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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두 천재 중 누가 더 경제력이 있었을까

[변종필의 미술 대 미술] 레오나르도 다 빈치 VS 미켈란젤로

2014.12.08 변종필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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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에게 돈은 언제나 성공과 실패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현대미술에서는 세계미술시장을 이끄는 소더비나 크리스티 경매에서 최고가를 경신하는 화가들을 성공한 예술가로 간주한다.

인기작가와 돈의 관계는 과거에도 큰 차이가 없었다. 미술시장이 형성되기 전 예술작품은 주문자와 제작자의 직접적인 거래로 이루어졌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교황, 군주 등 절대 권력층의 주관적 성향에 따라 예술가의 처우가 결정되다시피 했다.

르네상스 두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르네상스 최대 맞수이자 최고 거장이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는 미술서적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메뉴이지만, 돈과 관련한 이야기는 알려진 바가 적다.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인 두 사람 중 누가 더 경제력이 있었을까?

미켈란젤로는 왜소한 체구에 볼품없는 외모(155cm의 키, 토레지아노에게 코를 맞아 평생 부러진 코로 살았다)와 고집 세고 타협할 줄 모르는 성격 때문에 여자에게 인기는 없었지만, 그의 재능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끊이질 않았다. 당대 최고 인기작가에 걸맞게 많은 돈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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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잘생기고, 귀족적 풍모를 지닌 외모(특히 머리카락이 비단결처럼 부드러웠다)와 매혹적인 언변, 탁월한 패션 감각까지 갖춰 그의 주위에는 항상 여자들이 넘쳤다. 그러나 금전적으로는 항상 넉넉하지 못하고 어려웠다.

미켈란젤로에게 돈은 그가 이룬 수많은 예술적 업적의 동인(動因)이었다. 뛰어난 재능을 지녔어도 돈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는 시대를 초월해 예술가들이 겪는 비애다. 미켈란젤로 역시 돈이 없으면 당장에 좋은 대리석을 구할 수 없고, 조수(미켈란젤로는 작업을 혼자 했다고 전하지만, 이는 그의 재능을 신화화하기 위한 전설에 불과하다. 기록상으로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제작할 때 4명의 조수가 있었다)를 채용할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오직 자신만을 바라보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미켈란젤로의 ‘카시나 전투’

미켈란젤로에게는 무능력하고 신세 한탄만 하는 아버지와 능력 없는 4명의 동생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장남으로 아버지를 부양하고, 언제나 돈의 부족함을 외치는 형제들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최고의 조각가로 이름을 얻었지만 오직 그만을 바라보고 사는 아버지와 형제들 때문에 돈을 벌어야했다. 고집 세고 위압적인 인물이었지만 내면에는 언제나 가족을 우선시하는 따뜻한 가족애를 지녔다.

아버지가 빚을 질 때마다 갚아주면서도 “온 세상의 금을 모아서라도 아버지를 모실 테니 저의 곁에 남아주십시오”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로 아버지에 대한 미켈란젤로의 효성은 그의 천재성만큼 미술사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미켈란젤로가 평생 가족을 부양한 것과 달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부양할 가족이 없는 자유로운 몸이었다.

사생아로 태어난 그는 책임져야할 아버지도, 물질적인 도움을 요구하거나 의지하는 형제도 없었다. 그래서 가족으로 고통 받는 일 따위는 없었다.

스스로 삶을 윤택하기 위해 돈을 벌었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 소비했다. 그러나 뛰어난 천재적 재능에 비해서 돈벌이는 쉽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로렌초 데 메디치(피렌체 메디치가 후손)의 눈에 띄는 예술가였지만, 미켈란젤로만큼 금전적 도움을 받지 못했다. 피렌체를 떠나 자신을 후원할 재력가를 찾아 떠나야 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하리 전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앙기하리 전투’

그가 밀라노의 스포르차 가문에 몸을 기탁한 후 그림보다 대량살상무기를 설계하고, 수금(竪琴, Lyre)을 만드는 등 미술과는 동떨어진 분야의 연구로 루도비코의 관심을 받은 것은 미켈란젤로가 조각으로만 유명해진 것과 비교된다.

