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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지컬 AI 시대
한·싱가포르 AI 동맹, '글로벌 AI G3' 향한 전략적 승부수
현재 글로벌 AI 시장은 미·중 중심의 패권 경쟁이 치열하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한-싱가포르 협력은 우리가 나아갈 '제3의 길'을 제시한다…세계에서 가장 준비된 AI 국가인 싱가포르와 함께 다진 'AI 대항해 시대'의 닻이 우리 기업과 인재들의 경쟁력으로 치환될 때 대한민국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AI 생태계의 명실상부한 주도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AI 대항해 시대', 한·싱가포르 함께 돛 올리다 인공지능(AI)은 이제 기술 경쟁의 차원을 넘어 국가 전략과 외교 의제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 특히 싱가포르 방문에서 대통령이 천명한 'AI 대항해 시대'의 비전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을 가장 명확하게 관통한다. AI는 더 이상 특정 산업의 혁신 도구가 아니라, 국가 경쟁력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핵심 자산이자 미래 산업의 새로운 항로를 결정짓는 나침반이기 때문이다. 이번 순방을 통해 양국은 단순히 우호를 확인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와 연구기관, 민간 기업을 잇는 촘촘하고 다층적인 협력의 틀을 공고히 했다. 국내 우수 연구기관과 싱가포르 명문 대학 간의 공동 연구는 물론, 자율주행 및 공공안전 AI 분야 혁신 기업들이 체결한 양해각서(MOU)는 그 의미가 남다르다. 이는 대한민국이 보유한 AI 설루션이 글로벌 테스트베드에서 검증되고 실질적인 생태계 연계로 이어지는 중요한 토대를 마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재명 대통령과 로런스 웡 싱가포르 총리가 지난 2일 싱가포르 외교부 청사에서 공동언론발표를 마친 뒤 포옹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왜 싱가포르인가? 세계 1위의 '준비'와 한국의 '역량' 만나다 그렇다면 수많은 국가 중 왜 싱가포르인가? 그 해답은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2024 인공지능 준비도 지표(AIPI)'에서 찾을 수 있다. 싱가포르는 174개국 중 세계 1위를 기록하며 AI가 경제 전반에 확산될 수 있는 최적의 토양을 갖췄음을 증명했다. 2014년 '스마트 국가 이니셔티브'부터 2019년 '국가 AI 전략(NAIS) 1.0'에 이르기까지, 싱가포르는 기술을 기다리는 대신 제도와 정책으로 먼저 길을 닦아온 '준비된 파트너'다. 이러한 싱가포르의 강점은 한국과의 협력에서 독보적인 시너지를 창출한다. 양국의 협력은 '세계적 수준의 AI 역량과 탄탄한 하이테크 제조 기반을 갖춘 한국'과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이자 최첨단 디지털 인프라를 보유한 싱가포르'가 만난 상호보완적 기술 동맹이다. 여기에 소형모듈원전(SMR) 협력 MOU와 디지털 통상 강화가 더해지며, AI를 구동하기 위한 에너지 인프라부터 제도적 틀까지 아우르는 '미래 산업 패키지 협력'이 완성됐다. '한-싱 AI 얼라이언스'와 글로벌 모펀드: 성장의 엔진 달다 특히 이번 순방에서 추진하기로 한 '한-싱 AI 얼라이언스'와 정부 최초의 '글로벌 모펀드' 조성은 협력의 실질적 동력이 될 것이다. 2030년까지 3억 달러 규모로 조성될 모펀드는 양국의 유망 AI 스타트업이 자본의 장벽 없이 글로벌 시장으로 뻗어 나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전망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2일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열린 한-싱가포르 AI 커넥트 서밋에서 인사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는 단순히 하드웨어를 공급하거나 기술을 교류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공공 안전과 혁신 분야의 공동 대응부터 차세대 AI 원천기술 연구, 나아가 미래 인재 교류까지 협력의 범위를 전방위적으로 넓혔다. 한국의 강점인 반도체와 로보틱스 기술이 싱가포르의 글로벌 네트워크 및 자본력과 결합할 때, 양국은 AI 산업의 전주기 생태계를 함께 구축하고 글로벌 시장을 공동 공략하는 강력한 파트너가 될 것이다. 글로벌 AI G3 향한 '제3의 길' 현재 글로벌 AI 시장은 미·중 중심의 패권 경쟁이 치열하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한-싱가포르 협력은 우리가 나아갈 '제3의 길'을 제시한다. 급성장하는 동남아시아(ASEAN) 시장을 거점으로 우리 AI 설루션이 확산되고, 글로벌 AI 표준과 규범 형성 과정에서 양국이 공동의 목소리를 냄으로써 다극화되는 글로벌 질서 속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확보하는 전략이다. 물론 이번 성과가 내실 있는 결실로 이어지기 위한 과제도 분명하다. 체결된 협력이 단기적 이벤트에 그치지 않도록 실제 R&D 성과로 이어지는 후속 실행력이 필요하며, 양국의 청년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인적 교류 시스템이 안착해야 한다. 데이터 활용의 효율성과 AI 윤리 및 안전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는 신뢰 기반의 협력 모델 정립도 병행돼야 할 과제다. AI 협력은 단순히 기술적 계약을 맺는 일이 아니라, 미래 산업의 질서를 함께 설계하는 거대한 여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준비된 AI 국가인 싱가포르와 함께 다진 'AI 대항해 시대'의 닻이 우리 기업과 인재들의 경쟁력으로 치환될 때 대한민국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AI 생태계의 명실상부한 주도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이번 순방이 다진 협력의 토대 위에서 대한민국 AI의 새로운 미래가 활짝 열리기를 기대해 본다.◆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서울대학교 전기·컴퓨터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현재 KIST AI·로봇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다. 그동안 인공지능·로봇 분야 연구를 수행하며 국가 과학기술 전략 수립과 대형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이끌어 왔다. 인공지능 기반 영상인식, 선별 및 전역 관제 등 다양한 AI 분야에서 다수의 원천기술을 개발해 산업 및 공공 영역에 확산시켰다. 과학기술 발전과 산업 경쟁력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석탑산업훈장을 수훈했고, 공학한림원 젊은 공학인상과 KIST 미래재단 석학상 등을 수상했다.
2026.03.06
김익재 한국과학기술연구원 AI·로봇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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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무역 인사이트
수출의 구조를 다시 설계할 때다
이제 수출 다변화는 특정 국가 비중을 낮추는 단순한 분산 전략이 아니다. 거대한 변화의 파고 속에서도 수출이 끊기지 않게 하는 '구조적 면역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경제안보 시대의 수출 전략은 '어디에 얼마나 팔 것인가'보다 '어떤 환경에서도 수출을 지속할 체계를 어떻게 갖출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됐다. 관세 인상, 수출통제, 규범 강화, 경쟁국의 산업 고도화가 동시에 진행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수출을 떠받쳐 온 자유무역 질서는 전환점에 서 있다. 오늘날 세계 경제는 단순한 관세 인상을 넘어, 상호의존을 전략적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는 '무기화된 상호의존'의 시대로 이동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관세를 상시적 통상 수단으로 활용하며 자국 산업 보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유럽연합(EU)은 탄소·공급망 규범을 강화하고, 중국은 핵심광물 통제를 확대하고 있다. 이제 수출의 성패는 가격과 품질이 아니라 정책과 기술 질서가 좌우한다. 이 같은 흐름은 이미 현실의 불확실성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미국의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한 관세부과에 법원의 위법 판단이 나오면서 관세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관세의 유지 여부와 후속 조치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대미 수출의 예측 가능성은 낮아졌고, 기업의 투자와 생산 전략 역시 재검토를 요구받고 있다. 여기에 더해 주목해야 할 변수는 중국 산업의 질적 도약이다. 중국은 더 이상 한국의 추격자가 아니다. 인공지능 연산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춘 자체 컴퓨팅 생태계를 구축하고, 휴머노이드 로봇 부품과 플랫폼 분야에서 높은 점유율을 확보하고 있다. 반도체에서도 기술 격차를 빠르게 좁히며, 서방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핵심 장비 국산화에 가시적 성과를 내고 있다. 