 새 없이 외쳐됐습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잠을 자고 계셨던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깜짝 놀라 일어나셔서 뭔일이냐고 놀라셨습니다. 합격했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가에 기쁨의 눈물이 살짝 맺혔습니다. 정말 면서기라는 별명을 갖고 학창시절을 보내다가 공무원으로 들어오기가 이렇게 힘들었지만 이런 좋은 결과가 있기에 열심히 노력해야 하는구나를 절실히 느꼈습니다.

간단히 맥주로 가족들과 파티를 하고 난 후 그날 밤은 정말 흥분 상태여서 잠을 쉽게 이룰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합격을 하고도 면접에서도 떨어진다는 말을 듣고 산넘어 산이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커트라인 보다 점수가 약간 높아 말만 잘하면 되겠지 하고 특별히 준비한 것 없이 면접을 보았는데 ‘문화인프라 활성화 방법인가?’ 그런 것을 물었는데 배경지식이 부족해 대답을 하긴했어도 둘러대다가 면접을 끝냈습니다.

7월 말경 면접을 보아서 땀이 온몸을 감고 도는데 정말 긴장을 많이 해서 그런지 그날 도청의 면접장소도 지금까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면접을 치르고 2003년 9월 1일 제천시 덕산면으로 첫 발령을 받았습니다. 음성에서 제천까지는 1시간 거리인데 지금은 교통이 잘 구축되어 빠르게 가지만 그때만 해도 도로 공사 중이라 음성에서 제천까지 출퇴근이 힘들었습니다. 제천 덕산면은 정말 오지였습니다. 제천시청에서 임용장을 받고 덕산면사무소까지 찾아가는데 1시간이 걸렸습니다. 제천시인데 어떻게 면사무소까지 1시간씩 매일 출퇴근을 해야 하나 생각하니 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험공부도 그렇게 힘들었는데 이런 것 쯤이야 생각하니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이장님과 주민들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얼굴도 익고 친해지면서 일도 재미있어지고 점점 애정이 생겼습니다. 전형적인 산골농촌의 순박함과 인정을 느끼게 해준 첫 발령지는 제게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요즘 일을 하면서 힘들 때 초임 발령지의 일을 생각하면 다시 힘을 얻습니다. 그때의 마음가짐으로 생활한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초임지 동료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늘 간직하며 후배들에게도 베풀며 살겠습니다.

지금은 5번째 부서인 충북 음성군 의회사무과에서 하루하루 의미있게 잘 생활하고 있습니다.

다소 두서 없이 지난 수험시절의 추억을 들춰보았습니다. 미진한 글이지만 후배님들의 어려운 수험기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써보았습니다.

공직을 준비하시는 수험생 여러분!
2010년 경인년 새해에는 공무원을 준비하시는 후배님의 노력이 결실을 이룰수 있도록 진심으로 바랍니다. 힘내세요.
공직은 여러분이 직업으로 선택할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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