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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지킨 바다, 이제 누가 지키나

[김준의 섬섬옥수] 하동군 대도

2018.01.05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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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족관에는 숭어가 가득하다. ‘녹차 먹인 참숭어’라 한다. 노란 안경테를 쓴 참숭어는 지금이 제철이다. 인간은 녹차보다 커피를 더 좋아하는데 , 갯벌이나 바닥에 낀 유기물을 대신 ‘녹차’를 섞은 사료를 숭어는 좋아할까. 어떤 맛일까. 궁금증을 뒤로하고 시원한 물메기탕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대도아일랜드’에 올랐다. 대도와 인연은 겨울에 이어지는가보다. 몇 년 전 대도를 방문할 때도 눈이 내리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겨울이었다.

대도는 경상남도 하동군에 있는 유일한 유인도다. 1690년 남해군 이동면에 거주하던 장수이씨 부부가 정착하면서 집성촌을 이룬 섬으로 알려져 있다. 60여 가구에 150여 명이 살고 있다. 대도는 노량을 지키는 섬이다. 노량은 이슬 혹은 안개가 낀 좁은 해로라고 해석하곤 한다.

사실은 다르다. ‘노’는 고어에 보면 강을 건너는 다닐 수 있는 곳에 붙여진 이름으로 보통명사다. 건너다닐 정도로 좁은 강을 노량, 노루목이라 했다. 육지에도 노루가 다녔던 길이라 알려진 노루목도 사실은 지름길을 의미한다. 지리산에 노루목을 보니 그렇다. 진도의 명량을 노루목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강의 노량진도 마찬가지다.

노량을 잇는 새로운 다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노량을 이웃을 둔 남해군과 하동군이 다리 명칭을 제2남해대교와 노량대교로 각각 요구하고 있다.
노량을 잇는 새로운 다리가 만들어지고 있다. 노량을 이웃 둔 남해군과 하동군이 다리 명칭을 제2남해대교와 노량대교로 각각 요구하고 있다.

대도마을은 장수이씨 집성촌이다. 1690년 무렵 입도해 마을을 이루었다.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선착장에서 뱃길로 10분거리이며 배가 자주 있다.
대도마을은 장수이씨 집성촌이다. 1690년 무렵 입도해 마을을 이루었다.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선착장에서 뱃길로 10분거리이며 배가 자주 있다.

대도 섬마을의 역사와 함께 했을 가장 오래된 나무다. 선창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골목에 있다.
대도 섬마을의 역사와 함께 했을 가장 오래된 나무다. 선창에서 마을로 들어서는 골목에 있다.

은어의 고향, 노량바다

대도 동쪽 노량사이에 넓은섬 동글섬 주지섬 장도 등 무인도가 많다. 서쪽과 남쪽에도 농섬 밴월도 등 무인도가 더 있다. 사람 사는 섬  주변에 무인도 많이 있는 것은 좋은 어장을 위한 조건이다. 섬 그늘과 주변에 형성된 갯벌 그리고 갯바위에 기대어 사는 작은 생물과 바다풀은  큰 고기를 부르고 어장을 만든다. 광양만으로 가는 길목이다.

전라북도 진안 데미샘에서 발원한 섬진강 긴 물줄기가 머무는 곳이다. 그곳 갈사만과 광양만 은 어패류가 풍성해 황금갯벌이라 했다. 김 양식도 일찍 시작했다. ‘은어들의 고향’이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은어는 바다에서 생활하다 봄이면 산란을 하기 위해 섬진강으로 든다. 지금도 섬진강은 다른 강에 비해서 깨끗해 은어를 볼 수 있고 잡기도 한다. 이제 은어의 고향은 더 이상 은어가 머물 수 없다. 대신에 녹차사료를 먹는 숭어가 가두리에서 자란다.

1990년대 갯벌에 쇠말뚝이 박히고 광양만에 광양제철소가 들어섰다. 갈사만에는 화력발전소가 만들어졌다. 멀리 마주보이는 여수 율촌 연안에도 율촌산단, 여수국가산단이 만들어졌다. 대도 배후는 공장으로 둘러싸인 만 중심에 놓인 셈이다. 김 양식을 비롯한 마을어장이 소멸되었다. 과거 어류 산란지와 서식지 훼손도 말할 필요가 없다.