이는 단순한 기술 추격을 넘어 산업 표준과 설계 주도권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23일 경기 평택시 포승읍 평택항에 수출용 컨테이너가 쌓여있다. 2026.2.23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이제 수출 다변화는 특정 국가 비중을 낮추는 단순한 분산 전략이 아니다. 거대한 변화의 파고 속에서도 수출이 끊기지 않게 하는 '구조적 면역력'을 확보하는 일이다. 경제안보 시대의 수출 전략은 '어디에 얼마나 팔 것인가'보다 '어떤 환경에서도 수출을 지속할 체계를 어떻게 갖출 것인가'의 문제로 전환됐다. 관세 인상, 수출통제, 규범 강화, 경쟁국의 산업 고도화가 동시에 진행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무엇보다 규범 대응력을 하나의 수출 경쟁력으로 인식해야 한다. 미국의 수출 통제와 현지 생산 요건, EU의 탄소·공급망 규범은 시장 진입의 기본 조건이 되었다. 제품 설계 단계부터 권역별 규정을 반영하고, 제도 변화에 따라 부품 구성과 원산지를 조정할 수 있는 유연성을 확보해야 한다. 가장 엄격한 기준을 가장 먼저 충족하는 '신뢰받는 공급자'로 자리 잡는 것이 장기 경쟁력을 좌우한다. 상호의존이 무기화된 시대라면, 의존을 축소하기 보다는 그 방향을 설계해야 한다. 중국이 규모와 가격으로 시장을 넓힐수록 한국은 대체 불가능한 영역을 선점해야 한다. 반도체 공정 안정성, 고정밀 소프트웨어, 핵심 소재처럼 생산 시스템에 깊이 결합되는 분야나 유지보수와 업그레이드가 수반되는 거래는 단순 물량 공급과 다르다. 이러한 영역에서는 제품뿐 아니라 기술과 운영 역량이 함께 축적되기 때문에, 상대 산업이 성장할수록 우리의 역할도 확대된다. 수출 다변화의 또 다른 축은 통상 인프라의 정비다. 보호무역이 확산되는 환경에서 제도적 시장 접근을 확보하지 못하면 기업 전략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전통적 자유무역협정(FTA)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모든 국가가 포괄적 협정에 적극적인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경제동반자협정(EPA), 무역·투자촉진프레임워크(TIPF), 디지털 무역협정, 상호인증협정(MRA), 공급망 협력 등 다양한 수단을 기능별로 활용해야 한다. 관세 인하에 더해 인증 간소화, 통관 협력, 데이터 이동, 투자 보호 등 실질적 진입 비용을 낮추는 장치가 병행돼야 한다. 최근 브라질과의 정상 외교를 계기로 핵심광물 협력과 메르코수르 협상 재개에 공감대가 형성된 것도 이러한 전략적 접근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례다. 중국과의 교역 역시 단절이 아니라 재배치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최근 3년간 대중 무역적자 전환은 산업 구조 변화의 신호다. 중국은 여전히 거대한 제조 인프라이자 소비 시장이다. 중요한 것은 의존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부가가치의 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다. 제조 기반은 활용하되, 설계·데이터·핵심 공정 기술은 국내에 유지하는 정교한 분업 체계를 갖추어야 한다. 범용 중간재 경쟁에 머무른다면 적자 구조는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 미·중 전략 경쟁이 장기화된 환경에서 한국이 지정학적 중립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도 해법은 아니다. 서로 다른 기술 체계와 규범이 병존하는 상황에서 그 정합성을 설계하고 연결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확보해야 한다. 중국에서 생산된 제품이 서방 시장의 보안·탄소·인증 요건을 충족하도록 설계하고, 서방 기업이 중국 공급망을 활용하면서 핵심 기술 통제를 유지할 수 있게 조율하는 영역에서 한국의 역할이 있다. 이는 단순한 중간자가 아니라 체계를 설계하는 위치다. 경제안보 시대의 수출 경쟁력은 단기 성과가 아니라 지속 가능한 위치에서 나온다. 외부 충격이 반복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기반, 기술과 규범이 변화하더라도 대체되기 어려운 역할을 확보하는 것이 앞으로의 수출을 좌우한다. 수출 다변화는 지리적 분산을 넘어 산업 체계와 통상 전략을 함께 재설계하는 과제다. 자유무역 이후의 질서에서 한국은 수출의 '규모'를 지키는 데 머물 것이 아니라, 세계 가치사슬 속 '위치'를 다시 세워야 한다.◆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연세대 경제학과와 KDI대학원(MBA)을 거쳐 건국대에서 무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2년 한국무역협회 입사 후 30년 이상 수출입 동향분석과 글로벌 통상전략 수립을 주도해온 무역 전문가다. 현재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으로서 수출경쟁력 강화, 산업별 공급망 안보, 신통상질서 대응 등 급변하는 대외 환경 속에서 우리 기업이 나아갈 이정표를 제시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2026.03.04
장상식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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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코리아의 글로벌 전략
이 대통령의 싱가포르·필리핀 순방이 갖는 전략적 가치
이번 순방은 단순한 친선 외교가 아니다…이번 순방이 신남방정책 2.0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글로벌 톱10 코리아의 자신감과 피크코리아의 두려움이 혼재하는 지금, 안보 컨버전스 시대에 동남아시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이재명 대통령이 3월 1일 싱가포르를 시작으로 필리핀을 잇달아 방문한다. 한국은 최근 두 나라를 연달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키며 인도·태평양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끌어올렸다. 이번 순방은 단순한 친선 외교가 아니다. 2020년대 중반, 군사·경제·과학기술 안보가 서로 수렴하는 '안보 컨버전스' 현상이 글로벌 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미·중 전략 경쟁이 반도체, 인공지능(AI) 등 각종 첨단기술 제재로 심화되면서 경제와 기술이 안보의 핵심 변수가 됐고, AI 기반 유무인복합전투체계(MUM-T)처럼 최첨단 무기가 이중용도 기술에 기반하면서 세 영역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이 안보 컨버전스의 맥락에서 필리핀과 싱가포르는 각각 고유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1일 싱가포르 한 호텔에서 열린 동포 만찬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싱가포르는 과학기술안보와 군사안보의 교차점이다. 양국은 미·중 AI 독점 구도에 맞서 AI 주권(Sovereign AI) 확보라는 공동 목표를 공유한다. 현 정부의 'All in AI' 전략과 싱가포르의 국가 AI 전략 2.0, 'AI for Fun'이 만나는 접점에서, 양국은 디지털 협력 MOU와 디지털 통상협정(KSDPA)을 체결하며 AI 공동연구, 안전성 가이드라인 공동 개발에 나섰다. 글로벌 AI 지수 3위인 싱가포르는 프랑스, UAE, 캐나다와 함께 한국이 반드시 연대해야 할 AI 기술 동맹 후보다. 군사 분야에서도 중동·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기존 공급선이 불안해진 싱가포르가 한국산 전차, 자주포, 드론 도입을 검토하며 방산 다변화의 문이 열리고 있다. 필리핀은 군사안보와 경제안보의 교차점이다. 한국은 필리핀 전체 무기 수입의 33%를 차지하는 최대 공급국이다. FA-50 전투기는 2017년 마라위 전투에서 '게임 체인저'로 호평받은 뒤 2025년 12대 추가 계약이 체결됐고, 호세 리잘급 호위함의 운용 만족도를 바탕으로 HDF-3200 호위함 2척 재계약도 이뤄졌다. FA-50에서 KF-21로, 초계함에서 호위함으로 이어지는 점진적 능력 확대 전략이 작동 중이다. 필리핀은 향후 10년간 48조 원 규모 추가 무기 도입의 첫 번째 공급자로 한국을 지목했다. 남중국해 분쟁 속 군 현대화가 절실한 필리핀과, 방산을 피크코리아 극복의 신성장 동력으로 삼는 한국의 구조적 윈윈이다. 경제안보 차원에서도 바탄 원전 재가동 협력, 니켈·구리 공급망 공동 개발을 통해 한국의 에너지·광물 다변화 전략과 필리핀의 자원 산업화 목표가 정확히 맞물린다. 필리핀은 올해, 싱가포르는 내년 아세안 의장국이다. 신남방정책 이후 충분히 이어가지 못한 대동남아 외교의 동력을 되살릴 적기다. 한국은 지금 미국과 중국 양쪽으로부터 경제·기술·군사안보 압력이 점증하는 위기에 처해있다. 동남아시아가 이 두 강대국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3대 안보 컨버전스 축에서 한국의 국가역량을 실질적으로 강화할 지역 파트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순방이 신남방정책 2.0의 출발점이 돼야 한다. 글로벌 톱10 코리아의 자신감과 피크코리아의 두려움이 혼재하는 지금, 안보 컨버전스 시대에 동남아시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UCLA 정치학 박사로 혁신 과학 시대의 정치적 新舊 난제에 천착하는 융복합정치학자다. 국내·국제정치의 상호작용, 글로벌 안보컨버전스, AI 정치와 정책을 연구한다. 주요 저서로는 피크코리아(Peak Korea)가 출간됐으며, 그 국제편에 해당하는 세계에서 한국은 얼마나 쓸모있을까?를 집필 중이다. 또한 Global Expansion of Korea's Defense Industry는 2026년 출간 예정이다.
2026.03.02
백우열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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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를 넘어
한류가 문화유산이라고?