결과적으로 레오나르도가 돈을 벌지 못한 이유에는 다방면(천문학, 물리학, 지리학, 토목학, 병기학, 생물학, 음악)에 재능이 많았지만 한 가지에 몰입하지 못한 성격 탓이 컸다.

미술사에 남긴 위대한 회화(최후의 만찬, 모나리자, 암굴의 성모 등)의 무게감은 그 누구도 넘보기 힘들지만, 현존 작품이 미켈란젤로에 견주어 부족한 것은 그의 관심분야가 미술에만 있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레오나르도에게 그림은 많은 능력 중 하나에 불과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요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요한’

실제 루도비코 대공에게 자신의 이력서를 쓸 때 엔지니어로서 재능을 강조하고, 편지 끝부분에 예술가로서 ‘그림도 그릴 줄 안다’고 적었다.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에게 누가 후원자가 되느냐는 중요한 부분이다. 이 점에서 보면 레오나르도 보다 미켈란젤로가 더 행복했다고 볼 수 있다.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를 자신의 궁정 유희담당자로 임명해 노래나 파티게임을 만들고, 연주자나 파티기획자로 활동하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게 했다.

물론 그에게 <최후의 만찬>을 그리게 하는 등 예술적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주었지만, 향락적인 궁정생활로 그의 예술성을 약화한 부분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미켈란젤로에게는 메디치가(家)가와 교황이 있었다. 특히 메디치가의 로렌초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의 천재적 예술성이 시들지 않도록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황 율리우스의 총애와 미움을 동시에 받던 시절, 시스티나성당의 천장과 율리우스 2세 묘지작업을 하는 동안 제작비(인건비)를 받지 못해 파산을 겪기도 했지만, 1513년 율리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나고 뒤이어 교황에 오른 레오 10세(조반니 데 메디치)재임시절 부터는 다시 지원을 받아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2세 무덤’
미켈란젤로의 ‘율리우스 2세 무덤’

바오로 3세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교황청 건축가이자 화가로 임명되어 1200두카트(3만 달러)를 연봉으로 받았다.

평생 돈을 벌기위해 교황과 밀고 당기는 두뇌싸움을 지속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미켈란젤로는 살아있는 동안 재임한 13명의 교황 중 7명의 교황과 관계 속에서 경제적 부를 쌓는 방법을 터득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말년에 자신의 재능을 알아준 프랑수아 1세의 요청으로 평생의 재산(원고묶음, 스케치, 그림 몇 점)을 마차에 싣고 프랑스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루도비코 밑에서 받았던 처우와는 다르게 프랑수아 1세가 마련해준 성(城)과 두둑한 보수로 풍족한 삶을 살았지만, 넉넉한 삶은 오래가지 못했다.

1591년, 프랑스로 초빙된 지 6년 만에 뇌졸중 발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했다. 말년의 동반자였던 젊은이(프란체스코 멜치라)에게 가장 아끼던 공책(1490년부터 쓰기 시작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원고)을 남긴 채 예순 일곱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미켈란젤로는 여러 명의 교황에게 인정받으며 예술가로 최고의 명예와 부를 누렸다. 말년에 이르러 <최후의 심판>으로 수차례 곤혹(누드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교황이 바뀔 때마다 수정논란이 있었다)을 치렀지만, 마지막까지 예술가로서 자존심을 잃지 않았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말을 타고 질주한 뒤 심한 몸살을 앓던 그는 사랑하던 동성(토마소 카발리에리)에게 많은 유산을 남기고 팔에 안긴 채 여든 아홉의 열정적인 삶을 마감했다. 

변종필

◆ 변종필 미술평론가

문학박사로 2008년 미술평론가협회 미술평론공모에 당선,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부문에 당선됐다. 경희대 국제캠퍼스 객원교수, 박물관·미술관국고사업평가위원(2008~2014.2) 등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원 겸 편집위원, ANCI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대학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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