어장 소멸 이후 하동화력발전소는 반경 5㎞ 지역인 하동면 금성명, 금남면, 고전면 그리고 남해군 설천면, 고현면에 지역발전 지원사업을 하고 있다. 대기질 환경농도 측정 외에 마을 공동창고, 농로포장, 마을회관, 상하수도 시설 건립 등을 지원하고, 교육환경 개선, 장학사업, 교사지원사업, 교육 기자재 지원사업 등 육영사업과 사회복지시설도 지원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수질이나 해양환경은 모니터링을 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대도 서남쪽 농섬과 연결하는 나무다리다. 다리 너머 광양제철 공장이 보인다. 물이 빠지면 안쪽 바다는 갯벌체험장으로 바뀐다. 근처에 캠핑장과 스포츠시설 등이 있다.
대도 서남쪽 농섬과 연결하는 나무다리다. 다리 너머 광양제철 공장이 보인다. 물이 빠지면 안쪽 바다는 갯벌체험장으로 바뀐다. 근처에 캠핑장과 스포츠시설 등이 있다.

남해군과 하동군 사이 노량을 지나 광양만으로 들어오면 남해, 여수, 광양, 하동이 만나는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섬진강 영향을 받는 곳이다. 임진과 정유 7년의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노량해전이 펼쳤던 곳이다.
남해군과 하동군 사이 노량을 지나 광양만으로 들어오면 남해, 여수, 광양, 하동이 만나는 너른 바다가 펼쳐진다. 섬진강 영향을 받는 곳이다. 임진과 정유 7년의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노량해전이 펼쳤던 곳이다.

바다를 내주고 ‘해양관광섬’으로?

어장이 소멸되기 전에는 대도 섬주민들은 김 양식을 비롯해 어업으로 섬살이를 유지해 왔다. 화력발전소가 건설되기 전 생계수단이었던 150ha 마을어장이 소멸되었다. 굴, 바지락, 낙지, 새조개로 육지 어떤 마을 부럽지 않았던 대도 주민들 허탈감은 아주 컸다. 생계를 책임졌던 바다와 갯벌을 내주고 댓가로 보상금 150억을 받았다.

보통 어장소멸로 보상금이 지급되면 분배까지 이어지기 전에 마을은 갈등에 휩싸이고 공동체가 붕괴되는 경우가 많다. 살날 보다 살아온 날이 더 많은 노인들은 개별 분배를 원했고, 젊은 사람들은 섬에 공동투자를 원했다. 가구당 2억5000여만 원에 이르는 보상금이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었기에 젊은이의 말이 들어올 리 없었을 게다. 마을에 얼마나 의견이 분분했을까.

또 가정마다 자식과 부모들 사이에, 자식들 사이에 이견과 의견이 많았겠는가. 화목한 가정에 금이 가기도 했을 테고, 이웃과 등을 지기도 했을 것이다. 집성촌이지만 마을공동체가 위기에 몰리기도 했을 게다.

어쨌든 생계수단을 담보로 받은 보상금을 전액을 투자해 어촌마을을 ‘해양관광마을’으로 전환하는 개발을 시도했다. 수많은 선진지 견학과 회의를 통해 전액 섬발전에 투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결정 자체로도 박수를 보낼 만 하다. 정부에서도 이에 감동해 도서특화시범단지로 지정해 큰 금액을 지원하는 것으로 답했다.

그 결과 농섬과 연결교량을 만들고 일주도로 포장도 했다. 노량리와 대도를 오가는 차도선도 새로 짓고, 섬에 오수처리시설과 가로등과 조경시설도 갖추었다. 민자를 유치해 상가, 숙박시설을 마련했다. 이렇게 섬을 물놀이, 휴양, 낚시, 갯벌체험이 이루어지는 복합 관광휴양섬으로 바꿔냈다.