한류 현상은 하나의 문화적 유산으로, 전승될 가치가 있는 '무엇'으로 인정되었다. 이에 한국인들의 자긍심과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을 박물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콘텐츠인 한류의 유산화는 이제 우물쭈물할 일이 아니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한류와 관련된 최근의 가장 큰 이슈는 뭐니 뭐니 해도 중앙박물관의 급격한 위상변화다. 2025년 중앙박물관 방문객 수는 650만을 넘어서며 루브르 박물관과 바티칸 박물관에 이어 영국박물관과 세계 3위를 다투는 박물관이 되었다. 이 기록은 박물관의 소장품을 고려하면 더욱 특별하다. 세계 최대 박물관들이 식민시대 강대국들이 힘으로 수집한 유물들로 대부분 채워졌다면, 중앙박물관은 기증이나 수집을 통해 소수 외국 유물을 전시하고는 있으나 거의 한국 유물들만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2024년에 비해 1.7배가 증가한 2025년의 폭발적인 기록은 케이팝 데몬 헌터스 성공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것이지만, 이전에도 팬데믹 기간의 감소를 제외하고는 꾸준한 상승세를 보여 2024년엔 방문객 378만 명으로 이미 세계 6위의 거대 박물관 위치에 도달해 있었다. 단지 케이팝 데몬 헌터스와 같은 한 편의 영화의 성공이 이룬 결과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폭발적으로 증가한 중앙박물관 방문자들은 절대다수가 한국인들이고, 외국인은 4%에 미치지 못한다. 즉, 한국의 문화적 매력이 세계적으로 어필한다는 한류 현상이 무엇보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문화와 역사에 대해 호기심과 자긍심을 갖도록 했음을 말해준다. 중앙박물관뿐만 아니라 진주박물관, 부여박물관 등 젊은 학예사들의 새로운 역사접근법이 빛나는 여러 시도들도 그동안 현대사의 굴곡에 침착해 있던 우리의 역사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정부의 문화와 외교, 교육 관계자들과 정치인들은 이러한 국민의 시선과 역사 인식 변화를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 해 동안 한국을 방문한 1900만 명 외국인 관광객도 디지털 한류 콘텐츠 속에서 접한 한국 문화의 아날로그 체험뿐 아니라, 굿즈의 매력을 통해서든 콘텐츠에 끌려서든 박물관과 역사로 관심을 확대해 나가도록 박물관을 준비해야 할 단계다. 주말인 4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관람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 2일 2025년 연간 관람객 수(2025년 12월 31일 기준)가 총 650만 7483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2026.1.4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한류 콘텐츠가 기존 박물관으로 방문객을 끌어들이는 것뿐 아니라 한류 스스로 박물관 안으로 초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한류 현상이 하나의 문화적 유산으로 인정되어, 기록되고 보존되고 전시될 가치가 있는 무엇,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전승될 가치가 있는 '무엇'으로 인정되었다는 사실이다. 한류가 전 지구적으로 의미 있는 문화현상으로 인정된 데에는 한국어와 한글의 힘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동시대 문화 다양성과 보존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는 유네스코와 같은 국제기구는 디지털 환경 속 인류의 언어 환경이 대형 언어 중심으로 재편되어 군소언어들이 사라져 가고 문화생태계가 다양성을 잃어가는 것을 경계해 왔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수집 보관하고 지역어 등 소수어를 학교에서 교육하도록 장려해 왔는데, 한국어야말로 이러한 거대 언어 중심의 환경적 변화를 역주행하며 한국어 사용 인구와 배우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중소 언어 사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한국어의 역주행은 한류가 추동하고 있기에, 한류의 문화적 하부구조와 작동 방식에 대한 관심도 높다. 2022년 런던의 빅토리아 앤드 앨버트 뮤지엄은 Hallyu! The Korean Wave라는 세계 최초 한류 전시를 시작했다. 이 전시는 지금 유럽과 북미의 대도시를 순회하고 있고, 한류에 대한 다른 소소한 전시들도 국내외에서 진행되고 있다. 한류의 전시는 그동안 서구 박물관들이 일본의 망가와 애니메이션, 기모노, 중국의 공예물이나 디자인, 디지털 문화 등 동아시아 다른 동시대 문화들을 수집, 전시해 온 데 비해 더욱 복잡한 접근이 필요하다. 한류는 콘텐츠나 특별한 형식, 미디어 상품이 아닌 가치, 정서, 인간관계, 경험이 핵심적 중요성을 띠는 문화현상이기 때문이다. 즉, 문화 생산자가 부여한 가치뿐 아니라 전 지구적 수용과정에서의 재창조와 이해도 이 현상의 일부인 상호 관계적 현상이다. 또한 케이 뷰티 현상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미적 감수성, 실천과 기준(norms), 그것이 생산하는 매력 및 창출하는 새로운 젠더와 인종에 대한 상상력과 정체성이 중요한 요소다. 이 문화는 무엇보다 디지털 기술을 새롭게 소화해서 세계의 청년들에게 전례 없는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측면에서 세계사의 변방에서 탄생한 21세기 글로벌 컬쳐로서 한류의 문화유산적 가치는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류의 유산화를 대한민국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한국인들의 자긍심과 스스로에 대한 이해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을 박물관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콘텐츠인 한류의 유산화는 이제 우물쭈물할 일이 아니다. 한류를 가능케 한 한국 대중문화의 발전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문서와 물질 자료를 수집, 보관, 전시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할 텐데, 어느 주체가 어디까지 어떻게 수집할 것인가? 또한 한류 현상으로서의 케이팝은 어떻게 수집, 보관, 전시할 것인가? 보관과 전시의 문제를 뒤로하더라도 어떻게 무엇을 수집할 것인가는 그간의 케이팝에 대한 문화연구 전체를 참조해야 하는 일이다. 케이팝 음원과 뮤직비디오, 방송영상을 수집하는 것으로 족한가? 세계의 청년이 열광하는 케이팝 댄스 실천은 어떻게 수집해야 하나? 글로벌 OTT 등장 전부터 스스로 자막을 달면서 이해하고 수용해 온 한국 드라마 수용 현상은 어떻게 수집해야 하는가? 유명한 한류 드라마들의 디지털 판본을 수집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저작권을 지닌 방송사와 기획사들에게 이러한 공적 활용의 중요성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무엇보다 정부는 한국 역사상 초유의 이 작업에 어느 정도의 중요성을 부여하고 재원을 동원할 것인가? 케이팝 공연장 문제에서 불거졌듯, 정부의 공적 대응이 더 이상 늦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공연장 부족으로 케이팝 행사를 도쿄, 홍콩, 싱가포르에서 해왔듯, 세계인이 한류 전시를 런던과 파리 샌프란시스코에 보러 가도록 두지 말아야 한다.◆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한류 연구자로 정진하면서 팬덤 온라인 참여관찰로부터 데이터 분석까지 다양한 연구방법을 거쳤으나 스스로는 여전히 세상 속 의미의 생산을 묻는 기호학자라고 이해한다. 세계화와 디지털문화시대의 한류, 드라마의 모든 것, BTS길 위에서를 출판했고 넷플릭스의 영향, 한국문화산업, 한류현상의 이론화를 위해 국제적 연구자 네트워크를 가동하며 다년간 연구 중이다.
