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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바흐, 시골 도시에서 창조적 휴식기를 보내다

[정태남의 클래식 여행] 독일/쾨텐

2016.09.23 정태남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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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동북부의 주요 문화도시 라이프치히는 바흐가 일생의 마지막 27년을 보냈던 곳이다. 이 곳에서 일요일 오전에 지방열차 편으로 북쪽으로 약 30킬로미터를 달려 헨델이 태어난 도시 할레를 지나 다시 북쪽으로 30킬로미터를 달려 안할트 지방의 쾨텐(Köthen, 옛 표기는 Cöthen)에 도착했다. 

쾨텐이라면 웬만한 지도에는 나오지도 않는 인구 2만 7000명 정도의 작은 시골 도시이지만 바흐의 행적을 찾아보는 여행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쾨텐 역을 나와 서쪽으로 향하니 고딕 양식의 성 야콥 교회의 높은 쌍둥이 첨탑이 멀리서 시선을 이끈다. 

쾨텐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 고딕식의 성 야콥 교회가 길을 인도하는 듯하다.
쾨텐 시내 중심으로 들어가는 길. 고딕식의 성 야콥 교회가 길을 인도하는 듯하다.

이 교회의 측면과 직선으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 약 150미터 더 서쪽으로 걸어가자 조그만 광장이 펼쳐지고 광장 한가운데에는 분수와 바흐의 기념상이 눈에 띈다. 바흐의 흉상을 유심히 살펴보니 젊은 시절의 얼굴이다. 그가 쾨텐에 처음 온 것이 1717년이니까 32살 때이다. 

이 광장의 이름이 바흐 광장(Bachplatz)이다. 그가 살던 집이 어디엔가 가까이 있을 것 같아서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보려고 하는데 일요일 오전이라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없다. 마침 유모차를 밀고 가는 한 젊은 여인이 보여 다가가서 물었더니 마치 엄청나게 어려운 질문을 받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성 야콥 교회쪽으로 되돌아가서 왼쪽 길로 쭉 들어가면 있을 거라고 한다.

그녀에게 감사하다고는 했지만 대답이 신통치가 않다. 그 곳에는 레오폴트 공의 궁전이 있는데 그녀는 바흐가 그곳에서 살았던 것으로 혼동한 모양이다. 바흐 기념상 바로 뒤의 건물 앞에 서서 지나는 사람을 다시 기다렸다. 그런데 이 건물 창가의 벽에 조그만 명판이 부착돼 있어서 가까이 다가가서 읽어보니 바로 이 집이 바흐가 살던 집이란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바흐의 집을 바로 등 뒤에 두고 괜히 한참 헤맸다. 바흐가 쾨텐에서 5년 반 동안 살면서 두 군데서 거주했는데 첫 번째 살던 집은 보존돼 있지 않고 1719년부터 살던 이 집만 남아있다. 이 집은 1719년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첫 번째 세입자가 바흐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흐 기념상이 있는 바흐광장. 기념상 바로 뒤에 바흐가 살던 집이 보존돼 있다.
바흐 기념상이 있는 바흐광장. 기념상 바로 뒤에 바흐가 살던 집이 보존돼 있다.

아이제나흐 출신인 바흐는 17세 때부터는 주변의 여러 소도시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는데 쾨텐으로 오기 전에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음악감독으로 있었다. 안할트-쾨텐 공 레오폴트의 궁정 음악감독으로 온 바흐는 이곳에서 여유를 갖고 창조적 재충전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레오폴트 공이 첼로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를 능숙하게 연주할 정도로 열렬한 음악애호가였고 또 경건한 칼뱅주의자로 바흐에게 종교음악 작곡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흐는 바이마르 시절과는 달리 종교적 요구와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세속음악 작곡에 전념 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오케스트라와 오케스트라에 쓰이는 악기를 위해 작곡하는 데 몰두했는데 바로 이 시기에 레오폴트 공 궁정의 저녁음악회를 위해서 여러 협주곡을 작곡했다. 

바흐 기념상. 그는 32살 때 쾨텐에 와서 5년 반 동안 활동했다.
바흐 기념상. 그는 32살 때 쾨텐에 와서 5년 반 동안 활동했다.
그런데 평온하기만 하던 쾨텐 생활에 위기가 닥쳐왔다. 1721년에 레오폴트 공이 약혼을 하는데 문제는 약혼녀가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심지어 레오폴트 공이 ‘하인들’과 함께 ‘무의미한 짓’을 하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흐는 음악가를 하인 취급하는 여주인 밑에서 더 있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속히 다른 도시에서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는 지위를 확보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그는 협주곡 6개를 깨끗이 필사해 혹시나 하여 안면이 있는 브란덴부르크 후작 크리스티안 루트비히에게 헌정했다.

이것이 바로 바로크 양식의 절정을 이룬다고 평가되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으로 바흐의 모든 음악적 능력과 경험이 집약된 작품이다. 하지만 바흐는 일자리를 기대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나았으리라. 후작의 궁정악단은 쾨텐의 악단과 달리 워낙 소규모라서 그의 작품을 제대로 소화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같다. 

그러던 중 마침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음악학교의 음악감독 자리가 비었다. 1723년, 바흐는 쾨텐 생활을 모두 접고 가족을 데리고 더 넓은 세계로 갔다. 독일어로 바흐(Bach)란 ‘개울물’이란 뜻이다. 바흐는 이제 개울물이 아니라 넓은 강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후 그가 다시 쾨텐으로 잠시 돌아온 것은 1729년 3월 23일. 성 야콥 교회에서 레오폴트 공의 추모 예배 때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를 지휘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이 칸타타는 종교음악이었다.

정태남

◆ 정태남 건축사

이탈리아 건축사이며 범건축(BAUM architects)의 파트너이다. 건축 분야 외에도 음악, 미술, 언어, 역사 등 여러 분야에 박식하고, 유럽과 국내를 오가며 강연과 저술 활동도 하고 있다. <매력과 마력의 도시 로마 산책>, <로마역사의 길을 걷다>, <유럽에서 클래식을 만나다>, <이탈리아 도시기행> 외에도 여러 저서를 펴냈으며, 이탈리아 대통령으로부터 기사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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