잃은 대신 얻은 것도 있다. 육상에 마련된 스포츠시설, 물놀이장, 숙박시설 등 편의시실 등이다. 어촌에서 해양관광마을로 새롭게 변신을 꾀하고 있다.
잃은 것 대신 얻은 것도 있다. 육상에 마련된 스포츠시설, 물놀이장, 숙박시설 등 편의시실 등이다. 어촌에서 해양관광마을로 새롭게 변신을 꾀하고 있다.

섬 곳곳에 예술작품과 놀이용 설치물들을 세워져 있다. 마을 선창에 세워져 있다. 대도에는 곳곳에 작품이나 설치물이 세워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작품을 찾아가는 마을지도가 있으면 싶다.
섬 곳곳에 예술작품과 놀이용 설치물들이 세워져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작품을 찾아가는 마을지도가 있으면 싶다.

어촌체험하기 좋은 섬

대도는 어촌체험마을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여름철에는 물놀이와 함께 어촌체험도 겸할 수 있는 명소 중 한 곳이다. 배를 타는 시간도 10이라 부담도 없다. 물놀이장이 있어 물이 빠지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놀이가 가능하다.

그리고 물이 빠지면 갯벌체험을 한다. 언제라도 어떤 놀이든 선택을 할 수 있다. 갯벌체험장에서는 조개, 고둥, 민꽃게를 볼 수 있다. 샤워시설과 화장실, 체험에 필요한 모든 장비가(장화, 소쿠리, 호미, 장갑) 잘 준비되어 있다. 캠핑장을 비롯해 다양한 해상과 육상 레저시절들을 경험할 수 있다.

숙박이 가능한 좌대 10동이 운영되고 있는데 마을 운영진에서 체험객들이 직접 낚은 물고기로 싱싱하게 회 떠드리고 있으며, 바닷가에서 잡히는 여러 가지 해산물도 맛볼 수 있다. 여름철이면 한 번쯤 가볼만한 곳이다. 낚시체험을 위해 겨울에도 대도를 찾는 사람들은 제법 많다.

마을 너머 밴월도가 보이는 곳에 아담한 서너 칸 교실이 있는 노량초등학교 대도분교장이 있었다. 1946년에 문을 열어 2008년 문을 받았다. 지금은 숙박시설로 리모델링을 해서 운영 중이다. 운동장 과 바다가 접해 있고 모래해변이 이어져 여름철에는 인기가 많다.

사계절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찾고, 여름에는 갯벌체험과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어촌체험마을로 유명하다.

공동어장이 그립다

겨울 섬을 걷는 것은 이런 맛이다. 아무도 없는 나무다리를 걷는다. 여름철이면 얼마나 많은 갯벌체험객들이 이곳을 찾겠는가. 맞은편 농섬과 대도를 잇는 나무다리로 햇빛이 쏟아졌다. 길고 지난했던 2017년이 저무는 빛이다. 어느 틈에 나타났는지 연인이 다리에 서서 사랑을 나눈다. 섬은 여행객에 이렇게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 준다. 뭍에서 배로 10분 거리에 있을 뿐인데도.

방해하지 않으려 농섬 서쪽 끝자락에서 갯바위로 돌았다. 그곳에 누군가 일부러 세워 놓은 돌기둥이 있었다. 그 옆에 바위에 하얀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공동어장 4호’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마을어업 공간을 표시한 것이다.

대도에는 일찍부터 김 양식이 발달했다. 대도는 섬진강 하구에 위치해 있다. 태인도, 금호도, 대도 주변은 일찍부터 김 양식이 발달한 곳이다. 광양 태인도에는 최초로 김 양식을 시도했다는 김시식지비가 있으며, 김 양식을 시도했던 김여익을 모신 사당도 있다. 일제강점기에 섬진강 하구에서는 ‘섶 양식’이라 부르는 초기 김 양식이 시도되었던 곳이다. 김 양식 기술을 전수하는 학교도 있었다.

또 두 세대 전에까지 대도주민들은 풍선배를 타고 칠산바다와 충청도 죽도 어장까지 나가 조기를 잡기도 했다. 어업이 활발할 대는 마을 뒤 팽나무를 신체로 모시고 당산제를 지내고 샘굿과 집돌랑(지신밟기)을 하면서 액을 쫓고 복을 빌기도 했다. 김 양식이 활발할 때는 10월에 풍어제를 지내기도 했다. 지금은 매년 음력 섣달 초 사흗날 선창굿을 하고 있다.