2026.02.26
홍석경 서울대 아시아연구소 한류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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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평화
'이재명 정부의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 쟁점과 과제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은 미래의 목표와 현실의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한다…실질적인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없는 긴장 완화 단계'에서 '대화 있는 신뢰 구축 단계'로 얼마나 빨리 전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김연철 인제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이재명 정부가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을 발표했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는 복잡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끝날 줄을 모르고, 트럼프 정부는 예측하기 어려워 북미 관계의 앞날을 알 수 없고, 남북 관계의 두꺼운 얼음도 녹는 데 시간이 걸린다. 안개가 자욱할수록 나침반이 필요하듯이, 예측이 어려운 정세를 헤쳐 나가려면 정책이 중요하다. '평화·통일·비핵화·번영' 균형적 접근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은 미래의 목표와 현실의 과제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한다. 언제나 장기적인 목표도 중요하지만, 정책은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 현재 남북 관계의 시대정신은 평화공존이다. 1971년 남북 적십자 회담 이후 남북 관계는 가다 서다 현상을 되풀이했지만, 지금이 역사적으로 대화 중단 기간이 가장 길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도 국면이 아니라 구조가 변화하는 역사의 변곡점에서 정책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한 3일 경기도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방문객들이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와 개성공단 일대를 바라보고 있다.2025.9.3.(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첫째, 평화공존과 통일의 관계다. 목표로서의 통일 원칙을 유지하면서도 당면한 평화공존의 제도화를 강조했다. 평화공존의 추진 원칙으로 북한 체제를 존중하고 흡수통일을 추구하지 않으며 적대행위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미래의 통일이 아니라 당면한 평화 정착을 중시하겠다는 뜻이다. 공존의 추구는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원칙을 합의하고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합의한 이후 주요 남북 합의에서 재확인한 바 있다. 북한이 2024년부터 '적대적 두 국가론'을 주장하면서 평화공존의 과제가 중요해졌지만, 체제 인정과 공존의 제도화는 남북 관계에서 오랜 역사가 있다. 이재명 정부는 대북 심리전 방송을 중단했고, 민간 차원의 대북 전단과 무인기를 단속하면서 적대행위를 추진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실천하고 있다. 둘째, 비핵화와 평화 정착의 관계다. 목표로서의 비핵화를 유지하면서, 당면한 군사적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을 강조했다. 북한은 핵 보유를 헌법과 당규약에 명시했고, 비핵화 협상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북한을 사실상 핵보유국으로 인정했다. 북한 핵 문제가 1990년대 이후 한반도의 외교, 경제, 군사 질서를 규정했다는 점에서, 달라진 현실을 고려하는 새로운 협상의 틀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한반도 평화공존 정책은 평화 체제의 구축과 핵 없는 한반도의 실현 과정이 상호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구조를 만들어 한반도의 전쟁 위협을 제거하겠다고 강조했다. 우선 핵 위협을 완화할 수 있는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법이 필요하고, 재래식 분야의 군사적 신뢰 구축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셋째, 평화와 경제 번영의 관계다. 평화라는 땅에서 번영이라는 꽃이 핀다. 한반도의 평화 정착은 남북 공동 번영뿐만 아니라, 동북아 경제협력의 필수 요소다. 올해 1월 초 한중 정상회담에서 논의했던 남·북·중 삼각 협력 방안도 남북 관계 개선과 평화 정착이 뒷받침돼야 가능하다. 물론 본격적인 경제협력을 위해서는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완화돼야 한다. 제재 완화의 수준은 북미 관계에 달려 있고, 이를 위해서는 한미 간에 긴밀한 협의가 필요하다. 적대에서 '공존'으로의 전환을 위한 과제 북한은 무인기 사태에 대한 이재명 정부의 사과와 재발 방지 조치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9차 당대회에서 '적대적 두 국가론'을 유지했다. 다만, 9차 당대회에서 대남정책과 외교정책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4월 미·중 정상회담 계기에 있을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러·우 전쟁의 종전 이후 한반도 질서 변화에도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판단이다. 남북 관계는 당분간 대화 없는 긴장 완화 조치를 이어갈 가능성이 높다. 이재명 정부는 먼저 긴장 완화 조치를 하고 북한의 호응을 유도해 왔다. 방송과 전단, 무인기에 대한 조치는 북한의 호응을 끌어냈다. 북한은 그동안 남북 관계 악화 시기에 발언의 공격성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긴장감을 높이지는 않았다. 그래서 일정한 수준까지는 대화가 없어도 긴장 완화 조치를 주고받을 가능성이 있다. 9·19 군사합의 중에서 서로 호응할 수 있는 비무장지대의 비무장화를 선도적으로 조치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실질적인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해서는 대화가 필요하다. '대화 없는 긴장 완화 단계'에서 '대화 있는 신뢰 구축 단계'로 얼마나 빨리 전환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현재 한반도 정세의 특징을 고려하면, 군사적 신뢰 구축 분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경제협력은 북미 관계를 포함해서 주변 정세의 변화에 영향받지만, 군사적 신뢰 구축은 남북 모두 서로 이익이 있고 남북 양자 차원에서 합의할 문제다. 재래식 분야의 군사적 신뢰 구축에서 진도가 나가면 당연히 핵 위협 감소를 포함하는 핵무기의 군사적 신뢰 구축 분야도 논의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남북 관계없이 한반도 평화 정착이 이뤄질 수 없다. 북한이 이러한 한반도 질서의 현실과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경기도 파주시 임진각 일대에서 열린 2025 DMZ OPEN 평화 마라톤에서 참가자들이 통일대교 남단을 향해 달리고 있다.2025.11.2.(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국민과 함께하는 평화공존정책 대북정책은 국민적 합의가 중요하다. 이재명 정부의 평화공존 정책도 국민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사회적 대화를 확대하고, 새로운 세대의 참여를 보장하며, 지역별 통일 플러스 센터의 운영으로 국민의 공감대를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빛나고 있다. 내란을 극복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세계 곳곳에서 혐오와 대결의 정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어서 더욱 그렇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중요한 국가 과제를 두고 얼마든지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 소음이 아니라 화음의 수준이 그 나라의 민주주의 수준을 반영한다. 평화의 국민적 공감대는 매우 높다. 공존의 공감도 높아지고 있다. 평화공존의 국민적 합의가 높을수록 남북 관계의 얼음도 서서히 녹을 것이다. ◆ 김연철 인제대 교수 / 전 통일부 장관 성균관대에서 북한의 정치경제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노무현 정부 때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 문재인 정부때 통일연구원 원장,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현재 인제대학교 통일학부 교수이며, 한반도평화포럼 이사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협상의 전략(2016), 70년의 대화: 새로 읽는 남북관계사 등이 있다.
2026.02.23
김연철 인제대 교수(전 통일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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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와 산업의 미래
AI 시대, 인문학의 새로운 기회
우리가 AI 시대의 새로운 인문학 연구 방식을 수립하면 전 세계 인문학 연구를 이끌 기회를 가질 수 있다. AI에서 G1은 어렵더라도 AI 시대 인문학은 한반도에서 얼마든지 이끌어 갈 수 있다. 정부는 이 부분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해야 하며, 이제 공학자와 자연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가 협동해야 하는 시대라는 것을 의미 있게 봐야 한다.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 몇 년 전에 '위대한 지성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다트머스 대학교 학제 간 참여 연구소에서 과학자와 인문학자들이 의식, 실재, 지능, 영성, 시간, 환경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토의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토의의 내용도 훌륭했지만 가장 인상적인 것은 세계적인 인문학자들이 현대 과학과 기술 수준에 대해 매우 상세히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AI 시대가 점점 더 선명하게 다가올수록 인문학의 위기나 소외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인류는 새로운 과학과 기술 발전으로 큰 변혁을 이룰 때마다 인문학을 발전시켜 왔다. 코페르니쿠스와 뉴턴을 거친 과학 혁명, 다윈의 진화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의 양자 역학은 우리 인류에게 세계와 실재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시각을 주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인간이 갖는 존재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AI 관련 강연을 하다 보면 많은 분들이 기술 발전의 내용에 대한 질문보다 그럼 이제 인간이란 무엇이고 우리의 존재 가치와 삶의 의미 그리고 미래 사회에 대한 걱정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질문에는 나 같은 공학자가 아니라 인문학자들이 답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제 우리는 디지털 지능을 가진 자율적 존재의 등장을 예견할 수밖에 없으며, 이들은 이제 도구가 아닌 우리의 동반자가 되리라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일부에서는 인간 지능을 뛰어넘는 존재의 등장이 5년 안에 현실화될 것이라고 말하며, 최근에 등장한 '오픈클로'와 이를 기반으로 하는 '몰트북'에서 보여준 AI 에이전트의 대화 수준은 이들이 자체적인 사회를 갖는 존재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다(물론 과장된 면이 아직 많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스마트라이프위크(SLW) 2025'에서 방문객들이 키네틱 LED 터널 앞을 지나고 있다. 2025.9.30.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인문학이란 기본적으로 언어, 문학, 철학, 역사 등 인간의 문화적, 정신적 유산을 탐구해 인간 자체와 그 가치를 본질적으로 성찰하는 학문이다. 