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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2015.03.27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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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열리는 싱가포르 ‘건국의 아버지’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의 장례식에 세계의 주요 인사들이 다수 참여한다.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도 참석한다. 미국은 클린턴 전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등으로 조문단을 꾸렸다. 리콴유의 시신은 화장되는데, 그 이후 싱가포르 국민들이 그를 어떻게 기릴지가 궁금하다. 

그는 생전의 인터뷰에서 “내가 죽거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기념관으로 만들지 말고 헐어버리라고 가족과 내각에 말해놓았다”고 밝힌 바 있다. 집이 성지가 되면 주변 개발을 할 수 없게 되고 부동산 가격이 떨어져 이웃 주민들이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총리 취임 전부터 75년간이나 살았던 그의 집은 너무 낡아 기념관으로 보존하는 데 돈이 많이 든다는 말도 했다.

리콴유의 유언을 싱가포르 국민들이 그대로 들어줄까.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胡志明·1890~1969)의 경우를 보자. 그의 유품은 지팡이 하나와 옷 두 벌, 몇 권의 책이 전부였고 평생 결혼을 안 했으니 유족도 없었다. 

호치민은 유언장에 이렇게 썼다. “내가 죽은 후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시신은 화장하고 재는 도자기 상자에 담아 하나는 북부에, 하나는 중부에, 하나는 남부 베트남에 뿌려다오. 무덤에는 비석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 소박하고 넓고 튼튼하고 통풍이 잘 되는 집을 세워 방문객들이 쉬어갔으면 좋겠다. 방문객마다 한두 그루씩 나무를 심게 하면 나무가 숲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이 유언은 지켜지지 못했다. 베트남은 하노이에 대규모 기념관을 짓고 시신을 방부처리해 전시하고 있다. 무덤도, 동상도 세우지 말라고 했으나 베트남인들은 그를 영원히 보기 위해 그렇게 했다. ‘호 아저씨’  ‘호 할아버지’가 베트남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력과 상징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1997년에 타계한 중국 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은 집안에 빈소를 차리지 말고 각막은 기증하고 유골은 바다에 뿌리라고 유언했다. 집권기간에 “공연스레 폐만 끼친다”며 쓰촨(泗川)성 고향도 찾지 않았던 사람이다. 한 줌의 재가 된 덩샤오핑은 자연으로 돌아갔고, 생가는 그의 뜻대로 방치됐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그가 죽은 지 4년이 지나 생가를 복원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1970년에 사망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18년 전에 미리 써놓은 유언장에서 국장(國葬)을 원하지 않는다며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라고 했다. 퇴임하고 나면 시골 콜롱베에 있는 집에 살 작정이니 죽으면 마을 공동묘지에 묻어달라고 했다. 묘비엔 이름과 생몰연도만 새기도록 했다. 그리고 모든 특전이나 동상과 훈장, 기념관을 거부했다. 프랑스인들은 30주기를 맞은 2000년에야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 그의 동상을 처음 세웠다. 그가 살던 집은 2004년 역사 유적으로 공인돼 옛 모습 그대로 기념관이 됐다. 

27년간 중국 공산당 총리였던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는 ‘육무(六無)’로 유명하다. 1)사불유회(死不留灰), 사망 후 유골을 남기지 않았다. 2)생이무후(生而無後), 살아서 후손을 두지 않았다. 3)관이불현(官而不顯), 관직에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4)당이불사(黨而不私), 당을 조직했지만 사조직은 꾸리지 않았다. 5)노이무원(勞而無怨), 고생을 해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리고 6)사불유언(死不留言), 죽으면서 유언을 남기지 않아 정치풍파를 막았다. 

그는 외빈과 만찬을 할 때면 먼저 주방에 가서 국수 한 그릇을 말아 먹곤 했다고 한다. 자신의 배가 고프면 손님을 챙기는 데 소홀할까 우려해서였다. 항일전쟁과 공산 혁명 초기에는 마오쩌둥보다 더 사회적 신분이 높고 신망도 두터웠던 저우언라이는 스스로 몸을 굽히고 남을 배려하는 자세로 2인자의 자리를 슬기롭게 지켜나갔고, 중국 공산혁명과 인민의 삶 향상을 위해 진력했다. 

저우언라이의 좌우명이 제갈량의 후출사표에 나오는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 死而後已)라는 점도 그의 인간 됨됨이를 잘 알게 해준다. “삼가 몸을 바쳐 수고로움을 다할지니 죽은 후에나 그칠 따름”이라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자신의 사후에까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살아서 얻은 명성과 영예를 자신의 사망 이후까지 그대로 보전하면서 충심으로 섬겨온 국민들에게 좋은 정신적 자산을 남겼다. 국가지도자의 죽음은 이렇게 사회의 공적 자산으로 기여하고 작용할 수 있어야 한다.  

공직자는 청렴하고 정직해야 한다.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실행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청렴을 이야기할 때 흔히 인용되는 게 다산 정약용이 벗의 아들인 영암군수 이종영에게 준 글이다. 옛날 소현령(蕭縣令)이 선인(仙人) 부구옹(浮丘翁)에게 ‘고을 잘 다스리는 법’을 묻자 “내게 여섯 자로 된 비결이 있으니 사흘 뒤에 오게”라고 했다. 사흘 후 찾아가니 ‘염(廉)’ 자 하나를 주면서 재물 여색 직위에 이 글자를 생각하라고 했다. 나머지 세 글자는 다시 사흘 간 목욕재계하고 오면 알려주겠다고 했다. 

사흘 뒤 찾아간 소현령이 받은 ‘비결’도 ‘염, 염, 염’이었다. 소현령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어렵지만 부구옹은 중국 황제(黃帝) 때의 사람이라 하고 혹은 열자(列子)가 호구자(壺丘子)라고 부르는 인물이라고 한다. 

부구옹이 물었다. “염은 밝음을 낳나니 사물이 정(情)을 숨기지 못할 것이요, 염은 위엄을 낳나니 백성들이 모두 명(命)을 따를 것이요, 염은 곧 강직함이니 상관(上官)이 감히 가벼이 보지 못할 것이다. 이래도 백성을 다스리는 데 부족한가?” 이에 현령이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띠에 그것을 써가지고 떠나갔다고 한다. 

우리 민족의 전통에는 청렴정신이 추상 같고, 청렴한 선비들이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 청렴의 전통은 오늘날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외국 국가지도자들의 정직하고 청렴한 삶과 그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보노라면 다시 여지없이 쓸쓸해진다. 살아 있을 때 나라를 발전시키고 국민이 잘살게 하기 위해 정직하게 애쓴 이들은 사후에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지도자들은 잊으라고 해도 국민이 잊지 않는다.

임철순

◆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언론문화포럼 회장, 자유칼럼그룹 공동대표.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졸. 1974~2012 한국일보사 근무. 기획취재부장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이사대우 논설고문 역임. 현재는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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