대도선창에 걸린 물메기가 영하의 찬기온과 좋은 햇살에 꾸덕꾸덕 마르면서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대도선창에 걸린 물메기가 영하의 찬기온과 좋은 햇살에 꾸덕꾸덕 마르면서 새로운 맛을 만들어낸다.

녹차숭어는 하동 특산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녹차보다 커피를 더 좋아하지만 숭어에게는 녹차를 권한다. 섬진강 은어의 고향이다. 가두리양식장에 갇힌 숭어가 살고 있다.
녹차숭어는 하동 특산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은 녹차보다 커피를 더 좋아하지만 숭어에게는 녹차를 권한다. 섬진강 은어의 고향이다. 가두리양식장에 갇힌 숭어가 살고 있다.

마을어장 경계를 알리는 표지석이다. 하동화력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대도는 많은 마을어장을 잃었다. 농섬 뒤 일부어장만 남아 있다. 나머지는 광양만권특별관리해역에 포함되어 있다.
마을어장 경계를 알리는 표지석이다. 하동화력발전소가 만들어지면서 대도는 많은 마을어장을 잃었다. 농섬 뒤 일부어장만 남아 있다. 나머지는 광양만권특별관리해역에 포함되어 있다

이순신이 지킨 바다, 이제 낚시꾼이다

戰方急 愼勿言我死

부산과 울산 등 남해 동부에 거점을 잡고 있던 왜군은 퇴로가 차단되어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을 구하기 위한 지원군이 노량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장군도 순천 예교 봉새를 풀고 노량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전쟁도 불리해지자 퇴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선 수군의 최후격적지를 보려면 관음포가 제격이다. 길목에 반기는 비석에 새겨진 글이다. 밤새 왜군과 격전을 독려하고 승리를 눈앞엔 둔 여명기에 유탄에 맞고 죽어가며 아들 회에게 남긴 말이다. 동백과 소나무가 전망대로 이어지는 길 양쪽에서 안내를 한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대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섬보다는 섬 뒤로 하얗게 내뿜는 화력발전소 연기가 더 웅장(?)하다. 이곳 사람들은 관음포를 ‘이락사’라 부른다. 이순신 장군이 목숨을 잃은 곳이라는 설명이다.

대도를 둘러싼 바다는 조선수군과 일본수군이 목숨을 건 최후의 전쟁을 치렀던 전장이었다. 대도에 장수이씨들이 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690년으로 추청하다. 그러니까 1598년 12월 일본군이 완전히 퇴각을 한 후 100여년 만에 사람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셈이다.

이락사 입구에 있는 이순신장군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고 숨지기 직전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적어 놓은 비석
이락사 입구에 있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유탄에 맞고 숨지기 직전에 아들에게 남긴 유언을 적어 놓은 비석.

전쟁이 끝난 후 장군의 주검은 뭍으로 옮겨졌다. 남해대교 건너 서쪽 설천면 노량리 충렬사가 그곳이다. 이후 시신은 수군진이 있었던 완도군 고금면을 거쳐 아산에 안장됐다. 그곳에서 충렬사가 있고 장군을 모셨던 가묘도 있다. 이제 노량 바다는 낚시꾼들이 지키고 있다. 해가 지는 늦은 시간까지 바다에 띄운 좌대에서, 콘도형에서는 밤을 밝히면서 낚시를 하고 있다.

김준

◆ 김준 섬마실 길라잡이

어촌사회 연구로 학위를 받은 후, 섬이 학교이고 섬사람이 선생님이라는 믿음으로 27년 동안 섬 길을 걷고 있다. 광주전남연구원에서 해양관광, 섬여행, 갯벌문화, 어촌사회, 지역문화 등을 연구하고 정책을 개발을 하고 있다. 틈틈이 ‘섬살이’를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며 ‘섬문화답사기’라는 책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 섬문화답사기, 섬살이, 바다맛기행, 물고기가 왜, 김준의 갯벌이야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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