그 기저에는 이 세상에 이런 지적 수준을 갖는 생명은 우리밖에 없고 그에 따라 인간다움의 가치를 논하고 자기 성찰과 삶의 방식을 고민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에 우리 수준 또는 그 이상의 지능을 갖고 자체적으로 문화를 만들고 역사를 구성할 수 있는 존재가 생긴다면 인문학 연구 주제 대상을 인간에 국한하는 것이 맞을까? 2019년 세계적 규모의 사모펀드 회사인 블랙스톤의 스티븐 슈워츠만 회장은 옥스퍼드 대학에 1억 5000만 파운드를 기부해 슈워츠만 인문학 센터를 설립하도록 했다. 그가 옥스포드에 요청한 것은 기존의 인문학을 넘어서 AI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인문학의 지평을 열라는 것이고 옥스퍼드가 인문학과 철학 분야에서 쌓아온 연구를 통해 전 세계 자연과학 연구자들이 하는 일을 보완하라는 것이었다. 옥스퍼드 대학은 이 기부를 르네상스 이후 가장 규모가 큰 기부라고 반겼다. 그런데 바로 르네상스는 신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을 벗어나 인간 중심의 인본주의와 개인을 발견한 초기 근대 문화의 성립이라고 볼 수 있다(르네상스에 대한 여러 해석이 존재하지만). 어쩌면 지금 21세기에는 또 다른 르네상스적 변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고 인문학은 다시 한번 변신과 도약을 할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0세기까지 인간만이 독창성, 창의력, 뛰어난 사고와 우주에서의 유일한 의식을 가진 존재라는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유전학과 생물 화학의 발전, 천문학과 물리학의 새로운 발견, 컴퓨터 문명의 등장으로 인간 존재의 의미와 우리가 갖는 가치를 다시 살펴보게 만들고 있다. 또한 다른 생명과의 공존, 인간 자체가 여러 생명체로 구성된 복합적인 세계라는 것, 뇌과학의 발전과 양자 역학적 해석에 의한 의식 탐구 등은 인간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새로운 지적 존재의 등장은 우리에게 문명사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제 지능 수준에서 우리를 넘어설 수 있는 디지털 존재와 공존, 협력, 공동 연구, 의사소통과 새로운 사회 구조, 예술 창조 등은 인류 문명이 또 다른 단계로 넘어서는 순간에 와 있다고 본다.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지능에 따른 후(後) 인본주의 또는 인지적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고 있고, 비인간과 공존하는 인간의 조건을 탐구해야 하는 새로운 인문학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AI 시대의 인문학은 인간을 연구 대상에서 배제하는 학문이 아니라, 인간이 더 이상 유일한 지능 주체가 아닌 세계에서 의미와 규범이 어떻게 생성·유지·충돌하는 지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재정의되어야 한다. 지금 AI 관련해 많은 국가 과제가 기술 혁신과 국가 경쟁력, 산업 고도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많은 개인은 AI 사회에서 내 삶의 의미, 존재의 가치, 새로운 윤리와 같은 인문학적인 질문과 대답에 목말라하는 것도 사실이다. 지난 10년 동안 국내에서도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지만, 대부분은 고전적이거나 20세기 수준의 인문학이었다. 이제는 21세기 AI 시대에 맞는 인문학 연구가 필요한 것이고 새로운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다. 우리가 AI 시대의 새로운 인문학 연구 방식을 수립하면 전 세계 인문학 연구를 이끌 기회를 가질 수 있다. AI에서 세계 1위 국가 달성은 어렵더라도 AI 시대 인문학은 한반도에서 얼마든지 이끌어 갈 수 있다. 정부는 이 부분에 더 많은 관심과 투자를 해야 하며, 이제 공학자와 자연과학자 그리고 인문학자가 협동해야 하는 시대라는 것을 의미 있게 봐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이 인류 문명에 공헌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분야이며, 이는 우리 젊은 인문학자들이 과학과 기술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이해를 갖출 때 가능할 것이다. 인문학자와 공학자, 과학자들이 같이 연구하는 새로운 융합 연구에 대해 정부 지원이 더 크게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1회 졸업생으로 1980년대 카이스트에서 인공지능 주제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종합기술원, 삼성전자 등에서 활동했으며 1999년 벤처포트 설립, 2003년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 전략대표와 일본 법인장을 역임했다. 카이스트와 세종대 교수를 거쳐 2011년부터 테크프론티어 대표를 맡고 있다. 데이터 경제 포럼 의원, AI챌린지 기획, AI데이터 세트 구축 총괄 기획위원 등을 역임했다. 대표 저서로는 AGI의 시대, AI 전쟁 2.0 등이 있다.
2026.02.12
한상기 테크프론티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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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생경제
코스피 5000, 가능성을 지속성으로
코스피 5000은 단순한 숫자 이벤트가 아니다. 한국 자본시장이 오랫동안 발목 잡혀 있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실질적으로 걷어내며 '시장 규율의 프리미엄'을 회복했다는 신호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가능성을 지속성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코스피 5000은 단순한 숫자 이벤트가 아니다. 한국 자본시장이 오랫동안 발목 잡혀 있던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실질적으로 걷어내며 '시장 규율의 프리미엄'을 회복했다는 신호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이루어진 상법 개정 논의, 이사회·감사기구의 독립성 강화, 공시 투명성 제고, 배당·자사주 소각 등 주주환원 확대가 맞물리면서 '한국 기업은 싸게 사는 시장'이라는 인식이 불식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자사주 매입과 소각이 크게 늘어난 흐름은 밸류업이 구호에 그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상승의 엔진은 AI와 반도체다. 2025년 한국 수출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고, 반도체 수출이 큰 폭으로 늘었다. 반도체가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졌다는 점은 한국 경제의 강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쏠림이라는 구조적 위험도 함께 노출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대표 기업의 호황이 지수를 끌어올릴수록, 그 성과가 다른 산업과 지역으로 퍼지는 통로는 더욱 중요해진다. 코스피 5000의 밝은 면은 성장 동력의 폭발과 투자 자신감 회복이다. 특히 부동산에 과도하게 쏠렸던 가계 자산이 자본시장으로 유입되는 '머니 무브'가 가속화된다면, 이는 기업의 투자 재원 확충과 혁신 투자로 이어지는 선순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주식·펀드·연금이 장기 자금으로 자리 잡을수록, 기업도 단기 실적에만 매달리기보다 연구개발과 설비투자 같은 미래 현금흐름 창출에 투자할 여지가 커진다. 한국 증시 최초로 종가 기준 코스피 5000을 달성한 27일 서울 영등포구 한국거래소에서 직원들이 코스피 종가가 표시된 전광판을 배경으로 세레머니를 하고 있다. 2026.1.27 (ⓒ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그러나 어두운 면도 분명하다. 특정 업종 집중이 심해질수록 지수는 상승해도 체감경기는 따로 노는 디커플링이 가속화될 수 있다. 2025년 4분기 역성장(-0.3%) 논란이 불거졌듯, 지수 랠리와 실물 사이의 간극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다. 소비 회복은 여전히 더디고, 고용 시장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그냥 쉬었음'이 늘어나는 등 불안 요소가 상존한다. 지수의 환호가 청년의 일자리와 중소기업의 매출 증가로 골고루 퍼지지 않는다면, 코스피 5000은 사회적 통합을 강화하기보다 박탈감을 키울 수도 있다. 가계부채 부담은 이 간극을 더 넓힐 수 있다. 부채가 소비 여력을 갉아먹는 구간에서는 수출 호황이 와도 내수 반등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책은 '지수 부양'이 아니라 '순환 복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재정은 단기 부양에 나서더라도 궁극적으로는 민간의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방향, 즉 서비스 산업 혁신, 규제 합리화, 노동 이동성 강화를 지향해야 한다. 통화정책 역시 성장과 물가, 금융안정의 균형을 흔들지 않는 범위에서 예측 가능성을 높여야 한다. 2025년 말 기준 실업률 4.1%대, 청년 실업률 6.2% 안팎이라는 지표는 주가 상승이 곧바로 일자리 개선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 가계신용 잔액이 1968조 원 수준으로 불어난 상황에서, 금리 부담은 소비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든다. 내수를 살리려면 임금·고용의 질 개선과 함께 중소 서비스업의 생산성 혁신이 병행되어야 한다. 2025년 성장률이 반올림해 1%에 머물고 4분기 역성장 논란까지 겪은 만큼, "시장은 파티인데 실물은 냉각"이라는 경고를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 한국은행이 2026년 성장률을 1.8% 내외로 전망하는 것은 급반등보다 완만한 회복에 가깝다. 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코스피 5000 이후 자본시장이 한 단계 더 도약하려면 다음 세 가지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 첫째, 시장이 과열될 때는 '일괄 규제'보다 '맞춤형 관리'가 필요하다. 투자경고 종목이 늘어난다고 해서 일률적으로 묶기보다, 위험 수준에 따라 단계적으로 대응해 변동성을 줄이고 투자자 피해를 막아야 한다. 둘째, 공매도는 필요하되 공정하게 운용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불법 공매도는 확실히 차단하고, 관련 정보는 더 투명하게 공개하며, 개인 투자자도 제도에 접근할 수 있도록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아야 한다. 셋째, 반도체 호황이 대기업 실적에서 끝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중소·중견기업이 AI를 도입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노동시장에서 직무·성과 중심 문화가 자리 잡도록 돕고, 전직·재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더 수월하게 이동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MSCI 선진국 지수 편입 기대도 같은 맥락이다. 경제 규모나 유동성만으로는 부족하고, 외환·결제·계좌 개설 등 접근성에서 국제 투자자가 체감하는 불편을 줄이는 제도 정비가 핵심이다. 편입이 성사되면 패시브 자금이라는 안정적 수급이 생길 수 있지만, 그만큼 글로벌 위험회피 국면에서는 조정 폭도 커질 수 있다. 들어오는 돈만 볼 것이 아니라 나갈 때의 충격 흡수 장치까지 함께 설계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5000'을 위해 필요한 것은 숫자에 취한 낙관이 아니라 이익 체력에 기반한 질적 성장이다. 정부는 지수 중심 정책의 유혹에서 벗어나 내수 회복과 구조 개혁에 집중해야 한다. 기업은 주주환원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상시 규율로 내재화해야 한다. 투자자 역시 변동성 확대를 전제로 장기·분산 포트폴리오를 갖춰야 한다. 지수는 목표가 아니라 결과다. 과정의 품질이 지속성을 좌우한다. 코스피 5000은 가능성을 보여줬다. 이제 남은 과제는 그 가능성을 지속성으로 바꾸는 일이다.◆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 / 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서울대 경제학 학·석사, 美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로 2008년부터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연구 분야는 공공경제·재정학(출산·지방재정·기초소득), 노동경제학(최저임금·고령자 노동), 복지정책평가(보육·빈곤), 조세정책(종부세·조특법), 빅데이터·데이터사이언스이다. 빅데이터연구소장을 맡아 정책 평가와 실증분석을 수행해왔다.
2026.02.09
우석진 명지대 경상통계학부/응용데이터사이언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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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싶다, 골목의 맛
허름한 시장에서 할머니가 말아주는 '제주 순댓국'
민족의 국밥 한 자리를 차지하는 순댓국. 제주는 유독 순댓국의 역사가 깊다. 제주에서는 '큰일'이라고 부르는 혼례와 장례 문화가 있는데 그때 돼지를 많이 잡았다. 주로 여자들이 순대를 만들었다. 순대는 창자라는 고유의 모양 덕에 속에다 무엇이든 채워넣어 먹을 수 있는 기능적인 음식이다. 제주의 풍토가 만들어낸 이 한 그릇의 음식 박찬일 셰프 오래 전 제주에 신혼여행을 갔던 누이의 기억 한 토막. 그때는 흔히 개인택시를 하루 이틀 대절(금액을 정해서 빌리는 것)해서 여행을 했다. 기사가 데려간 식당에 앉았더니 돼지고기를 내오더란다. 문제는 시커먼 털이 숭숭 박혀 있는 껍질 붙은 고기였던 것. 그게 서울사람에게는 흔한 장면이 아니었다. 식욕이 떨어져서 젓가락을 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신랑의 채근에 한 점 먹었다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없는 고기 맛이었다고. 나도 처음 먹었을 때 한 급 다르다고 느꼈다. 굳이 제주 돼지의 맛을 설명할 건 없겠다. 자, 여러분도 궁금해 할 질문 한 가지. 제주 사는 음식전문가 친구에게 그걸 물었다. 왜 제주 돼지는 맛있는가. "제주 사람들은 여기 돼지 맛있다고 하지 않아, 뭍 돼지가 우리 것보다 맛없다고 하지. 크하하." 알았다 알았어. 제주 사람들의 고기 자부심, '육부심'이라고 해야 활까. 하여튼 답을 찾자면 해석이 많다. 물이 좋아서 그렇다, 종이 좋은 거다, 사육기술이다 등등. 흑돼지는 그렇다 치고 이른바 '백돼지'는 육지랑 종(種)이 같은데 왜 맛이 그리 좋으냐고. 제주고유 재래흑돼지 (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고기가 맛이 좋으면 다른 것도 좋다. 이를 테면 뼈와 부산물을 이용하는 온갖 음식들. 제주 국밥은 순댓국과 해장국이 양분한다. 순댓국은 돼지이고, 해장국은 소다. 둘 다 전국 대표선수 자격이 있을 만큼 맛있다. 하지만 제주에서 국밥이라고 하면 순댓국밥을 지칭한다. 그만큼 많이 먹는다. 외지인에게도 인기 있는 몸국이라는 것도 돼지 부산물로 만드니까 순댓국의 형제다. 요즘 제주 대표음식이 된 고기국수가 상업화된 것은 1980년대로 본다. 순댓국, 고기국수, 몸국. 죄다 돼지 음식이다. 셋 다 제주식의 오랜 '큰일' 문화 덕에 번성했다. 큰일이란 결혼, 장례 같은 걸 뜻한다. 제주는 성씨가 적고 고립된 섬 문화, 특유의 끈끈한 유대관계 때문에 친인척 사이의 친밀도도 아주 짙다. 그걸 확인하는 게 혼인잔치며 장례다. 요즘도 잔치하면 삼일씩 내리 하는 전통을 지키는 집이 꽤 있다. 이때 돼지를 잡는다. 요새는 맡겨서 사서 쓰곤 하지만 여전히 돼지를 몇 마리 잡느냐 하는 게 큰일의 핵심이다. 돼지를 잡으면 창자가 나온다. 여자들이 달라붙어 속을 채운다. 계절에따라 구할 수 있는 재료를 넣는다. 돼지 피가 중심이다. 진한 제주 순대의 탄생이다. 제주에서 순댓국은 곳곳에 명가가 있는데, 나는 동문시장 광명식당에서 처음 먹었다. 허름한 노포에서 뜨겁게 토렴한 국물을 한 술 뜨자 속이 다 풀렸다. 적당히 야성적인 냄새가 살아 있다. 현대식 순댓국은 너무 깔끔하달까. 냄새를 다 지워버린다. 제주 돼지 역사는 오래 되었다. 3세기경의 중국의 삼국지 위서나 5세기 후한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제주에서 돼지를 많이 기른 것은 여러 설이 있다. 화산재가 중심인 토양이 영양이 적어서 농사를 위해 비료를 얻으려고 돼지를 많이 길렀다고 한다. 이른바 돗거름(돼지거름)이 그것이다. 물론 고기는 귀중하고 맛있으니 가능한 한 많이 기르려고 했다. 사육 환경에서 제주가 유리한 게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에서 순대는 오래 전부터 먹었다. 근대적인 순댓국 기록도 있다. "순대국은 도야지살문물에 기름은 건저버리고 우거지를 너어서 끄리면 우거지가 부드럽고 맛이 죠흐나 그냥 국물에 내쟝을 써러너코 졋국 처서 먹는것은 상풍(常風)이요 먹어도 오르내기가 쉬웁고 만이 먹으면 설서가 나나니라." 조선무쌍신식조선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1936년판에서. 초판은 1924년). 점잖게 '하느니라'하고 썼던 과거의 요리책이다. 그림이나 사진은 없고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이 책에서 설명하는 100년 전 순댓국도 지금과 똑같다. 졋국(새우젓)을 쳐서 먹는 방식도 흡사하다. 저자는 서울의 유명한 음식평론가 겸 셰프 겸 한량이었던 이용기 선생이다. 그때 순댓국이 서울에서도 꽤 팔리는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처럼 싸고 만만한 음식은 아니었다. 당시 돼지 생산은 쉽지 않아서 나름 고급음식에 속했다. 순댓국이 전국적으로 흔해진 건 1970년대 현대적인 돼지 생산 덕이었다. 식용유 짜고 남은 수입콩깻묵 같은 사료가 풍부하게 공급되고 사육기술도 보급되면서부터다. 돼지고기를 많이 먹으면 당연히 창자가 많이 생기고, 순대도 덩달아 폭발한다. 값싼 당면 덕도 보았다. 당면으로 순대소를 만들면 가격이 거의 거저다. 순대 피와 약간의 자투리 채소, 당면이면 충분히 맛있는 순대가 된다. 지금도 당면순대는 식품 중에서 가장 싼 '고기(?)' 음식이다. 만 원이면 시장에서 거짓말좀 보태서 한 보따리를 받을 수 있다. 허름한 제주의 시장에서 할머니가 말아주는 순댓국밥 한 그릇 하고 싶다. 제주에는 봄이 오고 있을 것이다. ◆ 박찬일 셰프 셰프로 오래 일하며 음식 재료와 사람의 이야기에 매달리고 있다. 전국의 노포식당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소개하는 일을 오래 맡아 왔다. 백년식당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 등의 저작물을 펴냈다.
2026.02.05
박찬일 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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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새 지평
2026년 한국의 4강 외교 과제와 한반도 평화
한국 외교의 자율성을 고양했으며 향후 오해 소지 없이 적극적으로 국익 중심 실용 외교를 전개할 능력과 의지를 보여줬다…남북 대화 재개와 관계 정상화의 물꼬는 우리 정부가 계속 선제 조치를 포함해 우호적인 의사와 행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 주도로 북·미 정상회담이 재개된다면 트일 수 있다.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국제 평화·공동번영 주도할 기반 갖춘 한국의 실용 외교 이재명 대통령은 작년 후반 6개월간 다자외교 5회, 9개국 순방 및 35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올해 들어 중국과 일본을 방문해 전쟁 중인 러시아를 제외한 4강 외교를 완료했다. 그 결과 국제 평화와 공동 번영을 주도할 외교적 기반을 구축했으며 국익 증진 실용 외교의 외연을 확장하고 보다 능동적으로 펼칠 준비를 갖췄다. 무엇보다 한국 외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미국, 중국, 일본의 지도자들과의 돈독한 신뢰를 구축해 호혜적 차원에서 자신감 있는 외교를 펼칠 수 있게 됐고, 동시에 한국의 국익과 보편적 이념에 따른 우리의 입장을 천명함으로써 한국 외교의 자율성을 고양했으며 향후 오해 소지 없이 적극적으로 국익 중심 실용 외교를 전개할 능력과 의지를 보여줬다. 미국의 일방적인 자유무역협정(FTA) 무효화와 고관세 부과, 투자 및 안보 관계 조정 압박에 대해 우호 및 신뢰 관계를 유지하면서 인내심을 발휘하고 설득해 우리의 국익을 수호하는 선에서 관세와 투자 협상을 마무리했으며 안정된 안보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전작권 전환에 대한 동의, 그리고 원자력 잠수함 건설과 우라늄 농축 및 재처리를 포함하는 원자력협정 개정에 대한 합의까지 이끌어냈다. 중·일 갈등이 돌출돼 안보 환경이 악화됐지만 오히려 이를 슬기롭게 간접 활용해 연초에 연속적으로 한중, 한일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동북아 평화와 안보 및 협력을 강조하면서 중·일 양국 간 긴장 수위를 낮추고 협력을 도모하도록 유도하는 주도력을 과시했다. 시진핑 주석이 일본의 침탈 역사를 지적하면서 대일 공조를 주장하고, 다카이치 총리가 민주국가 연대를 내세워 대중 공조를 유도했지만, 이 대통령은 "동북아 3국이 최대한 공통점을 찾아 함께 소통하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한중일 협력 기조 회복을 권유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피스메이커로 추대하고 자신은 페이스메이커를 자임해 한반도 평화 회복의 동력을 마련했고, 미국의 과도한 투자 압박을 인내와 투철한 의지로 극복했다. 시진핑 주석에게 한중 해군의 공동 수색·구조 훈련을 제안해 대미 자주성을 보여줬으며, 동시에 "중국만큼 일본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지적하고 한중 모두 고유의 핵심적 이익이 매우 중요하므로 북한을 억지하기 위해 원자력 잠수함 건조가 필요하다고 역설해 대중 자율성도 과시했다. 끝으로 일본은 이 대통령의 한일관계도 중시하는 태도에 안도했고 양국 관계에 난제였던 과거사 문제도 조세이 탄광 사망자 신원 확인 협력 합의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경주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답변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용범 정책실장, 강훈식 비서실장, 이 대통령, 조현 외교장관, 위성락 안보실장. 2025.11.1.(사진=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4강 외교 과제와 한반도 평화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고관세 복원 위협에서 알 수 있듯이 신뢰의 한미관계를 유지하려면 정상 간 합의의 원활한 후속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 먼저 35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대미투자특별법이 정상적으로 국회에서 통과되고 순조롭게 적절한 투자처를 찾아 실행될 것임을 미국 지도자들에게 안심시켜야 한다. 원자력추진잠수함 건조와 원자력협정 개정 그리고 한미 동맹 현대화와 조정도 전작권 전환과 함께 양국 간 우호적인 조정을 통해 계획대로 진전돼야 하고, 특히 한미동맹이 한국의 연루 위험을 키우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않도록 억지해야 한다. 끝으로 4월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 방문 계기 북·미 정상회담을 가지도록 지원해야 한다. 중국의 서해 구조물 일부 이동으로 순조로워 보이는 한중 전략적 협력 동반자관계 정상화도 양국 국민 간 반감을 완화하고 교육, 문화, 관광 교류 등을 증진하면서 경제·사회 협력 부문에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한령 해제도 서두르기보다 바둑, 축구 등 쉬운 문제부터 시작해 영화, 드라마, 게임을 거쳐 노래, 공연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반도 안정과 평화, 남북 관계 정상화 및 협력이 중국에도 이득임을 지속적으로 설득해 중국이 북·미 회담이나 남북회담 재개에 기여하도록 유도하는 데도 각별한 외교적 노력이 전개돼야 한다. 이 대통령은 일본 지도자들과도 신뢰 관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월 22일 소위 '다케시마의 날'을 맞아 다카이치 총리가 선을 넘지 않아야 하고, 4월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 방문 이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는 등 극우적인 행동을 한다면 양국 관계가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는 점에 대비해야 한다. 한미일 간 적절한 안보협력을 모색하되 미·일이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하나의 전구' 등 반중 동맹화 움직임은 억지해야 한다. 양국 간 문화·경제 협력을 증진하면서 일본을 설득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 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을 모색해야 한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으로 한러관계가 비우호 관계로 악화돼 러시아 내 교포 및 한인과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등 실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대러 제재를 최소한으로 완화하고 한러 직항로를 재개하는 등 전쟁 중에도 우리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쟁이 끝나면 조속히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호혜적인 다양한 남북러 경협 가능성을 활용해 러시아가 한반도 평화 및 남북 관계 정상화에 기여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반도 평화를 지키고 지속 가능한 안정을 유지하며 분단비용을 최소화하려면 남북 관계도 정상화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는 최악의 불신과 대립 관계로 전락한 남북 관계를 먼저 적대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평화공존 의지를 지속적으로 천명하고 신뢰 회복을 위해 노력하면서 대화 재개를 위해 정진했다. 그러나 북한은 적대행위는 자제하면서도 아직 관계 복원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남북 대화가 재개돼야 하며, 전쟁은 물론이고 국지전 이상으로 이어질 위험이 큰 우발 충돌도 방지하는 제반 조치가 강구되고 합의돼 실행돼야 할 것이다. 남북 대화 재개와 관계 정상화의 물꼬는 우리 정부가 계속 선제 조치를 포함해 우호적인 의사와 행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트럼프 대통령 주도로 북·미 정상회담이 재개된다면 트일 수 있다. 따라서 미 행정부와 중국 정부가 북·미 정상회담 개최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하는 데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정부는 핵 문제와 연계하지 않더라도 북·미, 북일관계 정상화를 지지할 것임을 천명할 수 있다. 남북 관계 재개와 진전을 위해 노력하면서 그 성패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북측과 약속한 것을 설사 미국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더라도 관철할 수 있는 자율 역량을 가지느냐 여부에 달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남북 관계 진전에 과속을 자제하고, 외국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지켜낼 수 있는 사항에 국한해 합의를 이루고 일단 합의를 본 사항은 반드시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추락한 남북 신뢰를 회복하는 관건이다.◆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27년 간 세종연구소에서 북핵문제, 남북관계, 한미동맹, 한러관계,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등 한국의 국가안보와 국가전략을 연구했다. 한반도 정세 안정과 평화 구축 및 평화통일을 위해 화해와 공동번영 및 국익 극대화를 지향하는 실용외교를 주창해왔다. 국정기획위원회 외교안보 분과장을 맡았다.
2026.02.02
홍현익 전 국립외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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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경제다
환율, 한국 경제의 보이지 않는 속살
1%에 턱걸이할 정도로 경제성장률이 추락한 가운데 반도체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가 바로 고환율이 지속되는, 한국 경제의 '실제' 펀더멘털(속살)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핀란드 경제가 노키아 몰락 이후 이른바 '노키아 리스크'를 겪은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난 25년간 실패한 산업생태계의 진화가 시급한 이유이고, 이재명 대통령이 이제는 성장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할 시점이라 한 배경이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환율 안정화를 위해 애쓰는 이재명 정부의 안쓰러움은 이재명 정부가 물려받은 과거 유산에서 비롯한다. 환율 안정화에 책임을 떠맡고 있는 당국 수장들의 구두 개입이나 국민연금 동원 등에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지난해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공정성 논란의 소지가 있는 세제 혜택이라는 강수(?)까지 동원하였다. 그러나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다. 13거래일 후에는 다시 1470원대로 돌아갔고, 1월 21일부터 25일 사이에 한일 정상의 구두 개입으로 환율은 하향 안정세로 전환하였다. 문제는 고환율이 취약한 경제구조의 산물이기에 하향 안정세 추세가 지속할 수 있는가를 장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현재의 환율 수준이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과 괴리가 되었다는 주요 당국자들의 주장은 구조의 취약성을 외면하고 있다. 경제학에서 펀더멘털은 고용·생산·물가 등 경제의 기본 체력을 의미하며, 환율은 단기적으로 펀더멘털 변화를 예상해 움직이고, 중장기적으로는 펀더멘털 상태에 따라 움직인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모두가 주지하듯이,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은 지난 35년간, 특히 외환위기 이후인 2000년 이후 빠르게 약화해 왔다. 예를 들어, 성장률은 10%대 성장률 시대의 막을 내린 1992년 이후 연평균 7.8%(1992~97년)→4.1%(1998~2019년)→2.0%(2020~24년)로 계속 하락해왔고, 지난해에는 급기야 1.0%를 턱걸이하였다. 같은 기간 일자리 증가율 역시 연평균 2.2%→1.1%→1.0%로 하락해왔고, 지난해에는 1% 밑으로 떨어져 0.7%를 기록하였다. 그런데 이는 세계 최고의 고령화 속도와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빈곤율, 그에 따른 세계 최고 수준의 노인취업률을 고려하지 않은 수치다. OECD 기준 경제활동인구(15~64세) 대상 일자리 변화율을 기준으로 보면 2.0%→0.9%→0.2%로 더 빠르게 줄어들다가 지난해에는 –0.6%로 일자리 자체가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경제 체력의 지속적 약화는 모두가 아는 얘기이다. 그에 따라 원달러 환율 역시 외환위기 이전 평균 819원에서 외환위기 충격이 완화된 2000년 이후부터 닷컴버블 붕괴나 금융위기, 코로나 팬데믹 때를 제외하면 러·우전쟁 발발(2022년 2월 24일) 이전까진 평균 1130원, 러·우전쟁 이후부터 이재명 정부가 출범한 2025년 6월까지 평균 1352원, 그리고 지난해 7월 이후 최근까지 1422원으로 구조적 상승이 진행되었다. 펀더멘털이 취약해지며 환율도 계속 상승해 왔음을 보여준다. 문제는 원화 가치의 하락이 과거와 달리 지난해 2분기부터 진행된 자본시장 붐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환율은 2024년 12월 3일 계엄 전후로 1400원을 돌파하였고, 그 이후 정치적 불안이 지속되며 지난해 4월 4일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때까지 1450원 안팎에서 움직였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파면과 이재명 정부의 출범 등으로 환율은 안정세로 돌아서 지난해 상반기 마지막 날인 6월 30일에는 1350원대 초까지 약 100원 가량 하락했다. 그런데 하반기부터 다시 상승세로 전환하더니 9월 26일부터 1400원을 다시 돌파한 이래 최근까지 4개월 동안 평균 1450원대로 뛰어올랐다. 일반 국민은 내란 상황 때로 환율 변동성이 커진 것을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가운데 일부 언론이 '3차 외환위기 조짐'을 거론하고, 한국은행이 전문가 대상으로 조사한 '시스템 리스크 서베이'에서는 주요 리스크 중 환율이 가계부채를 제친 것으로 나타나면서 국민 불안이 확산하고 있다. 사실상 동원할 수 있는 대부분 조치가 쏟아져 나왔고, 그 결과 한두 달 내에 1400원 전후로 환율이 떨어질 것이라는 이재명 대통령의 전망이 실현된다 해도, 현재의 환율 수준은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 이전 20년 이상 지속됐던 평균 1100원대와 비교하면 매우 낯설고 불편한 수치이다. 통화의 대외적 가치를 나타내는 환율은 기본적으로 해당 국가 경제의 신뢰를 반영한다. 그런데 원화가 주요국 통화 중에서 가장 많이 하락한 통화 중 하나라는 사실은 우리 경제에 문제가 있음을 나타낸다. 28일 오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전광판에 환율 현황이 표시되어 있다.(ⓒ뉴스1,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경제학에서 말하는 환율의 결정 요인을 소개하기에 앞서 먼저 상식적 수준에서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원달러 환율은 달러 대비 원화의 상대적 가치(가격)라는 점에서 한국의 물가상승률이 높아질수록 원화 가치는 하락할 것이고, 한국 경제에 비해 미국 경제가 건강하고 높은 수익을 보장해 준다면 돈(달러)은 한국에서 미국으로 유출되고, 그 결과 환율은 상승할 것이다. 이러한 상식적 판단을 반영하여 경제학에서는 경제성장률이나 통화량 증가율이 환율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이라고 말한다. 환율과 관련하여 거론하는 펀더멘털로 고용이나 생산, 물가 등을 말하는데, 고용이나 생산 등은 경제성장률의 구체적 산물이고, 통화량 증가율은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인이기 때문이다. 금리 차이는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뿐 일시적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실제로 지난 2년간 미국과 일본 간 금리 격차가 축소됐음에도 엔저는 개선되지 않았고, 한국에서도 환율이 상승으로 전환한 지난해 7월에 비해 그 이후 한미 간 금리 차이가 축소되었음에도 원화 가치는 반대로 하락이 지속되었다. 그렇다면 통화량 증가율이나 경제성장률을 중심으로 지난해 7월 이후의 환율 상승 배경을 살펴보자. 소비쿠폰 지급 등 정부의 돈 풀기가 환율을 올렸다는 야당의 주장을 포함해 많은 이들이 통화량 증가가 고환율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지난해 7~11월 사이 한국의 총통화량은 2.1%가 증가했고, 미국은 1.7%가 증가했다. 그런데 통화량 증가가 비례적으로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는 주장은 기계적 사고다. 경제활동을 매개하는 돈의 규모는 통화량 자체뿐만 아니라 돈이 얼마나 빠르게 순환하는가를 나타내는, 이른바 화폐유통속도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돈이 돌지 않는다는 말이 한국 경제의 특성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됐듯이 한국의 화폐유통속도는 미국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화폐유통속도 하락만큼 통화량 증가가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억제될 수밖에 없다. 시중에 공급된 돈 중 많은 돈이 실물경제로 가지 않고 자산시장으로 유입되며 주식과 부동산 등 자산 가격 인플레로 이어지는 배경이다. 환율에 대한 마지막 설명 요인은 경제성장률이다. 그런데 환율이 상승세로 전환한 지난해 3분기(7~9월)의 성장률 1.3%는 전분기 대비 성장률 기준으로 2021년 4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치였다. 성장률 수치만으로 설명되지 않듯이 지난해 7월 이후 환율 움직임은 이전과 다른 패턴을 보였다. 전통적으로 원달러 환율은 위안화와 달러의 움직임에 의해 대부분 결정되었다. 구체적으로 러·우전쟁 발발 이후부터 지난해 6월 30일까지 달러 대비 원화 가치는 14.6% 하락하였는데, 같은 기간 위안화는 달러 대비 13.4% 하락했고, 달러는 0.9% 상승했다. 달러와 위안화 가치의 변화가 원달러 환율 변화의 약 98%를 설명한다. 그런데 지난해 7월 이후 최근(1월 20일)까지 원화 가치는 9.5% 하락했는데 달러와 위안화 가치의 변화는 19%밖에 설명하지 못한다. 특히 이 기간에 위안화 가치는 하락세를 멈추고 상승세로 전환하였다. 오히려 이전 기간에 사실상 통화정책의 자율성이 약화한 엔화 가치 하락률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으나 지난해 하반기 이후부터는 원달러와 엔달러가 동조화되고 있다. 이는 한국 경제의 성장 방식에 변화가 있음을 말한다. 실제로 수출과 무역수지, 경제성장 등에서 반도체에 과도한 의존을 해왔다. 수출에서 반도체의 비중은 꾸준히 증가해 왔으나 2018~2024년간 최대 20% 안팎을 유지하였다. 그런데 지난해엔 24%를 넘어섰다. 특히 지난해를 분기별로 보면 1분기까지는 종래 흐름의 연장선인 20.6%에 불과했으나 코스피 주가가 급등하기 시작한 2분기에 23.1%, 3분기에 25.1%, 4분기에 28.3%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마찬가지로 반도체 수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25년 이전 가장 규모가 컸던 2022년과 2024년의 7%대에서 지난해에는 9%대로 증가하였다. 지난해 분기별로 보면 1분기에는 이전과 비슷한 수준인 7.7%였으나 2분기 8.3%, 3분기 9.7%, 4분기 11.3%로 급증하였다. 지난해 GDP(1조 8662억 달러)는 2024년 GDP(1조 8746억 달러)보다 0.4% 줄어들었는데 반도체 수출액은 22% 이상 증가하였다. 경제 규모가 줄어드는 가운데 반도체 수출의 급증으로 반도체 의존도가 기형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반도체는 중요한 산업임에도 반도체를 제외한 지난해 수출액이 2022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듯이, 반도체에 대한 극단적 의존은 반도체가 불황으로 바뀔 시 파국을 피할 수 없다. 반도체가 주도하는 자본시장의 붐 속에 실물경제 침체가 공존하는 배경이다. 1%에 턱걸이할 정도로 경제성장률이 추락한 가운데 반도체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가 바로 고환율이 지속되는, 한국 경제의 '실제' 펀더멘털(속살)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과거 한때 휴대폰 시장의 약 절반까지 차지하였던 노키아에 높은 의존도를 보였던 핀란드 경제가 노키아 몰락 이후 이른바 '노키아 리스크'를 겪은 경험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난 25년간 실패한 산업생태계의 진화가 시급한 이유이고, 이재명 대통령이 이제는 성장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할 시점이라 한 배경이다.◆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건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자 최배근 경제연구소 이사장. 건국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경제사학회 회장, 민족통일연구소 소장, 대안학교인 민들레학교 설립자이자 교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누가 한국 경제를 파괴하는가, 화폐 권력과 민주주의 등이 있다.
2026.01.29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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